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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 법과 질서 - 5 등록일 2016.02.24 14:45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36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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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원칙의 하나님

이와 같이 하나님은 철두철미 원리원칙대로 하시지 이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시는 법이 없다. 그래야 우리 피조물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사랑할 수 있고 영원토록 안심할 수 있음이다. 어느 정도까지 이런 원리원칙에 충실하셨느냐 하는 그 증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당신께서 죽으시지 않고는 절대로 법(法)대로는 인생들을 구원하실 수가 없어 친히 죽으시기까지 하셨으니 영원토록 이 사실은 확고불변이다. 다시 말해 당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이 법질서를 확립하셨으니 그 나머지야 말하나 마나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조물주 하나님이라 하면 전지전능하시므로 또한 이런 우주를 그 아무리 방대하더라도 다 지으셨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시거나 차지 않으시거나 혹은 '기타 등등'의 이유로 얼마든지 현재의 이 피조물 세계를 없애 치우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음이다. 누가 그렇게 하시지 않으리라 장담하리요.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으실 것을 이와 같이 당신 자신을 이 법질서로 영원히 얽어 매심으로써 당신의 존재의 영원한 한 부분이 되시어 있음을 확증해 보이신 것이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영원히 사람되어 계심'이다.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지는 한이 나더라도 이 하나님의 모습만은 변하실 리 없다는 확신을 우리 모든 피조물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확신을 단번에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죽으셨으므로 살아나실 때에도 마지막 아담의 실체 그대로 살아나신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첫 사람 아담이 자기 죄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 그 모든 죄의 청산을 마쳤으니 죄 짓기 이전 상태로 복귀된 상태로 당연히 살아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가 그런 신령한 몸이었음을 확증하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죽었다 하지 않았는가.[롬 5:12].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담은 지금까지 살았을 것이요 따라서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니 영생이다. 자연법칙으로는 모든 육체가 죽게 되어 있으므로 이런 자연계에 있지도 않는다. 에덴낙원 곧 영계에 살아 있을 것이다.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어 자연계에 사는 것이 바로 아담으로서 죽음이요, 그래서 모든 인생들을 "죽은 자"[마 8:22/골 2:13]라 하신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으므로 그 스스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이요 우리 역시 동일한 의미가 됨은 당연하다. 우리 모두가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은 아담의 닮은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 전 상태에 우리가 놓이게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일단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모습임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변함이 없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만일 아담이 그렇게 살아났어도 또다시 이전처럼 범죄하면 다시 죽는 것이지 절대로 무사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처음 선례(先例)의 적용[범죄하였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을 받기 때문이다. 이는 누차 강조하는 대로 법질서[법 적용]의 일관성을 말함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믿는 자 즉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기로 작정하는 자 다시 말해 항구여일(恒久如一)하게 복종하겠다는 회개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자에게만 피 흘림이 적용되어 죄 용서가 됨이다[히 9:20/출 24:6,7]. 그래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5] 하신 것이다. 즉 쌍방간의 약속이니 우리는 복종하겠다는 약속, 하나님 쪽에서는 복종하는 경우에만 한해서 죄 용서하신다는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믿고 복종하기로 약속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해당되는 이유가 밝혀지는 것이며, 처음에는 믿고 잘 나가다가도 중도에 마음이 변하여 즉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 시험을 받을 때에는 배반하여 곧 넘어지는"[막 4:16,17/마 13:21/눅 8:13] 자 역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은 약속 불이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이다.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는 행위이므로 그와 대립되는 표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 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이제는 영원히 마지막 아담의 시대요 첫 사람 아담의 시대는 그의 범죄와 죽음으로 종료되었은즉 아담을 따라 우리가 더 다시는 적용되지 않고 오직 마지막 아담의 예를 따라 모든 사실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래서 위와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죽은 자로 있을 때를 기준한다면 죽었다가 스스로 살아나는 수도 없거니와 그런 법도 없다 함이니, 난데없이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하신 죽음"이라 하여 과거 자기 자신을 살던 대로의 삶으로는 절대로 다시 살아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성령]으로 난 것은 영으로서 하늘과 땅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도저히 같은 것일 수가 없다. 과거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지만 다시 출생한 지금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데도 그렇게 여전히 산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만 증명하는 것이니 성령으로 출생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이런 명확한 판단을 성경이 내리고 있으니 겸허하게 이를 수용할 일이다.

따라서 영생을 알기 쉽도록 '질'과 '양'으로 나누어 생각해본 것처럼 양의 면에서는 아직 우리가 실감하지 못하나 질의 측면에서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현재 내 스스로 얼마든지 그 실상을 알 수 있고,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내 스스로가 이를 좌지우지할 수 있어 바로 이것이 나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즉 내 스스로 자기 부인을 그대로 끝까지 지속시키면 영생의 '질'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요, 그렇지 않고 다시 이전처럼 자기 중심으로 살아 과거로 회귀(回歸)해 버리면 그 '질'은 내 스스로 판단해도 사라지고 없을 수밖에 없다. 본질적인 '질'이 사라져 버렸는데 '양'이 그대로 남아 있을 턱이 없다.

죄는 무릇 욕심에서 잉태된다[약 1:1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무슨 욕심이 있어 죄를 또 짓는다는 말인가. 내가 그리스도만을 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나만을 위하시는 본을 보여 주심에 근거함이다. 본이라는 말 뜻도 분명해야 한다. 단순히 본을 보여 주셨으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기보다, 실제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므로 내가 나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어서 나를 위하지 않는 까닭에 그래서 자기를 부인함이다. 그래서 현재 나는 이러한 사랑의 교류, 교제, 사귐 속에 들어가 그 아기자기한 맛을 즐기는 것이니 온갖 고난에서도 죽음에서도 이 사랑의 누림 곧 그 평안과 기쁨은 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에서 이러한 "삶의 향락"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믿을 때의 "회개"[행 2:38]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 됨을 다시 강조한다. 왜냐면 위와 같은 내용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 까닭이다. 믿지도 않는데 회개할 수 있는가. 그러한즉 믿어도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든가, 로마서 7장의 "육신" 체험이 믿은 후의 바울 자신의 내적 갈등이라든가 하는 헛된 소리는 더 다시 통할 수 없다. 그런 말을 하게 되면 그 스스로 믿음이 없음을 표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너무나 성경을 곡해해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데에 이런 모든 설명의 목적이 있다. 구원이 이미 이루어져 구원을 얻은 다음의 삶의 법칙,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생명의 원리를 지키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 자체라, 생활 원리라 하는 것이다. 종교와는 본질적으로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차원이 다르기로 표현하면 사람과 동물의 차이와 같고 생물체와 무생물이 다름과 같다. 죽은 자와 산 자와의 차이이다.

그러면 어떤 삶의 법칙을 제시하느냐 하면, 그 알기 쉬운 적절한 예로 이공과 '나'원균으로 나타난 대조적 삶의 유형으로 부각되어 있는 공동체 의식에 있음을 앞에서 역설한 바와 같다. 세상에서 널리 인식되어지고 있는 윤리 도덕율, 공동체 의식 등과 하나도 다름이 없기에 그런 알기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함이 합당한 것이다. 원래 그런 윤리 도덕이란 것이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를 생각하면서 그 '우리' 속의 '자신', 그 '우리'와 결부된 '나'를 생각하자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 ‘우리’를 전체 몸으로 여기고 자기와 이웃을 그 몸의 각 지체로 인식하여 상호간 대하자는 인간 삶의 영원한 지혜[하나님 정하신]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으니 혼자가 아닌 여럿이 마치 한 몸처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서로가 반드시 지키기로 되어 있는 공동 합의요 사회 계약이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그런 원류(原流)를 따르는 본류를 형성하고 있음이다. 이 세상 삶이나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이나 다 같이 하나님 지으신 생명체들이 여럿이 함께 사는 세상인 이상 그런 삶의 성격상 이런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죄는 이 약속을 파기함에서 빚어지는 비극적 결말이다. 따라서 이 생명의 법칙을 지키지 않고 공공의 약속을 어겨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불행을 자초한 것이라면 이제 다시 은혜를 입어 그 공동체로 받아들여진 것이 구원인데, 일단 그렇게 다시 확실히 받아들여진 이상 그 당사자는 역시 확실하게 옛날과 같은 어리석음[아담이 저질렀던]을 버리고 향후로는 철저하게 그 공공 복리를 위한 상호간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것은 당연하다.

다시금 재탕으로 그 약속을 전처럼 파기하면 하나 마나 있으나 마나 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이전처럼 공공(公共) 약속을 지키지 못할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구원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경우 구원은 무의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 구원을 스스로 이루지 못하게 된다[빌 2:12]. 죄를 짓는 것 다시 말해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고후 5:15]는 것은 구원을 이루고 있는 뼈대에서 그 한 쪽 면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기에,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나머지 면이 아무리 그냥 있어도 원래의 화폐 가치는 영영 사라지는 것처럼 구원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이 경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항을 지적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것을 단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로 표현한 것뿐이다. 왜냐면 우리가 비록 새 창조를 입어 산 자가 되어 있지만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어느 순간에든 아담처럼 또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죽음[이제는 멸망]에 해당되는 단초[실마리, 빌미]를 스스로 만들 수 있어 자멸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범죄하기 전에는 새로 창조된 우리와 같은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내 자신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원함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이것이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과 큰 근심이 되어 있음은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바"[롬 9:1,2,3]라 했던 바울인즉, 역시 같은 내용으로 기도한 모세의 심정과 같으니[출 32:32], 이런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으로서, 우리 각자가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고 "나 자신을 구원하는"[딤전 4:16] 지향점이 바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닮아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데에 있음이다.

따라서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든가 "네 자신을 구원하라"[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3/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고 경고한다고 내 구원이 목표인 줄 결코 착각하지 말 것은, 우리 구원이 다시는 아담이나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되지 않고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머리의 지시를 받아 복종하며 사는데 있으므로 복종 않으면 구원 자체가 무의미, 무효가 됨이다. 그런 복종이 결국 위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추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웃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는 것도 사양하지 않는 심정인데 무슨 자기 자신의 구원을 목적함이 있다는 말인가. 이상 설명과 같이 애초 구원하시지 아니함만 못한 결과를 낼 바에야 처음부터 구원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므로, 그와 같이 처음부터 구원하지 아니한 상태로 되돌려놓으시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의미가 되기 때문에 “두렵고 떨라”[빌 2:12]는 것이다. 그렇게 되돌려지는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가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은 그 아는 것이라곤 세상 종교밖에 없는 까닭에 그리고 이상 설명과 같은 거짓된 "기독교 교리"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로 착각하여(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또 그런 종교 형태로 모조품을 많이 만들어 두었으므로), 약한 인간이 자기보다 강한 초월 신 같은 것을 가상하여 만들어놓고 거기 의뢰하려는 의타성 또는 반(反) 자주성의 나약한 부류의 인간들에게만 해당되는 인생 삶의 장식품 정도로만 종교를 인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종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착각하는 것이다. 이른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착각에서 즉 세상 종교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식품으로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추장스러운 또는 한번 중독되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아편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 삶[행복한]의 필수불가결한 생명의 핵심적 철칙이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바로 알지 못함이다. 이 법칙을 벗어나면 인간은 더 다시 인간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므로 '생명' 그 자체이다.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의 존재를 지탱하는 밑바탕으로서의 헌법이 있는 것처럼 바로 그 "새 피조물"[고후 5:17], "새 사람"[골 3:10/엡 2:15/4:24]의 인간 헌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  자기중심 즉 매사 자기가 앞선다는 것은 로마서 7장에서도 보듯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는 것이 영생하기 위해서는 옳은 줄을 아는데 이 지식대로 실제 행동이 따라와 주지 않는 데에 인생 비극이 있었음을 묘사함이다. 한마디로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왜냐면 항상 자기라는 것이 앞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 받는 것이 두려워 영생하려고 시도하는 일체의 행위가 이런 자기중심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가 없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구원 받기 전에도 하나님이 사랑이신 줄은 알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언제나 앞서는 것이 자기 사랑이었다. 이런 것이 성경이 말하는 "육신"이다. 고로 육신으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성경은 경고한다[롬 8:13]. 자기중심은 언제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 벌려놓은 인간 살인[아담 부부를 꾀어 죽게 만듦으로써]과 같은 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그런 불상사밖에 나타내는 것이 없다.

즉 이공과 '나'원균의 경우로 말하면 '나'원균의 행동밖에 하는 것이 없어 전체도 죽이고 자신도 죽인다. '나'원균은 통제사라는 자리도 탐 나고 전공을 세워가는 이공을 시기하는 마음이 앞서서 이공이 없어지기만을 바라지 않았던가. 자기중심으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원균의 행각을 벌이는 것이기에 '나'원균으로 아예 우리 각자를 원균의 위치에 놓고 반성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균이 당시 그런 자리에 있었음으로써 우리에게 교훈이 되어 주었으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지 그를 만일 비방한다면 하늘 보고 침 뱉기다. 이공과 같은 강직한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생활 신념이 없는 한 자기중심 일색인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자기중심 아닌 자가 없고 보면[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한], 원균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니니, 우리 모든 사람 중 어느 누구든 당시 그 원균의 자리에다 대입시켜 놓으면 원균과 똑같은 일을 할 것이기에 그렇다. 이공과 같은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지 않는 한 다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서 원균이라 하지 않고 ‘나’원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니, 내가 바로 원균이라는 뜻이다. 원균이라는 한 인물을 지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심판대에 올려놓는 의미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 사람을 지으신 애초의 하나님 의도이신 것이다. 하나님 뜻이 모두 이 사랑의 원리 즉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나를 위하시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을 위하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각종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고로 새 창조로써 우리를 구원하심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그와 같이 죄 짓지 않고 즉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애초부터의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하나님[머리되시는] 중심으로 다시 말해 최대치의 행복을 살려내어 살도록 하심이 그 골자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 위해서는 즉 그와 같이 사랑으로 하나님 뜻을 행하게 하려면, 이미 한번 범죄 타락하여 죄 가운데 있었던(한 번도 범죄치 않고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는 거룩한 천사들과는 달리) 또는 그렇게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의 육체 곧 흙으로 돌아가는 몸으로 지금까지 살면서 지어온 '죄의 육신'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었던 인간인지라, 방법은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의 아들] 친히 인간과 하나 되시는 것[영혼과 육체의 불가분성으로], 그래서 각 자 안에 성령으로 오시어 영원히 함께 계시는 방법 즉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는 방법 외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고난 받으신 사실로 인해 친히 나와 하나 되셨고 그렇게 주님과 하나됨으로 인하여 이제 함께 살아나 있는 둘[나와 그리스도] 사이가 되어 진정 사랑으로 맺어지는 교제 속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하심이 우리 구원인 것이다. 그냥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심으로써만 되는 일은 아니니 성령으로 오시되 '사람'으로서 오셔야 하는 것이다.

그냥 사람으로 오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나와 함께 하나 되신 위치에서 내가 죽어야 하는 것 혹은 죽게 되어 있는 것 또는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을 나와 함께 죽으시는 의미로 그 친히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나를 위해 죽으심에만 목적이 있지 않고 죽으신 뒤 반드시 다시 살아나셔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된 이치를 따라 나 역시 다시 살아나고, 그래서 이제는 산 자로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어, 사랑과 생명의 법칙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사시고 존재하시는 그런 복된 영원한 관계를 이루어 있음이 우리 구원의 구조이다.

산 자로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지 죽은 자와 산 자가 또는 죽은 자끼리 하나가 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때문에 주님께서 비록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이, 나도 지금부터는 아무리 나를 위하지 않더라도(그래서 하나님만을 위해도) 즉 자기 부인을 해도, 나는 하나도 손해 볼 것이 없고 오히려 주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 되어 계시니 더 잘 되어 있고(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처럼 나도 주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으므로), 주님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장차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 나 역시 똑같이 주님처럼 되어 신령한 몸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바로 "새 사람"으로서의 새 피조물된 영광스러운 삶으로서의 당연 결과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꿈꿀 것도 없으니 원하고 바라고 꿈꾸는 것 이상으로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렇다. 그리고 나보다 월등하게 나으신 나의 짝[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시나 육체로 임하여 계심과 똑같으니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과 함께 영원히 짝을 이루어 사는 삶이니 이보다 더 복된 삶의 모습이 있으랴.

그래서 앞에서 설명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단지 영생 하나만을 욕심 내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본능 그대로 죽음을 무서워하는 나날이었기에 살고자 발버둥치고 몸부림을 했으나 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죽음의 죄 속에만 빠져드는 상황이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이와 같이 은혜로 구원을 받은 새 생명 속에서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복종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다.

그런데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당시 에덴낙원 때처럼 새로 창조되어 있는 자들을 아담을 시험하여 무너뜨린 것과 같이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고로, 이전의 아담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 변함없이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켜 보호해 주시는데 무슨 걱정이랴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는 것은 우리가 믿을 때 한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자동적으로 다 구원 얻게 하실 것이 아닌가. 믿는 자에게만 구원이 적용되고 이미 이루신 구원의 효용이 나타나는 것이니, 왜냐면 믿음에 이르는 회개는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회개는 복종하겠다는 약속이기에 그런 것이다. 아담이 죽은 자가 된 것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심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 함이다. 성경은 결코 모순되는 말을 하는 법이 없으니 왜냐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에는 모순이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하시는 능력은 우리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우리의 주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막아내고[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막아낼 수 있는 것] 의연히 설 때에 앞서의 설명처럼 동시성(同時性)으로 나타나는 것이다[그림 79]. 결코 하나님 일방적으로 나타나는 역사(役事)가 아니다. 우리의 대표로서의 그리스도 역시 시험당하실 즈음에는 천사들이 나타나지 않다가 시험을 마치시고 승리하시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물리치신 다음에야 천사들이 나아와 도운["수종 든"] 것이 이를 입증한다[막 1:13].

다시 말해서 우리 힘과 노력이나 애씀과 힘씀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고 보호하시는 은혜로 이루어지되 반드시 '동시성'에 의하여 나의 믿음으로 난 순종을 따라 '동시에' 함께 나타나지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래서 일면으로 보면 내 스스로 이룬 것과 같이 나타나 보이고 다른 일면으로 보면 하나님의 능력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처럼 나타나는 것이니,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삼위일체 원리에서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어 있을 때 갑으로 보면 을을 안은 모습이요 을로서 보면 을이 갑을 업은 모습으로 동시에 드러남이다[그림 29,30].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 것처럼, 단지 지금은 우리도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그 분의 뜻을 행하는 단계에 있는지라 그리스도께서 그런 순종 중에 "약한" 상태로 계셨던 것을 본받아 우리 역시 "약한" 상태에서 고난 중에서의 순종을 체험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나 아들과 하나로 계심을 인하여 아버지 친히 아들과 항상 함께 하시어 아들의 모든 고난에 동참하심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요 그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으로 되어 있음과 같이, 우리 역시 나 혼자 그리스도 위해 고난 받음이 아니요 그리스도 친히 나와 더불어 당하시는 모든 고난이요 고통이니 나를 '육체'로 삼아 그 '영혼'처럼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친히 나의 육체를 통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시고 계심이다. 이는 아름답기로 말하면 이 이상 아름다운 관계가 우주 천하에 없다.

이상이 성경적인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데 무엇 때문에 주님 외의 그 누구인들 내게 더 필요하겠는가. 마리아의 기구(祈求), 이른바 성인(聖人)들의 기구가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이상 설명과 같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선물로서 받아 모심이 성령의 세례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심이다. 물 속에 잠기는 것처럼 성령 안에 즉 하나님 안에 푹 잠김이다. 이는 엄마 품속에 파묻혀 있는 아기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오신다 함은 친히 내 안에 오시되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와 하나 되신 원래의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성령"이시라 하는 것뿐이다. 고로 나는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요이 1:9].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 말씀대로 항상 순종해 나가면 그것이 성령 충만이다. "내게 오는 자는 목마르지 않는다" 하신 대로 주님과 내가 이같이 언제나 변함없는 교제를 하는데 목마르고 허전하고 배고플 이유가 없다. 정 그래도 허전하다 하면 성경에 제시하신 모든 기준을 따라 스스로를 점검하고 시험하여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과연 계신지 여부를 살피면 된다(고후 13:5).

항상 문제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달받았느냐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느냐 여부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배운다고 하신 것이다[요 6:45]. 바르게 전달 받고 있는지의 여부가 미심쩍으면 성경이 있으니 성경을 읽으면 될 일이다. 두드리고 찾고 구해야지[눅 11:9,10]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는 문이 열려지지 않는다. 왜냐면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약속을 하셨다는 것은 그 약속대로 하지 않고는 절대로 문이 열려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래도 열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 아니면 영원한 형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줄 알면서 그 정도의 시간 내는 것도 아까워 기도하고 성경 읽을 여유가 없다고 한다면 그래서 두드리고 찾고 구함이 없다면 참으로 영생을 누릴 자격도 없다 할 것이다.

"은혜"니 "사랑"이니 "죄인만이 오라" 한다고 그리스도 복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이다. 속된 말로 공짜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사람되시어 친히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는 엄청난 대가가 치러진 다음의 구원이다. 사랑은 절대로 값싼 싸구려가 아니다. 고로 가볍게 여기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고 경고했다(히 2:3). 그렇게 가볍게 여긴 사람이 받는 응보를 주님께서는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난다"(마 22:13)는 말씀으로 미리부터 엄중히 경계해두셨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나와 합류하시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이니, 이렇게 죽어 있는 상태를 스스로 모르고 있는 사람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이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됨이다. 그의 죽으심으로써 내가 죽었다고 '합법적으로 용인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계시어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심으로써 '사실상' 그렇게 되어 있음이다.

뿐 아니라 그의 살아나심이 내가 또한 살아남이 되어 현재 이렇게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구원 받은 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비로소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간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었던 그 이후로 모두가 '죽은 자"[마 8:22]인 것이다. 이 자연계에 속한 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죽음이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의 인간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죽어 썩고 말 육체가 아니라, 영계에 속한 신령한 몸이었던[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일도 기약 못해 언제든 바로 이 시간 후로도 사고를 당해 죽을 수 있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으니 "죽은 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현재의 나는 어떤가. 여전히 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를 입고 있는데 그러면 죽은 자인가? 이미 설명한 대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시려고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사람이 되셨다고 "죽은 자"이셨던가? 아니다. 영원히 사시는 자로서 나 위해 죽은 자로서의 육체를 입으셨을 따름이니 '나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야 나와 하나가 되실 수 있음이다. 바로 그런 원리로 나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육체 가운데 아직 머물러 있음이다. 그래서 앞으로 얼마든지 구원 얻을 사람들을 구원해낼 밑바탕으로서 이런 육체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강조하는 말이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산 자로서 입는 이런 죽음의 육체'는 아무 소용에 닿는 데가 없고 오직 사람들 살리기 위한 고난 받음에나 소용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아무 미련없이 거룩하고 갸륵한 일을 위해 "살아 있는 제물"[롬 12:1]로 하나님께 드릴 일이다. 이것이 "합리적인 예배"[:1 ]라 성경은 밝히고 있다. 이런 구차하고 나약한 육체를 가지고, 아무 것도 몰라 방황하며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 채 그저 살려고만 하는 것처럼 삶의 낙을 누리려고 하는 것은, "미친 마음"[전 9:3]이라는 말보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결론밖에 없다. 말로는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실상이 그러함을 어찌하리요.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 되어 영원히 그와 더불어 하나 되어 살게 되어 비로소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답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인정하여 우리 모두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라는 희소식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 그리스도 복음[희소식]의 전파이다. 참답게, 사람답게 사는 방법, 그래서 올바르게 살아 자연스럽게 영원토록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지 단순히 영생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행 17:30]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하라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믿을 수 있는 은혜가 임하고 영생이 허락되는 것이다. 이 역시 약속이다. 왜냐면 중도에 마음을 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약속이지만 그러나 또한 영생은 현실이다. 아담이 장차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기는 했으나 창조될 때는 영생을 누리는 자로 창조된 것은 영물(靈物, 천사)들의 사정이나 마찬가지다.

아담이나 악령들이나 하나님 창조하신 창조의 의도대로 스스로 살지 않은 결과다.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지 못함 즉 자기중심으로 살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애초 창조의 의도를 벗어난 삶이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요 영락없는 멸망에의 지름길이다. 이 세상 지배자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넘어가 지금까지 그렇게 잘못 알고 속아 온 인생들이다. 이제는 더 이상 속지 말고 처음부터의 사람 사는 도리를 알아 선하게[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의롭게[나쁘지 않고 좋은 것을 따르니 이는 바로 올바른 것 즉 의(義)를 행함이다] 사는 길을 모든 인생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의 발이 실로 "아름답다" 한 그대로다[롬 10:15/사 52:7].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니 아름다운 사람이요 그런 소식을 전하려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니 그 발이 아름답다[사 52:7]. 무지막지한 세상이 천지를 분간할 줄 모르고 이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취급하여 학대하고 고통을 가하고 죽여도 [짐승을 죽여도 그렇게는 죽이지 않는 악독한 방법으로 처참하게 죽여도] 여전히 그런 사람들의 말과 발과 마음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장차 반드시 찬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별과 같이 비치리라고 성경은 확언하고 확약해 두고 있다. 육체는 풀과 같이 시들고 그 영광으로서의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확립되어 있을 것이라 하셨다[벧전 1:24,25/사 40:6,8]. 세상은 믿는 사람만을 그렇게 죽이는 것은 아니다. 이 인류 역사가 눈 뜨기 시작한 날부터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 왔다. 가인이 아벨을 그렇게 죽이던 날로부터 이 광경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이런 세상이니, 인간 구원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만 없다면 당연히 오래 전에 자취도 없이 하나님 면전에서 사라졌을 터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라지기는 시간 문제다. 오직 핵심이 되는 것은 단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자는 데에 있다[고전 9:22]. 여기서 바울 사도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한다"[:23]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각자 자기 혼자라도 구원만 받으면 된다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한 것이다.

반드시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함께 구원시켜 대동(帶同)해야 한다는 의미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성령 받음을 가리켜 "내가 세상에 너희를 보낸다"[요 20:21,22]고 하시지 않았던가. 또 성령 받아 모시는 의미를 가리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 1:8] 하신 것이다.

물론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는 회개한 후에 '전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짬도 없이 그 즉석에서 이 세상을 떴으나 천국에 들어갔다. 이것은 공명정대 공정공평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우리의 마땅히 할 본분은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하는 오직 그 분부를 충실히 받드는지' 여부다. 그 회개한 강도는 그런 분부를 받지 않았고 우리는 받고 있다는 그 차이다. 다시 말해 일하고 않고 하는 데에 차별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저울질됨이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단 한 시간도 안되는 분량의 일을 한 사람이나 주인이 주는 일당(日當)은 똑같다고 하셨다[마 20:1-15].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 상에서 회개한 강도는 겨우 "1시간만 일한" 일꾼에 해당된다는 뜻이다. 이 모두 하나님께서 미리 아심을 따라 미리 택하심과 같은 맥락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좋은 것]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바에 따라 진행되고 진척되는 것이니, 우리는 그러한 모든 하나님의 일을 헤아려보려는 호기심보다 당장 우리 발 앞에 떨어진 우리가 마땅히 할 사명부터 충실히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 상에서 말하자면 임종시에 회개한 강도도 바울처럼 반평생을 수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이라고 가정할 때, 또는 바울이 당시 아시아 쪽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려고 했으나 성령께서 이를 막으심으로 인해 결국 유럽 쪽으로 복음 전파의 방향이 주로 틀어져 나갔으므로 그런 경우 아시아에 있던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은 받을 믿음이 있었을지라도 바울처럼 일한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라고 할 때, 이는 형평상의 문제가 된다.

기회 균등이라는 말도 있듯이 만일 우리가 실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것과 그렇지 못함에 따라서, 각자가 받을 영광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이는 심각한 불평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평균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고후 8:14]. 물론 그리스도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부인하시지는 않았다[막 10:40].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크고 작음 여부로써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라 보면 틀림이 없고 이 사랑 여하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로서 이런 문제는 하나님께 완전 일임하는 것으로서 충분하다. 사람을 지으신 이께서 각 사람을 미리 아시고 그래서 미리 정하시는 분이신데 그 각자의 사랑 여하를 측량 못하시랴.

§  우리가 이공 순신과 '나'원균을 들어 말하는 것은, "이공과 같이 생활해야 나라 곧 국민 전체가 사는 길이다, '나'원균과 같이 살면 나라도 망하고 개인도 망한다. 그러므로 눈 앞의 이익만 위해 살지 말고 한 때 고난이 있고 장애가 있어도 그래서 죽는 한이 나더라도 이공과 같이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일관해서 나가고 절대로 '나'원균처럼 개인주의, 이기주의[자기 중심]로 나가지 않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임을 알림인 것이다.

방방곡곡 누비며 이러한 '이순신 정신'을 배우기를 선전함과 같으니, 사람 사는 법이 바로 이 한 몸 구조에서 각자 그 지체(肢體)로서의 본분을 다함에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바로 이러한 사람 사는 법을 따라 살도록 하심이다. 이공의 경우는 한 때 이 세상에서의 사람 사는 법대로 따름이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모든 세계 사람들이 영원히 함께 사는 이상향을 건설하는 방법을 선전함이다. 이 둘이 하나는 이 세상에 속한 일이요 다른 하나는 영생하는 것이지만 삶의 질과 내용은 차이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쉬운 예를 들어 영원히 사는 법을 가리킴에서 이공과 '나'원균의 대조된 삶을 소개하는 것처럼 적절한 사례는 없다. '나'원균은 처음부터 승산 없는 전쟁이라 판단하여 전투를 포기했다는 것이 그 주된 죄과다. 반면 이공은 명량해전에서 보듯이 한 공동체를 이룬 구성원 즉 한 몸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다한다는 일념으로 나간 것이 그 모든 행동의 근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원균은 한반도의 해군 주력부대로서 군사도 배도 최고로 많았지만 그 배들을 스스로 바다에 가라앉히고 군사들은 해산시키고 육지로 빠져나가기 위해[그것이 도망이든 아니면 육지에서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었든 간에] 자기와 직속 부하들만이 몸을 실을 수 있는 두 척의 배만 끌고 자기의 임무 지역을 방기하고 이탈한 것이니 참수형에 처해 마땅했다. 전쟁이 벌어진 상황에서 임무 이탈은 도주 행각인 것이다.

그럼에도 소위 말하는 "팔자에 타고 난 복"이 있어 죽음도 면하고 통제사 자리에도 앉고 죽어서는 감히 이순신, 권율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무일등공신"에까지 오른다. 벌써 참수를 당해 마땅하지만 "운수가 좋아" 그렇게 된 것이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하는 일들이 대개 이러함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는 좋은 예다. 이런 사주팔개자(四柱八個字) 즉 운수(運數)도 인간 생애를 주장하는 법칙에 속하는지는 모르나 그러나 이는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개연성이야 아무리 충분해도 그것이 증명되지 않으면 권위가 없다. 3운법칙은 그 자체 구성의 짜임새로 스스로가 그 진실성과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예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의 기록이라 하면 무조건 신성시하듯 권위를 두어 절대 진실인 양 받들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록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편견도 있고 잘못된 정보 수집도 있고 왜곡된 것 역시 없을 수 없다. 인간 냄새 나는 기록임에는 동일하나 오랜 세월을 견뎠다는 측면 하나로 무게를 두는데 참고(參考) 정도는 좋아도 비중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원균의 사례로 보아 재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육지로 오르려 할 즈음 '나'원균은 그의 행동에 못마땅해하는 부관들의 의견을 듣고 뱃길을 돌려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기는 하나 연전연승하는 전라좌우수영의 기세를 보니 자기의 이전 행동[수군 병력을 스스로 헤쳐 버린 일]이 후회막급이었다. 그래서 전투에는 관심이 없고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적병들의 머리 베기에만 급급해서 마치 자기가 싸워 거둔 전과처럼 작성해서 조정을 속였다. 한편으로는 자기

부대에 할당된 양곡으로 자기 부하들의 생명 줄인 군량미까지 긁어내어 부지런히 중앙에다 뇌물로 보내어 자신의 출세영달에만 바빴다. 임금과 사돈 관계인 중앙 실력자와 인척 관계에 있음을 최대한 활용하려 한 것이다. 참수(斬首)를 면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결과 뇌물이 횡행하던 당시의 사회 풍조를 따라 고관들을 매수하는 데에 성공하여 이공과 서로 전공을 다투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었고, 나중에는 조정으로 하여금 통제사 자리를 바꾸어도 무방하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고, '나'원균도 이공을 시기하여 자기가 그 자리에 대신 앉겠다는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욕심으로 차지한 자리이니 전의(戰意)가 있을 수 없어 전라 우수사는 이런 거동을 보고 "우리 수군(水軍)이 망하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예단(豫斷)하여 탄식할 정도였다. 과연 칠천량 해전[해전이라 할 것도 없고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이름이다]에서 당시 왜군의 보고대로, "그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자패(自敗)했다". 군인은 싸워 승리하는 것이 그들의 명예인데, 싸우지도 않고 거저 얻은 결과라면 공이 될 수 없어 자랑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자기 입으로 말할 정도이니 당시 사태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다시 이공이 개입하여 나라는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졌지만 그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 수군이 전멸할 때 거북선도 함께 사라졌다. 일개인의 자기 중심이 그렇고, 일개인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이 그러했다. 후자의 경우, 한 나라는 물론 그 이웃 나라의 거대한 인구까지 전쟁 참화의 도가니로부터 지켜 준 것이다. 그래서 자기 중심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과, 한 몸 의식으로 한 지체로서의 자주 독립성으로 매사 임하는 것과의 차이를 우리는 이런 사례로써 충분히 입증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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