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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 법과 질서 - 4 등록일 2016.02.24 14:44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26

 

반면에 거룩한 천사들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떪"으로써 자기 생명을 지켰기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처럼 영원 멸망에 처해짐을 면한 것이다. 창조는 마찬가지다. 처음 창조에서 그들이 자기네 생명을 스스로 지켰다면 새 창조에 해당되는 우리의 경우 스스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표현되는 그 차이뿐이다. 두려워하고 떠는 이유도 하나님의 처벌 때문이라는 또다시 일방적인 생각으로 치우칠 일이 아니다.

내 스스로가 그와 같이 나의 영원한 운명을 그르칠 수가 있으므로 바로 이 사실 앞에서 두려워하고 떠는 것이다. 여기서의 하나님의 역할 즉 하시는 일은 각 피조물이 스스로 정한 대로 차질없이 이루어지도록 조처하심이니 여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벌"[살후 1:8]이라는 개념이 생기는 것이다. 항상 양면으로 균형되게 생각하고 관찰하고 판단해야 하는 법이다. 일방적으로만 생각하면 아무런 진리에도 이르지 못한다. 만유의 양면성을 가리키는 '삼위일체의 원리'가 모든 것의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 윈리에 머물지 아니 할 때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은 스스로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눅 16:16/마 11:12] 것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나의 주동성(主動性), 자주 독립성을 말씀하심이다. 내가 주인 의식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말씀하심이니, 항상 이런 일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움직여 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이런 상호 관계를 항상 명심할 일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오직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관계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는 비참한 현실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가 범죄하게 된 것도 주인 의식으로 판단하지 않고 피조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에 피동적으로 따라간 결과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피동적으로 무조건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판단하고 분별하여 그 말씀이 옳기 때문에 그 뜻이 자기 마음에 와 닿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니 이것이 주인 의식이다.

불교에 심취하신 분들은 이 점에 깊이 유의하시기 바란다. 불교는 자주 독립성을 강조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방향을 앞의 설명처럼 잘못 정해놓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작정 나를 중심으로 하니까[왜냐면 머리이신 조물주 하나님을 인종하지 않으니] 자기중심일 수밖에 없다. 이기주의가 아닌 무조건의 이타주의이기 위해서는 자기 부인밖에 없고 자기 부인 내가 나를 위하여 살지 않음은 오직 하나님 친히 나를 위하신다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을이 갑을 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은 갑이 을을 위한다는 전제 아래 이런 상호 관계 속에서 다시 말해 머리와 몸의 혼연 일치됨에서 작동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을 반드시 개입시켜야 제대로 된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이 제대로 움직여 굴러가는 것이다. 제대로 된 자주 독립성이고 의타, 의존적이 되지 않는다. 성경을 직접 읽어 그 진리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종교 교리를 성경의 내용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진리를 떠나 있고 성경의 원 내용에서 아주 떠나 있는 것이다.

결코 일방적이지 않음을 항상 염두에 둘 것을 거듭 강조한다. 쌍방 교류이다. 그래서 성경은 교제["사귐"-요일 1:3/"참여함, fellowship"-빌 3:10]를 강조하는 것이다. 위의 '그리스도'와 '나'라는 인과 관계에서,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셨다"[고전 1:30]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갑'이시라면 나는 '을'이고 하나님은 '병'이신 것이다.

그러나 아래 그림과 같이 갑으로부터 을로만 흘러가는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 또는 "성령"[병]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을 역시 갑에게로 흘러감이다. 다시 말해 똑같이 움직이는 것이니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다. 이것이 우리의 독립성, 자주성, 주동성이다. 이런 것이 자유인의 삶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원치 않는 것을 아니하는 자유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니 천하 그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한다. 이 세상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나를 막지 못한다.

그런 반면 어느 하나라도 움직임을 멈추면[상대 쪽으로 흘러가는] 상대방도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왜냐면 막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신다 함이다[눅 12:8,9/마 10:32/딤후 2:12].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게 되면 그리스도 또한 더 다시는 나를 위하시지 않게 되니 우리의 구원도 자연 소멸(消滅)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3] 하심이 바로 그런 "우리를 부인"하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동일하신]"[히 13:8] 주(主)요 대(大)이시나, 문제는 그 종(從)이요 소(小)인 과(果)인 나에게 있음이다. 그래서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부득불 나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고 내가 주님을 시인해야 주님도 나를 시인하심이니[딤후 2:12/마 10:32],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룰"[빌 2:12] 필요성이 이 세상에서는 절실한 것이다.

동시성(同時性)

그래서 내가 흐름을 멈추면 그리스도께서도 그 생명의 흐름을 멈추실 수밖에 없다. 내가 흘러야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내게로 무진장으로 흘러 오게 되니, 그리스도의 흐름이 바로 생명력 곧 구원이 아닌가. 위 그림에서 보듯이 갑과 을이 대소 주종 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갑만 을 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병을 통해 을 역시 갑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병으로 하나되어 있지 못하면 당연히 갑과 을 중 어느 쪽이든 큰 쪽에서 작은 쪽으로 작동함으로써 일방적이 된다.

그래서 압박하게 되고 압박을 당하게 되니 균형이 잡히지 않고 조화 통일이 없게 된다. 서로가 이렇게 다투다 보면 갑과 을은 필경에는 똑같이 함께 괴멸된다. 이것이 삼위일체 원리의 갑과 을의 동시성(同時性)의 움직임이다. 다시 말해 갑과 을은 대등하지 않고 대소, 주종, '인(因)'과 '과'의 관계에 있음이다. '병'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사실을 나타냄이니, 왜냐면 '을'이 생기기 전의 '갑'의 모습이 '병'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의 원리인 것이다. 대등하게 되면 삼위일체의 원리 자체가 존재할 수가 없다. '대'가 '소'를 움직이게 함이니, '대'가 본을 보임으로써 '주'가 되고 '소'는 그 '대'가 보이고 있는 본을 따르니 '종'이다. 그리고 '대'가 '소'를 낳았고[파생시켰고] '소'는 '대'에서 났기 때문에 '대'가 '소'에게 모든 힘과 능력의 공급원이 되어 있어 '소'는 '대'가 공급해 준[주는] 힘으로써 움직이는 터이므로 '대'는 '인'이요 '소'는 그 '과'이다.

세상 종교는 이런 이치대로 움직이지 않고 따라서 이 원리를 따른 구원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만일 가르친다면 위의 설명처럼 그대로 따라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까닭에 그래서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요 속임수라 하는 것이다. 그런 종교를 개설 또는 창시한 인간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조종하는 배후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그 뜻이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보여 주고 들려 주고 가르친 대로 따르니 그 사람 자신은 진실하나 그 내용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난 것이므로 거짓이라 하는 것이다. 석가(釋迦) 등(等)이 바로 그런 경우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종교와 구별하여 종교가 아니라 하는 것이다. 종교는 다음 세상의 행복을 노리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도덕율을 강조하더라도 그런 목적을 위한 수단 방법으로 인식되어질 뿐이다. 그래서 그런 본질을 따질 때 어느 모로 보아도 사랑일 수가 없다. 왜냐면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므로 자기중심 일변도다. 이기주의다. 세상 종교에서 영생에 들어가려면 선행을 힘쓰고 사랑을 실천하라 해도 자기중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를 못하는데 그것이 진정 선이고 사랑일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것은 표방하는 정도로 그치고, 일정 양식의 종교 의식에 충실히 하는 것으로써 영원한 행복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주장삼는다. 그래서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모세가 정한 율법처럼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고 특정한 날을 정해 특정 장소에 가서 특정 의식을 거행하는 데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런 것이 모두 종교의 전형(典型)이다. 이런 것은 한마디로 속임수다. 왜냐면 그것이 선행이 아닌데도 선행이라 하고 사랑이 아닌데도 사랑이라 하기 때문이다.

자기 구원을 위해 선행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인데 그런 위선과 가식을 어찌 선행 또는 사랑이란 이름을 붙일 수가 있는가? 자기 구원이 목표이니 구원을 받아 그 목표를 이룬 다음에는 당장이라도 그만 둘 수 있을 그런 "선행"이고 "사랑"이 아닌가. 그래서 위선이고 속임수이고 미신이라 하는 것이다. 아니면 한정도 없는 무지(無知)이다. 그렇게 가르치며 "이것이 선행이다, 사랑이다" 하는 이도 무식하고, 그런 것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이들 역시 무지하기는 일반이다. 많이 배워 학문이 넘치는 천하 없는 박사라도 진리를 모르니 '모른다는 의미의 부지(不知)' 곧 무지다.

그렇다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개신교 교인들처럼] 선을 행하기를 힘쓰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이상 설명한 것과 같은 진리에 무지하다는 것은 매양 같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요 산 자가 되었기에 산 자로서의 법과 질서가 자기 부인으로서의 사랑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니 역시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아무 다를 것이 없다. 미신이고 남들을 그렇게 가르치니 속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한다. 왜냐면 그런 모든 있을 수 있는 단계를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훌쩍 뛰어넘어 더 이상 거기 신경을 쓰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까닭은 이미 나의 노력과는 일체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루어놓고 그래서 현재 영생을 누리면서 다시 말해 나의 구원을 목적함과는 일절 상관없이 순수하게 선행,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하는 것이므로, '그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행도 사랑도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런 선행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제사장으로서의 끊임없는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전달과 그런 인생 구원 차원에서의 선행으로 실현된다. 무엇보다 특징은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드러난다[요 12:25]. 살고자 아니하니 즉 삶의 누림과는 담을 쌓으니 그리고 선한 직업을 갖는 것도 그와 같이 일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계 유지를 위함이고 나머지는 전도 차원에서의 구제 등 선행을 위한 것이므로[엡 4:28] 간결한 삶이고 욕심이 없다. 소위 무소유의 자유이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자기 부인이 안되고 여전히 자기중심이다보니 죄를 짓게 된다. 자기중심 자체가 바로 죄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생각은 없이 하나님의 계명만은 지키려고 하니[성경에 지키라고 명령하므로] 한 다리는 앞으로 가려 하고 나머지 다리로는 뒤로 가려는 꼴이 되어 그런 자가당착이 없다. 이런 모순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하나 무리이고 억지다. 성경을 순리대로 읽으려 하지 않고 끝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서 영생은 얻으려고 하니 마침내 사악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상 종교의 교리와 타협하게 된다.

즉 "육신대로 살아도 죽는"[롬 8:13] 것이 아니라고 억지로 말을 만들어 둘러대며 '믿었으니 구원은 얻는다'는 고집이다. 믿음의 의미조차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죽는다[육신대로 살면-롬 8:13]”고 한 것은 행위로 구원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멋대로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은 올바른 행위 곧 “선행으로” 영생에 들어간다고 명백히 하고 있다[2:7].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 받는다”[고후 5:10]고 했다.

여기에는 믿으면 된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다. 그러면 그 선행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뒤이어 설명이 나오니 즉 15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신 것은 그 목적이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려 하심이라 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써 되는 결과다. 선행하는 자가 영생하고[롬 2:7] 악행하는 자가 심판을 받는[고후 5:10/계 20:12,13/딤전 4:16/행 3:26] 것이라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악이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선행이다.

살아도 죽어도 주님 위함이 선(善)이다. 의(義) 곧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름이다. "누구든지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는 말씀을 너무 간단히 가볍게 피상적으로 거의 모두가 해석하고 있다.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6:65] 하신 말씀을 동시에 같은 비중으로 마땅히 생각하지 않는 까닭이다. 하나님께 배워야 오는 것이다[:45].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인간은 "죽은 자"[마 8:22]이고 따라서 세상은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배움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절대로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다.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죽음의 세상인 줄 알므로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에 눌러 앉아 삶을 향유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라야 제대로 된 믿음이다. 무의미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속아 넘어가는 것인 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받고 있어도 절대로 이 세상에서 그 새 생명을 향유하고 즐기고 누릴 생각을 않는 것이니 그 새 생명은 영계 곧 신령하고 영원한 세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누리는 것이기에 지금은 이 자연계에 있어 자연계에 속한 몸을 하고 있음이므로 비정상인 것이다.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니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이 몸에 채우면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하겠다는 일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이렇게 죽음의 모양새를 그대로 지니는 판인데, 어떻게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가 아니고 인생이 모두 죽음의 군상(群像)들이 아닌가.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라 하시고 "모든 것을 버리라"[눅 14:33]고 하셔도 그 말씀을 달게 받고 그 말씀을 떠날 생각이 전연 없다. 왜냐면 이 세상이 그리고 현재의 인생이 죽음 일색인 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을 여전히 사람 살 만한 곳으로 착각하고 인간을 산 자로 여기고 있는 바탕에서는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말씀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면 자기는 살았다고 여기고 있는데 죽음의 말씀을 하시니 수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말씀 곧 자기 살과 피를 온통 우리들을 위해 바치시고 영원히 우리가 먹을 양식이 되어 주시고 마실 음료가 되어 주신다는 말씀에 기가 질려 망설임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요 6:66].

오늘날도 똑같은 양상이다. 많은 이들이 이 세상의 죽음의 현실은 자각하지 못한 채 오직 영생 하나만 찾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를 중심하여 살고자 하는 욕심 그대로이기에 자기 비위에 맞게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자멸에 빠지고[벧후 3:16] 구원의 진리에는 절대로 이르지 못함이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오늘날은 성경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함으로써 자기 기만 행위를 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 좁은 길이 생명으로 통하는 것이므로 많은 사람이 외면하여 찾는 이가 적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해도 못하는 이들이 많다고 미리 경고하셨다[눅 13:24].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많은 제자들이 이 자기 부인의 말씀 한 마디에 썰물처럼 빠져 나갈 때 베드로는 "생명의 말씀이 계신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요 6:68] 한 것이다.

베드로는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 다시 말해 이 세상과 인간이 모두 죽음 일색임을 알았기 때문에, 생명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설혹 죽으라 명령하셔도 마땅히 죽어야 하는 줄 알고 기타 무엇을 명하시든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도리인 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것이니, 바로 이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아무나 그리스도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 있어 산 자가 되어 있음이 사실인데 아무리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라 하더라도 산 자로서의 삶의 낙은 어떤 형태로든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할 때, 삶의 핵심, 진수(眞髓)를 향유함이다. 다름아닌 '사랑'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그 핵심이시고 진수이시니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으로 인한 사랑의 평안과 기쁨을 누림이다.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사랑, 그리고 한 몸을 이룬 믿는 형제들 간의 사랑이다.

중심이 되는 것은 '제2의 나 자신', '또다른 나'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 주님과 의논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그 사랑의 기쁨이야말로 아는 이만이 아는 비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동적으로 움직이고 자주 독립성을 향유한다고 했지만 주님께 매사 매건 기도로써 여쭈면 종속이 아닌가?" 한다면, 내 스스로 주님의이 일을 나의 일로 삼고 하는데 내가 어찌 내 식으로 내 독단으로 하겠는가.

반드시 주님의 마음을 따라 그 원하시는 대로 하기 위하여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여쭈어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 엄마라면 나는 그 품속의 아기이다. 아기가 어찌 자기 마음대로 엄마의 마음을 알아 스스로 일을 할 수 있는가.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니 바로 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마음을 내가 먼저 주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 기도다. 그렇지 않고 주님 친히 내게 시키는 방식 즉 명령하고 지시하는 모양이 되면 그것은 영락없이 간섭이요 강제다.

그래서 내가 즐겨서 기뻐서 주님께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니 나는 일절 불만이 없으면 내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자유인으로서 하는 모든 것이다. 고로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는"[엡 5:19] 삶이니 이런 죽음의 삭막한 세상에서 이 이상 가는 삶의 향락이 있다 하겠는가. 세상 권력과 부귀를 다 쥐었다 해도 이 깊숙한 강물과 같니 넘치는 사랑의 기쁨, 감사, 만족보다 더 하겠는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면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니, 기뻐하라"[4:4] 함이 이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로서 첫째로 거론되는 것이 사랑이요 기쁨이요 평안이다[갈 5:22]. 먹고 마시는 가장 기본되는 욕구보다 앞세우는 것이 평안과 기쁨과 올바른 삶이다[롬 14:17]. 십자가에 나아가시면서도 주님께서는 낙담 중의 제자들에게 오히려 "내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요 14:27/15:11/16:33] 하시면 위로 하심과 같다.

죄는 욕심에서 난다[약 1:15].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무덤에 묻혔는데 무슨 욕심이 있는가. 그래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고 하지 않는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그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나의 일로 삼아 이를 온전히 이루려는[요 4:34] 목적밖에 없다. 머리를 위함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함이다. 이것이 몸이 사는 모습 그대로다. 삶 자체이다. 그 외로 달리 살라고 하면 그것은 곧바로 죽으라는 의미다.

남편과 아내가 머리와 몸의 관계인데[고전 11:3]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엡 5:28]이라 함이 그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 받음을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 정의해 주신 것이다[요 20:21,22].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21] 하셨다. 따라서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그 본을 따르면 되는 일이다. 주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사셨던가? 아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려 하심이었고 그래서 그 뜻을 따라 우리 각 사람에게 자신을 선물로 몽땅 주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양식”[요 4:34]임을 명백히 하셨다.

다시 말해, 양식(糧食, food) 즉 먹을 것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 육체적 생명은 끝나는 것이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면 우리의 영생은 끝이다.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그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하신 명백한 뜻이다. 이제까지 죄 중에 안일하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이 없이] 살면서 공짜로 영생하는 줄로 착각했으면 때 늦기 전에 회개하고 이제는 성경대로 믿을 일이다.

지금까지 믿어 온 것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사람이 가르치는 교리대로 "믿는다"고 믿은 것이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받는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무덤에 묻힌 사실을 받아들이는 의미이다. 함께 죽었는데 무슨 죄를 또 지을 수 있는가. 죄의 육신 다시 말해 죄의 몸이 멸해진 것이니 이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다[롬 6:6]. 이 육신의 붕괴를 다시 명확히 밝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4]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죄와 사망의 법"[롬 8:2]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2]이므로 우리가 이제는 "성령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요 따라서 얼마든지 "성령으로 행할"[갈 5:25]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는 절대로 육신에 사로잡혀[롬 7:24] 지내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 이유로 인하여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 하는 것이다.

세례 받음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짐을 의미하여 이제는 그렇게 "멸해진"[6:6] "육신"[7:14-8:13]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이제는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8:4] 되어 있으니,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율법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 즉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따라 넉넉히 지키는 것 자체인 것이니 다시 말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다.

그러므로 이런 근본적, 기본적, 핵심적인 의미가 없는 세례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세례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도 아니고 믿음의 증거도 아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영원히 장사 지내져 다시는 이미 그렇게 죽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그 확신을 가리킴이니, 그냥 단순히 그리스도 나 위해[사람들은 이를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으로 착각한다-우리말 번역은 그런 신학 사조에 물들어 있는 번역자의 편견에 따른 오역이다] 죽으신 사실을 사실로서 인정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아닌 것이다[롬 6:3,4/골 2:12].

우리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인간[아담]이 이미 죽음을 벌어들여 벌써 죽은 다음의 그 죽은 자로서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일이든 자기 구원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죽은 자로서 죽은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을 역사(役事)하시지 않고는 달리 방도가 없어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나를 창조하심으로써 나를 구원부터 해놓고 보신 것이다. 죽은 자이니 산 자부터 되게 함이 급하고 최 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만드신 다음에 나를 살리시되 역시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되도록 하시어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구조 즉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되어 있는 구조로서 나를 새로 만들어[창조하시어] 산 자[죽은 자가 아닌]로서의 삶을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 하고 은혜로서 구원 받을 당사자인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고 단지 그 이미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믿음으로 얻는"[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요 "선물"이다.

새 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조 행위는 하나님의 단독 행위이지 피조물이 개입해서 되는 일은 없다. 죽은 자를 이렇게 산 자로 만드신 다음의 조처는, 첫 사람 아담이 거쳐야 했던 바로 그 동일한 과정이니 즉 선과 악으로 스스로를 구분해냄이다. 피조물 스스로가 자기를 구별시키는 것이니, 이미 설명한 대로의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의 결과 즉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정하는 것을 말함이다. 다시 말하면 복종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가름되는 것이다.

아담은 그 결과 죽은 자가 되어버렸고 영물들은 그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현재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해]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이같이 구분되었은즉 우리 역시 당연히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함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시종일관성이다. 이는 법질서 확립에서 필수 요건이다. 예외가 있으면 그 법은 절대로 제대로 세워질 수가 없다. 많은 사람이 당치도 않게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치 예외가 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으나 이런 주장은 보통 착각이 아니다.

이런 진리를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마침내 깨우쳐 주시게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사전(事前) 교육 차원에서 그 그림자[실체인 그리스도께 대해] 역할로서 각종 절차와 율례(律禮)와 법규를 통한 모세의 율법을 정하신 것인데, 그것들이 상징하는 바 이상과 같은 실질적인 내용은 깨닫지 못하고 그런 본질적 '내용'을 상징화하여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그 '외형'에만 신경을 썼던 것이 당시 유대인들이었다.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작 그 '내용'이 밝혀졌을 때는 힘써 그 '내용'이신 그리스도를 배격한 것이다. 실질적인 '내용'이 나타나면 그 '외형'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데, 그런 '외형'을 그대로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 "예배"[요 4:24/롬 12:1]를 마치 세상 종교인 양 착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그런 사정은 변함이 없으니 어찌 아니 답답한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앞서서 배격하는 것은 세상 종교요 그 중에서도 가장 앞장 서서 열심을 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로 착각하여 그런 종교 형태로 만족하고 안주(安住)하는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 집단인 것이다.

이 모든 속임수와 방해 책동이 이 세상 신(神-고후 4:4)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것은 물론이다. 빛의 천사로도 이 세상 신은 가장한다고 성경에서 밝힌 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거룩하신 이름을 도용하는 것쯤이야 다반사로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이반 로버츠의 영적 현상[1904-5년]이 그런 대표적 예다. 온갖 모방은 다 할 수 있으나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기 부인만은 흉내 낼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자기 부인은 외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기보다 완전히 내면적인 획기적 변화이기 때문이니, 곧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셔 이로 인하여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한 몸으로서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고후 5:15]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변화는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는 대개 판단이 불가능하고, 그 열매로써 차츰 밝혀지고 드러나게 되는 속성이다.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되는데 믿은 즉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다. 죽고 나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미 이러한 "새 생명"[롬 6:4]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미 영생을 살고 있는 현재이다. 고로 여기서 영원히 산다 할 때 "영원하다"는 것을 양(量) 곧 무제한의 양을 말한다면, 영생으로서의 질(質)은 믿은 직후인 지금이나 천국에서나 동일한 것임은 당연하다.

그러나 항상 오해하지 말 것은 영생한다고 이것이 절대적이거나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대적이니 다시 말해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경우에 한함이다. 악령들 역시 원래부터 영생하기로 작정된 영물들이다.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창조된 것인데도 거룩한 천사들은 거룩한 천사로 남고 그들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해서 악령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니, 그 이유는 범법했기 때문이다[요일 3:4]. 생명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죽음이다.

아담이 죽은 것도 법을 지키지 않음이다[롬 5:12]. 죄가 "불법을 행함" 곧 법을 지키지 않음, 법을 범함[to break the law-요 4:34]이기 때문이다. 무슨 법이냐, 이미 설명한 대로 '사는 방법', '사는 도리' 곧 한 몸의 구조에서 머리와 몸이 되어 사는 삶의 이치이니 다시 말해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신체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런 작동은 기계적인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개념화하여 "자기를 부인함이라 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 삶의 질을 논할 때,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서 이룩된 우리 구원 즉 새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었으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요[:14]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므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지라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므로 나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당히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15].

이는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는 가장 간명한 삶의 이치다.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한다, 그러니 너는 절대로 네 자신을 위해서는 안되고 나도 절대로 나 자신을 위하지 않을 터이다" 하는 소리가 아닌가. 그리고 내가 죽었다면 그대로 죽은 것이지 그것이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난 것은 그 죽은 것이 살아나 있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은 일단 죽었고, 새 것이 다시 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죽음의 뜻을 강조하여 "무덤에 묻혔다[장사 지내졌다]"는 사실까지 말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이를 구분하여 육으로 나는 것과 영으로 나는 것으로 구분하기까지 한다.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았으니 육체로 나는 것이요,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을 물려받았으니 성령으로 난 것으로서 이는 또한 아버지의 영을 받음이 되어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神子]로서 출생함임을 성경은 강조한다. 육으로 난 것은 사람이요 사람의 아들[人子]인 것이다. 확연히 다르고 같지 않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은 단순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 아니라 새롭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출생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났다"는 표현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일 뿐이다. 그 외에는 쓰이지 않고 오직 다시 출생했다, 성령으로 출생했다, 새로이 창조되었다는 말만 쓰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 통한다. 말 그대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셨는데 어찌 그대로인가 한다면,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마지막 아담이시니까 아담이 그 죄로서 죽은 의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나와 함께 하신 죽음의 의미다. 죄의 형벌이니 저주 받은 몸의 죽음의 모습으로서 이 경우 [당시 환경을 따라] 십자가 죽으심이 제격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 죄로 그렇게 죽음의 결과를 맺고 삶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아담 스스로 그러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법은 없다. 왜냐면 아담은 그렇게 죽은 후 다시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의 의미로서 죽으신 그리스도는 살아날 수 있으니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버지 친히 그를 살리시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역시, 아들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가 살리시는 경우는 없다. 왜냐면 엄정, 엄격한 법질서 차원에서 죽을 것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다면 그렇게 죽도록 되어 있는 법이 무너지는 것이요 무효화가 되는 순간이다. 고로 절대로 죽었는데도 살아나는 법은 없다 함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이시기 때문에 살리셨다는 의미이니 이것이 중요하다. 둘이 하나로 존재하면 항상 대소, 주종, 인과 관계다. 다시 말해 작은 자는 큰 자를 따르게 마련이다. 고로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는데 죽으신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사는 이치이지 죽음 그대로 남아 있을 수가 없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아들이시기 때문에 살리신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되심을 인하여 그 생명과 사랑의 법 또는 삼위일체의 원리를 따라 아들을 살리실 수 있기 때문에 살리셨던 것이다.

삶이 무엇이냐, 사람 사는 것이 무엇이냐. '사는 것'이 아니다. '망하는 것'이다. 산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고 그래 가지고는 아무 해결도 보지 못한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그 똑바른 가르치심이, 우리 인생이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망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눅 13:1-9].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것'이라고 바로 규정해 주시고 정의(定義)해 주신 것이다.

인생이 사는 것은 천국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자연계가 아닌 영계(靈界)에서야 사람으로서는 비로소 사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해서 지금 모든 인생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이 자연계는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서식처일 뿐이다. 영혼이 있어 지각이 뛰어나고 미래를 예상할 수 있고 비록 가보지는 못하나 이 광막한 우주의 끝 자락까지를 훑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 영혼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는 인간은 그 영혼에 걸맞게 영계 곧 신령한 영원한 세계에서의 신령한 몸이라야 비로소 그런 분위기와 환경으로서 또는 그 거처(居處)로서 안성맞춤인 것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그렇게 창조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요 6:45]. 이렇게 배우지 않고는 누구든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은 올 수 있다[마 18:3].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사랑이 확증된 것을 "보는"[요 6:40] 순간 그렇게 된다. 왜냐면 어린 아이가 사랑을 제일 잘 알고 가장 이상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연령이기 때문이다. 본성적으로 그 사랑을 엄마에게 배우고 있는 그 사랑의 풋내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이 사랑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난 다음의 사랑을 말한다. 왜냐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그 어는 인간도 사랑을 아는 바가 없다. 안다고 해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고 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사랑을 알고 나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 있는"[마 18:3] 사랑의 반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즉 '엄마'의 사랑에 대한 '아기'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랑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생명 자체를 모르고 살 줄을 모른다는 그 뜻이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어 자유 선택을 할 수 있으므로 사는 법을 따라 즉 올바르게 사는 방식을 따라 살도록 되어 있음이니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 테두리 내에서 그러한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아야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지 못해 첫 사의 범죄로 현재 모든 인생이 "죽은 자"[마 8:22]가 되어 "망하는"[눅 13:1-9] 길로 접어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죽은 자로서 망하는 자이니까 침울하고 우울하게 매일 지내야 옳은가. 우리 가운데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사 53:1-12] 죄를 지은 자의 당연한 응보를 받는 모습으로서 죽으려고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표 또는 본으로서 "나의 기쁨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 하셨다. 넘치도록 풍성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퍼 나를 정도이셨기 때문이다.

죽음과 망함의 실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워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와 죽은 자의 탈과 굴레를 벗어나 먼저 산 자부터 되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산 자로서 "죽은"[골 3:3] 자 모습을 띠고 이 세상에서 사람 살리는 일, "사람 건져내는 일"[막 1:17]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넘치는 기쁨과 평안은 산 자이셨기 때문에 산 자로서의 생명의 기쁨이요 평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외에는 세상에서 그 어떤 기쁨도 평안도 없으니 오직 망하는 자의 죽음의 뒤척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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