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운법칙

  • 3운법칙 계시판

Home > 3운법칙 > 3운법칙 게시판

제목 생명체는 형태에 구애되지 않는다ㅡ교회는 생명체다 등록일 2016.02.24 12:37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65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중세 시대의 보헤미아 교회-윌리엄 틴들-죠지 뮬러
--------------------------------------------------------------------------------------------------------------------------

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


 一名 “집 교회” 운동


명칭에 구애될 것은 없다. 또는 특정 단체의 기치 아래 모이라는 취지도 아니다.  윤곽은 그려졌으니 구체적인 설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독자들께서 하실 일이다. 여기서는 단지 그 본보기, 예시일 따름이다. 핍박 속에서 태동한 초대 교회 그리고 극심한 탄압 속에서 성장을 유지하고 있는 북한 교회가 장차 적 그리스도의 유례 없는 탄압에 맞서는 우리 교회의 유일한 대비책이기에 미리부터 그 예행 연습을 겸해서 능동적인 교회 활동을 할 절실한 필요성에서 제기하는 제언이다. 형태 체제 등을 변경하는 것과 생명 운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우리는 수 세기에 걸친 교회사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현 교회 체제일지라도 생명 운동으로 전환시킬 수 있으면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니 이것만이 유일한 핵심 과제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가장 혹독한 핍박을 받는 북한 교회가 있기 때문에 3운법칙, 3위1체 원리가 한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매일 모여 합심 기도하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이 세상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위함이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내가 살기 위함이 아닌데 합심기도가 모이는 주된 이유일진대 매일 모여 합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성경적이니 초대교회에서 그런 본을 보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라고 해서 원시 교회 덜 깨인 교회 걸음마 교회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초대교회가 생명이라면 오늘날 교회는 죽은 것이다. 초대교회가 모범교회이다. 초대교회가 하던 대로 그 본을 따르면 그 교회가 온전한 것이다.


사람들을 일껏 전도해내어서는 "교회"라고 해서 사이비 종교집단에다 보내는 결과게 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찰즈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를 가리켜 카나다의 '피플즈' 교회의 오즈왈드 스미스 목사가 "바울 사도 이후 최대의 복음 전도자"라고 평했지만 이 피니의 부흥(復興, revival, 영적 각성) 전도 집회 당시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회개를 촉구하는 피니가 교회 강단에서 외치는 것을 당시 교역자들은 누구도 원치 않았다. 그러면 당시 교회 구성원들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 모든 경고에 일치하게 다 거룩한 신앙생활을 행했느냐 하면 물론 아니다.


회개를 원치 않는 육신의 아집 그대로, 성령의 역사에 순응하기를 원치 않았기에 피니가 교회에 들어와 회개를 강조하는 말씀 전파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는 비참했다. 피니 자신도 놀라고 당황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피니 집회에서 회개한 초신자들 중 많은 숫자가 그런 교회들에 영입된 후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중도 탈락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워낙 피니가 강력하게 회개를 강조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흥 전도자들에 비하면 상당히 건실한 결실을 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80% 정도가 끝까지 믿음을 견지했던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람 생활에서 환경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런 주변 상황에서 애초의 믿음을 지키는 것보다 거기 동화해 버리는 것이 더 쉬운 것은 뻔하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먹이라["Feed my lambs, sheep."]"고 세 번이나 연거푸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처럼 전도하여 하나님의 양들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을 먹이는["to feed"] 일이다. 출생하기는 했어도 그 후 성장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칭하는 일부 개신교 집단의 형편이 그러하니, 항상 성경을 읽도록 독려하는 일에 일반적으로 등한히 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성경을 아무리 자주 읽어도 그 뜻을 왜곡되게 읽으면 소용이 없는데 숫제 성경을 읽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니 말해 무엇하랴. 새 생명이 시작하면 그 성장을 촉진하는 순(順)작용과 더불어 그 파멸을 도모하는 역(逆)작용이 동시에 활동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즉각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악랄한 공격 대상이 된다는 그 뜻이다.


세상사를 보아도 애초의 기본 이념과 이상에 충실하게 지속되는 예는 드물다. 중도에 부패하고 그 설립 취지와 이념이 퇴색되게 마련이다. 하물며 그와 같이 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즉각적인 공격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일진대 말할 필요도 없다. 때문에 항상 새로 시작하듯이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은 자극과 결의가 요구되니 이는 그 집단의 쇠퇴를 막는데 필수적이 된다.


무엇이든 덩치가 커지면 병들게 마련이다.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이고 어떤 조직체도 예외가 아니다. 실질 대신 형식주의, 무감각, 마비 상태가 서서히 전체를 잠식하여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도 교회 활동의 세포 분열 식 확장[전도]은 아주 권장할 만하다. 교회 구성원 숫자만 자꾸 커가는 대로 그냥 이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무슨 교세(敎勢) 과시나 되는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일정 한도에 달하면 곧장 ‘분가(分家)시켜’ 세포 분열식으로 확장해가는 것이 옳다.


12 사도처럼 12,3 명 정도를 상한선으로 하고 그 숫자가 넘으면 둘로 쪼개어 각각 6, 7명 그룹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자극을 받아 결의에 차 있기 때문에, 물이 고이기만 하여 썩어질 염려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이것이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의 취지요 장점이다. 그러므로 전도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전도 받은 사람을 주님 안에서 양육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므로 교회를 잘 선택하도록 인도해야 하는데, 그런 이상적이고도 성경적인 방법으로서 우리는 '집 교회 운동'을 적극 권장하는 것이다.


"바영사회" 운동을 '교회' 설립 측면에서 알기 쉽게 이름을 바꾼 것뿐이다. 처음부터 지적해 둘 것은, 이런 명칭[CITHM]이 아니더라도 자기 취향에 맞는 무슨 이름으로든 시작해도 좋다. 우리는 우리만의 조직체을 만들거나 어떤 종류든 우리만의 세력화를 일절 꾀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대로의 그리스도를 지도자 곧 머리로서 받들어 그 몸의 지체 역할을 하기로 하는 이들은 한 공동체로서 우리는 그들을 100% 환영한다.


현역 교역자로서 이 일에 찬동한다면 소속된 교단의 간판을 그대로 내거는 것도 무방하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일에는 그런 외형적인 것에 구애될 이유가 없다. 사찰의 주지(住持)라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다. 단 이 경우, "부처"라는 이름의 우상은 치워 버릴 일이다. 천주교 성당의 신부라도 얼마든지 이 운동에 독창적으로 참예할 수 있다. 단 그 때는 "마리아"를 상기시키는 그 어떤 것도 제거할 일이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물론 특별히 사도 바울로 말하면 그 과거 경력에 비할 때 남다른 열심으로 주님의 일에 임했던 만큼 힘써 성령의 인도를 받아 모든 일을 행하려 했으며 또한 그런 편지 글[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도 남긴 것을 아는 까닭에, 그가 말한 내용은 가끔 예언의 색채가 깃들여 있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딤전 4:1]. 더구나 그의 편지들이 신약성경을 구성하는 중요 부분으로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 갈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을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마지막 때까지 남아 각 시대의 각 교회에 교훈이 될 것이겠으므로 더욱 그런 성격을 지닌다고 단정하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26]고 한 사연 역시 그러하다. 즉 임박한 환난을 대비한다는 점에서,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경고라고 여겨 의심치 않는 것이다.


"때가 단축해진"[:29] 것을 말함이니, 이런 상황을 놓고 볼 때 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때와도 다른 절박한 시대적 여건 속에 처해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니엘의 예언 성취라든가[단 12:4], 또는 유달리 이 시대에 빈번히 일어나며 동시에 순식간에 널리 확산되는[신속한 보도 수단의 발달로] 각종 초자연적인 현상들[소위 'ufo 현상'을 포함]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이 시대에 맞는 개혁 방안의 실천이 요구되는 때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그 전통이 성경적으로서 모든 면에 유익할 때는 마땅히 사수할 일이나 그렇지 않을 때는 거기에 미련을 두어 주저하거나 미룰 때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성경에, “그의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that is in their house"](롬 16:5)라 했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that is in their house"](고전 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the church which is in his house"](골 4:15)라 했으니, 우리는 이 시대를 당하여 이 '집 교회 운동'이 시의적절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메시아 교회


지금은 거의 영어가 세계어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그리스어가 그랬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데, 이 전통을 살려 "그리스도"라 하는 데에는 아무 하자가 없다. 그러나 "메시아 예수"라 한다 해서 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대인의 용어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를 당시 그리스 말로 "그리스도"라 했던 것이다. 앞으로 적(敵) 그리스도가 나타나 구약 성경에 예언된 그 그리스도가 자신이라고 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라 할 것인즉, 그런 의미에서 즉 메시아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뜻으로 ‘메시아 예수’로 새삼스럽게 부른다 해서 흠될 것은 없다.


따라서 교회 이름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던 것을 ‘메시아 교회’라 함이 적당하리라는 견해다. 왜냐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이 너무나 속화한 이름이 되어버려 거의 모든 이단들이 이 이름으로 세상에 통해지고 있기에 차별화를 시도하는 뜻에서다. 메시아로 자칭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초대 교회 당시 믿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 예수’로 불렀던 그대로 우리도 부를 수 있다는 순리를 따름이다.


교회 이름만 그렇게 하자는 것이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다시는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명칭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니 명칭을 바꾸든 않든 간에 영원히 변함 없으신 그리스도시다. 사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 가장 사랑스러우시고 아름다우시고 그리고 가장 막강하신 천하무적의, 우리 각자 그리고 교회의 영원하신 반려자[伴侶者]시다.


교회 명칭으로서는 "그리스도"보다 "메시아"라는 칭호로서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차별화시키는 것이 적절하다 함은, "메시아"를 고대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그럴 바에야 최초의 말 히브리어 그대로 "메시아"가 더 합당하지 않으냐 하는 그런 뜻이다. "그리스도"라는 명칭 못지 않게 일반인에게도 "메시아"는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니, 예컨대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헨델의 "메시아"를 모르는 이가 없다는 사실로도 그렇다.


또 세계 각국에 산재해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되심을 홍보하는 효과도 될 수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보다 "메시아 예수"라고 함이 그들에게는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다 친근감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바람직하겠다. 신약성경이 씌어진 그리스어가 당시의 그리스어이지 현대 그리스어는 아니나, '메시아'라는 말은 오늘날도 유대인 사이에서는 가장 친숙한 단어가 아닌가.


그러므로 'cithm'["Church in the House" Movement]에 동조하여 세워지는 교회는 일괄적으로 "메시아 교회"라 부름이 좋을 것같다. 간판을 그렇게 바꾸어 달라는 의미는 아니다. 장,감,성,침 어느 교파 이름을 달아도 좋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다.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불렀는데 오늘날은 "로마 카톨릭"은 물론 "희랍 정교", "개신교" 그 외 각종 사이비 모두가 하나처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으니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메시아인 [Messia(h)n]” 또는 "메시아 사람"이란 명칭으로 통해진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메시아 교도"라고 세상이 빈정거려도 감내할 만하지 않을까.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날을 바라보며 그들이 진정으로 감격어린 눈물로 "메시아 예수"를 연호[連呼]하기를 바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들이 믿음에 들어오면 그리스도 예수 또는 예수 그리스도라 할 리가 없다. “메시아 예수”라 할 것이기에 그렇다. 그토록 대망하던 그 '메시아'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두고 왜 생소하게 '그리스도'라 하겠는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를 모두 메시야(아)로 대체하자는 것은 아니다. 필요 없는 일을 할 이유는 없다.


'신학교'는 성경, '신학교수'는 성령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에베소를 떠날 때 교회 장로들을 불러 모아 놓고,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행 20:20]고 했다. 여기서 "교회(당)에서 가르쳤다"는 말은 없다. 이는 오늘날처럼 교회당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교회당이라는 것 자체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명백하지 않다. 바울의 말투로 보건대 그런 것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단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했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라 해야 기껏 가정 집임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집집이 돌아가면서 모인 것이 확실하다. 공중 앞이라 한 것은 불신자나 형제들 할 것 없이 여러 사람 앞에서 즉 대중 앞에서[즉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말했다는 것이지 그것이 특별한 장소를 가리킴이라는 암시는 없다. 야고보는 "너희 회당에"[약 2:2] 했을 때의 "회당"은 우리말 번역과는 달리 영역으로는 "your assembly", "your meeting" 정도로 되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너희가 모였을 때에"라는 의미다.


초대교회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모진 핍박 중에서도 줄기찬 명맥을 유지해오던 중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공인되면서 세상 종교로 변질되기 시작, 거대한 집단이 새로 형성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 이전 국가권력이 교회를 탄압하던 일을 대신 맡아 세상 집권자들을 배경으로 하여 이 거대한 종교 집단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게 되었다. 이 세상이 처음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권에 있기 때문이니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이런 세상의 탄압은 변할 리가 없다.


당시 그런 핍박의 표적이 되어 있던 것 구성체 중의 하나가 이른바 '발도[또는 '왈도']파[派]였다. 당시 대표적으로 알려졌기에 그 이름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고 그 외의 이름으로 혹은 이름도 없이[그들 스스로 자기네를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 곳곳에 "적은 무리[little flock]"[눅 12:32]를 이루어 활동했으니, 즉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지속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기본되는 가르침을 숙지하지 못한 탓으로 박해가 극심해지자 무력으로 자기 방어를 하게 되는 등 오류를 빚기도 했다. 하나님의 뜻에서 명백히 벗어난 일을 자행한 것이다. 교회가 무력으로 자기 방어를 할 양이라면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세상 종교처럼 세상 권력을 등에 업었더라면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라는 말씀으로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그렇게 무저항주의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고난도 불가능했을 것이요[요 18:36] 그러면 우리의 구원도 없는 것이다. 이 명백한 뜻에 어긋나는 대표적인 것이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은 그런 거대한 종교 집단이니 곧 세상 권력을 등에 입어 그리 된 것이다. 핍박이 나면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본을 보인 것과 같이, 무력을 동원하는 육신의 생각을 하거나 겁을 집어먹고 믿음 이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그 기본 틀을 적시해 주는 대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면 되는 것이다.


핍박을 면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것을 전도의 호기로 삼는 지혜이니 주님 친히 그렇게 지시하신 것이다[마 10:23]. 핍박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명백하지만 그들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목숨이 아까워 그렇게 피해 다닌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대로 복음을 전달함이 일차 의무요, 시종일관하는 그리스도 교회의 이 세상 존립의 유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각지로 다니다가 복음을 받지 않거든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라 하셨다.


핍박 받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하여 같은 자리에 죽치고 앉아 순절(殉節)하기만 기다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든 고장과 산천을 떠나기 싫어할 까닭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의 삶 즉 생명을 누리는 것 자체를 백안시(白眼視)하므로 가족 단위, 혹은 적당히 무리를 이루어 타고장 또는 타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한다는 일념으로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하고 모든 것 버리는 자세로 한결같이 줄곧 임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은 자기 부정으로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이며 생명을 한껏 누리라고 창조하셨는데 누가 감히 "금욕(禁慾) 운운" 하리요. 자기 부인은 그러므로 최고도의 삶을 누리고 향유하는 방법이요 지혜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몸 체제에서의 몸과 머리 관계를 말하는 것이니 곧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이다. 상대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또는 이 세상이 죄와 죽음 가운데 있어서 자기중심 일변도이므로 그 대칭 의미로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심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심이 그 때문이다. 왜냐면 친히 머리가 되시므로 한 몸의 생명 구조에 들어올 수가 없음이다. 우리 구원이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이룩된 머리와 몸 관계의 형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서 인정하지 않고 자기중심인데 구원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은 이 한 몸의 원리에서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영관을 받는 원칙을 따라 사람 살리는 일이 시급하므로 그리고 이 사람 살리는 일은 죄인으로서의 죽음 가운데 처해 있는 이들을 살리는 일이기에 그와 함께 하나가 되는 의미에서 그 죄의 고통을 나누어 짐, 다시 말해 그가 받을 형벌을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 몸된 지체로서 나누어 짐으로서의 의미가 필수이기에 이 자기 부인이 이 세상에서는 고난으로 일시적이나마 변환되어 있을 따름이다. 고난이나 생명을 탄생시키는 의미이므로 이 세상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의 또 다른 형태인 것이다. 그 의미와 가치로 따지면 영원 세월 속의 생명이 환락과 맞먹고도 남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대로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요 20:21] 절대로 구원과 결부시키지 말 것이다. 즉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 이렇게 한다거나 이렇게 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은 아주 금물이다. 당연히 영생하고 있는 현재이고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산 자 즉 구원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는 "무익한 종"[눅 17:10]일 뿐이다. 그리스도 친히 "아들이시라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 함과 같다[히 5:8].


이렇게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셨던 것이다. 처음부터 산 자이시고 죽으신 일이 없으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에는 죽은 자였고 이제 구원 받아 산 자가 되었기에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니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의 구원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차이뿐이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산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니하였기에 죽은 자가 되고 또는 영원 멸망에 처해진 운명이 되어 있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이 우리에게 본이 된다. 아담이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범죄한 본보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지 않은 본보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더 이상 시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 즉 우리의 대표로서의 마지막 아담으로서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심으로써 온전하게 되시는 과정이 필수요 필연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서는 영원히 그런 시험의 대상이실 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다.


우리의 새 창조의 일환으로서 당신 자신을 사람으로 "만드신" 격이다. 아버지께서는 또한 이를 통해서 아들을 사람으로 "만드신" 셈이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육체'와 '영혼' 관계로서[요 20:21-"성령을 받으라" 하실 때 아담의 영혼을 지으실 때 "숨을 내쉬신" 것(생기-the breath of life-를 불어넣으심)과 같은 동작을 취하신 것] '어버이'와 '자식' 관계로서[요일 3:1]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고전 6:13]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사랑하는 상대의 삶을 사는 행위일 뿐이다.


즉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하고, 영혼은 육체를 육체는 영혼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의 생명의 영원한 체제요 구조다. 생명이 이렇게 둘이 하나된 위치에서 서로 상대를 위함에 있는 것이니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심[창조하심]으로 확정된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인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기를 위함으로써 자기중심이 되는 자는 이 생명의 구조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킴이니 그가 선택한 대로 자연히 되어질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그러했고 아담이 그러했다. 반면에 거룩한 천사들은 그렇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현장이요 삶[영원한]의 모습이지 세상 종교와 같은 식의 구원 받기 위한 것 즉 최종 목적이 구원이 아닌 것이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말해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2/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격이니 왜냐면 산 자로서의 특징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자의 특징일 수밖에 없고 그 중간은 없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생명 아니면 오직 죽음이다.


아담이 산 자[영생하는 자]로서 창조되었지만 자기 스스로 결과론적으로 자신을 죽은 자로 만들었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 역시 거룩한 천사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자유 의지를 따른 선택을 함으로써 결과론적으로 멸망하는 자가 된 것과 같은 이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결코 죽은 자로 만드시지 않았고 악령들을 멸망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으신 것이나 모두 그 스스로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결과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살아 있고 영생하는 것이나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영생하는 수는 없으므로 그가 신령한 몸으로 영생하는 자였음을 성경은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롬 5:12]. 범죄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명시한 까닭이다[:12].


따라서 에덴낙원 역시 영계였다고 성경은 이 대목을 통해서도 이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을 두고도 여태껏 에덴 낙원을 자연계로만 인식하고 있었으니 성경적 사실이 제대로 밝혀질 리 만무하다. 초대교회 당시는 이 사실을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누구나 알고 있었으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 착실히 타락의 길로 접어들어 "기독교"로 표방하는 강력한 세상 종교가 대두면서 이 사실 역시 빛을 잃은 것이다. 유대인들이야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의 가르치심[복음]을 외면하고 있는 까닭에 이런 지식이 통할 리 없다.


거의 이천 년에 가까운 소위 "신학(神學)"의 총결산이다. 하나님의 3위1체성(性)도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그 사이 많은 신학자가 배출되고 많은 신학교가 세워지고 신학생들이 해변의 모래알 같이 쏟아져 나왔지만 성령의 계시로 성경을 접하지 않고 인위적인 학문 취급을 해왔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그리스도 복음은 '사람 삶'이다. '종교'가 아니다. 여러 세상 종교가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라면 종교라 불러도 좋으나 종교라는 것이 여럿이 있는 이상 그런 것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이 점은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의 종교적 틀에서 과감히 탈피하는 집 교회 운동 또는 '바영사회'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바르게 살아야 영원히 산다,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범죄하여 죽음이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우리를 다시 산 자가 되게 하심은 올바르게 즉 의롭게 선하게 살도록 하심이다. '의(義)'와 '선(善)'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니까 올바른 것이고 좋고 올바른 것에서 벗어나니까 악이고 불의다. 의와 선이 생명의 법질서이니까, 이 질서에서 벗어난 문란 행위가 죄요 불법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 생명의 구원의 이치는 간략하고 단순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것뿐이다. 사랑은 반드시 순종으로 표현되게 마련이므로 고난을 통한 순종을 배우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도 온전하게 되셨다 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히 5:9]. 이유는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와 머리와 몸의 관계를 형성함이니 머리의 지시를 완벽하게 철저히 따르지 않는 지체라면 그것은 우리 신체의 암과 같은 존재다. 자기 혼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온통 감염시켜 몸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는 한 당연히 제거되어야 하므로 그 결과 죽음이요 멸망일 수밖에 없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몸 혹은 몸의 지체가 없듯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심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한 몸 체제에서 머리와 몸의 구조로써 충분히 해결되고도 남을 일이다. 불교의 교리처럼 멀쩡히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없다, 그 실체가 없다 하고 무리하게 끙끙 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멀쩡한 자기를 없다고 자기 세뇌를 시키려니까 그것처럼 고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석가가 타계한 후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수도하기 위해 각자는 산속 같은 외진 곳을 찾아 정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정진한다고 이 한 몸의 생명의 체제 외에는 영생하는 방법이 없고 삶의 도리가 도저히 존재할 수 없기에 결국 바람 잡는 것밖에 없으니 진실로 헛되다.


고로 이 세상은 전적으로 죽음과 고난[고난은 죽음의 영역]이 관장하는 곳이므로 핍박의 소용돌이로 직면해 들어가는 것도 죽음이요 세상에서 재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쾌락을 찾지 않으며 세상 일에 신경 쓰지 않음[근심하지 않음]도 죽은 자로서의 특색이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가 아니라[과거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갈 5:24/6:14/롬 6:6]. 같은 "죽은 자"[①골 3:3, ②마 8:22]라도 차원이 다르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 세상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고난 받는 상황일 것을 알므로 성경은 "혼자 지내는 것이 더 복이 있다" 하는 것이다[고전 7:1-40]. 그러다가 주님의 뜻이면 언제 어디서든 달게 죽음을 맞으면 되는 것이다. 당시 그와 같이 핍박 받던 '발도'파 사람들이 그 박해지를 떠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세계 각지로 뿔뿔이 흩어졌다면 아마 세계 선교는 좀 더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물론 주님의 다시 오심을 비롯해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한 치 어김없이 시계 바늘 돌아가듯 빈 틈이 없다는 것이야 알지만 최소한 우리의 임무는 다해야 한다.


이에 관해 바울은 그 서신에서 분명 성령의 지혜로 말한 바 있으니 즉 "혼자 지내는 것이 임박한 환난을 인해 좋다"[:26]는 충고였음을 방금도 지적했다. 이에 유의했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 딸려 있으면 아무래도 주님의 일을 하는데 지장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육체에 고난이 있다" 했고, "교회를 아끼는" 충정에서 하는 권유라고도 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경고요 권유임은 "나도 성령을 받은 줄 안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분명히 밝혔다.


오늘날은 더더욱 이 권고가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역시 성령을 따라 말하면서 "받은바 은혜가 다르다"고 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고로 절대로 이런 일 가지고 누구는 믿음이 있다 없다, 열심이 덜하다 더하다, 낫다 못하다 식으로 악하게 편가르기 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을 금했다. <누구든 반드시> 따라야 하는 표준은 아니니, 그래서 "주님의 명령은 아니라"고 밝힌 것이다. 임의 사항으로 자기 사정과 형편에 가장 합당한 쪽을 기도 중에 택하는 것이므로 참고(參考) 정도로 이해하되, 매사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만은 철칙이다.


이런 사정은 그 개인과 더불어 주님께서 가장 잘 아시는 터이다. 판단은 주님께 있다. 이 글에서도 당시 '발도'파 형제들을 판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세상 무력을 사용하는 잘못을 택했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에서 벗어난 일임을 밝히는 차원에서 하는 말일 뿐이다. 성령의 인도를 갈망하는 자세로는, 항상 무슨 일에 임해서든 진정으로 주님 앞에 "주님께서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든지 제가 따르겠습니다" 하며 기도하는 습관을 가질 것이며, 100% 그 인도를 따르리라는 결심으로 임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든 자신의 호불호를 생각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니[롬 15:1-3]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교회 구성원들이 모두가 그러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 일부임이 드러난다. 아래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주님의 인도를 훌륭히 따른 교회도 건재(健在)했다. 다음의 영문 자료는 초대교회의 순수성 그대로를 간직해오면서 믿음을 지킨 것으로 보이는 '소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서다.


그들이 '발도'파인지 혹은 다른 집단인지는 모르나 당시 로마 카톨릭과 관련된 모든 종교 행위를 일절 배척했음은 분명하다. 12세기 경 프랑스로부터 믿음의 자유를 위해 탈출해온 사람들로 시작되었는데 그 후로도 200년, 150년, 120년 간격을 두고 보헤미아 지방으로 내려 와 정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모인 수가 3, 4만명에 이르렀던 모양이다. 이 보헤미아[현재의 첵코 일대] 지방에서 배출된 믿음의 사람 중에 존 허쓰[John Huss, 1369-1415]도 있다. 그리고 ‘종교 개혁’ 이후의 혼란 와중에서 각처로부터 몰려든 사람들로 말미암아 인근 모라비아 지방에서 일어난 진젠돌프 백작 주도(主導)의 모라비아 선교 부흥운동 역시 교회 사상에 그 족적을 뚜렷이 남기고 있다.


이상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당시 로마 카톨릭과 같은 사제직(司祭職)도 두지 않고 그냥 서로가 서로를 가르쳤고(골 3:16), 사유 재산이 없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고, 무저항주의로 나갔고[핍박에 대하여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기는 삶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오직 세례식과 성찬식만 거행했다. 진리의 근본이 있으면 어느 정도 형식이 있게 마련이므로 최소한의 형식으로서 이 세례와 성찬 예식은 필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의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믿음을 지켜 나가면 되는 간단 명료한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이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 세상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고 오직 부지런히 일하여 그 소득으로 조촐하게 생활해 나갔다. 물론 그렇게 해서 평화롭게 지낸 것은 아니고 화형에 처해지는 등 박해에 시달리기도 했다. 천주교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그들은 배격했기 때문이다.


Authentic records in France assure us, that a people of a certain description were driven from thence in the twelfth century. Bohemian records of equal authenticity inform us, that some of the same description arrived in Bohemia at the same time and settled near a hundred miles from Prague, at Saltz and Laun, on the river Eger, just on the borders of the kingdom. Almost two hundred years after, another undoubted record of the same country mentions a people of the same description, some as burnt at Prague, and others as inhabiting the borders of the kingdom; and a hundred and fifty years after that, we find a people of the same description settled by connivance in the metropolis, and in several other parts of the kingdom. About one hundred and twenty years lower, we find a people in the same country living under the protection of law on the estate of Prince Lichetenstein exactly like all the former, and about thirty or forty thousand in number. The religious character of this people is so very different from that of all others, that the likeness is not easily mistaken. They had no priests, but taught one another. They had no private property, for they held all things jointly. They executed no offices, and neither exacted nor took oaths. They bore no arms, and rather chose to suffer than resist wrong, They held every thing called religion in the church of Rome in abhorrence, and worshipped God only by adoring his perfections, and endeavoring to imitate his goodness. They thought Christianity wanted no comment; and they professed the belief of that by being baptized, and their love to Christ and one another by receiving the Lord’s supper. They aspired at neither wealth nor power, and their plan was industry. We are shown how highly probable it is that Bohemia afforded them work, wages, and a secure asylum, which were all they wanted. If these be facts, they are facts that do honor to human nature; they exhibit in the great picture of the world a few small figures in a background, unstained with the blood, and unruffled with the disputes of their fellow creatures." [Robinson, in his Ecclesiastical Researches, p. 527.]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 받은 이러한 형태의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아 성경을 쉽게 입수할 수 없던 시대라 성경 내용을 이미 알고 있는 몇 형제들의 도움으로 성경을 통째로 암기하고 있었다. 가령 욥기 같은 것도 거침없이 줄줄 꿰고 있었다고 그들을 핍박한 로마 카톨릭 관계자들이 증언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에 친근해 있어 그들의 믿음은 말씀 중심이어서 빗나갈 염려가 없었다.


존 위클리프(1320-84)가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백여 년 뒤 윌리엄 틴들(1492?-1536)이 주위의 도움을 입어 자기가 번역 완성시킨 영어 성경을 간행 배포했다. 그 전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400?-68)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고안했던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찍은 것이 성경이었다고 한다. 1456년 이전에 활자 인쇄한 라틴어역 성경을 “구텐베르크 성경”이라 한다. 마틴 루터(1483-1546)가 또한 독일어판 성경을 간행했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각 개인의 손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틴들의 성경은 흠정영역의 원어 학자들이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거나 참고할 정도로 거의 완벽한 것이었다. 틴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 말이 있다. "어거스틴이나 오리겐도 오류가 있다. 이런 오류를 검증하려면 성경을 직접 읽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지당한 말이다. 오늘날 절실하게 필요한 마땅히 귀 담아 들을 경고다.


이런 말을 한 틴들 역시 어느 모로 보면 그 가르침에 오류가 있었으니 예를 들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 본 것이다. 때문에 그를 적대시한 천주교에서는 그가 인간의 자유의지까지 부정한다고 비난했었다. 루터에게도 비슷한 정도의 오류는 있었다. 칼뱅에게도 있었다. 고로 틴들의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의 오류 여부를 알려면 각자 스스로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성경으로 검증하는 것"이 유일하게 안전한 것이다.


성경 역시 이와 같이 베뢰아 사람들의 예로써 경고하고 있다[행 17:11,12]. 그러므로 최종 판결은 성경을 통해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계시로 내려 주시는 데에 있다. 때문에 성경을 각자 부지런히 읽지 않으면 안된다. 왜 자기 운명을 남의 손에 의탁하는 못난 짓을 하겠는가. 모든 사람 각자에게 충분한 판단력과 건전한 양식과 상식을 주셨다. 고로 오직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 짓게 하셨다.


성령께서 그 스승이시기 때문에 그 정확한 가르침을 우리가 받을 수 있다고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3년간이나 눈물로 밤낮 가르치고 아무 것도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면서 떠날 때 한 말이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맡기니 그 말씀이 능히 너희를 든든히 세우실 것이다"(행 20:32).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께 맡기고, 성경을 신학교처럼 여기고 성령을 가장 권위 있는 신학교수로 모시고 배우며, 그 배운 이들 중에서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세워 목자(牧者)로 삼으면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목자 혹은 장로[감독]는 그 양(羊) 무리 가운데에서 본이 되는 사람을 세운 것임을 베드로도 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초대교회에서 장로[감독]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고 집사들은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교회 재정 업무[구제 등]를 맡는 것 이외에 달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단순한 구조의 초대교회였다. 단순 구조에 생명력이 있다. 생명력이 없는 데에서는 그 대신 인위적인 요소만 현란하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법이다.


종교 체제가 아닌 생활 자체이기 때문에 서로 교제하며 모여 합심 기도하고 은혜의 말씀을 서로를 통해 배우고 익히는 일 외에 따로 정할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일 때마다 "떡을 떼는" 것은 물론 필수이다. 주님께서 그 모임의 실질적인 주인이시자 주재자이신 까닭이다.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복음의 기본 골자는 각자가 충분히 숙지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슨 어려운 것도 복잡한 것도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보내심 받아 주님의 일을 하는 데에서만 이 세상 삶의 의의를 찾는 터이므로 이런 실생활에서의 기본 수칙만 주지하고 있으면 족하다. 이상 사실에서 우리가 얻는 중요 결론이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너무나 간결하고 단순하여 사람들이 믿고 구원 얻는 일에 많은 지식이 실상 필요치 않다는 바로 이 점이다. 성경 자체가 체계적으로 씌어져 있지 않고 '신약'은 단편적으로 편지글들을 한데 묶은 것에 불과하다. 성경의 가르침이 그만큼 단순 명료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간단한 진리라도 성경은 읽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령 친히 계시로써 가르치심으로 모든 진리를 알 수 있음을 또한 나타내는 것이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성경 번역이 활발해져 개인 단위로 성경을 직접 접하게 되기까지는 초대교회가 태동한 후로 상당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핍박은 격심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살하려 하거나 아니면 대중으로부터 차단시키려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획책 또한 시종 극에 달했다. 따라서 성경을 왜곡하여 가르치거나 엉뚱한 해석을 하는 등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일이 넘쳐 났음은 자명하다.


바울이 경고한 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에 빠져들 것은 뻔했다. 그러나 성경이 널리 보급된 지금은 어떤가. 사정은 똑같고 나아진 것은 없다. 지금은 오히려 더 험악하고 심각하다. 이제는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도 먼지만 쌓여져 갈 뿐 도무지 읽으려고 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미리부터 알고 계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이 바로 아래와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각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만 알면 족하고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그 뜻대로 행하면서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생활을 하면 충분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종교화'하지 않고 당시 초대교회처럼 '생활화'하면 되는 것이다. 오직 모이기를 힘쓰고 사랑의 공동체 생활을 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 수행에 전심전력을 다하면 되는 것이니, 믿을 때 세례 받고 모일 때의 성찬예식 거행만 제도화한 것뿐이다.


따라서 성직자로 구별되는 계층도 없고 그런 사람들을 양성하는 기관도 없었다.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훌륭하게 지어 올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라고 세상 앞에 과시하는 일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그것을 생활 원칙으로 삼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나님 사랑하고 사람 사랑하여 사람들을 구원해내고 믿는 형제를 내 몸처럼 돌보고 또 그런 차원에서 모든 선한 일에 힘쓰는 등]을 하는 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하게 양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더 요약해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진 사람 삶의 원리를 따라 살면 되는 것이다. 삶의 원리이기 때문에 이는 이 세상과 영원한 천국을 막론하고 두루 통하는 것이다. 삶의 원칙이기 때문에 사정과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원칙에 타협의 여지도 전혀 없음은 물론이다.


법질서로서의 대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물론 '엄수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이 이 고유한 생명의 원칙을 따라 살지 않고 반역한다 해서, 또는 이런 유형의 삶을 살아 자기네와 한 동아리가 되지 않음에 대하여 세상이 우리를 적대시하고 갖은 박해를 한다고 해서, 타협을 한다거나 원칙 준수를 유보한다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니, 생명의 법질서이므로 그것을 어기는 것은 곧바로 생명과는 정반대인 죽음이요 멸망으로 직결되는 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고 자세히 그 내용을 들여다보고 정통해 있다는 것이 좋은 이유는, 바울이 말한 대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 3:15]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 함에는 "말씀이 성령의 검"이라는 의미도 물론 함께 포함된다. 즉 이 삶의 원리를 원활히 지켜 그 삶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전쟁을 걸어오고 있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모든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세상은 사람 구원해내는 작업장이기도 하고 이 일을 방해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들]과의 전쟁마당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됨"[마 18:3]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정통하여 아무리 지식 있고 능력 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한 대로[고전 13:1] 주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키고[요 14:23] 따름으로써 순종하는 것, 이 이상 가는 것은 없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말씀이라 한번 믿은 것은 곧이곧대로 지키고 순종하는 그런 고지식한 무식자가, 비록 성경에 능통하고 많은 능력을 행하고[마 7:22] 많은 사람을 회개시켜 믿음으로 인도한 과거가 있으면서도 현재는 그 사랑의 순종이 보다 못하고 덜한 사람보다, 천국 가는 일에서는 앞지르고 앞장선다는 얘기가 된다. 마음은 언제나 가변적임을 명심할 것이니 가장 우선 순위로 내 스스로 지켜야 하는 나의 마음이다[잠 4:23].


이런 의미에서 앞서 그 영문 자료가 소개하고 있는 "세상에서 볼품없는" 그 ‘적은 무리들’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가! 핍박 중에서도 갖은 난관을 이기며 그렇게 믿음을 지켜 나간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교회에 대한 핍박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고 지배자[임금一"prince"]로 있는 한 변함이 없다. 시대가 다르다고 지역[국가]이 다르다고 그에게 무슨 치외법권이 있고 성역이라도 있어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핍박을 할 필요가 없어서 즉 모두 세속화되어 버렸으므로 굳이 그런 수단을 쓰지 않아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기에 탄압이란 방법을 쓰지 않는 것뿐이다. 오히려 박해는 그리스도 교회를 더욱 결속시키고 믿음을 더 굳게 하는 역효과를 낼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영리한 그가 모를 리 없다. 그런 핍박도 극적인 순간, 극적인 장면으로 전개될 때 그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으므로 단지 그 시기만 저울질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참 모습은 앞에서 소개한 바로 그런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우리 역시 현저히 우리 코앞에서 목도하고 있으니 곧 북한의 지하교회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교회는 운명적으로 "핍박 받는 교회"이다. 왜 핍박 받음이 교회의 필수 요건인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것이 교회요 그렇게 되어야 사람들이 구원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생 구원의 필수적인 원리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서[빌 1:29] 하나님의 뜻이므로 불변이다. 따라서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이고 원천적인 고유의 모습이다. 언제일지도 모를 아니면 현재 당하고 있는, 이 세상 신(神)의 핍박 아래에서 불가불 교회가 존립해야 하는 까닭이다. 바로 그런 현실에 처해 있는 북한 땅에서 교회당 건물이 있는가? 신학교가 있는가? 오직 있는 것은 수난(受難)의 교회의 모습뿐이지 않은가.


이 바로 초대교회의 형상이요 모습임을 다시 강조한다. 많은 경우 이 모습을 버리고 변질되어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를 통하여 이 같은 초대교회의 모습을 인생들에게 꾸준히 보여 주심으로써 교회의 표본을 나타내셨다. 즉 핍박 아래 고난 받는 교회 모습인 것이다. 때는 더욱 절박해져 가고 있다. 바야흐로 모든 징조의 시침, 분침[分針]은 바울이 말하고 요한이 예언한 바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 "멸망의 자식"의 출현을 가리키고 있다.


다니엘이 말한바 말세에 지식이 더하며 빠르게 소통되기 시작한다는(단 12:4) 바로 그 예언이 이미 성취되어오는 지가 일세기도 더 넘었고 그래서 우리 눈이 현란해질 정도로 각종 소위 "문명의 이기"들이 하루가 다르게 출현하여 "악한 자"의 나타남을 재촉해 가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가장 효과적인 그의 세계통치의 수단을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장래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는 사태가 전개되어질 날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제는 주님의 예언대로 교회가 모든 국가 모든 민족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는 시대가 왔으니, 이런 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특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초대교회의 형태로 즉시 되돌아가, 보다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하나님의 사업을 마무리 지을 때가 이제 온 것이다. 기존 교회 체제가 생명력을 상실하면 새 교회 운동은 필연이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교회(성공회)가 형식화하자 많은 교인들이 이 "교회"를 떠나 따로 모이고 있었던 것도 그러한 예다.


루터, 웨슬레를 통한 부흥이나 교회 운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형식화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는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사실에 눈 뜨게 되고 또한 당시 고고학적 발견에도 자극되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선교 열정이 고조되었고 성경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와중에 일어난 것이 소위 '형제 운동[Brethren Movement]'이다.


1825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당시 교회가 성경의 교훈을 떠나 형식과 전통에만 얽매어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인 몇 명이 모여 성경 연구를 시작했는데, 2년 후에 7명의 신앙동지가 성공회와 완전히 결별하고 따로 모이게 되어 이렇게 아일랜드에서 번지게 된 것이 이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스페인 등 유럽제국과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중국, 인도, 아라비아 등 세계 각 곳에서도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그들은 설명하고 있다.


각 시대 어느 곳에서든 언제나 자연스럽게 공통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요 흐름이다. 흐름은 흐름대로 두어야지 이것을 억지로 막거나 제지하면 더 큰 부작용만 따른다. 이 구성원 중 널리 알려진 인물 중에는 고아원의 설립자로 평생을 통해 무수한 기도 응답을 받았던 유명한 조지 뮬러 (George Muller)가 있다. 미국 무디성경학교의 설립자요 전도자인 무디(D. L. Moody), 세계적 성경학자 브루스(F. F. Bruce) 등이 있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
다음글 | (2) 죠지 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