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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 미국의 기도회 부흥운동 등록일 2016.02.24 13:20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01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중국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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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도회 부흥 운동[Second Awakening]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충돌 사건에서 나타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상 추락과 연결시켜 볼 때 이 무렵은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그 수하 세력과 미가엘 및 그 휘하 천사들이 접전(接戰)을 치르는 시기였음을 감안한다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미처 손을 쓸 여력이 없어 이전처럼 하나님의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을[1907년 한국 부흥에서 20여명의 초교파 선교사들의 기도에서 입증되듯] 전력을 다해 저지하지 못해서 일어난 결과라고 보아, 그렇다면 우리가 [비교적 또는 상대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방해 책동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부흥 때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평소 당연히 일어나야 할 사실들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 결과라 보면 틀림없다. 즉 그 한 때로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래서 한 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너무나 타락하여 그 본연의 자세를 잃어 버려 지금까지 비정상 상태에 빠져 있던 것이 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정상 상태로 복귀하는 데에 그 유일한 의미가 있음이다. 그래서 부흥(復興, restoration, revival)이라 하는 것이다.

교회의 본연의 자세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당연히 지녀야 할 자세도 역시 아울러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스스로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을 깨닫고 그 필연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자세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역사 때 일어나는 현상이 정상이요 그렇지 못한 것이 비정상이요 이상(異狀) 상태인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기도를 하지 않거나 하려다가도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방해를 하면 슬그머니 물러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는 분명 악착같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 기도를 막는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착같이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결론으로 역시 이어진다. 당시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이 에덴낙원["하늘"-계 12:8]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하느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도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해, 좌절시키지 못해서 된 결과였다면, 지금은 이 땅으로 쫓겨나 전력을 다하여 기도를 막고 있는 실태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오직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함이니[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방해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이 기도는 성도들의 자발적인 기도로 말미암는 것이고 결코 강제로 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방해한다고 그냥 주저앉으면 그냥 그렇게 무기력하게 하나님의 사업은 답보 상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에 대한 교훈을 정확히 받고 실상을 알았으니 한국 부흥이나 미국 부흥과 같이 그리고 18세기 모라비아 심령부흥운동처럼[진젠돌프 백작의 주도] 그리고 그 전에 마틴 루터가 혼자 고독하게 로마 카톨릭을 상대로 맞서며 매일 장시간[3시간 정도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기도했던 것처럼 기도할 때가 온 것이다.

이러한 기도를 이 세상 권력자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냥 좌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강제로' 못하게는 할 수 없지만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우리 스스로' 기도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재주와 힘은 있는 것이다. 부흥 역사가 비록 일어났다 해도 그 즉시로 이를 유야무야가 되도록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전력을 다하는 법이다. 한국부흥에서는 그 즉시 일본제국주의의 강점과 신사 참배문제로 핍박이 일어났고 미국 부흥[1857]은 남북전쟁[1861-65]이 일어났던 것이 그런 예이다.

찰즈 피니의 전도 운동도 이 무렵에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다고 반드시 믿음이 식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시험이 크고 많은 사람의 믿음이 여기서 수난을 보게 되고 무너질 수 있는 확률이 크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다. 믿음의 삶을 개척한 조지 뮬러[1805-1898]나 헛슨 테일러[1832-1905]도 동시대인으로서 1850년대다. 헛슨 테일러는 조지 뮬러의 믿음의 삶에서 감동을 받음으로서 그런 큰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1857년의 미국 부흥은 영국에도 영향을 끼쳐 1859년도 아일랜드 부흥을 보게 되었다. 한국부흥도 이 미국 부흥의 정오기도회를 추억, 회상하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정오시간에 맞추어 기도를 시작하지 않았나 한다. 조지 뮬러는 평생 성경을 200독을 했을 정도로 성경을 친근히 했고 주석서 같은 책은 보지도 않고 다른 서책도 거의 보는 일이 없었다. 피니 역시 오직 성경만을 읽고 주석 강해서에 의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조지 뮬러는 하루 두 시간 내지 세 시간은 기도했다고 한다. 이렇게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일당이 천사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하나님의 교회와의 싸움에 비교적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믿음이 비교적 제약과 방해를 덜 받을 수 있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제대로 따를 수 있게 된 결과로 이상과 같은 한국 부흥, 미국 부흥,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조지 뮬러, 헛슨 테일러를 위시한 각 개인들의 믿음의 행적들을 우리가 본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면 지나친 억단일까.

이 마지막 때에 처한 우리가 이런 모든 것을 면밀히 살피고 교과서적 지침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선교열(宣敎熱)에서는 헛슨 테일러,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 응답 생활을 하는 본으로서는 조지 뮬러, 선교지에 나아가 행동할 때에는 한국 부흥[가령 한 선교지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는 단독으로 보내지 말고 둘 이상으로 주님의 약속에 따라 합심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이 그 지침이 되겠고, 국내 전도와 회개운동을 위해서는 찰즈 피니와 다니엘 네쉬의 전도와 기도 활동, 그리고 미국 부흥이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미국 기도회 부흥 운동 역시 한 사람 평신도 기도자의 외로운 기도로써 전국 그리고 세계의 기도 운동으로 번져나간 사례다. 제레미아 렌피어[Jeremiah Lanphier]라는 이름의 한 평신도[사업을 하다가 불경기 때라 물러나 있던]를 풀턴 스트리트 교회[Fulton Street Church]가 유급 전도자로 채용하였는데 이 사람은 열심히 전도하며 기도 중에 한 착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즉 당시는 경제적 공황이 심하던 때라 실업자들이 거리를 떠돌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곤고한 중에도 시간이 남아 돌았던 것에 착안하여 그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에 집중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1857년 9월 21일 점심 시간에 시간이 생기는 대로 자기 교회당에 나와 누구나 기도할 수 있도록 교회를 개방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시간을 맞춘 것이 아니고 정오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한 시간 안에는 언제든 와서 기도하고 또한 언제든 자유로 나갈 수 있다고 광고한 것이다. 처음에는 불과 몇 사람만 나오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숫자가 모이기 시작하여 마침내 거국적인 전도와 기도 운동으로 확대되고 발전한 것이다.

전국으로 이 기도운동이 펼쳐지면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1858년 초에는 제레미야가 기도회를 열고 있던 풀턴 스트리트 교회만 해도 회개하고 새로 들어 온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주로 제레미야와 같은 사업가들이나 사업가 출신들이었다. 그 해 5월 경에는 80만 뉴욕 시민 가운데 5만명이나 회개하는 등 맹렬한 기세를 떨쳤다. 이를 본받아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기도 집회가 속속 열려 마침내 전국으로 번져 갔다. 심지어는 해상에 떠 있는 군함 내에서도 회개 운동이 일어 함내 분위기를 휩쓸어 일신시킬 정도였다.

피니[당시 66세]에 따르면 1857-58년 사이에 벌어진 부흥운동에서 전국적으로 매주 5만명이 회개하였다고 한다. 이런 미국의 부흥 소식은 바다 건너 아일랜드에도 전해져 젊은이들 네 사람이 함께 모여 매주 기도회를 엶으로써 마침내 이 열기는 북아일랜드만 아니라 영국 전역에 퍼졌다. 이런 사실에 고무되어 이반 로버츠가 10만명 회개를 목표로 기도하였고 실제로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고는 하나 금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한 최초의 열기를 감안할 때 신빙성을 결하고 있다.

조지 뮬러는 기도응답으로 개인 생활을 할뿐더러 복음 선교사업도 믿음으로 하여 큰 역사를 이루었는데 그렇게 주님의 뜻을 행하고 뜻을 따라 응답을 받는 삶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다고 그 자신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동감하는 바가 많다. 우리도 전적으로 그런 삶을 살든지 아니면 최소한 그 기본 정신만은 본을 삼아야 할 것이다.

이 1850년대에서 1907년에 이르는 시기에 일어난 교회사의 획기적인 사건들이야말로 향후 교회 활동과 사명 수행에서 나침반이 될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이런 복음 활동을 희석시키기 위해 1904-5년의 웨일즈의 '가짜'가 일어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본이 된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는 데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정상적인 모습을 보게 됨으로써 크나큰 교훈을 얻는다.

사랑, 이 말을 혼동하지 말 것이다. 이반 로버츠도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시라는 사실은 반드시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히 12:29]이시라는 사실과 항상 병행되어 함께 나타나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즉 자기 부인이 바탕이 되고 두려워 떪으로 인한 회개가 선행되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찔려 내가 어찌할꼬"[행 2:37], "무서워 떨며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까"[16:29,30] 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회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만이 '이반 로버츠 현상'의 골격이었다. 이런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편파적인 데에서 "그리스도의 '대신' 죽음이라는 허무 맹랑한 이단 사상도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反)성경적인 "구원"을 일반적으로 그들의 핵심되는 교리로 삼고 있는 교단에 몸을 두고 있어도, 이미 소개한 조나단 고프쓰[Jonathan Goforth]와 같은 이들은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고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가르치심을 따라 얼마든지 죄를 이기고 죄를 짓지 않는 삶으로 일관했으니 이들은 그런 교파에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그 생활 양상은 180도로 달랐었다.

그렇다고 그들은 자기네 교파를 자신의 복음 활동을 얽매는 굴레로는 생각하지 않는 이상 굳이 그 교파를 탈퇴할 필요는 느끼지 않았으나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 위주로 오직 어찌하면 복음을 제대로 세상에 알리느냐에 우리의 관심이 있는 이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처신하고 조처할 일이다. 오직 핵심은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그것을 생활화하는 데에 있음이다. 형식에 매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나 그러나 형식이 하나님 사업에 지장이 된다면 그런 형식이나 체제는 과감히 탈피함이 당연사리다.

다시는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표현은 다르고 형편 따라서는 모순되기도 하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틀에 짜여진 편견에 사로잡힌 교리적 해석 그대로를 답습하여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절대로 순종하는" 이 한 가지만은 핵심인 고로 이 점에서 분명하면 그는 제대로 믿음에 들어선 것이다.

"The word of God alone is our standard of judgment in spiritual things; that it can be explained only by the Holy Spirit; and that in our day, as well as in former times, he is the teacher of this people," 조지 뮬러가 한 말이다. 영적인 일을 판단함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잣대이며 이 말씀을 풀이해 주시는 선생은 오늘날에나 과거에나 오직 성령이시라는 뜻이다. 피니와 같이 조지 뮬러 역시 성경 주석서나 강해서나 기타 그 어느 인간의 생각으로 나타낸 글을 대하기보다 단지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음을 체험으로 확신하게 되다고 평소 가르친 것이다.

율법의 요구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하여 하나님의 모든 율법적 요구를 다 이루셨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지 물러도 당시의 그런 신학 사조에 물들어 있었다]. 인위적인 신학적 해석일 따름이지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지 못해 즉 지키지 못해 범죄함으로써 죄인으로 죽게 되었고, 우리는 또[아담의 죄의 육신을 물려받아] 죽은 자이기 때문에 즉 우리 몸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인즉 다시 말해 자기 중심의 속성이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롬 8:4]이라 한 것은, 말 그대로 우리가 육신을 따르는 대신 성령을 따라 행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그 행함이 바로 "율법의 요구[the requirement(s) of the law]를 이룸[to fulfill/to meet fully]"이라는 뜻이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가. 한 몸 체제에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하나님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아닌가. 곧 자기 부인인 것이다.

그러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런 일을 어찌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말인가.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지조차도 명확히 알지 못하고서 하는 말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우리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을 가리켜 '율법의 요구를 이룬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죽음은 '죄의 요구'이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더러 그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피조물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영물들은 지키지 않음으로써 영원 멸망에 처해 있고 아담은 그 신령한 몸을 잃고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항구적으로 돌아와 버림으로 죽은 자가 되지 않았던가. 산 자가 되면 능히 이루고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자였기 때문에 율법이 명하는 것 즉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여 지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산 자가 되지 못해서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산 자가 되게 함이요 이렇게 산 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생은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였다[마 8:22]. 자연계에 속한 몸을 하고 있으니까 죽은 자다. 원래 산 자로서의 인간[범죄하기 전 아담]은 신령한 몸으로서 이런 자연계의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능력이 있음이니 따라서 자연법칙을 따라 늙고 병드는 일도 없고 현재의 우리 인간의 몸이 외부의 물체에 의해 손상을 입는 일도 물론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죽음도 없으니 영원히 사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배운다는 것이[요 6:45] 바로 이 죽은 자가 된 사실을 배움이다. 뿐 아니라 죽은 자임을 알면서 산 자처럼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려고 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또한 함께 포함한다. 따라서 일구월심 죽은 자를 벗어나 산 자가 되고자 하는 일념밖에 없는 것을 또한 함유한다.

바로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배우지 않고서는 아무나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평소 말씀하신 대로 목마른 자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물을 찾게 되고 병든 자가 의사를 찾는 법이고 불 뱀에게 물려 죽게 되어 있는[민 21:9] 자에게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적합하고 의미 있는 것이다[계 21:6/요 7:37/3:14/막 2:17]. 바로 그 뜻이다.

따라서 그런 의식이 없이 단지 죽기가 무서워 즉 영생하는 것이 좋아서 그리스도께 올 수는 없는 것이니, 왔다 하더라도 반드시 실망하고 도로 물러가게 되어 있음이다[요 6:66]. 왜냐면 자기중심 일변도로 흐르는 현재의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와 같이 자기중심을 회개하지 않는 한 그래서 죽을지라도 이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대로 살리라는 확고한 결의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견디기 쉽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는 너무나 간명한 것이므로 혼란스러워 하거나 어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무엇이 구원이냐, 구원 얻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삼위일체 원리' 하나로도 간단하게 설명되는 것이다. 삼위일체 원리로써 비로소 설명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만사 만물 만상이 다 짝의 개념으로 되어 있고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상식 차원에서 거의 사람마다 알 수 있는 것이나, 단지 삼위일체 원리는 이런 모든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였다는 그 의미인 것이다.

이는 아주 중요하나 만유의 창조 및 존립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모습을 근거로 하여 만유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러함이다. 삼위일체 원리는 간단히, 양면성의 원리다. 더 쉽게 말하면 인과론을 완벽하게 풀이한 것이다. 양면성이라는 것은 그 바탕이 둘이 하나로 되어 있음을 항상 전제하는 것이므로 인(因)과 과(果)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를 구성해 있음을 이치적으로 설명함이다.

만사 양면이 있다는 통상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단지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확증함이다. 따라서 인생 무상(無常, 모든 것은 다 생멸 전변[生滅轉變]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불교 용어]을 논하기 전에 상주함 역시 무상과 똑같이 함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삼위일체의 원리로 증명된 것이다. 무상 하나만을 보기 때문에 진리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넉넉히 판단할 수 있으니, 양면성을 말하지 않는 것은 무조건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원리는 아예 처음부터 불교의 교리가 전연 근거없는 허무 맹랑한 것임을 입증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말을 한다. “부처님은 신을 의지해서 진리를 구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서 인간의 본성을 깨달았으니, 곧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도 없어진다’는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바탕으로서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이것이 절대가 아니면 저것도 절대가 될 수 없다. 모두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보면 아집이나 독선에 빠지게 된다. 아집과 독선이 사라지면 여기에서 영원한 자유가 존재하게 된다”.

알쏭달쏭 애매 모호한 말을 하는데, 그 "자연법칙"은 저절로 생겨났던가? 인(因) 없는 과(果)인가? 말(言語)의 유희(遊戱)일 뿐이다. 돌쩌귀[문짝을 문설주에 달고 여닫기 위한 쇠붙이로 된 암수 두 개의 물건]가 빠져 있는 문이다. 자연법칙의 핵심 또는 생명은 인과론에 있다. '인'이 없으면 '과'로서의 자연법칙도 없다. 또 자연의 법칙을 말하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생기어 상대적으로 존재하여 연기(緣起)의 이치를 깨달았다면서 ["연기론"이 인과율인 것이다] 어찌하여 '무상' 하나만 존재한다고 하는가. 

그 상대적인 의미의 영주(永住)함을 함께 생각하지 않고 '무상' 하나만 생각함 자체가 바로 그들이 부정하는 바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바탕"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연기"의 이치는 인과론이다. 절대적이라는 말 자체가 상대적이니 상대적인 말과 대칭이 됨으로써 그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우리 같은 피조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개념도 비로소 있기 때문이다.

영원성을 덮어놓고 절대적인 개념으로 볼 아무 근거도 없다. 영원성은 한시성[限時性]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말이다. 이것이 소위 "연기"라고 말하는 이치의 진상이요 제대로 된 설명이다. '상대적'인 것을 인정하면 그 '절대적'인 것을 인정함이다. 절대적인 것이 없고 상대적인 것뿐이라면 왜 불교의 교리를 하나밖에 없는 진리라고 우기려는가. "상대적"이라 말하려면 반드시 불교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성경의 진리도 동시에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 모두가 상대적이니 진리라는 것은 본래부터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리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왜냐면 그 하나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진리라는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상대적인 것은 비진리 곧 진리가 아닌 것 다시 말해 거짓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 둘 중 하나는 부득불 거짓임이 필연적이다. 위에서 밝힌 대로 인과율도 제대로 설명 못하는 판이니 불교의 가르침이 바로 그 거짓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이 달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밖에 없는 결론을 따라 그 절대적 가치를 믿기 때문에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상대적인 것이 있어 달에 갈 수 없다는 것도 동시에 인정하였다면 감히 과감하게 달에 착륙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절대적이라는 뜻은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다. 무상함 하나만 보는 것이 바로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 개념인 것이다. 이런 모순과 심한 자가 당착 속에서 무슨 진리를 논하려는 것인가.

무상함은 자연계를 말하고 상주함은 영계를 말하여 이 둘은 서로 대립하여 존재하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자기 실상은 알지 못하고 그런 모순되고 허황된 말을 예사로 "진리"인 양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립하여 만유가 존재하되 하나로 조화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이 법칙은 3운법칙으로 증명되어 있다. 그림을 그려놓고 설명하듯이 하나님 친히 이 삼위일체의 원리를 3운법칙의 구조를 통해 밝히시고 있음을, 역시 그림과 같이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위의 동영상은 바탕은 하나이지만 '바로 놓았을 때'와 '거꾸로 놓았을 때'의 상판이 정반대다. 이것이 양면성이고 만유가 짝으로 존재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로 놓았을 때'가 원인이고 '거꾸로 놓았을 때'가 결과이니, 왜냐면 그림은 한번만 그렸지만[因] 그것을 거꾸로 즉 반전시켜 놓으면[果]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이 되어 그림의 의미가 서로 달라짐이다. 그래서 '바로 놓았을 때'의 그림이 대(大), 주(主)가 되고 그것을 '거꾸로 놓았을 때'는 소(小), 종(從)이 됨을 가리킨다. 

이런 '대소, 주종'[큰 것이 작은 것을 이끌고 작은 것은 큰 것을 따르므로] 관계에서는 큰 것이 작은 것을 "낳았다[파생시켰다]는 의미로서 인과 관계가 형성된다. 이상 동영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서로 다른 의미로서의 '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인 것이다. 삼위일체 원리에서 '바로 놓았을 때'를 갑[A]이라 하고 '거꾸로 놓았을 때'를 을[B]이라 하고 실질적으로 하나, 한 바탕임을 가리켜서는 병[C]이라 한다.

이상 동영상에서 강조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본래의 바탕이 '하나'라는 것이고 동시에 둘로서 나타내는 의미가 서로가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에서 말하는 빛은 병이고 입자는 갑이고 파동은 을이니, 파동과 입자는 전혀 다른 성질이지만 이 둘은 원래 하나로서의 빛인 것이다. 즉 하나로서 존재하지만[실질적으로는 한 개의 사물이지만] 동시에 둘로서 존재함[내용으로는 전혀 같지 않고 반대이니까]이다.

그래서 "존재하기"로는 셋으로도 존재한다는 것이 3위1체의 원리다. 다시 말해 하나로서도 존재하고 둘로서도 존재하고 셋으로도 존재한다. 셋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용이 나타나지기는 둘이나 그 둘이 항상 하나로서의 형상으로 자신을 나타내므로, 둘로서 나타냄도 현실이고 하나로서 나타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어서 이 '현실적 바탕'을 무시할 수 없기에 편의상 셋으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 삼위일체 원리인 것이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또한 반드시 양면으로 전개되어 있다. 대칭[대립] 개념으로 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는 까닭이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현재 우리가 존재한다고 인지하는 모든 것은 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것이 대립적인 위치에 반드시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전자 즉 그 가시적인 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후자 즉 불가시적 세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우리가 공기를 보지는 못하나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이 불가시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해서 그 존재마저 부정한다는 것은 반(反)과학적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가시적인 자연계마저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 양분되어 있는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하물며 자연계와 영계[불가시적인 세계]가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으로 나누어져 존재함은 능히 미루어 확인할 수 있고도 남을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만유는 결과인 것이다. 이 결과에 대한 원인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이 결과를 "피조물"이라 하고 그 원인을 "조물주"라 하는데 무슨 하자가 있다는 것인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영계이건 자연계이건 그 고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결과'로서의 피조물의 특징이다. 그러면 이와 대칭[대립, 상칭]되는 '원인'으로서의 조물주는 일정한 형상이 없으시다. 이것이 대립 개념이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딤전 6:16]이시다. 다시 말해 조물주께서 "자기 형상"으로 만드신 것이 피조물인 것이다. "형상"이라면 그 대립 개념은 "본질, 실질"이 된다.'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으로 확연히 여기서 구분된다. 고로 '본질'은 그 '형상'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것이다. 그 외로는 절대로 인지될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하나님은 그 지으신 피조물을 통해서만 우리가 그 존재를 실감하게 된다는 성경의 선언이 이 때문에 나온다[롬 1:20].

여기서 핵심 사항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시기 전에 그 아들을 자기의 형상으로 파생(派生)시키셨다 즉 "낳으셨다" 함이다. 다시 말해 조물주 하나님은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창 1:26/11:7/요 14:23]로서 계시니 곧 아버지와 아들로 계심이다. 그러므로 앞에 소개한 그 불교 관련 이론대로,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바탕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하나님으로 즉 절대 신으로 착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의 신으로서 정확히 알고 무슨 비판이든 할 일이다.

상대적 개념의 피조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도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 자신께서 상대적으로 계시니 곧 아버지와 아들로 계심이다. 여기서부터 삼위일체의 원리가 확립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법칙은 물론 모든 피조물 세계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이 삼위일체의 원리이다. 그야말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 여기서나 통하게 된다. 왜냐면 모든 원리와 법칙과 이치와 체제와 구조가 삼위일체 법칙이라는 이 한 뿌리에서 비롯되고 여기서 벗어남이 없는 까닭이다.

그 “부처님"은 '결과'만을 놓고 보았을 뿐 그 '원인'을 간과 또는 아예 무시했으니 아무 지혜도 지식도 진리도 없다. "이것이 절대가 아니면 저것도 절대가 될 수 없다"가 아니라 절대가 있으니 상대가 비로소 있는 것이다. 상대는 절대라는 것을 전제해야 개념화할 수 있음과 같다. 최초 "절대"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시기 전이었다. 그러나 자기 형상으로서의 아들을 만드신 이후 '절대'는 사라지고 이제는 '상대'의 세계, 짝의 세계, 양면성의 원리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상대'만이 있었다"는 말과는 다르다. 처음에는 '절대'였으니 엄연히 존재하는, 살아있는 개념이다. 그 '절대'에 대립되는 '상대'의 세계가 이제는 되어 있다는 그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생기고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도 없어진다" 했는데 한번 생기면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요 사라지는 법은 없다. "있다"와 "없다"의 대립 개념은 이미 과거지사로서 지나간 것이다.

지금은 온통 '있다'뿐이다. '있기' 전의 상태가 '없다'였으니 즉 창조로써 모든 것이 '있게' 되었고 그 창조 이전에 '없다'가 통했으나. 지금은 '있음'의 세계이므로 더 다시 '없다'는 것은 되풀이되어 거론되지 않는다. 고로 생겨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는 일은 이 우주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둘 일이다. 결과만 말하고 그 원인은 자기 멋대로 빼어 버리는 데에 무슨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으랴.

그래서 엉뚱한 데에다 아전인수 격으로 만들어낸 것이 그네들의 소위 "연기(緣起)의 이치"다. 마구잡이로 다지기를 시작하여 "이것도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하여 "내가 없으면 인간고도 없고 인간고가 없으면 나 역시 없다"는 식으로 자기를 세뇌시키고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연기"를 자기네 가르침의 핵심 부분이라고 무리하게 강변을 하나, 앞의 지적대로 "사라진다"고 하는 전제부터가 잘못 되었으니, 모두가 첫 단추 잘못 끼우는 바람에 제대로 된 결론이 나와질 수가 없다.

이런 억지 논리로써 "모두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하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보면 아집이나 독선에 빠지게 된다"고 하니, "상대적"이라는 의미부터 알고 무엇이 "절대적"인지 그 뜻부터 알고 나서 말할 일이다. 그런 무리한 것을 고집하는 것이 바로 "아집과 독선"이니 여기서 벗어나야 "영원한 자유"에 들어가게 되는 첫걸음이 됨을 명심할 일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제는 "모두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보면 아집이나 독선"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요 멸망이다. 일개 피조물이 되어 있는 위치를 망각하고 그 상대가 되시는 조물주를 부정하고 간과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인 것의 추구가 다름아닌 자기 중심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머리가 있고 그 몸이 있어 몸의 각 지체는 머리를 위하고 머리는 몸[의 각 지체]을 위하는 데에서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 '우리' 의식, '한 몸' 의식, '하나' 의식임을 앞에서 거듭 강조했다. 위의 동영상에서 보듯이 온전히 말 그대로의 하나다. 한 개의 움직이는 그림이다. 두 개도 아닌 오직 하나로서 갖가지 표정 또는 [이 동영상에서는 대립되어 상반된] 내용을 연출하는 것뿐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를 다시 한번 더 설명한 것은 이 법칙이 모든 피조물과 관련되는 문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 삶의 원리 또는 애초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뜻]대로 살아 행복하게 영원히[죽지 않고] 사는 것을 보장해 주는 법질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가 한 몸을 이루어 그 지체 역할을 하는 것이 사람 삶의 이치다. 이 이치대로 하지 않을 때 죄[하나님의 창조의 원 의도에서 이탈한 것], 악[모든 좋지 않은 것 즉 선이 아닌 것], 불의[올바르지 못한 것], 불법[법질서를 어기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가 극히 간명하다 했거니와 여기에 그 간명함이 있다. 그러한 삶의 법질서를 첫 사람 아담이 어겼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이런 인간고[생로병사]의 화신(化身) 격인 자연계에 속한 몸을 입고 인간 세상이 무상(無常)의 대상이 되어 있음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 의지로써 자유 선택을 할 수 있는 영원한 생명체로서 만드셨는데 그와 같은 삶의 법질서를 어기고 깨뜨림으로써 생명과는 대립 개념으로서의 죽음과 고난에 필연적으로 이른 것이 오늘날의 인간 비극이다.

그러므로 일단 죽음에 이른 이상 스스로 생명을 취득할 수는 없으니 죽은 자가 어떻게 산 자처럼 움직인다는 말인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산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죽은 것이 현실일진대[바로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운다 함이다-요 6:45] 스스로로는 일절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어버이 자정(慈情) 에 의해 새로 창조되는 길[방법]밖에 없으니, 이 삼위일체 법칙[앞에서 피조물과 관련된 일로서 이 원리를 떠나서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나와 하나 되시는 길이다.

즉 한 몸 체제에서 벗어났으므로 다시 그 한 몸 체제로 복귀시키시는 것인데 이 법질서를 벗어나서는 일절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하나님 친히 당신 자신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니 철저히 법질서를 따라 움직이셔야 피조물과의 그 한 몸 구조가 유지되므로] 까닭에, 말하자면 친히 나 자신이 되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므로 그 영[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시어 내게 주신 영원하신 선물로 영원히 나와 함께 사시게 되니 이것이 구원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되어 있고 또 똑같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 나의 이웃들과도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내 이웃들도 나와 똑같이 그리스도를 공유하고 있음이니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내가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므로 이를 가리켜 다시 출생하였다[요 3:3], 새로 창조되었다[갈 6:15/고후 5:17] 하는 것이다. 이제 산 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산 자로서 삶의 법질서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지켜야 죽지 않고[왜냐면 아담처럼 지키지 않으면 역시 아담처럼 죽는 결과가 되므로] 영원히 산다고 해서, "그러면 도로 '행함으로 구원된다'는 말이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가?" 하겠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은 완벽한 것으로서 영생에 이르는 것임은["산 자"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영원히 사는 자"라는 뜻이다] 십자가 상에서 죽음 직전에 회개한 강도가 영생에 들어가게 된 사실로써 성경은 확증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기를 "영원히 살게 되었으니 당연히 이제는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냐?" 하는데 아담은 죽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닌데 왜 죽었는가 하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영물들 역시 영원히 사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왜 멸망의 처지에 놓여 이제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이 되어 있는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죄를 짓지 않은 거룩한 천사들도 있는데 그것은 왜 그런지를 생각하려 하지 않는 불찰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자유를 주신 것은 자유를 주시지 않으면 사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것이기에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일단 주시면 완전한 자유이지 반(半) 자유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면 자유고 아니면 아니다. 따라서 자기의 영원한 운명까지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음은 지당하다. 절대로 조물주께서 미리 정하시든 나중에 정하시든 정하실 일이 아니다. 피조물 자신에게 달린 문제로 완전 일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영생 대신 영원한 형벌에 처하심은 당자가 그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따르실 뿐이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스스로 정한 것은 변동이 없도록 만반의 조처를 취하심이 하나님이 하시는 몫이다. 우리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도 우리 각자 자신이 그렇게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로"[히 1:9] 뜻을 정하고 여하한 유혹이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을 나타낸 결과를 따라 이루어 주심이다.

또 성경에 명시한 대로 악인은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시고 귀로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시어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지 못하게"[마 13:15] 하시는 것은 악인은 종국적으로 형벌에 처하심과 같은 이치를 따르심이니 그들은 처음부터 악을 선택하기로 즉 자기중심으로 끝내 나아가기로 마음을 정한 결과를 따르심이다. 이는 처음부터 똑같은 피조물로 창조하셨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악인으로 또는 의인으로 만드시지는 않은 것이다. 각자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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