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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 죠지 뮬러 등록일 2016.02.24 13:09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78

 

판톤(D.M. Panton)은 "형제 운동의 영향력은 종교 개혁보다 훨씬 컸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소개를 하는 것은 어쨌든 그 중에서 그런 출중한 믿음의 재목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Brethren', 'Christian Brethren', 'Plymouth Brethren["Plymouth"는 그 곳 지방 이름]' 등으로 불렀으나 그들 스스로는 특별한 종파 이름을 내건 적이 없고 직급에 따른 호칭[목사면 "목사", 집사면 "집사"]도 배격한다고 한다.


"거룩해졌으니 성도(聖徒, a saint, 聖人)요, 믿음이 있으니 신자요, 서로 사랑하니 형제들이요, 순종을 요하므로 제자들이며, 성경을 따라 제사장이고 증인이요 그리스도인일 뿐"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현재 국내[한국]에도 이런 교회가 수백 개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9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세계선교를 수행하고 있다고도 한다. 이 사람들의 이런 운동을 소개하는 것은 그들의 현재 활동에 전적으로 찬동하여 한 울타리 안에서 일하라는 권유는 절대로 아니다.


그들이 이런 그룹을 형성하여 자유롭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수 있었던 것이 어디까지나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단 그들이 가르치는 성경 해석 중 일부 내용이 진리에 전적으로 합치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밝혀 둔다. 물론 그들은 자유를 표방하므로 개중에는 성격이 다른 데도 있어 한 쪽만의 실상을 보고 전체를 판단할 수야 없지만, 필자는 이런 그룹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해본 일이 있기에 그들의 일반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어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일례로, 그런 그룹 중의 한 곳에 갔더니 그 좌장 격인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유사시 핍박이 일어나 주님을 부인하라고 강요당할 때 가족을 위해서는 형편 따라 처신하여 주님을 부인할 수도 있지 않으냐". 간단한 표현이지만,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바 "은혜로써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실상이다.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급을 두지 않는다는 차이일 뿐이지, 현 "개신교" 체제 울타리 내에 있는 거의 모든 교단(개교회 목회자에 따라 사정은 물론 다르나) 교리의 내용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이는 명백히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말하는 바 '멸망에 이르는 억지 해석'[벧후 3:16]인 것이다. 누구라고 하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회 저명인사로 북한에 아내를 두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탈출 월남한 끝에 거의 50년을 독신으로 지내다가 작고한 분이 생전에 믿음 하나로만 살면서 인근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이미 지적한 대로의 "그룹" 집회에 나가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직장이 모 기독교 교단 산하의 기관 소속인데도 그 교단 교회에 나가지 않고 그런 그룹이 모이는 집회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 같으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그런 독자적인 행동을 감히 못하겠지만 이 분은 워낙 내로라는 사계의 권위자였기에 그럴 자유가 있었던 것 같다. <"font-family-ascii-font-family:cn?eeceececeece?ecece>그가 오죽하면 그런 독자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집회에 다녀온 일요일 오후에 하루는 필자에게, "나는 이 조용한 시간 예수님 하고만 지내요" 했던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나가는 집회에 서너 번 참석해보고는 다시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역시, "무엇이 다른가,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였음을 기억한다. "아무 것도 없는" 데다 "종교적 열심"마저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 "열심"이라도 있으면 그 열심 때문에라도 진리의 문을 두드리고 찾고 구하다가 혹 진정 은혜에 들어갈 기회라도 잡아볼 수 있으련만 없었다.


그들 중의 더러는 이런 말까지 하고 있었다. "기성 교회는 남의 눈치 보며(믿음 없다는 소리 들을까 싶어) 억지로라도 새벽기도에 나가야 하는 부담과 고충이 있지만 여기는 일절 그런 것이 없으니 자유로워 좋다." 이런 것은 진리를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으로서 할 말이 아니니 자기를 위해 살 때에야 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 5:15]. 한마디로,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실상을 말하면 이 "새벽기도회"는 한국교회의 자랑이다. 형식화되어서 탈이지, 오히려 더더욱 권장할 만한 것이 이 새벽기도다. 한국교회만 유달리 별나서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미국 같은 나라도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 4, 5시 경에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나 기도하기 위해 교회당으로 줄 지어 줄달음 치듯이 해서 나오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1907년 한국교회 부흥으로 결실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결과로서 그 영광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우리의 이 새벽기도다.


겨우 이 새벽기도에서 "해방"되는 것을 그 '차이'라 하고 또 "자유"라 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못 알아도 보통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복음의 종교화는 반드시 그 형태를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교회 제도와 같이 신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아 배출된 소위 성직자가 거대한 교회당 건물에서 예배를 집전하고 있는 양태를 반드시 배척하고 이상 소개한 바 소위 "형제"[Brethren] 교단과 같은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무슨 규약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다.


형태에 관계 없이 오직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그대로 주님의 사업에 헌신하면 되는 것이다. 단지 "교회" 형태 여하로 형제들을 판단할 일이 아니다. 즉 기성 체제하의 교회에서 이들 "형제회"[Brethren]와 같은 모임을 이단시한다거나 교회가 아니라고 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심각한 흠이 있다. 그러한 논리대로 하면 앞서 언급한 복음 전도자로 널리 알려진 무디(D. L. Moody)나, 고아원 운영으로 일생을 통해 무수한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George Mueller)도 모두 이단이 된다. 뮬러는 형제회[Brethren Movement]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누가 이들을 우리 믿음의 형제가 아니라고 하랴. 우리 중 누가 그들보다 나은가! 그렇다고 그런 소수 "그룹 교회"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는바 “기성 교회”를 가리켜 구원이 없다고 배척한다면 역시 성경적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형태로 판단하지 말고 그 실질적인 내용 여하로써 가름할 일이다. 앞서 말한 "형제회" 중에도 일률적인 것은 없어, 조지 뮬러 같은 이들도 있고 "형편 따라 주님을 부인해도 구원은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도 있는 등 천차만별이다.


우리의 '바영사회" 운동은 교회 형태 면에서 그런 "형제회"와 같은 자유로움을 지지하는 것이나, 전파하고 가르치는 내용 면에서는 모두가 동의 동조하는 일치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개인의 믿음을 두고 그가 속해 있는 단체를 미루어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또 어떤 단체가 처음부터 완전히 이단 사상에 물들어 있음에도, "그 가운데에도 믿음의 형제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옳지 않다. 또한 아무리 교회 형태는 성경적이라 하더라도 그런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 해서 모두가 다 형제는 아닌 것이다.


그 중에 얼마든지 불신자가 섞여 있을 수 있고 이단 사상을 품은 사람들이 있음은 현실이다. 같은 종류의 집단 안에도 조지 뮬러 같은 이도 있고 앞에서 지적한 “형편 따라 주님을 얼마든지 부인해도 구원된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주님, 한 하나님, 한 성령”[엡 4:4,5] 안에 있어 “한 몸”이므로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니 사리(事理)대로 판단하여 흑백을 가릴 일이다.


소위 “교회 분쟁”에 대한 기본적인 해결책을 바울 사도는 이미 제시하였으니, 즉 누구든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 때[고후 5:15] 그는 믿음의 형제 곧 구원 받은 사람이다. 구별의 기준을 정확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거나”[:2]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중하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는”[:5,6] 등의 갈등이 생길 때 여기서 어떤 점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면,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 하는”[:6] 이 점에서 서로 합치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기록되기를, ‘주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自白)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할 것인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10-13] 함과 같다.


즉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7]는 점만 분명하면 된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니 그가 세움을 입을 것이므로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음이다”[:3,4] 함과 같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으로서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主)가 되려 하심이라”[:8,9] 한 그대로다. 물론 이 경우 사람마다 모두 주님 위해 산다고 하지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눅 6:44]는 식별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 기준을 따르면 될 일이다.


그러므로 지엽적인 그런 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 사람이 과연 자기를 위해 사느냐 않느냐 그리스도를 위해 사느냐 않느냐 하는 것으로 잣대를 대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조지 뮬러나 헛슨 테일러 같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살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과 같은 그런 것이다. 헛슨 테일러는 조지 뮬러의 믿음의 본을 받아 믿음으로 초교파적으로 거대한 중국 선교 사업에 뛰어들어 큰 역사를 일으킨 인물이다.


"초교파"라 하면 무조건 반발하는 일부 교파주의자들도 있으나 이상 바울의 성령을 통한 경고에 귀기울일 일이다. 바울 정도의 성경 지식과 성령의 인도에 민감한 사람은 어느 쪽 주장이 옳다 그르다 하고 즉석에서 판별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방식을 쓰지 않고 이상 지적한 바와 같은 기본 원칙만을 제시하였으니 그 의미가 크다. 이 기본되는 자세의 유무, 그 여부에만 신경을 쓰라고 한 것은 과연 성령으로 난 지혜요 경고다.


그런 특정 문제만 아니라 시대를 따라 각종 별난 견해 차이에서 그런 분쟁과 충돌이 있을 터이므로 미리부터 그렇게 믿음의 기본만을 판별 수단 또는 척도로 세워 준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근본적인 면을 알려고 노력할 일이지 지엽적인 것으로써 상대를 비판하고 논쟁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과는 상종을 못한다고 하여 감정적으로 분리해 나가든가 하는 일은 그 스스로가 단죄를 면하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인이면 필독할 조지 뮬러와 헛슨 테일러의 생애


조지 뮬러가 믿음의 기도 응답으로 큰 역사를 이룬 것도 청년 뮬러가 다녔던 독일의 한 대학교[the University of Halle] 신학과 교수였던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가 1696년에 세운 고아원[당시로는 세계 최대 규모]을 믿음에 의한 기도 응답으로 운영했다는 그 전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이었다.프랑케는 경건파("Pietism" Movement: 17세기말 독일 루터교회의 일파) 운동을 시작한 사람 중 하나로 뮬러는 영국 브리스톨에서 이 경건파 집회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뮬러의 활동은 다시 헛슨 테일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것과 같이, 앞선 믿음의 선진들의 생애가 주는 교훈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교파 관념이라는 고질병에 걸린 한국 교회에서는 이들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미흡하다는 사실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장, 감 양대 교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에 이들 인물들이 아주 생소한 이름이 되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서는 큰 손실이다.


조지 뮬러는 자유로운 복음 활동으로 "형제회"에 속해 있고 헛슨 테일러 역시 초교파로 평생 활동한 관계로 미국의 거대 교단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회가 그런 교파적 편협한 시각에서 이들을 무시하고 있으니 보통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조지 뮬러, 헛슨 테일러, 기도자 하이드[Praying Hyde, 인도에서 활동한 장로교 선교사], 찰즈 피니[Charles Finney],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1907년 한국 부흥 등은 구원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아 두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성녀(聖女)" 앤["Holy Ann", Ann Preston, 미국의 여의사요 교육자인 앤(Ann Preston, 1813-72)과는 동명이인]은 90 평생 가정도 이루지 않은 채[어릴 때 공부가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학교도 그만 두고 일생동안 문맹자로 지냈으나 성경만은 읽는 기적도 나타냈었다] 평범하게 남의 집 가정부로 몹시 분주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기도의 사람’이 된 사실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앤이 당시 한 감리교 집회에 나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font-family;mso">[살전 5:15-18]는 성경 말씀에 접하고 "남의 집 가정부로 있으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성경대로 기도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주님께 기도로 하소연한 결과, 말 그대로 쉼 없이 기도하는[무조건 하나님께 일단 여쭌 다음에야 무슨 일을 하든지 행동에 옮기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앤은 열정적인 아일랜드 출신의 기질답게 성미가 괄괄하여 그야말로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와 같았다. 심술궂은 주인 집 아들들이 비 오는 날 밖에 나가 놀다가 장화를 신은 채로 그냥 방 안으로 들어와서 앤이 지금까지 말끔하게 닦아놓은 방바닥을 짓이겨 놓고는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면 앤은 열이 꼭대기까지 올라 고래고래 소리치는데 아이들은 이것이 재미 있다는 듯이 더욱 더했다. 이렇게 모든 것은 앤에게는 참담한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이상과 같은 말씀을 어린 아이 같이 받아들이고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기 시작하면서 앤의 입에서는 험한 소리 대신에 찬송이 흐르며 열화 같은 표정을 짓는 대신 온화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으로 변모해 갔다. <"font-family;mso">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라["singing and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엡 5:19] 한 대로 이런 것은 성령 충만의 비결이다.


평생을 통해 기도 응답 받은 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앤의 기도를 청하면서 그 소문이 세계에 퍼졌고 장례식에는 미합중국 대통령이 그가 살았던 카나다 토론토 시장과 함께 친히 조문을 올 정도였다. 오늘날까지도 그 가정부로 일하던 집과 기도 응답으로 말랐던 샘물이 펑펑 솟아났던 그 우물 등이 기념관으로 남아 그 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믿음의 일은 반드시 뮬러나 테일러 등과 같이 비범한 뜻을 세우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통 여자' "홀리 앤"이 훌륭하게 입증해 보인 것이다. 조지 뮬러는 특별한 의도를 갖고 믿음의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생활과 사업 일체를 주님께 맡겼으므로 그와 같이 부단히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말 그대로 자나 깨나 기도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앤은 그야말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으로써 그런 훌륭한 결실을 이룬 것이다.


이로써 그는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이 어떤 의미인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뜻을 따라 살아야 믿음의 정상적인 삶이 되는 것이다. 다 같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 나는 무엇이고 앤은 무엇인데 나는 변명만 늘어놓고 그와 같은 "기도의 사람", "기도의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해드리겠는가.


주님 말씀에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남방 여왕이 찾아 왔는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하시고 "그 남방 여왕이 이 세대를 단죄하리라" 하신 대로, "홀리 앤"이 우리들을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 각자의 삶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사는 삶이다. 둘이 하나되어 사는 삶이므로 반드시 주님과 여쭈어 의논하고 무엇이든 해야 하는 것이다.


둘이 하나됨을 통한 구원은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살전 5:10]이라는 한 마디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아니라 일상생활이라 하는 것이다. "피차 권유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11] 함이 그 때문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올 것이다"[요 14:17,18] 하심과 같이, 엄마가 아이를 품속에 거두어 들이시는 바로 그 의미가 "자나 깨나 함께 사심"이다.


함께 살 때에는 서로 손발이 맞고 의기 투합해야 하는 것이니 그 방법이 바로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삶"[고후 5:15]에 있다. 나를 사랑하심과 똑같이 내 이웃[그리스도를 공동의 머리로 모시고 있는]도 사랑하시니 머리의 지시를 따라 그들을 또한 나 자신처럼 사랑함이니 실질적으로 그들은 나 자신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하심은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시기 때문이니, 나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그 확증이다[갈 2:20/롬 5:8]. 헌신적인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이 부분적으로 반영된 것이다. 짐승들의 새끼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도 부모에 대한 이런 효(孝) 차원이다.


그래서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라"[딤전 5:4] 하였고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8]라고 한 성경의 경고를 멸시함으로써, 오늘날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소위 노인들의 고독사라는 것은 교회에서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을 배반하는 행위인 것이다.


소위 핵가족은 교회에서는 용인되지 않는다. 가족끼리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면서 어찌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하리요.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침이 그리스도 구원의 목적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서 어찌 세상의 빛과 소금이리요. 잘못된 개인주의에 물들었던 서구 사람들은 한국의 대가족 제도를 부고 부러워하였다. 그런데 무지한 사람들이 이기주의와 사대주의에 물들어 이런 아름다운 삶의 모본을 스스로 버리고 오히려 삭막하기 짝이 없는 서구 문명을 닮기에 열심이다. 선도(先導)해 가려는 주인 의식이 없다.


젊은이들이여, 세계 만방으로 나아가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가르치라. 서구에서 온 기독교 선교사들도 한국인의 "우리" 의식이 강함에 놀라 마지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이게 이루어진 이런 우리 의식, 한 몸 의식, 공동체 의식을 널리 선전하라. 하나님과 우리는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이 이상 가는 사람 삶의 사랑의 관계가 없음을 가르치라.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국민이 되다시피 하라. 그 나라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나가라.


적 그리스도가 곧 이어 출현할 것이니 무릇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이들은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있으니[마 24:9] 거기서 순절(殉節)할 각오를 하고 나가라. 교회를 위하여 충심으로 권고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고전 7:1-40] 바울 사도와 같이 그냥 홀 몸으로 지내라. 이 말을 하면서 바울은 나도 성령을 받은 줄을 아노라 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울이 지적한 대로 사람 따라 은혜가 다르니 일률적일 필요는 없다. 결혼을 해도 죄 짓는 것은 아니나[:36,37] 충분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살핀 후에 결정할 일이다. 때가 단축되었고 육체에 고난이 있을[:28,29] 일을 주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자청해서 함으로 자기를 얽맬 이유가 무엇인가. 절대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말 것을 가르치라. 오직 구원 받았으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것이니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 각처에서 가르칠 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의미와 목적이 삶의 낙을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사람들 구원하기 위해] 싸우는[이를 적극 방해하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상대로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의 피조물의 삶이 하나님과 사랑으로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이 부지런히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to walk with God] 함이 바로 이 뜻이다.


에녹이 그러했고 노아가 그러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에 나섰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하나님과의 동행]을 주지시키셨으나 한 때 여호수아가 이를 실천하지 못했을 때[주님께 먼저 기도하고 일을 결정하는] 성경은 이를 책망하고 있다. 야곱 역시 그 아들 요셉의 일로 그 형들의 거짓말만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여쭐 생각을 않았기 때문에 장장 13년간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살아 있음을 역시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경고와 교훈은 막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유의해야 할 일이다. 조지 뮬러와 같은 사람들의 생애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도전이 되고 자극이 되고 있다. 이들 역시 예외 없이 젊을 때는 방탕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고 성깔을 부리는 인간형이었으나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자 회개하고 새 피조물이 된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삶을 처음부터 살게 되어 있고 우리는 이 모양대로 살도록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다.


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는 그와 반대로 인생 문제로 고뇌하면서 진리를 찾은 경우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출중하고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남달라 방탕한 것과는 반대로 인간 삶의 허무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 고뇌를 너무 깊이 한 끝에, 건강까지 위협 받자 이를 안타까이 여긴 본 주위의 잘못된 권고로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성령의 능력으로 해방된 것이다.


조지 뮬러[1805-98]로 말하면, 그가 그렇게 믿음으로만 운영하게 된 고아원 설립의 동기가 있었다. 단순히 고아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먹이고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목회를 하고 있던 중에 어느 교인의 가정을 방문하였더니 직업이 대장장이인데 성경 읽고 개인적으로 기도할 시간이 도무지 없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 이유를 물으니, 먹고 사느라 이렇게 하루종일 일해도 빠듯한데 만약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까지 보태면 더욱 못살게 될 것이 아니냐는 아주 간단한 대답이었다.


여기서 뮬러는 결심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만 있고 그래서 모든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줄 알고 주님의 일에 헌신하기만 하면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인데 그것을 믿지를 못하고 저런 모양이니 내가 직접 그 일에 나서서 하나님의 능력을 본으로 보여 주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그래서 그 구체적 방법을 택하기 위해 기도하던 중 길거리로 부랑아(고아)들이 떼 지어 소리치며 우루루 몰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고아사업이었다.


단순한 자선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 구하면 모든 것을 들어주시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믿는 사람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기타 모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입히시고 먹이신다는 사실을 입증함에 그 고아 사업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즉 기도 응답의 산 증인, 증거가 되어 믿는 모든 이들을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은 무조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노예되어 있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종교를 통해서도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또한 포로로 잡아놓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 새로운 것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니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있을 수는 있지만 기독교라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닌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자처한다고 해서 그렇게 불러지는 것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닌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얼마든지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이다.


종교는 이 세상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신불(神佛)의 힘을 좀 의지해볼까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 목적을 위해 그런 '도움'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의 것은 자신의 구원을 포함하여 일체를 망각한 채[왜냐면 이미 자기는 구원되었으므로] 오직 하나님을 위하고 그러므로 이웃을 위하는 것으로써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위해서만 사는 당당한 삶이요 의연한 삶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겁약자(怯弱者)의 의타심과는 전혀 무관하다. 세상 사람은 아주 잘못된 시각으로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런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종교를 통해서도 인생을 포로로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분명히 말하거니와 믿음의 삶의 본이 되는 일은 없이 단지 일종의 직업처럼 여겨 교역자를 지망한 자가 신학졸업하고 일정한 지식을 다루어보는 학력 테스트인 양 목사 고시를 거쳐 안수 받았다고 해서 교회에 초빙하여 목자로 삼거나 혹은 그런 사람들이 세운 교회에 나감으로써 그것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인식한다거나 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복음을 진정 깨닫고 진정한 믿음의 반포자가 되어있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라 있다. 그러나 그런 형제들이 있다고 해서,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을 같이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진정한 목자의 자질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골라내는 기준은 오직 성경이요 따라서 나 자신 성경을 부지런히 읽음으로써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그와 같이 분별해내는 안목을 길러내는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이 정상이고 임시적인 방편도 아니다.


획일적으로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안수만 받으면 되는 것이라면 그 옥석을 누가 구분하겠는가. 분명히 개중에는 믿음의 형제들도 있지만 그런 이리 떼들이 없잖아 있고 많으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런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전방에 나가 적과 싸우는 부대가 요행히 우수한 지휘관을 만나면 좋으나 자질 없는 부대장을 만나면 그 군인들은 전멸할 수 있다. 세상 일도 그러한데 그리스도의 교회 일을 그렇게 방치할 수 있겠는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제시한 대로 따르면 최소한은 막을 수 있는데 왜 그 방법을 택하지 않는가. 바울 당시 그리고 사도들의 생존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의 기도와 수고로 얼마나 힘들여 목자들을 세웠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안다"[행 20:29-30] 한 것이다.


당시도 그런 상태였으니 오늘날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종교일 수도 없고 굳이 종교의 형태를 띠어야 할 필요성도 없고 그렇게 해야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더 잘 이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 뜻을 충실히 수행하는 방편도 아니다. 지금까지의 드러난 폐단으로 보면 오히려 그런 것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가려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 초대교회의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 성령께서 처음부터 나타내 보이신 본이요 그렇게 교회 운영을 하는 것이 언제나 최상이다.



북한 교회가 저렇게 우심한 핍박을 받으면 전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물론 전도는 활성화는 못되지만 더디게나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교회인데 그런 기도하는 교회를 만드는데 뜻이 계심을 간파할 수 있다.

 

바울이 한창 전도할 바쁜 때임에도 예루살렘에서 수 년간이나 갇혀 있게 하심도(로마로 압송되기 전) 바울사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이었다. 전도도 중요하지만 기도 없이는 아무 일도 안된다는 교훈을 이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날 소위 "자유 세계"에서는 기도하는 교회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한심한 실정 때문이다.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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