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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는 변화을 마다하지 않는다 등록일 2016.02.24 13:33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388

 

그래서 아담이 죽었고 영물들 중에 일부는 다시는 회개할 기회가 없이 영원한 멸망에 현재 처해져 있는 상태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정한데 대해서 하나님께서 일절 관여하실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하셨으므로 나중에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또한 이를 변경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친히 우리 위해 사람이 되시도록 즉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 주실 정도로까지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 위해 죽으신 정도라면 그 이상 더 하나님께 요구할 것도 알려고 할 것도 물을 것도 없다. 더 이상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바랄 것인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대한으로 하신 것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로서는 백 프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복종하든지 않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자동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그대로 변동이 없으리라는 생각은 너무 철부지이다.

더군다나 성경이 이렇게 모든 사실을 밝히고 있는 마당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 이성적 판단에 문제가 있는지라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절대로 차별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예를 들어 그처럼 "수고를 많이 하고"[고후 11:23] 그 자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열망할 만큼 열심인[롬 9:3] 바울 사도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자기 몸을 계속 쳐서 복종시키지"[고전 9:27] 않음으로써 "육신대로 살"[8:13] 경우 가차없는 멸망 즉 "버림 받는"[고전 9:27] 것임을 바울 스스로 천명한 것이 아닌가.

아담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창조된 것이다[롬 5:12]. 그러나 범죄로써 즉 삶의 도리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죽은 것이다. 영물로서의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역시 영생하도록 창조된 자이나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음과 똑같은 이치다. 산 자가 되어 있다는 의미는 자기 부인을 한다는 뜻이니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이다[고후 5:15]. 이런 자세가 되어 있지 않고는 한 몸 체제를 유지할 수 없고 한 몸 체제가 아니면 행복한 삶은 곧바로 죽음, 멸망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은 없다. 항상 이분법으로 정해진다. 이것이 인과론이다. 양면성의 원리다. 둘이지 셋, 넷도 없다. 둘로서 하나됨, 오직 이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관계가 서로 얼키설키 얽혀 관계와 관계 속의 만물 만상을 구성하고 있음이다. 항상 기본 단위는 '둘의 하나됨'이다. 모든 인간 관계의 기본 설정이 가정으로서 남녀 둘이 한 몸이 됨에 있음과 같다. 이런 관계에서는 반드시 둘은 대등하지 않고 대소, 주종 관계로 되어 있으니 왜냐면 인과 관계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것이 그 때문이다. 왜냐면 남자에게 여자가 나왔으니 '인'과 '과'의 관계, 대와 소, 주종 관계임이다. 그래서 양성평등은 이론적으로도 존재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양성평등이 오늘날 전세계적인 지배 사상이 되어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논리를 떠나 이 세상 신 악령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곧 마왕(魔王)의 지배 아래 철저히 예속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라 하는 것이다. 그는 용[dragon-계 12:9/20:2]이다.

한 몸 체제에서 사는 것이 산 자의 마땅히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니 이 한 몸 구조에서는 필연적인 것이 자기 부인이다. 최초의 범죄는 아담의 경우에서나 악령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경우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의심하고 불신하는 데에서 시작한 것이다. "사람을 불신한다"는 것은 그 상대자에 대한 갖은 모욕이 된다. 하물며 "하나님을 불신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보통 모멸이 아니니 이를 성경은 한마디로 "교만"이라 하여 멸망의 앞잡이로 규정한다.

그래서 믿음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고 확언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히 11:6]. 공연히 시답잖게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는 것이 교만이다. "밤이 맞도록 우리가 수고했어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는데 다시 그물을 던지라 하시니 말도 되지 않는다" 하는 조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그러하나 말씀하시니 그대로 하겠습니다"[눅 5:5]로 나간다. 베드로의 자세였다. 완연한 차이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실 것이요,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할 것이다"[사 55:7-11] 하심과 같다.

이와 같이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의 소유자 베드로는 믿음에 관한 또다른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주고 있다. 광풍에 배가 뒤집혀질 지경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만일 주님이시거든 저를 명하셔서 물 위로 오라 하십시오" 하니 "오라" 하시므로 이 말씀대로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가다가 광풍과 격랑을 보고는 무서워하여 곧장 바다 속으로 빠져 가며 소리 질러 "주님, 저를 건져 주십시오" 할 때,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 자"라고 베드로를 책망하신 것이다[마 14:28-31].

한 몸된 구조에서는 머리가 몸을, 몸이 머리를 위함이 필연이고 필수이다. 모든 피조물은 위의 동영상[그림 63]과 같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인 것이다. 즉 본질적으로 한 몸인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에게서 모든 피조물이 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고 다른 데에서 생겼거나 했다면 하나일 수가 없고 그 때는 별개다. 같은 본질일 수가 없다. 하나이므로 실체[실질]와 형체[형상]와의 관계인 것이다.

세상에 종교도 많고 사상가도 많았지만 한 몸의 이치로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을 핵심 내용으로 강조하거나 설명하거나 주창한 예가 없다. 우리 신체 조직을 들어 말하는 것이므로 알기 쉬우면서도 퍽 친근한 것이지만 이를 외면하고 딴 소리들을 하는 것은 머리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핵심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항상 겉돌기만 하는 것으로써 그침이다.

우리 모두의 어버이로서 하나님을 머리로 삼지 않고는 한 몸이 되는 것 자체가 허튼 소리로 끝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런 삶의 이치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시인하고 성경을 그 말씀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정작 핵심으로서의 이 진리에 이르지 못함은, 구원에 이르는 모든 것은 하나님 친히 계시해 주심으로써 사람이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의당히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두드리지를 않기 때문에 진리의 문이 열릴 수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아미타불의 왼편에서 교화를 돕는 보살[부처의 다음 가는 지위에 있는 성인]로서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면 곧 구제해 준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한 몸 체제에서의 친히 머리되심과 대비해보라는 뜻에서다. 구약 성경에도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구원[구제]하시는 사례가 빈번하다. 그러니 이는 관세음보살에게 구조 요청을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머리와 몸의 구조에서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니 즉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나타내 보여 주심이다. 이 자기중심의 죄악 세상에서 인간들에게 이런 한 몸 체제의 초보 지식을 넣어 주시는 단계였다. 즉 실체에 대한 그림자로서의 의미가 모세 율법 시대였다. 그 그림자에 대한 실체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정식으로 '몸과 머리' 관계를 가르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창조주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우리는 한 몸 관계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 각자는 그 몸 구성에서 지체 역할이다. 각 지체의 각 부분인 것이다. 즉 구조를 요청하고 그 소청을 들어 주어 구제해 주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숫제 한 덩어리 한 몸이 되어 희로애락을 함께 하고 서로 똑같이 나누는 것이니 실로 이보다 더 이상적인 관계는 없다. 사는 도리 또는 방법으로는 최고의 경지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은 머리가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하는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어느 쪽도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하는 여기서는 그 어떤 불행도 고통도 불만도 불평도 있을 수 없다. 더군다나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 친히 이 관계에 들어오시어 친히 그 머리가 되어 계시니 그 어느 한 구석이라도 부족한 것이나 미흡한 것이 있을 까닭이 없다. 말 그대로 나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 지으신 일체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는 현위치다.

사람으로서 이 이상 소원하는 바가 있을 수 없고 바라는 바가 있을 수 없게 된다. 말 그대로 완벽함 그뿐이다. 그러니 어찌 이를 사랑하지 않고 배기리요. 보화(寶貨)도 그런 보화가 없고 가치(價値)도 그런 가치가 없다. 이런 보화를 그냥 편안히 앉아서 받아 챙겨 누리기만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순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일생을 다 바쳐 보람 있게 수고하고 고난을 지천으로[in great abundance] 받고 죽음까지 불사하는 등 무엇이든 감수(甘受)하겠다는 자세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고"[빌 2:12] 항상 "조심하는"[고전 10:12] 자세를 취하라고 성경이 서릿발 같은 경고를 내리면서도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는 추임새[판소리에서 고수가 창의 중간중간에 흥을 돋우기 위하여 삽입하는 탄성으로서, ‘좋다’, ‘으이’, ‘얼씨구’ 등]도 아주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자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마 13:44-46] 하심과 같은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함이다. 물건을 아는 자가 결국 그 물건을 최종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이치 그대로다. 천국과 영생의 가치를 진정 아는 자만이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사랑 않고 기꺼이 미워할 줄 아는 자만이[요 12:25]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하고 지고지순(至高至純)하면서도 너무나 알기 쉽도록 간명하므로 이와 비슷한 것도 이 인간 세상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그렇게 남을 나 자신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머리와 몸 관계'의 아주 간단한 이치로 설명을 해도, 성경을 믿는다는 이들까지도 그것을 그리스도께만 국한하는 것으로 멋대로 해석해 치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를 섬기는 자로서 항상 있다"[눅 22:27] 하신 말씀은 머리로서 몸을 위하게 되어 있는 이치를 단지 말씀하심인데도 그것을 그리스도의 초인적인 사랑 또는 겸손 정도로만 치부해 버리고 우리 역시 몸[의 각 지체]으로서 머리를 전적으로 위해야 하는 것으로는 생각이 미쳐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육신"[롬 7:14-8:13] 타령만 하며 어쩔 수 없이 죄 짓는 죄인임에도 구원은 받는다는 망상 속에 젖어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벧후 3:16].

위의 그림에서 ④와 ⑤는 전혀 별개[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다. 이렇게 서로 불가분이 되어 있는 관계는 어느 쪽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그런데도 자기를 위함으로써 이런 하나되는 이치를 어기고 범죄하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든 아담이든 생명 아닌, 생명과는 대칭 개념으로서의 죽음과 멸망으로 자연적으로 귀결된[처분을 받은] 것이다. 그 스스로 그렇게 택한 결과다.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칙을 버리고 그 반대 방향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탓이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아담이나 이 점에서는 동일하고 새로 창조된 우리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을 경우 그들과 동일하지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모든 산 자는 한 몸 체제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므로 그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뜻을 따라야 함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어찌 몸의 각 지체가 자기 구실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구실을 못하면 죽은 것이 아닌가.

따라서 죽으라면 죽고[이 세상에서만 한정해서 하는 말] 고난 받으라면 고난 받고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우리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고 운명하여 천국으로 직행한 강도와는 달리 우리더러는 그 어떤 분부를 내리셔도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자기 부인의 특징이니 만일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때는 아담이나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처럼 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므로 우리가 돌이켜 즉 교만한 자세를 버리고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것이다[마 18:3].

이와 같이 생명의 법칙은 아주 간단 명료한 것이다. 그래서 죄가 무엇이고 의와 선이 무엇인가 할 때 자기 부인이 의이고 자기 중심 곧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악이고 죄라는 사실을 아주 선명하게 대표적으로 역사적 실례를 배경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기에 우리는 이공 순신과 '나'원균의 교훈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너무나 다 잘 아는 공동체 의식으로 살되, 하나님 앞에서 원리원칙을 따라 철저하게 본격적으로 '산 자'로서 산다는 그 뜻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공동체 의식의 삶[이공 순신으로 대표되는]은 그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런 그림자에 불과해도 그런 극명한 대조를 이루어 그 공과(功過)가 그와 같이 현저하게 나타났다는 그 뜻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핵심 골자는 이뿐이다.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이 점만 마음에 아로새기면 그 어떤 신학적인 논쟁도 필요치 않다. 그런 것에 구애되어야 할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그렇게 우리가 구원되는 방법이 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고전 15:14-18] 외에 달리 있을 수 없다는 그 점만 차이가 분명할 뿐이다. 죄악은 자기만 망칠 뿐 아니라 이웃들까지도 해를 끼치고 전체를 파멸에 몰아넣는 암적 독소를 지니므로 생명의 체제와는 분리, 격리될 수밖에 없음에 죽음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런 부류의 피조물은 격리시키는 장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악인에 대한 형벌 차원이라기보다, 의인에 대한 보호 차원인 것이다. 세상 일에서도 악인이나 죄인은 일반 사회로부터 차단시키는데, 세상의 것은 그 그림자에 불과하나 장차 오는 세계에서의 실제 상황은 영속적이고 또한 본격적인 것이다. 그것이 "장차 올 진노(震怒)"[눅 3:7]의 뜻이다.

악인과 의인의 차이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분류해서 창조하신 것도 아니다. 스스로가 자신을 만드는 것이므로, 악인은 그 악을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이요, 의인은 악을 행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 것이다.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다.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을 것이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 것이다.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0-23].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않을 것이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다.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할 것이다.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 것이니,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도록 하라"[:24-32].

바로 이상과 같은 말씀을 따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것이니, 얼마나 급박한가. 섰다고 안심할 틈이 없으니 안심하고 있는 순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음이다. 섰다고 생각하는 다음 순간에는 이미 넘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닌가.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이 아닌가. 오늘날 비성경적 또는 반(反)성경적 풍조는 한번 구원 얻었다고 태평이라는 데에 있다.

구원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다. 영생을 주시는 것이 구원이고 그리고 영생을 하나님 한번 주셨으니 절대로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는 일이 없다는 착각에서 그런 어림도 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영생을 주시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시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영생을 팽개쳐 버리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아주 엉뚱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늘 강조하는 양면성 또는 동시성에서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것만 생각하는 오류다.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 버림이다. 우리의 자유 선택에 의해서 위의 말씀처럼 스스로 의인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 또한 악인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두 의인으로 만드셨다. 처음부터 영생하는 자로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도 아담은 스스로 죽은 자를 만든 것이다[롬 5:12],

영물들 중에서도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약령들은 스스로 악령이 되었으며 반면에 거룩한 천사들은 스스로를 의롭고 선한 영들로 만든 것이다. 만들었다기보다 선하고 의롭게 만드신 그 뜻을 잘 받들어 자기 본분을 지키고 자기 할 몫을 다하고 빗나가거나 뻗대지 않았던 것이다. 아담 역시 자기 생명을 지켰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요 마땅히 경고 말씀대로 따랐더면 죄인이 되었을 리가 없다. 이와 같이 문제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의 예를 보아도 그런 것이다.

선하게 창조하심을 받은 영물들이 악령들이 된 것처럼 우리도 얼마든지 악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 말 것은, 그러면 거룩한 천사들은 왜 그렇게 거룩한 천사들로 남아 있게 되었던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우리가 절대로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 말 것은, 그러면 왜 아담은 죽었으며 선하고 의로운 천사들은 왜 악령이 되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되었던가. 순리를 따르면 되는 이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진리를 따르고 비록 당장 목숨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그 뜻을 변치 않으면 될 일이다.

진리가 무엇이며 선하고 올바른 것 즉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한 몸 체제에서 머리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가. 간단하고, 하나도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있을 수 없다. "사람아, 주님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公義)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함과 같다.

즉 '한 몸 구조'로서의 삶의 체제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가 되었으니 지체된 도리를 다함으로써 머리의 지시를 따르고 절대로 자행자지(自行自止, 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할 것이요 이웃을 같은 몸의 같은 지체 곧 자기 자신처럼 여겨 위하여 섬기는 자세로 변함 없이 나가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요구하실 것이 없는 것이다. 영물로 치면 바로 그렇게 하여 거룩한 천사들로 남는 길이었다.

따라서 그렇지 않은 것은 한사코 배격함이다. 두 번 다시 고려해볼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므로 일거에 박살 내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사람이 되어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으로서 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자기중심으로 나가는구나!" 하고 주님처럼 일갈하고 물리치면 그뿐이다[막 8:33]. 죽더라도 그런 식으로 나가면 그것이 태평이다. 엉뚱한 곳에서 "태평하다" 하고 있으니 일이 제대로 풀릴 턱이 없다.

자행자지하는 것을 가리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이라 했는데, "그러면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가" 할 필요가 없다. 왜 굳이 자신을 악인의 위치에 두려는가. 의인의 위치에 두면 안되는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아니하는 것도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있다. 악인은 그 악을 마음대로 하려 하고 의인은 그 의와 선을 마음대로 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의 개념이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산 자로 만드심과 동시에 의인으로 만드심에 있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도록"[히 1:9] 만드심에 있다. 이것은 억지로 되는 일은 아니고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을 확증해"[롬 5:8] 보이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우리를 억지로 죄 짓게 만들고 악인이 되게 하던 [우리의 속 사람은 의를 좋아하고 선을 행하려 함에도 불구하고-롬 7:22] "육신"[7:14-8:13] 다시 말해 "죄의 몸"[6:6]은 "멸해진"[:6] 것이다.

의인으로 우리를 만드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함이 이 때문이다. 산 자와 의인은 같은 뜻이다. 죄인과 죽은 자 역시 같은 범주에 속한다. 산 자가 죄인일 수 없고 죽은 자가 의인일 수가 없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3:12] 함은 모두가 죽은 자가 되어 있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가리켜 요한 사도는 분명히 "처음부터 범죄하는"[요일 3:8] 자가 되어 있는 "마귀의 일" 곧 죄 짓는 일을 "멸하려 하심"[:8]이라 한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이라는 말씀은 우리를 산 자로 만드시고 동시에 의인으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의인은 말 그대로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요 "의를 사랑하고 불법 곧 죄를 미워하기"[히 1:9] 때문에 의인이다. 미워하는 죄를 짓고 악을 행할 리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상황이었다[롬 7:24]. 마귀의 일을 멸하셨으니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스스로 악을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것이니 전과 같을 리가 없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이 의이고 선이요 하기 싫은 것이 죄요 악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을 안하는 완전 자유인이 된 것이다[요 8:32,36/고후 3:17/롬 8:2]. 이전과는 딴판이 된 것이다. 과거에는 악을 원치 아니하나 악을 행했고 선을 행하기를 원하나 그 선을 행할 수가 없었으니 죄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게 즉 죄 짓지 않게 된 것"[롬 6:6]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 즉 우리를 구원하신 것 다시 말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여전히 죄를 짓고 육신 가운데 있다면서 죄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은 그 대상이 아님이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눅 5:32] 의인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니 왜냐면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으로 자처하는 바리새 파 사람들은 그들이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함을 통박(痛駁)하시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사람은 의인이 되는 것이다.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그런 일은 이 우주 천하에는 있을 수 없다] 의인으로서 새로 창조되었고 의인으로서 다시 출생했고 의인으로서 비로소 출발했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음으로써 "육신"이 파괴된[롬 6:6]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 곧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이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오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니, 이는 곧 '둘이 하나됨'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바로 그 관계를 말하는 것이므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이므로 자기를 위하지 않고 둘이 하나를 이룬 상대를 위할 때는 죄가 존재할 수가 없다.

죄는 자기중심으로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인데[고후 5:15] 서로가 상대를 위하는 둘이 하나됨에서는 원천적으로 죄는 차단되어 있음이다. 자기가 아닌 상대를 위해야 둘이 하나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다"[요 7:18] 하심과 같다.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하나됨에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다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죄인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영생하게 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구"자도 모르는 성경에 대한 완전한 무지 탓임을 알 수 있다.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상황으로 말하면 거의 전부가 이런 미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굴레 속에 갇혀 있는 실태 그대로이다. 무신론자나 세상 종교에 빠져 있는 이들이나 똑같은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영생을 법질서 차원에서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죄가 그래서 생겨났고 죽음이 그래서 온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영생 곧 죽지 않고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을 말함이다. 자연계에 속한 생명체도 창조 후 지금까지도 연속되어 오고 있음과 같다. 그들은 개체적으로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나 자기를 재생시켜 오늘에까지 창조 당시와 똑같은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음이다. 그러나 인생들만은 영혼이 있으므로 개체로서의 죽음은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고로 비극이요 처참한 죽음의 실태라는 것이다.

살면 올바르게 살아야 함이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최대한의 행복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 최대한의 행복 유지는 한 몸의 체제로 사는 것이다.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은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그 결과로 거두는 자기 확대, 확충, 확장의 풍성을 의미한다. 최대한의 행복을 보장하는 지혜다. 그러면 자기 부인을 않고 자기중심이 되는 경우 최소한의 행복만으로 그치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고 곧바로 죽음으로 통한다.

이렇게 극과 극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있는 것의 반대 개념은 통째로 '없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한 것뿐이다. 성공 아니면 파멸뿐이다. 그 외 달리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것 아니면 저것일 뿐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조심하여" "두려워하고 떨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선과 악의 개념은 여기서는 생과 사의 개념으로 직결된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다.

모든 것은 이 삼위일체의 원리에 의해 설명이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전생이니 윤회니 환생이니 하는 것도 그렇다. 이 세상이 전생이고 이 이전에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 이 법칙에 의해 드러난다. 왜냐면 양자(兩者) 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대칭[상칭] 개념이다. 제3, 제4로 되풀이될 수 없는 것이 양면성의 철칙이요 인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이 있으니 결국 오는 세상밖에 없다. 그 오는 세상을 기준하면 이 세상이 그 세계의 전생(前生)이 되는 것이다.

즉 원인은 이 세상이고 결과는 오는 세상인 후생에서 나타나게 마련이다. 딱 양자 관계로서 한정되어 있고 계속 전생이 연달아 연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니 삼위일체의 법칙이 엄정히 작용하기에 그렇다. 따라서 전반기는 지극히 짧은 대신 후반기 세상은 영원하다. 전생으로서의 이 세상은 불완전한 반면 후생으로서의 오는 세상은 완전하다. 전생이므로 원인이 되고 후생은 그 결과인 것이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철저한 양자(兩者) 구도(構圖)다. 대칭 구조다. 내세로서 종결되고 더 이상 전생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한부이면서도 일견 부조리하고 불완전하지만 장차 오는 결과로서의 세상에 대해 그 원인이 되는 의미에서 이 세상의 의미는 막중하니 비중으로 따지면 가히 영원 세계와 맞먹는 중요성을 지닌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임에도 허랑 방탕 허송세월만 일삼으니 실로 비극적 현실이 아닌가. 악령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눈이 감겨져 끌어가는 대로 끌려가고 있다[고전 12:2].

가정 교회운동(House/Home Church Movement)

미국의 이른바 "House/Home Church"라는 그룹도 인터넷을 통해 그 존재를 알게 되었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성경 해석상 문제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단지 순수하게 성경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과 그 원래의 모습을 그들이 찾고자 노력하는 점만은 평가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과거 유럽의 '왈도' 교회를 소개했고, 중국의 '왓치만 니[Watchman Nee]' 교회 등의 활동상도 말하게 된다.

종교개혁 이후 다시 교권화하고 세상 종교 체질로 변질되기 시작한 서방 교회의 비성경적 교회 운영으로부터 과감히 자주성을 선언하여 일으킨 왓치만 니의 '가정교회운동[Home Church Movement]'은 과연 시의적절하여, 훗날 중국 공산당이 중원 천지를 철권통치하면서 다른 교파들은 교회당 폐쇄와 교역자 말살 등으로 다 붕괴되었지만 평신도 주축의 이 왓치만 니의 '가정교회'만은 즉각 이에 적응 대처하였고, 어떤 논자(論者)에 따르면 초대교회 이후 가장 혹독한 핍박 중 하나라 일컫는 중국 공산당 치하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5천만 이상이라고 추산되는 성도들이 중국 땅에 건재한다고 추측하고 있을 정도다.

왓치만 니의 성경 해석에는 동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그가 저술한 책("The Normal Christian Life")을 그 누구에게도 권장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이른바 '가정교회'라 해서 전부가 다 왓치만 니의 교회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교회 활동만은 성경적이 아닐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한국에도 그런 교회 활동이 그 무렵 전개되었다면 북한 교회가 지금까지보다는 활성화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왓치만 니의 활동에서 그 교회관이 성경적이라는 사실만은 우리는 인정한다. 이는 특별히 무슨 전문 지식이나 혜안이 필요한 것도 아니요 오직 성경을 읽고 상식대로 판단하면 누구나 내릴 수 있는 결론일 따름이다. 미국이나 기타 지역의 이른바 "집교회[House Church]" 운동이나 그와 유사한 교회 활동도 자생적으로 얼마든지 세계 어디서나 전개될 수 있고 또 그런 초대교회 형태로써 존재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우리의 확신은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뿌려진 곳에서는 어디서든 얼마든지 그와 같은 양상의 복음 활동이 전개되고 발전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현재 그룹 교회 형태로 활성화되어 있는 중국 교회도 반드시 왓치 만 니의 교회만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왓치만 니의 활동을 통하여 그 교회관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안 이상 비록 그들과 횡적 연관성이 없다 하더라도 자생적으로 돋아난 다른 교회들 역시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초대교회 형태로써 복음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도하심 받는 교회 활동인 이상, 그리스도의 말씀이 뿌려진 곳에서는 어디서든 얼마든지 그같은 복음 활동이 전개되고 또 발전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북한에도'지하교회'가 물론 있으나(하나님의 교회인데 누가 감히 말살하리요) 중국교회만큼은 큰 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북한 땅에서 '지하교회' 아닌 가시적인 교회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무관하게 한낱 종교지도자연하는 '정치꾼 목사'들뿐이다.

한국교회도 중국교회처럼 가정교회 운동을 벌였다면 오늘날 사정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초대 교회형태는 이 가정 교회/집 교회이다. 왜냐면 어느 시대에나 핍박은 있게 마련이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각자의 몸에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하나님의 뜻을 누가 감히 막겠는가. 더군다나 오늘날은 다니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우리가 현저히 목도하고 있는 터이므로 바울이 예언하고 요한 계시록에서 미리 말한 "악한 자 곧 멸망의 아들"의 출현이 이제 시간 문제로 남아 있어 사정은 더욱 그러하다. 대대적인 핍박은 필연이다.

국가 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때 나타나는 교회 형태

북한의 이른바 "교회(가정 예배소)"가 그 표본이다. 이하는 인터넷에 소개된 내용으로 참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CBS 자료에 의하면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북한에는 봉수, 칠골교회 등 선전용 교회당 건물 외에 가정예배소라는 것이 있다". 10여명(주님의 12명 제자처럼 우리로서는 12명 단위도 무방하다) 단위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 소규모 공동체는 "북한 기독교계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해온다고 한다. "남한교회가 ‘건물교회’ 중심이라면 북한 교회는 ‘가정예배소’ 중심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 무자비하게 가해지는 종교탄압에 살아남기 위해 ‘소단위화’와 ‘지하화’가 필수적이었다. 수십 년 간 이 같은 형태가 북한사회에 고착되면서 지금은 익숙한 형태로 굳어져 버렸다". 이와 관련, 1985년 방북한 세계교회협 관계자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기독교 연맹이 평양에 교회 하나를 짓자고 했을 때(당시는 85년으로서 북한에 건물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이를 실질적으로 무시한 것은 이들 '가정교회'였다.

"북한 크리스천들은 30여년 이상이나 개인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려왔기 때문이다....오랫동안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별 쓸모없고 겉만 번지르르 한 교회건물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실상은 그런 수작이 정부의 함정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다. 이런 지하 가정교회 형태는 북한만 아니고 종교를 탄압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인 현상으로서, 중국의 ‘처소교회’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그 자료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가정 예배소는 장로, 집사등 평신도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에 10여명의 목사만이 있었다는 사실로 미뤄보면 당연하다". 또 이런 말도 덧붙인다. "따라서 일부 가정 예배소에서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목사들의 설교 테이프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통제교회(정부의 통제를 받는) 목사들의 설교 테이프를 듣는다고 하니 대외 홍보용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형태의 통제교회로 이들 가정교회가 전락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런 종류가 520여 곳이라고 숫자까지 세고 있는 것을 보니 더욱 그러하다.

"평양, 남포, 개성 등 특별 또는 직할시에 30여곳씩, 평안남도에 60여곳, 그 외 도시에 40여곳씩 존재하고 양강도와 자강도 등 산간지역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니 계획적으로 그 같은 곳을 세워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북한교회 관계자들은 국제회의등 기회 있을 때마다 ‘가정교회에 지원할 VCR’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 종교자료라고 하여 또 다음의 글이 있어 소개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는 기독교도연맹의 기본 조직단위로서 가정교회가 다른 나라의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기 시작함으로써 가정교회의 구성과 예배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정교회는 1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예배에서는 1930년대 중반 이후 한국장로교회가 사용한 신편찬송가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들이 방문자들을 통해 드러났다."

조선 기독교도 연맹은 처음부터 김일성의 삼촌인 강양욱 아래 조직되어, 성도들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탄압의 앞잡이가 되어 온 악명 높은 집단임은 모두가 알고 있다. 각 지역의 가정교회들은 이 기독교도 연맹의 지도를 받게 되어 있으며 기독교도 연맹은 매월 가정교회에서 행해질 설교 방향을 제시하고 지역위원회 사무실에서 가정교회 신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례전을 거행하고 있다 하니 그들 산하의 소위 가정교회들이 어떤 성격인지 알 수 있다.

1988년 북한을 방문한 캐나다 교회협의회 대표들이 기독교도 연맹의 신학적 입장을 묻자 그들은,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습니다...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을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답변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 같은 판에 박은 입장 표명은 이미 1947년 강양욱이 외국 기자에게 한 말 그대로이고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

위에 소개한 북한의 이른바 "교회"-통제교회-는 이미 북한 현지에 존재해 있던 가정교회를 본따 만든 집단들로서[아니면 강제로 접수한 형태] 앞서 지적한 대로 대외 홍보용의 어용단체들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참된 신앙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사전 책략이기도 하다. 그런 조직들을 통하여 북한 지하교회들을 흡수 또는 세뇌화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로부터 종교 탄압국이라는 여론이 비등하자 북한에도 가정교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그런 대외선전용으로도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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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나름 인식하기 나름이니 항구적인 실패로 보느냐, 악착 같은 끈기로 보느냐, 후자로 본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엡 6:18].
악착 같이 끈기 있게["with all perseverance"-英譯] 기도하기를 항상 힘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기 부인이니 즉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우리가 구원 받아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함이니
사사건건 주님께 기도하여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쉬지 않고 기도함"[살전 5:17]이 우리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저 굴려 올라가던 '일[work]' 덩어리를 제 위치에 올려 놓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핍박을 받아도 온갖 불이익을 당해도 목숨을 버려도 드디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우리의 일은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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