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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8) 법과 질서 - 3 등록일 2016.02.24 14:35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63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법과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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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복음의 자유해방

예를 들어 로마서 7장에 대한 오해는 근원을 따지면 죄에 대한 이 같은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죄가 바로 자기중심이요 그런 자기 탐욕이 그 근간을 이룬다고 이해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자로서, 누가 그런 것을 놓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확보한 생명력으로 결연히 자기 의지력으로 자기를 다스리면 될 일이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전 9:27]는 말이 그 뜻이다.

세상 사람도 그런 의지력으로 그렇게 할 줄 아는데 그리스도인이야 더 말해 무엇하리요. 그리스도 친히 그 성령으로 계시면 바로 그 능력이 되어 계심이다. 그 능력[원동력]으로 자기중심을 타파함이니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살아나 있음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되어 나오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를 지금 바울은 그런 탄식으로써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난데없이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체험’으로 둔갑시키고 있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활함이 이다지도 집요하고 끈덕지다.

이것이[롬 7:24] 바울 자신의 체험을 말한 것이라면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말이 있을 수가 없다. 상충(相沖)되는 모순 속에서는 진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육신”[:14-8:13], 혹은 "죄의 몸"[6:6]이란 것은, 그런 자기중심의 근본되는 밑 뿌리를 들추고 있음이다. 그 밑 뿌리는 무엇이냐. 철저히 자기가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인간 본연의 삶인데, 현실이 그렇지를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죽어지면 그만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보다는 내가 항상 앞설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현실론이다. 양심상 자기중심이 나쁜 줄은 알아 어떤 특수 환경에서는 그런 욕심을 자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삶 그 자체가 하나님 중심이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한 것이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동안은 '내'라는 것, '내 욕심'이라는 것이 항상 앞서는 것이므로 한마디로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비참한 인생이로다!"[7:24] 하고 탄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7]. 그러면 할례를 받고 날과 달과 해(年)와 절기를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유도(誘導)함인 것이다. 실질적인 복종은 못하지만[육신에 매여 있으므로] 이 복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이 정해졌으니 즉 그런 것을 지키면 복종으로 간주된 것이다. 온전한 실질적인 복종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육신이 멸해짐"[롬 6:6]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나 그 때까지는 이런 의문(儀文, written code)에 속한 것으로써 대용된 것이니 즉 의문에 있는 그대로 지키면 복종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자 역할에 불과했던 의문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하여 완전히 폐기되었으므로[엡 2:15]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할례를 받거나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등의 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고, 오직 이제는 하나님의 원래의 생명의 법칙 즉 하나님의 율법을 정식으로 제대로 충분히 지키게 되었으니 곧 성령의 능력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대로 삶을 인함이다. 하나님의 이 율법을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곧 "새 계명"[요 13:34]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내가 나를 구원하겠다는 것 자체가 자기 중심이요 자기 본위요 자기 위주이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적인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롬 7:24]. 그리고 죄의 결과는 꼼짝없이 죽는 데에 있다. 한번 죽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 죽어 없어졌는데, 생명이고 영생이고 구원이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일체가 무용지물이다. 도로무공이다.

그래서 그런 처절한 비명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죽지 않겠다는 욕망부터가 즉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는 것 자체가 자기중심 일변도이니 이 자기중심이라는 데에서 다시 말해 죄란 것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결론이 되므로 "이 죽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리요" 하는 탄식이다. 죽으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나는 그래도 살아 있다고 해서 지금도 꿈틀거리지만, 이미 사망에게 움켜쥐어져 "죽은 자"[마 8:22]이다.

그리고 산다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연속행위이니 여기에도 나의 심각한 고민이 있다. 또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그렇게 죽었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다. 한마디로, '생명의 법칙으로서의 자기 부인'을 행함이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 부인 자체가 생명의 법칙은 아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기를 부인하라 하지 않으셨다. 할 필요가 없으니 왜냐면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들어 행동하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 잘났다고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가 죄를 지어 자기중심이 된 결과로 인해 그렇게 자기 중심이 되어 버린 자기를 "부인할" 절대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만들었지만 이미 그런 마음을 먹고 선악과를 먹는 결과를 낳은 것이니 이중(二重)으로 엎친 데 덮치기로 된 결과다. 그래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수단 방법이 없다는 탄식이 로마서 7장 24절의 의미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에서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여 자기 수양으로 욕심을 떨쳐 버리려 하지만 그 모든 행위가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의 행위이니 그 자체가 여전히 죄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런 수련을 하면 할수록 죄의 왕성한 용틀임 즉 "나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우렁찬 포효만 들을 뿐이다. 기가 찰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성경의 해결점은 무엇이냐. 다름아닌 '오직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비로소 죽을 수가 있음이다. 단지 이론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니, 이론으로 죽어지다니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은 세상에 없다. 그의 죽으심이 '현실적으로' 나의 죽음이 되어 있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지 않은가. 그러면 어떻게 되어 그리 되느냐, 그렇게 죽으신 후 살아나신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향후 나라는 존재를 영원히 구성해 주심으로써 되는 일이다.

그래서 비로소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다시 살아남으로 말 그대로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나 위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친히 그 영으로 즉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셔서 나와 문자 그대로 하나고 되어 주심으로써 이루어진 엄연한 현실이 곧 나의 이 죽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갈 2:20]. 어디까지나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실제 상황이다. 나와 그리스도는 이제 영원히 하나가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심이다. 선물은 영원히 나의 소유이다. 그리스도 친히 영원히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계시니 그러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라 하면 이제는 나와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나’라고 하면 그리스도와 또한 분리해서 상상할 수가 없게 된 것이 우리 구원의 실상(實相)이요 실체다. 이는 그리스도 친히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사람이시라야 나와 하나되실 수 있으니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히 2:14]. 그리고 하나님이시라야 내 안에 친히 들어오실 수 있고 나의 영혼처럼 나와 영원히 함께 사실 수 있으니, 만일 사람만이시라면 사람은 육체인지라 내 안에 그런 육체로 오실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내 영혼처럼 오셔서 계시는 것이므로 얼마든지 가능해지는 일이다. 죽자니 죽을 수도 없고 살자니 항상 죄 즉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죽었으니 이야말로 '자유 해방'이 아닌가!

고로 과거의 죄에 대한 대가가 죄다 청산되었을 뿐 아니라[그 죄로 인한 모든 죄 값이 죽음인데 이 죽음이 그리스도로 인해 치러졌으므로] 그 죄의 뿌리 즉 자기, 자기 욕심,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육신"의 지향성 역시 모두 한꺼번에 척결되어 죽어 매장된[장사 지내진] 것이다. 또 죽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살아나기도 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 있음으로써 그렇게 되었다. 왜냐면 내가 지금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와 같은 ‘나의 죽음’을 기반으로 한 것이니, 여기에 자기 부인 곧 죄를 짓지 않고 죄를 이기는 핵심이 있다. 왜냐면 내가 말 그대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있으므로 내 아무리 죽고 또 죽어 천번 만번 죽더라도[자기 부인의 결과로써] 죽음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니 왜냐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현재이기 때문이다[롬 6:9].

복음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만 강조한다. 그래서 그 부활은 하나님이시니까 즉 그 죽으심의 역할을 완료하셨으니까 이제는 당연히 살아나실 수밖에 없는 것으로 오해한다. 즉 죽으심과 부활이 일관된 하나의 연결 고리로서의 의미인데도 따로 분리해서 해석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부활을 우리와는 직접 연관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고전 15:14-18].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한다면서도 그리고 믿는다면서도 반쪽만 이해하고 절반만 믿는 실상이다. 이러니 제대로 된 능력의 역사가 나타날 턱이 없다.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부활이 없으면 죽음도 없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의미해진다. 바꾸어 말하면, 부활 즉 나의 구원 받음은 내가 이미 죽었다는 죽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이 평범한 사실이 중요하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구원 받아 영생하게 되었다] 함은 나의 죽음[그리스도와 함께]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롬 6:2/벧전 2:24]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고후 5:15] 전제 아래 우리가 구원됨이니, 그래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과 결의와 약속으로서의 회개가 우리가 구원 받는 믿음에 가장 먼저 오는 것이다. 우리의 새 삶, 새 탄생, 새 피조물로서의 새 생활을 전제로 하여 즉 육신에 다시는 포로되지 않아 죄 짓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해서 이를 전제하신 죽음 곧 우리 죄의 용서요 우리의 구원이다.

이로써 우리는 향후 영원히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의 표명으로 회개를 하는 것이고 이를 액면대로 수용하셔서 죄 용서와 더불어 성령께서 임하심이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다시 말해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하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가 동시에 필수가 된다. 영생을 얻자는 적극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여[나를 그토록 사랑하시어 자신을 모두 나를 위해 바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확증되었으므로-요 3:16/롬 5:8] 다시는 죄 짓지 않고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고후 5:15] 그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22]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겠다는[4:34] 결의, 결단에 맞추어 동시에 움직이시는 것이,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다.

이것이 ‘믿음으로 얻는 구원’ 또는 ‘믿어야 구원이 된다’는 사연이다. 과거에 죄 지은 것을 회개하는 것이므로 이는 향후 죄 짓지 않겠다는 결의를 의미함이다. 이러한 사람에 한해서 성령께서 임하시게 된다. 그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이라 하는 것이요[행 5:32]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시라 하는 것이요[히 5:9],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요 영생이라 하는 것이다[고전 2:9/약 2:5/1:12].

왜냐면 성령께서 임하심은 능력 받음[행 1:8]이니 즉 그리스도 친히 그 능력[생명력]이 되시는 고로 죄 짓지 않게 되는 다시 말해 제대로 순종하기 위한 원동력이 되시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능력은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나의 의지와 합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 특성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내 스스로 믿어야 구원 얻음이다. 처음부터 나의 자유 의지가 작동되었으니 마지막까지 나의 자유 의지가 핵심이다. 왜냐면 사랑은 자유 의지가 없으면 전연 존재 가치미가 없는 까닭이다.

죄 짓지 않음은 순종하는 것이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므로[요 4:34] 그래서 구원 곧 성령 받음을 "보내심을 받는"[20:21,22]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행 1:8] 하셨다. '죄 용서의 은혜[구원 받음]'와 동시에 병행되는 것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능력[구원을 이룸-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이니 곧 성령 받음이다.

후자를 전제하고 전자가 시행되는 것이다. 후자의 보장이 없으면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전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가 병을 훌륭하게 다 치료해놓고도 그 병근(病根)을 그대로 남겨두는 미숙이나 실수와 같다. 왜냐면 당장 병은 잘 치료하고 그래서 현재로는 위험이 제거되었으나 그 병근은 멀지 않아 또다시 같은 병을 키워 다시금 수술의 집도를 들게 되어야 하는 되풀이 과정이 강요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는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런 식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태반 아니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슬픈 실상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말하기를, "구원을 받았으나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는 죄 짓고 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자기를 속이고 남을 또한 그렇게 기만하여 멸망으로 인도한다. 왜냐 하면 "육신으로 살면 죽는다"[롬 8:13]고 했는데 "육신으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을 더 믿기 때문이다.

이전 에덴낙원에서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은 오늘날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마귀의 속임수의 수법도 똑같고 그 되풀이다. 죽을 것을 죽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전철을 밟고 옛 교훈을 기억하지 못하니 통탄할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의미가 비단 그 부활만 아니다[물론 그 죽으심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승천까지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까지 모두가 그러하다. 아니, 그 이후의 그리스도의 전부, 그 일체가 그 현재와 미래 모두가 나와 불가분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몽땅 내게 주신 선물로 지금 내 안에 와 계시지 않는가[요 4:10]. 그 모습이 바로 내게 개별적으로 주신 "선물"로서의 성령이 아니신가[행 2:38]! 그 중심과 핵심은 그리스도의 희생 양으로서의 죽으심이다. 나 위한 죽으심이 없고는 그 모든 것 중 어느 하나도 이루어질 수 없는 까닭이다. 고로 이 "죽으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리고 강조함이 없으면 부활, 승천 등의 모든 의미가 무색해진다.

그 죽으심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 신(神-고후 4:4)으로부터 그리고 각자 '자기 자신'으로부터 완전 해방되는 것이다. 그 완벽한 기틀이 됨이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부활, 승천 등을 뿌리로 하는 새 삶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하고 영생을 얻었다고 하는 이는 반드시 자기의 죽음과 그래서 무덤에 묻혀 있음[장사 지내짐]을 그 밑바탕 즉 토대로 한 것임을 한 시라도 망각하지 말 일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해 살아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는 한, 토대 무너진 건물이 되어 그 붕괴는 시간문제다. 자기 부인은 ‘나의 의지(意志)’와 ‘주님의 능력’의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재차 확인하게 되는 것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롬 7:25] 있는 실상을 뼈아픈 현실로 인식하고 탄식하는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복음이 된다는 진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가 아니라 믿기 전의 상황이다.

이를 거의 전부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이다. 그러나 이 율법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에게는 그 죽은 자임 즉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야 말하나 마나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불가항력으로 죄와 죽음의 실상밖에 없는 현실에 눈뜨게 함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망의 몸”을 탄식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했던 율법의 역할이었던 것이다[갈 3:24].

고로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되어 있는 이마다 여기서 탈피하고 해방된 자유인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절대 다수로서 이런 탄식을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런 이들은 처음부터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이다. 진리를 들여 주어도 진리를 사랑함이 없다[:10]. 이런 사람은 예외로서 구원이 해당되지를 않는다. 이 경우 "벌써 심판을 받은"[요 3:18] 위치다. 그런데도 난데없이 이를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의 바울 자신의 체험이라 착각하여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실질적인 자화상(自畵像)이라 선전해대니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만들어도 유분수이지 이럴 수가 없다.

바울이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율법 아래 있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엡 2:15]은 지킬 수 있어도 실질적인 율법의 본질에 대해서는 완전한 무기력을 절감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을 대변한 것이다. 왜냐면 이미 설명한 대로 바로 이것이 많은 인간 종족 가운데서도 유독 이스라엘을 택하심으로 그리스도 오심에 대비하게 하시던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즉 왜 인간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대망(待望)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이유를 가르치려 하심이다.

사전(事前) 교육 차원이었으므로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언급이 있음이다. 다시 말해 산 자에게만 통용되는 율법이 죽은 자로서의 나에게 임할 때는 그 율법을 내가 지킬 수가 없는 현실을 일깨워 도리어 나의 죽은 실태만 실감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그 뜻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異邦) 사람은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이런 하나님의 율법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미 양심을 통해 그와 유사한 체험을 다 하고 있는 현실이다[롬 2:14,15]. 말하자면 유대인의 율법은 그 양심의 소리를 명문화(明文化)한 격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게 되는 그 역사적 연유를 안다는 것뿐이지,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미를 알고 성령을 영접하여 모셔 구원 받으면 그것으로 종결되는 것이지, 이 구원 받은 상태에서 다시 모세 율법시대로 되돌아가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이방인에게는, 그런 모세 율법의 역할[유대인 곧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을 하는 것이 각자의 양심의 작용이었기 때문에[롬 2:14,15] 더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으로 일단 종결이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모든 지식은 성령의 계시로 이루어지고 나타나는 것이요 결단코 인간의 학문과 지식 차원에서 접근할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이 몇 번이나 강조해야 했던가[눅 10:21,22/고전 2:9/요 6:44,45,65/고전 2:13,14/마 16:17]! 양식과 상식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더 특별한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 곧 친히 가르치심을 통해 그런 이해에 이른다. 학문으로 여겨 인위적인 것에 의존하면 도리어 흘러가던 물을 사람 스스로 막는 것과 같은 결과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으니 죽음만으로 끝나면 내게 아무 효험도 없다[고전 15:16,17]. 다시 살아나신 그 부활에서 나는 실제적인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됨이다. 왜냐면 부활하여 다시 살아나신 그리고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는 이 사실에 나의 영생 곧 구원이 기초하고 있음이다. 이것이 나로 하여금 죄의 대가[代價一죽음이라는 열매]에서부터 해방될 뿐 아니라 그 죄의 밑 뿌리까지 도끼로 찍어 근절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있음이다.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고후 5:15] 죄를 다시는 짓지 않게 됨이다.

왜냐면 나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지 죽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죽음 그것뿐이고 살아 있는 내가 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니 그 죽음과 하나가 됨은 물론이고 동시에 그 영원하신 생명과도 하나가 됨이니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다"[요일 5:12]. 이와 같이 내가 현재 영생 가운데 있는[것을 믿는] 까닭에, 이 세상에서는 마치 죽음에 이르는 것과 같은 그 어떤 상태 즉 자기 부인에도 위축되지 않는다.

죄가 곧 자기중심이요 죄를 이기는 것이 자기 부인인데 이같이 자기 부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넉넉하고 든든하기만 하고 느긋하기만 한 자세로 자기 부인[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수용하게 되니, 죄는 이 앞에서 맥을 출 수가 없다. 왜냐면 내가 아무리 천번 만번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니 이제는 죽을 수가 없는[롬 6:9] 것을 아는 까닭에 얼마든지 넉넉하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게 됨이다.

과거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자기 부인 앞에서 기를 못쓰고 위축되어 죽어지내고 그 대신 내 안에서는 자기중심이 "나 여기 있노라!" 큰 소리 치며 기고만장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반대가 되어 그 자기 부인을 도리어 기꺼이 내 안에 품을 수가 있게 되니["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자기중심이란 것이 거꾸로 기가 죽어 쪽도 못쓰는 상태다. 왜 내가 자기 부인이라는 얼음덩어리[이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를 품에 품고도 끄떡도 하지 않느냐 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라는 뜨거운 용광로가 그 모든 얼음덩이를 녹여 버리고 있음을 내 영혼이 너무나 잘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의 조화(造化)다. 믿음 없이는 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구원을 모르는 단지 종교적인 사람은 이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랑, 자비, 인애 등의 덕목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다 종국에 가서는 구원 얻는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가리키는 것은 한낱 공허일 뿐 실체가 없다. 구름 잡고 안개 움켜쥐는 꼴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 즉 모든 종교가 모두 사랑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결국에는 다 구원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쁜 소식"이 아닌 종교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성경을, 그리스도의 구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혼란이다. 사랑이 무엇이냐. 그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이다. 자기 부인이 곧 사랑이다. 몸과 머리 관계에서 둘이 하나됨이 사랑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부인이 없는 일체의 것 즉 아무리 사랑, 자비, 인애를 들추고 입에 담아도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하였다.

자기라는 것이 아주 죽어 무덤에 묻혀 버리고 말끔히 청소되지 않는 한 그 어떤 이름의 사랑도 허위요 위선이요 자기 기만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증명해 주는 것이다. 고로 사랑은 일체의 관심 곧 자기의 전체 생명력이 자신에게 쏠리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랑의 상대에게 가 있는 것을 말함이다. 자기 안으로 삼투(渗透)하여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으로 발산(發散)하는 것이 사랑이다. 자기의 풍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외부로 부어 주고 쏟아 주고 흘러가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 내부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만드신 조물주로부터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생명은 조물주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즉 공급원이 있기 때문에 수요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수요 측면만 인식한다. 공급은 무시해 버린다. 고로 병적(病的)이라 쓸모가 없다.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힘, 능력이 없다. 따라서 세상 모든 종교는 가공(架空)이요 망상이요 미신이다.

우리 인생은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그 공급원이 끊겼었다. 이렇게 되면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다. 새 창조로써 이 공급원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곧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선언하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어째서 이제는 자기 부인이 가능해졌는고 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 중심[그리스도 자신을 중심으로 하시지 않는]이 되시어 내게 무한한 힘의 공급원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자연적으로 나 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일 수밖에 없다. 고로 나는 아무리 주고 주며 또 주어 한없이 주어도 내 안에 솟아나는 이 힘의 공급원은 마를 날이 없고 다함이 없다. 삼위일체의 원리에서 보듯이 순환의 원리를 따름이다. 내가 흘러 보낸 것이 결국 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내 생명을 모조리 내놓아 십자가에 내 육신을 걸쳐 놓아 팽개친다 하더라도 내 생명은 다시 내게로 부메랑[boomerang一활등처럼 굽은 나무 막대기로, 목표물을 향해 던지면 회전하면서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에서 목표물에 맞아 부딪치는 데가 없으면 반드시 다시 되돌아오게 되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중서부 원주민이 사용하는 무기]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을 나는 내 믿음의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있는 터이다.

그러면 목표물에 맞히면 어떻게 되느냐. 나는 또 하나의 ‘나 자신’[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가 될 것이므로]을 내가 쏜 그 '사랑'의 낚시로 낚아 올리고 사로잡는 결과가 된다. 사랑이 사랑을 낳는 당연한 결과다. 내가 사랑을 베푼 그 사람은 자기 사랑을 다시 내게 쏟아 주는 것이기에 그렇다. 내가 그를 죽도록 사랑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사랑하기를 죽도록까지 하니 바로 이것이 내가 ‘또 하나의 나’를 새로 얻는 결과다.

조물주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다 인정한다고 겉으로는 주장하는 '종교'는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위의 설명처럼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를 말하면서도 [그것으로 끝나 버리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 그들은 거기서 끝나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됨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불이야!" 하고 누가 고함을 치면 그 말을 믿는 사람은 피하거나 아니면 살림 도구를 건지기 위해 즉각 행동을 취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나와 하나 되어 죽으신 사실임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나를 <대신하신> 죽음이니까 나는 죽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만 엉뚱하게 착각하기 때문에 무지(無知) 속의 비극적 태평이다. 나와 '하나 되어' 죽으심이 그리스도 죽으심의 핵심 골자이다. 그것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표현이 나타내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죽음에서 이미 하나 되었다는 것은 이후의 연속적인 사건 즉 그 부활과도 하나 됨이요 하나님 우편에 나도 함께 앉아 있는 것도 기정사실이 되는 것으로 직결된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믿는 것'이 아니다. 먹어도 배부르지 않다는 것과 같다. 물은 마시는데 여전히 목마름과 같다. 나와 하나 되셨다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허전하고 배부르지 않고 목마르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옛 관습대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삶의 낙을 찾는다.

그래서 난데없이 마리아를 찾고 거기 의존하는 미신행위에 열중한다. 헛된 마귀의 영을 받고 사이비 교리에 도취되어 주위를 어지럽게 하기도 한다. 나와는 동떨어진 위치에서 단지 나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당하셨다고만 하는 그런 관점인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를 좋은 먹이 감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것은 그리스도 구원의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은, 처음부터 우리와 하나 되시는 관계를 설정해놓으신 다음이 아니시라면, 애초부터 실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대신 죽으심은, 이 하나 됨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영이 되는"[고전 6:17]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구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을진대 따라서 "대신 죽으심"의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과는 전혀 무관한 세상의 종교 교리만 될 것뿐이다.

학교 친구가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게 되는데 이를 보다 못해 그 친구가 자진해서 선생님께 말하여 자기가 그 아이 대신 맞겠다고 나선다 하자. 그래서 그 매를 대신 맞아 주는 경우, 그러면 그 때의 그 잘못에 대한 대신 벌 받음은 된다. 그러면 그 이후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찌 되는가. 당자가 두 번 다시 그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다. 똑같은 잘못을 재차 저지를 때 그 친구의 대신 맞아 줌이 무위로 돌아가니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친구만 공연히 매를 맞았을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을 "대신 죽으심"이라 착각한다면, 바로 위와 같이 된다. 그런 식이 되지 않으면, 한번 우리 죄를 위해 죽어 주셨으니까 앞으로 혹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무조건 용서해 주신다는 따위의 허무 맹랑한 생각이 된다. 이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짐짓(고의적으로) 짓는 죄는 도저히 용서되지 못한다"는 성경이 이미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히 6:6].

그러면 어떤 것이 고의적인 범죄이고 어떤 것이 아닌가. 고의적인 것은 자기 자유의지로 기쁨으로써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는[사랑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다. 즉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모시기를] 싫어하는”[롬 1:28] 경우다. 간단히 말해 자기중심의 성향 그대로 남아 있음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곡해할 때 나타내는 결과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롬 6:3-8/갈 2:20/5:24,25/6:14/골 2:12,13,20/엡 2:5-7/딤 후 2:11,12]을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으로 바로 알 때에만 자기중심이 척결되고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된다. 자기가 없어졌고 따라서 '죄의 몸"[롬 6:6] 즉 "육신"[7:14-8:13]이 "파괴되었으므로"[6:6] 그러한 것이며, 성경은 이 사실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함께 장사 지내졌음[무덤에 묻혀 버림]"[롬 6:4/골 2:12]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 1:30] 함도, 우리 대신해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다는 뜻이 아니고, 삼위일체 원리에 의한 인과(因果) 관계에서 그 인(因)이 되심을 말함이니, 곧 우리 자신이 스스로 지혜롭게 행하고[마 10:16] 선과 의를 행하게 되고[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요 5:29] 거룩함을 이루고[롬 6:19,22/엡 4:24/벧전 1:15,16/히 12:14/고후 7:1] 우리 스스로 믿음으로써 구속하심을 얻는 즉 구원되는 '결과'의 '원인'이 그리스도 친히 되어 주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하심과 같다. 사람마다 다 지혜로운 자일 수는 없는 것이고 원래 지혜가 없는 자가 스스로 지혜 있게 하려 한다 해서 지혜 있는 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니, 이는 당연히 내 스스로 '지혜를 이루어야', '지혜롭게 되어야', '지혜 있는 행동을 해야' 함이다.

지혜가 원래부터 없는 자라도 "지혜롭게 하라"는 똑같은 명령을 받고 있으니 이는 어떻게 되는 일인가. 나의 의지로써 마음만 먹으면 그리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심이다.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하면, 내가 "쉬지 말고 기도함"[살전 5:17]으로써 여호수아처럼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 9:14] 어리석게 여부스 사람들의 꾀에 넘어간 것처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을 주님께 여쭌 다음 그 지시를 받음으로써 그대로 하면 지혜롭게 행함이 되고 어리석음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어리석은 행동을 면하니 지혜롭게 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데도 자동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일은 위의 여호수아의 예에서도 보듯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능동적이어야 하나님도 움직이시니, 우리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필수이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이 자동적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인과 관계가 삼위일체 원리에서 나타나는 갑과 을의 주인 의식이다. 갑은 큰 자로서 작은 자인 을을 항상 주도하고 인도하는 것이지만, 을 역시 피동적으로 이끄는 대로만 따르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임하여 주인 의식으로 그와 같이 갑을 따름이니, 곧 갑의 마음[뜻]을 자기 뜻으로 갑의 일을 자기의 일로 적극 받아들여, 능동적으로 그 뜻과 그 일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심이 바로 우리가 이렇게 할 것을 원하심이다. 구원을 단지 받는 것으로만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그릇된 잘못된 생각을 버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타적으로 사는 것, 자주 독립성이 없이 피동적으로 사는 것으로 착각한 모든 것을 버릴 일이다. 타력에 의존함으로써 자주성과 독립성을 결한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심이니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차이냐, 완전하게 자주 독립성을 발휘하여 살되 그 방향을 이전처럼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자기중심이 아니라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그래서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지 않고], 하나님[친히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어 계시는]께 향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웃[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를 이룬]에게 향한다는 그 뜻이다. 왜냐면 한 몸의 이치는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와 같이 어느 방향으로 나가든지 자주 독립성으로 나가도록 창조되어 있음이다. 인간이든 영물이든 자유 의지를 주심에서는 마찬가지이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 역시 그들의 자유 선택을 따라 선과 의가 아닌 악을 택하여 지금까지 스스로 활동하고 있되, 모름지기 활동할 때에는 조물주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피조물임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단 마음으로가 아닌 억지가 되어 행하는 복종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히 1:14]임에는 거룩한 천사들과 똑같으나 후자는 구속 받은 사람들을 위함에 있고 "섬김"[:14]에 있지만 전자는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런 차이다.

이와 같이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생명의 법과 질서인 까닭에, 인생들로 하여금 자기부인만이 삶의 기본임을 깨우치도록 하시기 위해서는 인생들을 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할 필요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도록[왜냐면 처음부터 나 자신을 위할 수가 없고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시는 이시니까]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전체적으로 바로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잘못되게 해석하여 마치 하나님께 빌붙는 의타심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갑이 을을 위하고 을이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에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신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으로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사실부터 배워야 하는데, 이를 곡해하여 마치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의지하기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언제나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달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뜻뿐으로서 진리는 서로 모순되는 법이 없는 까닭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사람은 완전히 자주성을 구가하는 독립된 개체이다. 인격성을 지니고 자유 의지가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절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다 하지 않는가. 심지어는 영원히 운명까지도 각자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시는 마당인데 다른 것이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원한 멸망에 이미 처해져 있고 첫 사람 아담은 죽은 자가 되어 오늘날의 인간 실상이 죽음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그들 자신이 정한 대로 일절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은 결과다. 그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어버이로서의 마음은 악한 자에게나 의로운 자에게나 한결 같으시나 이미 정하신 것은 친히 바꾸실 수 없으니 질서 확립 차원에서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승자박하신다는 뜻은 아니니 하나님께서 한번 정하신 뜻은 완벽하고 그 자체가 조화된 아름다움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복종함으로써"[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 우리가 을이라면 을이 해야 마땅한 몫 혹은 도리를 다함으로써] 각자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다. 그 '스스로 망치는 자신'이요 '스스로 흥하게 하는 자기 자신'임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은 그들의 완벽한[모르는 구석이 없다는 뜻] 지식으로써 이와 같이 "두려워하고 떨어야" 마땅한 특성의 생명의 일, 자유 선택의 일임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음에도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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