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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 소위 "영국 웨일즈 부흥"의 허상 등록일 2016.02.24 13:16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93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찰즈 피니와 다니엘 네쉬-영국 '웨일즈[Wales] 현상'의 이반 로버츠 트리니 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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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부흥

한국 부흥의 경우에는 일본의 강제 침탈이라는 민족적 비극이 일어나 신사 참배 문제로 교회가 극심한 핍박과 배신의 태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미국의 1850년대 기도회 부흥은 곧 이은 남북전쟁으로써 그 불길이 식어져 가는 시험을 당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초대교회 3천명, 5천명씩의 대 회개 운동은 스데반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대 핍박이 일어남으로써 당시 교회는 산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이상의 모든 사실은 교회 자체로서는 전화위복이다. 믿음이 더 공고해져 가고 복음 전도가 확산되는 계기를 이룬 것이다. 어쨌든 마귀의 방해 작업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만은 이상 사실로써도 증명되고 있다. 우리가 언제나 명심할 일은 성령의 역사는 지고(至高) 지순(至純)하다는 것이니 즉 거룩한 것이다. 한 점이라도 우리 마음에 상을 찡그릴 만한 데가 없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상의 여러 사실들은 어디인가 모르게 우리들 마음에 반발심과 거부감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대할 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의 심성이 원래부터 거룩하지 않아서 그 거룩함을 분별하지 못함은 절대로 아니다. 분별하는 것과 실제 행하는 것과의 차이는 엄연한 거리가 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거룩한 것 앞에서는 예외없이 엎드려 부복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사단은 아주 근사하게 실제처럼 모방하지만 그 모방 뒤쪽에는 양의 탈을 쓴 이리의 꼬리 즉 마각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전면(前面)에 나타나 있는 대로의 아주 그럴 듯한 모방에 홀리거나 취하지만 않는다면, 그 뒤쪽(後面)을 유심히 살펴볼 여유가 생기고 그런 여유 있는 안목은 그런 "뒤에 삐죽이 튀어나온 꼬리"를 결국 간파해 내는 것이다. 곧 이어 나타나게 될 적 그리스도의 모든 활동이 이런 식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 속이게 될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1904년 웨일즈 "부흥"을 성령의 역사(役事)라고 단언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이와 같이 이 초자연적 현상을 앞으로의 경계로 삼는 것이다.

단정하거니와, 성령의 역사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사 40:31]과 같은 것으로서 로버츠의 경우와 같은 그런 해괴한 "좌절"이나 신체적, 정신적, 영적 "붕괴"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이 사실은 백 번 강조해도 좋다. 그리고 앞으로 '웨일즈 현상'과 같은 국지적인 규모가 아니라 세계적인 속임수 즉 가짜가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판치려는 바로 그 시대에 우리가 현재 몸 담고 있다는 현실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택한 자라도 얼마든지 속여 넘어뜨릴 수 있는" 초대형 태풍 급 위력을 지니고 임할 것이다. 그래서 멸망의 자식 출현[살후 2:3-12]을 예언하는 바울의 표현을 "strong delusion"이라고 흠정 영역은 번역하고 있다. 아주 대단한 강도(强度) 높은, 웬만한 것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그런 위력을 말함이라 하겠다. 이 '웨일즈 현상'은 바로 그 전조(前兆)라 할 수 있으니 모두 이 점에 깊이 유념할 일이다.

여기서 또 덧붙일 수 있는 것은, 웨일즈의 그 초자연적 현상에서 보듯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회개하여 죄를 자백하고 전도하는 등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회개의 역사와 방불하다는 것이다. 외양으로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을 정도다. 사단은 얼마든지 이를 모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를 묵과하신다는 것이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12]의 차원이다.

이렇게 외면만 가지고는 대개 얼른 분별이 안되어 일반적으로 그 진위를 가려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면 그런 현상의 결과로 일어나는 회개가 모두 가짜라고 속단할 수 있는가 할 것이다. 그런 경우 회개의 역사가 전혀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지나친 판단이라 여기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구원 받지 않았으면서도 구원 받은 자로 스스로 여기는 경우]의 전도를 이용해서라도 구원 받아야 하는 사람은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성령의 역사를 가장하여 나타나는 모든 가짜로 인해 야기되는 결과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회개의 참 모습은 자기 부인에 있음이니 이 자기 부인을 모방할 수 없다는 뜻이다. ①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②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자기 부인으로서, ①, ②를 함께 갖추어야 함이니 ①만 있고 ②가 있든가, ②인 듯 싶어도 ①이 없을 때 이는 가짜인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혈(寶血, 피)을 아무리 찬양하고 선전하고 그리고 회개하였노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급격한 변화를 나타내어 사람이 그야말로 달라지고 선한 행실의 열매를 나타내는 듯이 보여도 그 자체만으로는 그가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판정하기에는 이른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고 하셨으니 이 열매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자기 부인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시간을 두고 나타나게 되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진짜의 특성이다. 그러나 가짜는 냄비 끓듯이 했다가 곧 식어 버리고 만다. 소위 웨일즈 "부흥" 당시 고조되던 웨일즈 사람들의 영적 관심사가 급속도로 식어 간 사실에 많은 사람이 기이하게 여기고 있으나 실은 이상하게 여길 것도 없으니 당연 결과라 해야 옳다. 찰즈 피니의 부흥 역사의 결과[당시 믿기로 결심하여 회개한 것을 말함]가 80%까지 진실되게 남았다는 기록과는 대조가 된다.

하나님의 능력과 너무나 흡사하지만 그러나 마음 한 쪽에 “아닌데...이럴 수는 없는데...이상한데” 하게 되면 이미 그것은 거짓임이 들통 난 상태다. 하나님의 능력은 결단코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정결하고 순수하여 거룩하게 나타나므로 한낱 피조물에 속하는 우리로서는 거부 반응이 일절 우러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그보다 더 순결하고 거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결론은 사단이 하나님의 능력을 아주 유사하게 모방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할 수밖에 없다. 사단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음이다.

로버츠 본인 자신도 나중에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그렇게 반신반의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확정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로버츠 자신이 그렇게 의심한다는 것은 그것부터가 성령의 역사가 아님이 입증되는 대목이다. 사단이 이 세상에서 모방만을 일삼고 속이는 것으로만 일관하는 줄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단이 훼방을 놓을 여백을 남겨두시지 않는 뜻에서라도 일절 그런 불확실한 구석을 허용하시지 않는 것이 모든 성령으로 난 역사의 특징이다.

부르심을 입는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다고 하신 대로, 일시적 감정이나 기분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개의 산물이냐 하는 것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고 확실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은 그런 현상, 그런 역사 자체를 두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냐 마귀의 작용이냐를 놓고 말한 것이고, 개개인의 사정은 그 나무에 그 열매로서 확연히 분별되어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웨일즈 현상'이 1904-5년의 사건이고 한국 부흥도 1907-8년에 일어났다 하여 특별히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즉 한국 부흥이 성령의 역사이니까 '웨일즈 현상'도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냐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동양에서는 그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있을 듯 싶어 그 훼방 공작으로 사단이 먼저 선수를 쳐져 그런 사태를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 부흥은 사단이 하늘 전쟁에서 지고 지상으로 내리 쫓기는 1908년 바로 그 언저리에 놓여 있어 사단의 적극적인 훼방의 손이 상대적으로 덜 미쳐, 선교사들이 작심하고 합력해서 기도회를 넉 달 가량 지속할 수 있지 않았느냐 하는 데에서, 교회 사상 그 어느 부흥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이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진실로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진 회개의 역사인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얼마든지 되풀이해서 밟아 동일한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다. 사단의 손이 덜 미쳤다는 것은 사단이 하나님의 능력을 감히 가로막을 수 있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함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役事)도 사람이 그러한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으므로 사단이 그 믿음을 방해할 수 있다는 그 뜻이다.

개개인의 구원도 사람들이 믿지 않으면 속수무책인 것과 같은 이치다[막 6:6]. 만일 한국 교회 부흥 당시 선교사들이 기도를 중도에 포기했더라면 그런 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하루 한 시간씩 기도로 매달려도 별다른 변화가 감지되지 않다 기도를 중단하자는 말도 나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말대로 중단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도 시간을 서너 시간 더 연장하여 더욱 기도에 매진했다고 하지 않는가.

로버츠 외에도 당시 웨일즈에서는 웨일즈의 영적 부흥을 위해 개인적으로나 그룹별로 합심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참된 회개운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로버츠가 관여된 또는 그의 영향권 내에서의 집회는 로버츠가 그렇게 손놓아 버리자 이내 잠잠해졌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이 참으로 성령의 역사라면 '사람'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친히 역사하시는 것이므로 그대로 한동안 지속되는 것이지 중단되는 법이 없다.

한동안이라는 것은 부흥 역사 후에는 언제나 사단이 개입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지거나 그 믿음이 쇠퇴해지는 현상이 조만간에 닥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개인의 믿음 여하에 따라 나타나고 또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부흥 역사를 논함에 있어 역점을 두고 살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그런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기점으로 하여 꾸준히 상당 기간에 걸쳐 영혼들이 구원 얻는 역사가 지속되어 일어나야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役事)인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해 둘 것은, 칼뱅의 신학에 물들어 있던 당시의 그 장로교 선교사들이나 또는 그와 비슷한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하신 죽음"과 같은 견해를 가졌다면] 당시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그런 합심 기도로써 부흥 역사를 일으키는 주동 역할을 했다고 해서 그런 교리 자체가 정당시되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교리를 수용하든 않든 언제나 핵심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모든 뜻을 행하고 그 일을 함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만 확실하고 그래서 그 모든 말씀대로 복종하겠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비록 그런 교리를 수용했다고 해서 구원 못받을 사유는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면 그런 교리를 버려야 다시 말해 "우리 대신 죽으심"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죽으심"으로 믿어야 구원된다는 조건은 없음이다. 성경에서 오직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요 3:16] 것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4:34/20:21]에 있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것도 그와 같이 하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대신 죽으심"을 믿어도 끝까지 이 사랑의 자세를 아니라 견지해 나가면[히 3:6,14], "우리와 함께 죽으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의 자세를 버리고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요 얼마든지 "구원을 이룸"[빌 2:12]이 되고, 반대로 후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으로 멸망"[3:18,19]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각 사람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 따라 성령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인 교리[성경의 가르침과는 부합하지 않는-예컨대 "육신대로 살아도"(롬 8:13) 구원은 받는다는 식의]에 끝까지 치중하고 쏠리는 고집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자기중심으로 나가면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삶을 회개하지 않으면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롬 8:13]는 경고대로 되어질 것뿐이다.

나중에는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돌아감으로써 어리석음에 빠진다고 해도 당장 현재는 그와 같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 가운데 있어 합심 기도로써 자기 성찰을 하는 중에 죄를 회개하면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는 어김 없이 내려지게 되어 있다. 이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이제까지 순종으로서의 아무 행함이 없었어도 복종하겠다는 회개의 약속 하나만으로써도 하나님은 이를 그대로 수용해 주시어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항상 관건은 이 사랑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마음 잘못 먹으면 식어질 수 있고 이 "처음 사랑을 버릴"[계 2:4]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사랑으로써 과거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로써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가 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다"[마 7:22] 해도 현재 그 처음 사랑의 마음이 아니니, 그 날 심판 때에 가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 하시는 선고를 받게 마련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자유로운 결단의 마음을 중시하시므로 그 사랑의 마음만 굳세고 시종여일하면 그것보다 최상의 것은 없다. 그러나 무조건 회개하면 성령의 선물을 주시는 그런 기계적 작동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으로는 오해하지 말 것이니, 우리의 마음 씀을 이와 같이 절대적인 요소로 보시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 망정 현재는 그 마음이 진실하니 당연히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 결격 사유가 없는 까닭이다.

이 세상은 장차 없어지는 세계로서 사단의 지배력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곳으로서 영원하고 확고 부동한 천국과 같은 곳은 아니므로, 사람들이 갑자기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회개하며 자복(自服)하고 믿는 자들이 되고 교회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든다고 해서 두 손들어 환영할 일은 아닌 것이다. 실질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실제 하나님께 돌아오느냐가 문제이므로, 성령께서 역사(役事)하시는 부흥 집회 역시, 설교자 즉 집회의 주동 역할을 하는 이들 자신의 시종일관하는 기도야 말할 것도 없지만, 주위에서의 누구든 혹은 여러 사람이라도 '제사장으로서의 필사적인 기도'가 필수 사항이어야 하는 사실은 앞서 찰즈 피니와 다니엘 네쉬[Daniel Nash]의 예로써 살펴본 것이다.

찰즈 피니의 부흥 역사에서도 피니 자신이 집회 활동 기간에 시종 일관으로 때로는 금식하면서 기도에 열심일 뿐 아니라, 다니엘 네쉬 및 그와 함께 한 다른 기도의 동역자(同役者, 함께 일하는 이)들이 일심으로 기도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일어난 1857년 미국 부흥도 사람 중심 즉 설교 중심의 부흥이 아니라 기도회 중심의 성령의 역사였다. 한국 부흥도 주동 인물이 없고 오직 선교사들의 기도 중심으로 일어난 기도의 결과였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한국 성도들 사이에서도 기도회가 무시 못할 기세로 곳곳에서 열려 졌다고 하나, 한국교회 자체의 기도보다 선교사들의 기도를 중시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넉 달 간에 걸쳐 하루도 빠짐 없는 네 시간 이상의 조직적인 기도 체제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4시간 이상의 기도회가 넉 달 동안이나 뻗쳐 나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고로 언제 어떤 곳에서의 부흥 역사도 기도 중심의 영혼 구원 위주로 이어져 나가야 그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한국 부흥도 [부흥 역사 이전만 아니라] 역사가 일어난 후에라도 그 진행 과정에서 계속해서 그런 기도회가 지속되었다면 더 큰 역사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면 모든 일이 다 된 줄로나 아는 듯이 기도를 중단하고 말씀 전도와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하는 단점이 있다. 찰즈 피니의 경우와 1857년 미국 부흥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사보나 롤라Savonarola]

이태리 플로렌스에서 로마 카톨릭의 부패상을 통박하고 많은 사람의 부도덕한 생활을 책망함으로써 이름을 떨친 사보나롤라[1452-98]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구현"이라든가 "종교개혁자"의 범주에 든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로마 카톨릭 신도요 또 충실히 그렇게 죽은 사람이다. 단지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의 부패를 있는 그대로 지적했기 때문에 이 일로 미움을 받아 파문당하고 이단이란 죄목이 씌어져 화형의 재로 사라졌을 뿐이다.

그가 로마 카톨릭 신자인 만큼 그가 무슨 행동, 무슨 말을 했든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아무 이유도 없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를 평하는 일부 "그리스도인[개신교인들]"들의 그릇된 이해와 시각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죄를 통박한다고 해서 특별히 종교계(기독교)의 도덕적인 삶을 강력히 주장한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또는 "성령으로 난 것이라"고 간단히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위의 로버츠 현상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성령의 역사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피상적으로 알고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것이 문제다. 성경의 가르침 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아버지의 가르치심"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가 구원 얻을 이름을 인간 세상에 주신 일이 없다"(행 4:12)는 사실에 있다.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무조건 점찍는 것은 성경적 판단의 기준은 아닌 것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도 얼마든지 도덕적 존재로 자처할 수 있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장차 그 절정을 이룰 것이라고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상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불의"를 일소하고 "정의의 법질서" 확립으로 장차 세상을 기만할 것인데 곧 그렇게 할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높여 자칭 하나님 즉 창조신이라 하게 될 것이다.

사보나롤라의 행위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든가 이른바 '종교개혁자'의 범주에 들려면 로마 카톨릭 사제 계층의 비리를 책망하기 이전에 그들이 끈질기게 집착하고 있는 모든 비성경적인 요소,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이 없다"는 이 기조를 허물어뜨리거나 가리거나 희석시키는 모든 미신(迷信)부터 통박해야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미신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마리아 숭배다.

소위 "신(神)의 어머니[the mother of god]"라 했으니 그것이 신격화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들어 반성경적인 교리를 그가 들추어낸 적이 없다. 오직 로마 카톨릭 사제들이 행하였던 갖가지 비도덕적인 비리만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을 뿐이다. 가령 여기 종교인으로서 자선사업을 힘쓰는 이가 있다. 남달리 큰 일을 하는 이로서 세상에 알려져 있다고 하자. 이런 사람도 끝까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경우 죽으면 영락없이 영원한 고통의 불 못으로 들어가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물론이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나 하나님은 그 심중 내막의 모든 실상을 아신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르게 행동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사람은 어떤 일에 뜻을 세우면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내는 일을 해내는 그런 잠재력이 있다. 이 또한 기억해야 하고, 따라서 그런 '큰 일' 자체만으로 하나님 앞에 의(義)로 내세울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인간의 모든 공덕은 그것이 크든 작든 하나님 앞에 헌 누더기 같다고 성경이 선언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자기 부인이 없는 까닭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양심이란 기계장치가 있어 '양심의 평화'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따라서 자기 양심이 추구하는 대로 일이 잘 풀려질 때 그것을 얼마든 확대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큰 낙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팽배해 있는 것은 이런 "큰" 선행을 베푼데 대한 보상 심리 즉 장래 자기 영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감을 부정 못한다. 그런 것을 믿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공로다. 심지어는 그 스스로가 신(神)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이는 교만이다. 한 마디로, 그가 의식하고 있는 것은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조물주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이런 것이 자기중심인 것이다. 이 피조물의 세계에서, 조물주가 만드신 피조물로서 그런 자세가 과연 용납이 될까?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 구원의 방법을 따라야 하는데 끝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데에서 이미 완연한 허물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사보나롤라를 거론하는 것도 사단의 속임수를 알기 때문이다. 진실과 아주 가깝게 가장하여 사람들을 비진리로 끌어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단이므로, 따라서 그 피해가 막심하기에 모든 것의 진위를 가려내어야 할 필요성에서다. 그래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나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을 모든 것의 요체, 핵심으로 삼지 않으면 선행이든 그 무엇이든 절대 가치는 없다.

이 표준을 명확히 하지 않는 그 무엇이든 반드시 훑고 넘어가 그 진위를 구분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항상 핵심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데에 있으니 이 점 우리 각자 스스로를 반성하고 성찰하기를 게을리 아니하기를 "힘써야"[눅13:24/행 1:14/2:42,46/24:16/롬 12:12,13/14:19/고전 15:58/16:10/살전 4:1/골 4:2/엡 6:18/4:3/빌 4:3/딛 3:8,14/딤후 2:15/4:2/벧후 1:5,10/3:14/유 1:3/히 4:11] 하는 것이다.

§  한국 부흥은 1908년 7월 초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사건으로 알려진 사단의 지상 추방 무렵 다시 말해 사단과 그 세력들이 치열한 전쟁 중에 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 압박에 대해서는 이전처럼 제대로의 힘을 발산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가정할 수 있]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단의 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능력을 받을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이니 즉 성령의 인도를 따를 수 있는 믿음이 그만큼 자유로워졌던 상태의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 있기에,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한국부흥의 특징도 회개운동이었고 그 결과 기도, 성경 읽는 일에 열심하는 교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웨일즈의 영적 현상은 그런 후속적(後續的)인 두드러진 특징이 없었다]. 회개의 결실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은 둘 다 비슷하게 나타났으니 즉 밀린 빚을 갚게 되고 모든 부정(不正)이 교정되고 인간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가정 예배도 다시 드려졌다. 전체 사회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앞서의 설명처럼 한국 부흥은 기도하는 것, 성경을 읽는 것 등으로써 성령의 역사로서의 그 두드러진 특성이 드러났는데 반해 '웨일즈의 로버츠 현상'에서는 없었다는 점이 근본적 차이다.

그러면 사단이 천사들과 전쟁 중이라 이 지상의 교회 활동을 방해할 여력이 없어 그리 되었다면 '웨일즈의 속임수'는 왜 일어났던가. 인생 구원을 방해하는 것과 사단이 직접 그런 속임수를 나타내는 것과는 에너지 소모 면에서 전적으로 차이가 나는 일이다. 전자에서는 천사들의 제지와 제동이 따르므로 그렇고 후자의 경우 이를 제지할 반대 세력이 전혀 없는 까닭이다. 왜냐면 사단으로 인한 모든 속임수는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자들의 "심판"[:12] 차원에서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전에는 없던 이런 유례 없는 속임수를 20세기에 나타낸 사단의 저의는 무엇인가. 천사들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력이 인간 구원 사업 방해에 미치지 못할 것을 알고 미리 선수(先手)를 쳐서 성령의 역사를 혼동시키도록 함이었다. 과연 1907년 한국 부흥 앞서 1904-5년에 웨일즈의 그런 유례 없는 영적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인생 구원의 복음 활동을 희석시켜 방해할 목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경원시하게 만들거나[로버츠 자신의 정신적 공황 상태를 두려워하게 함으로써] "부흥 전도 운동"에 물 타기 작전을 시도하여 평가절하하는 목적과 더불어, 그 자신 "성령의 능력"으로 가장하여 곧 이어 활발하게 전개할 속임수의 활동을 위한 안전판을 미리 깔아둔 의미 그것이다.

왜냐면 '가짜'이기 때문에 아무리 근사하게 모방한다 해도 엉성하고 어색한 면이 나타나게 마련인데[이리가 양의 탈을 뒤집어 써도 꼬리 끝은 나오게 마련이라는 말처럼], 장차 적 그리스도의 그런 엉성한 점이 있어도 [일반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착각하고 있는 웨일즈의 영적 현상의 '어색함'과 '엉성함'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이 이를 별로 문제시하지 않도록 인식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적 그리스도를 위한 안전판을 미리 깔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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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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