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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 설교자와 기도자의 합동 전략 등록일 2016.02.24 13:06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12

 

네쉬의 비방자들은 "그가 남 모르게 기도한다지만 그것은 빈 말이고 그가 곳간이나 지하실이나 숲속이나 어디에 들어가든지 그의 격렬한 기도 소리는 수백 미터 밖에서도 다 들린다" 하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물론 과장된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다음 사실은 소개할 필요가 있다. 주민의 절대 다수가 회개했다고 피니가 확신한 곳에서의 일이지만, 이 집회 기간 중 네쉬는 새벽 일찍 일어나 숲 속에 들어가 기도했는데 청명한 날이어서 멀리서도 기도 소리가 들릴만 했다고 피니는 술회하고 있다.

이 때 3리[3/4마일, 1.2km 가량]나 떨어진 곳에 있던 한 불신자가 이 네쉬의 기도 소리가 울려 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이 기도 소리가 갑자기 그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하나님, 죄, 영원 멸망, 영생에 대한 것들이 마치 살아 꿈틀거리기나 하듯이 현실이 되어 그를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찾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네쉬는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그렇듯이 기도의 대상 인물들의 명단을 종이에 적어놓고 매일 기도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하루도 몇 번이라도 계속하여 위해서 기도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 생각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정해 놓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거의 또는 전적으로 구제불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마음 가운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이름을 적어 두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경우 그 기도 응답은 기적에 가까웠다. 도저히 회개할 수 없으리라고 모두가 알고 있던 이들이 믿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남 모르게 그와 같이 기도 대상을 종이에 적어 놓고 기도할 뿐 아니라 네쉬는 피니와 함께 기도할 때도 또는 집회 때 공중 기도할 때에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것을 피니는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기도자의 마음에 특정 인물을 위해 기도하도록 감동하실 때에는 이미 그 대상 인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뜻이 분명히 계심을 성경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대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네쉬는 자기의 기도 명부에 올려 놓고 기도했다고 했거니와 그 가운데 하나가 다음 사례였다. 피니가 직접 밝힌 대로 하면, D라는 사람은 싸구려 여인숙과 술집을 경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자기 동네에서 열리는 피니의 전도 집회에 대하여 온갖 욕설과 비방을 하고, 누구든 믿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면 일부러 들으라고 온갖 상말을 동원하여 약을 올리는 것으로 재미를 삼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욕지거리를 해댔으니 자연히 그의 술집은 피니의 집회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의 소굴이다시피 되었다. 마침 이 사람이 자기 집 건너편 거의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쪽에 피니의 집회에 나가 새로 믿게 된 사람이 있었는데 이를 알고 D는 그가 문 앞에 나타날 때마다 마치 기다리기나 한 듯이 앞에 나와 그런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부러 감정을 돋구는 것이었다. 이 새로 믿게 된 사람은 이사를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집을 버리고 타처로 떠나든지 해야 할 판이라고 피니에게 호소할 지경이었다.

'파더 네쉬'는 이 D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후 그 영혼에 대해 심령 깊이 비통함을 느껴 즉각 자신의 기도 명부에 올렸다. 그리고 잘 때에도 깰 때에도 그 영혼에 대한 생각이 줄곧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며칠이고 계속해서 이 죄인에 대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이런 사람에 대해 이 정도로 깊은 연민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가 없이는 보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 하던 중 얼마 안되는 어느 날이었다. 피니가 저녁 집회를 열고 있는데 그 D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집회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 날 집회는 사람들이 꽉 들이 차 있었다. 그가 들어서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알고 있었고 그를 무서워하고 혐오하는 터였으므로 집회를 해코지하려고 온 줄 알고 어떤 이들은 슬그머니 자리를 뜨기도 했다. 피니도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D가 집회를 방해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심령의 큰 고통을 안고 들어온 것이 곧 드러났다. 자리에 앉는데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게 역력했다. 곧 일어나더니 떨리는 소리로 몇 마디 할 기회를 주겠느냐고 피니에게 물었다. 허락하니 그 입에서 피니 자신도 많은 사람을 상대했지만 일찍이 들어 본적이 없는 기막히고 끔찍힌 죄의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대해서,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집회에 대해서 저지른 온갖 악행을 죄다 있는 그대로 토해내는 것이었다.

D의 자백은 청중들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일신해 버렸다. 많은 심령들이 하나님을 찾았고 회개에 이르렀다. D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받은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그의 술집은 더 다시는 술을 구경할 수도 없고 욕지거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술집은 이제는 거의 저녁마다 기도하는 기도회 장소였다. 그 기도회가 얼마만큼 지속되었는지는 모르나 피니가 그 곳에 있는 동안은 그러했다.

피니가 새로운 집회를 열기 시작할 장소에 먼저 가서 기도할 때 네쉬는 습관적으로 자기의 기도의 짐을 함께 들어 줄 몇 사람의 기도 동역자를 구했다고 했거니와 그럴 때면 아벨과 함께 할 때가 많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아벨은 네쉬와 같은 기도의 심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마음이 같은 사람끼리 합심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니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다[마 18:19].

네쉬는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기도했다. 여기 저기 왔다 갔다 하는 산만한 기도는 하지 않았다. 그런 기도는 열매가 없는 법이다. 한 사람 한 사람씩 전 심력(心力)과 정신력을 모아 기도하여 결실을 거두기까지 중단하지 않고 쉬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사람씩을 상대로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은 말 그대로의 사투(死鬪)인 것이니, 그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함께 나누어질 그와 같은 기도의 동역자를 구하는 것은 당연했고 그래서 기도의 짐을 서로 나누어 지며 함께 기도했던 것이다.

네쉬는 세상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기도하면서 간 것이다. 피니에 의하면 그는 떠나는 날까지 세계 지도를 펴놓고 세계 각 나라, 각 곳에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이 임해지기를 일심으로 기도하는 중에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피니에게, "기도할 수 있는 여력이 남지 않았으니 이제는 죽는가 보오! 온 세상이 그 모든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 있는데 어찌 내 육체가 지탱하리요. 그러나 어찌 기도하지 않고 배기리요!" 하던 그는 56세에 그렇게 해서 생을 마쳤다.

네쉬의 기도는, 각 사람의 영혼이 자기의 기도하고 아니하고에 마치 달려 있는 양으로 그렇게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는 영혼의 씨름이었다. 그렇게 기도 중에 육체적으로 완전히 탈진해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라는 막강한 영혼 구원의 수단을 주셨는데 이 수단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활용했는지 그 허와 실이 심판대에 가서 가려지게 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네쉬는 그와 같이 기도에 임한 것 같았다. "영혼의 수고"[사 53:11]였다.

이전에 나타내신 모든 역사(役事)의 사례들은 그 한 때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교회에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명령[지시]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절대로 강박 관념에 의하지 않으니 충분히 기도하는 가운데 확신 중에 기쁨으로 결정하는 일임을 참고할 일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등으로 떼밀리듯 강요당하듯이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가 아니니 경계를 요한다.

모든 것을 사랑 가운데에서의 복종으로 하기를 원하시는 까닭에 또 그런 사람들만을 불러 일을 시키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절대로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하시지 않는다. 우리 각자 스스로 주인 의식으로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몰아내시듯 강제하시지 않으니,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을 하도록 처음부터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작용과 성령의 인도를 구별할 수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강제하듯 압박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피니가 처음부터 이러한 네쉬 같은 기도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모집하여 기도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니엘 네쉬나 아벨 클래리 같은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자생(自生)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것이다. 능력 있는 복음 전파에는 말씀 전파하는 자의 기도와 함께 반드시 이런 기도자들의 합동 사업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성령께서 보여 주심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말해 "성령 안에서의 기도"[엡 6:18], "성령으로 기도하는"[유 1:20]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이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피니는 한 도시나 읍 단위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 오늘날 소위 부흥 전도자처럼 한 때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몇 주일이라도 좋고 달을 넘겨도 좋고 어쨌든 그 지방이 완전히 복음화가 될 때까지 머물며 철저히 작업을 한 것이다. 말하자면 가는 곳마다 그 곳의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아성(牙城)을 뿌리째 뽑아 버리기도 작심하고 임한 것이다. 복음 전도자로서의 바울 사도는 에베소에서 3년이나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 것이 그런 좋은 예다.

교회 역사상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일어난 1850년대의 기도의 부흥운동[the Fulton Street Prayer Meeting Revival]의 주역들이 이 때의 찰즈 피니와 다니엘 네쉬의 영혼의 수고로써 맺어 배출된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에 시작된 정오 기도회 운동[noonday prayer meetings]은 한국에 나온 장,감 선교사 20여명의 1907년 한국 부흥을 위한 정오 기도회[낮 12시 정오를 기해 기도하기 시작하여 한 시간 혹은 그 후로는 저녁 식사 시간까지 계속된]로 그 최종 결실을 이룬 것이다.

굴절과 곡절이 많은 생애지만 짧은 6년간의 피니와 합동 작업[작전]을 전개하여 교회 사상 큰 족적을 남긴 네쉬의 본보기는 해외 및 국내 복음 사업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이들과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합동으로 이룬 성령의 역사는 참으로 보기 드문 사례로서 우리가 알기로는 유일한 것이다. 이런 황금 같은 교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열심히 이 본을 따라 우리는 일해야 하는 사명을 지고 있다.

피니와 네쉬에 대한 핍박도 물론 있었다. 시기심에 불타는 교역자들, 또는 성경 해석에서 이해를 달리 하는 부류들로부터, 또는 일반 불신자들의 세속적인 이유로써 가해 오는 박해였다. 피니의 집회에 총을 들고 들어와 쏘아 죽이겠다고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피니와 네쉬의 형상을 만들어 교수형에나 화형식에 처하는 광경도 연출되었다. 이런 일을 하면서 군중들은 환호하며 두 사람에 대한 적대 의식을 고취했다. 교역자들 역시 가담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피니와 네쉬의 복음 활동은 능력으로 진행되어 갔다.

집회 도중에 집회장[교회당] 내에서 소음을 내어 방해하기도 하고 집회장을 에워싸고 돌을 던지기도 했으며 직접 총도 쏘아댔다. 거짓된 기사와 비방의 글들이 도하 신문에 연일 실리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전의 난장판과 같은 그런 소동이 비일비재였다. 그러나 두 사람에 의한 복음의 역사는 계속 능력으로 진행되었다. 뉴욕 주의 어느 도시[Rochester]에서는 10만여명이 건실하게 믿음으로 돌아왔다.

요한 웨슬레의 복음 운동에서도 군중들은 폭도로 변하여 갖은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니, 이런 성령의 운동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잠자코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1907년의 선교사들에 의한 한국 부흥이나 피니와 네쉬의 말씀과 기도에 의한 복음 전도 방식이나 정리해보면, 당시 선교사들이 4개월여의 기도 끝에 성령의 크신 역사(役事)로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처 그런 기도를 계속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피니와 네쉬 역시 당대에만 한정시키지 말고 그런 복음 전도 방식을 조직화하여 그들의 세대 이후에도 계속되도록 조처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날 우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서 그 결론을 얻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니, 곧 교회 자체를 그런 전도와 기도의 조직으로 만들어 오늘날 적 그리스도의 시대에 끝까지 대처함이 마땅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물론 이상의 일들은 초대 교회가 시작한 이후로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으므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접한 것만으로도 대 만족이어서 그 이상 생각을 못했음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을 간추려보는 오늘날의 우리는, "그와 같이 반드시 일하라"는 하나님의 분부에 접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오늘날과 같은 최후 발악적인 대대적인 속임수에 직면해 있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도 전에 없는 강수(强手)를 두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추호도 이 세상 살고자 하지 말 것이며 오로지 하여 구원의 말씀만을 전달하되 전에 없이 간절한 기도의 배경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한 필요성에서 자연적으로 내리는 결론이다.

자기 교파의 교리나 예배 형식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사갈시하는 풍토에서 이런 '탈'종교, '탈'형식, '탈'교권주의의 초대교회의 단순한 교회 형태로서의 <집 교회> 운동을 소개하면 처음부터 귀를 막을 것이나, 누차 설명하고 강조하지만 핍박에 임하여 이에 대비하고 주님 오실 때까지 이런 박해 속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해야 하는 교회의 실상을 바로 이해한다면 누구도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과거 중국이 그러했고 북한이 그러하여 이미 본을 보이고 있다. 교회가 환란 가운데 들어가는 일이 없다고 고집해야, 이런 핍박 속의 교회 운영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곧 모든 고난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받는 이 고난[네쉬가 보인 바와 같은 기도 중의 모든 고통이 당연히 여기에 포함된다]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는다"[살후 1:4,5] 함과 같다.

여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 여부가 논의되고 있는 점에 우리는 주목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난 받음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함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착각하기를, 우리의 의지 작용과는 아무 상관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대로 구원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하나님이 불공평 불공정하시다는 뜻인데 피조물들의 원망이나 들으실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다.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피조물 자체를 만드실 이유도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지 여부를 보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미리 택하심도 이를 미리 아신다[우리 스스로 어떻게 행할 것을]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되는 일이다. 이것이 성경과 합일된다. 생명을 주셨으나 생명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된 아담이다. 이제 새 창조로써 산 자가 되어 있는 우리이므로 이 합당한지 여부를 묻는 까닭에 믿는 자는 적고 믿지 않는 자는 많은 것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성경이 단정한 그대로다[살후 3:2].

다시 말해 여기서 논하게 되는 자격은 순종이다. 그래서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하는 것이고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함이다[행 5:32/히 5:8]. 아담이 순종하지 않아서 죽은 자가 되었은즉 이 사실은 백 번 지당한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 역시 같은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인즉 사랑하는 자, 사랑할 줄 아는 자라야 마땅히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랑에 법칙이 있어 이는 곧 생명의 법질서이니 곧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사랑하여 기쁨으로 지키는 자가 들어가는 천국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 증명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입증함이다. 세상 종교에서도 기도하여 응답된 사례들을 열거한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냐,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實存)을 증명함이다. 성경이 미리부터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 예언하고 있으니 "악한 자의 임함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이니 이는 저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인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라"[살후 2:9,10] 함과 같다.

그들 종교의 경전에 악령들이 그런 큰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해 둔 데가 있던가? 그러나 성경은 미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온갖 기적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능으로 인한 또는 거짓 것으로서 그렇게 대대적으로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나타내게 될 것을 확언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에 유학 갔다 온 박형룡 박사의 피니 비판에도 보듯이 미국의 일부[주로 장로교] 사람들은 피니를 성경적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와 같은 기도의 능력으로 시종일관 진행된 것이 그가 성경대로 말씀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입증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들의 주장대로 하면 이 기도가 악령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이 아닌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모방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네쉬처럼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건강을 잃고 죽기까지 이르게는 만들 수 없다고 단정해도 틀리지는 않는다. 피니의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인간은 자기 자유 의지에 의한 순종으로 자기 운명을 결정한다는 데에 있었다. 이 점을 들어 소위 "칼벵 신학"에 물들어 있는 그들은 피니를 반대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의 역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천사들이 나아와 힘을 도왔다고 했다[눅 22:43]. 다시 말해 우리가 처절히 기도로써 싸울 때 천사들이 함께 하는 것이다. 천사들의 힘으로 끝까지 기도할 수 있음이다. 다니엘 네쉬 같은 기도에 천사들이 함께 하였고 힘이 되어 주었다는 것은 당연 사실이다. 천사들은 "구원 얻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보내시어 부리시는 영"[히 1:14]이라 함과 같이, 그들은 한 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 각자에게는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천사가 할당 배정되어 있어 필요시에는 전광석화와 같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행 12:15/마 18:10].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다음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즉 우리가 시험 받을 때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자리를 비켜 준다는 것이다[마 4:11]. 왜냐면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 의지와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어지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간섭이나 강제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아담처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에 넘어가 그를 따르게 되면 천사들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타내신 행적(行蹟)들은 항상 '한 사람'으로서이지 [늘 자기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아들(人子)이라 강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항상 사람이시라는 사실과 불가분의 의미이지만, 이와 같이 천사들의 도움을 받으셨다는 것은 '사람'으로서이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에게 임한 것과 똑같은 것이 해당된다 함이니 즉 이와 같은 천사들의 보우(保佑)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마귀 역시 부단히 시험하는 자이니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 있었다"[눅 4:13] 함과 같다. "얼마 동안"이니까 이내 즉시 다가와 시험했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마치 천사들과 악령들이 사이 좋게 서로 역할 분담을 하는 것 같으나, 원래 이 전쟁 상황은 우리 인간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원수" 사이로서의 악연인 것이다[창 3:15].

거룩한 천사들은 인간을 위한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다보니 악령들과의 마찰도 불가피해짐이다. 하늘에서의 전쟁도 그 때문이다[계 12:7]. 하나님의 능력은 그와 같은 천사들의 힘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다. 모세 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바로 그러하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또한 그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이 입증되심과 같은 이치다[롬 1:20].

기도만 아니라 우리의 순종은 무턱대고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순종이니,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런 순종이 가능해지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 자신 그런 순종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구원이 아무리 완벽하고 은혜로 말미암고 믿기만 하면 되는 "선물"일지라도 내게 일절 효험이 없다. 그래서 믿어야 구원 얻는 것이고 이 믿음은 따라서 절대적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피니의 성경 해석에도 부분적으로 미흡한 점은 없지 않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근본 핵심에서는 그 정곡을 찌르는 것이므로, 그 가르침대로 하면 일반 개신교의 변질되고 왜곡된 인위적인 가르침의 해독에서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피니의 가르침을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따른다면 그것만으로도 천주교나 일반적인 개신교와 같은 미신에서 능히 벗어날 수 있으련만 자기 교파, 교리, 주장의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날 의사가 없으니 매양 그렇게 포로되어 있어 자유인이 되기는 요원하다.

지금까지 설명하면서 그 부적절성과 치명적인 해독을 지적해 온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을 피니가 비이성적이고 비성경적이라 비판했다고 해서 그와 같이 일부 장로교와 같은 반대파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서, 한국 교회에 피니가 전혀 소개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가르칠 때는 성경에서 "네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가 먹혀 들 까닭이 없다.

때문에 기상천외한 해석을 내려 "구원을 이룬다"는 말을 난데없이 "상급(賞給) 탄다"는 의미로 억지 해석을 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다[벧후 3:16].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라"[빌 2:12] 할 정도로 심각하기가 짝이 없는 경고인데도 이를 완전 무시하니 어찌 자멸의 길이 아닌가. 이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3:18] 것을 말함이니 결말이 "멸망"[:19]일 것이야 불문가지다. 왜 원수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기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갈 2:20] 세상 역시 십자가에 못박혔는데[6:14] 이전 믿기 전 그리스도를 알기 전처럼 자기를 위해 살고[고후 5:15] 세상을 사랑하여 이전처럼 세상과 더불어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의 영혼 격이신['육체와 영혼'이라는 양면성에서 나를 육체라 할 때]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이 히브리서 경고를 두고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경고를 위한 경고라고 한다. 그러면 실제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실제 일어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인 성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에덴낙원에서도 그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수용하여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의미로 억지로 딴 방향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의 특점이 있다. 기정 사실, 기존 사실을 이상한 방향으로 풀이하도록 만드는 것이니 그 자신 그렇게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다가 범죄에 이르렀고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 터로서 애초의 버릇대로 행하는 것이다. '죽은 자로서' 구원을 이루려는 것과 '산 자로서' 구원을 이루는 것과 혼동하기 때문에 "대신 죽으심 운운" 하게 된다.

그리스도 없이 구원을 이루려는 것 즉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기를 구원하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려는 것과의 차이다. 전자에서는 구원을 이룸이 실제는 도저히 불가능하여 착각일 뿐인 반면, 후자는 실제로 얼마든지 이룰 수 있고 또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데에서 의미가 갈라진다. 전자에서는 만일 이룰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실제는 절대로 불가능하므로] 자기 자랑으로 끝나는 반면, 후자에서는 얼마든지 이룰 수 있지만 항상 믿음으로 구원 얻었고 은혜로 얻은 선물이 자기 구원임을 강조하므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고 대신 "나의 할 일을 다 하였을 뿐 무익한 종이다"[눅 17:10]는 말로 일관하게 되는 그런 명백한 차이다.

앞서의 설명대로 구원을 생명과 직결시키면, 은혜로 선물로서 얻은 자기 생명을 스스로 지키는 일에 해당되는 것이 후자에서의 "구원을 이룸"이다. 죽음에 이른 첫 사람 아담이나 영원 멸망에 현재 처해져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자기 생명을 지키지 않은 예에 해당된다. 바로 그런 선례를 따라 우리도 우리 생명[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은]을 지키지 않으면 즉 스스로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죽을 것이요 이 죽음은 이제는 아담과는 달라서 "멸망"이다.

왜냐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돌아오는 것으로서의 죽음의 의미는 이미 과거지사이고, 현재 우리 자신이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있다가 신령한 몸으로 복귀하려는 단계인지라 과거사가 되풀이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사부재리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으므로 인간 중에 [부모 처자보다] 가장 가까우신 분 곧 '제2의 나 자신', '또다른 나'로서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들어갈 일이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신다[to yearn jealously] 하신 말씀을 괜스레 하신 줄로 너희가 생각하느냐"[약 4:4,5] 한 것과 같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암흑의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연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님께로 가지 않겠다" 하느냐. 처녀가 어찌 그 패물(佩物, 몸치장으로 차는 귀금속 따위의 장식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으니 그 날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렘 2:31,32]는 말씀으로 경고하심과도 같다.

 

 

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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