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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 중국 웟치만 니의 "적은 무리" 운동 등록일 2016.02.24 13:37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41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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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왓치만 니의 "적은 무리" 운동[Little Flock Movement]

사도시대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의 교회 역사를 일별해보면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첫 300년간은 핍박이 계속하던 때로서 교회 건물이니 제도적인 교역자 양성이니 하는 것은 몇몇 특수 지역을 제외하고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콘스탄틴 황제 이후에는 교회가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국가적 보호와 지지를 받으면서 급속도로 타락하고 변질되었다. 그렇게 타락하고 변질된 것을 교회라고 할 수 없을진대, 종교개혁이 15,6세기를 전후해서야 활성화되었음을 감안한다면 그러면 교회 활동은 거의 일천 년 넘도록까지 장기간 갑자기 정지된 것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럴 리는 없다. 맨 앞에서 소개한 이른바 왈도(Waldo)파의 [또는 다른 이름으로] 복음 활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그 교파는 오늘날도 남아 있어 당시를 증언하고 있을 정도다. 그들은 무자비하고 악마적인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체적인 건물이나, 제도권 내에서의 교역자 양성 등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로마카톨릭 사상에 젖은 이가 아니고는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은 맥락을 따라 다시 말해 핍박 받은 초대교회의 형태를 본받아, '웟치만 니[Watchman Nee]'로 알려진 중국의 한 평신도를 중심으로 가정 교회 운동("적은 무리" 운동/Little Flock Movementㅡ눅 12:32)이 시작되어, 거의 반세기 이상에 걸친 중국 당국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건실하게 그 줄기찬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숫자가 혹자에 따르면 3천만 내지 5천만 또는 그 이상으로도 헤아려지고 있다 한다.

왓치만 니가 강조하고 가르친 것은 그의 책자들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데 그 글들이 원작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번역자들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 있으니만큼 꼭 그의 주장이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우선 그 줄거리에 담긴 내용만으로 볼 때 덕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한번 훑어본 뒤 읽기를 접어버렸다고 앞에서 말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교회는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데에 그 생명력이 있는 것이지, 어떤 교리에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므로, 겉으로 어떤 특정 교파에 소속되어 있다 해서 그런 외양으로만 사람들의 신앙을 저울질할 수는 없다.

그 소속 구성원들 개개인의 믿음을 보면 그와는 상관없이 진실로 성경적인 믿음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므로 여기서 독자의 오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강조하지만, 왓치만 니의 그와 같은 교회 형태 상으로 본 활동만은 성경에 가르치는 바 정도(正道)를 따라 행하는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과연 그 중국교회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살아 있는, 그리고 승리한 교회로 지목되고 있다는 평가를 내는 논자도 있을 정도다.

공산정권으로 해서 교회가 박해 받기 이전에 이미 왓치만 니는 그런 복음운동을 전개했던 바, 이는 박해를 받을 것을 예상하고 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명시한 교회 형태가 바로 그 같은 형태임을 알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고 실천한 것뿐인데 핍박이 닥치자 거기에 아주 이상적으로 적응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핍박을 당하자 다른 교단의 교파는 교회 건물이 폐쇄됨과 동시에 그 존재마저도 사라졌지만, 왓치만 니의 가정교회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그럴수록 교세가 더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왓치만 니가 그런 형태의 교회 운동을 벌인 것도 중국에 파송된 구미 선교사들의 '종교형태'적 교회 운영에 회의를 느껴서였다고 한다. 이런 자주 정신은 당연한 것이다. 북한의 가정교회와 중국의 가정교회의 일반적인 차이점은, 북한교회는 현재의 가정교회 형태가 핍박 속에서만 부득불 통하는 비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반해, 중국교회는 처음부터 그런 형태야말로 초대교회 당시부터 전승되어 오는 정상적인 교회 형태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런 확신 속에 복음 활동이 그 모든 핍박 중에서도 활기 차게 계속되고 있다는 그 점이다.

전자의 경우 만일 오늘이라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면 당장 교회 건물부터 짓고 교역자들을 초빙하고 신학교를 짓기에 바쁘겠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전혀 그런 것 없이 그 색깔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전과 같은 복음 활동을 계속 이어 갈 것이라는 그런 근본적 차이다. 북한에서 그런 소그룹으로 모이는 것을 “교회”라 하지 않고 단지 “가정 예배소”라 자칭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마땅히 "교회"인 것이다.

현재에도 북한의 경우 그 활동이 항상 주춤주춤하고 자신감이 없을 수 있는데 반해 중국의 경우는 마치 깊이 뿌리 박은 나무처럼 견고하고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정한 건물을 점유하고 날과 시간을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제도적으로 양성한 교역자를 두는 체제하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든 저렇든 어떤 특정 규격과 형식에 매이는 규격품이 아니라는 데에 생명체의 특징이 있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제도권 내의 사람들이 예를 들어 왓치만 니 같은 복음운동을 비성경적이라 또는 이단이라고 보는 데에 문제가 있고 이런 관점이 성경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재삼 강조하는 것뿐이다. 여기서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의 극심한 핍박 가운데에서도 반비례로 오히려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확산되는 것이 중국 교회라고들 말하는데, 이는 비단 왓치만 니의 ‘그룹 교회’ 운동 때문만 아니라, 앞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믿음의 기도로 초교파 교회 운동으로 약진해 나간 헛슨 테일러의 중국 내지 선교회 활동 역시 그 밑바탕이 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도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역경과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의 기도로 일꾼도 얻고 필요한 자금도 얻는 등의 강행군을 거듭한 헛슨 테일러의 믿음의 거대한 발자취는 교회 선교사상에서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다. 국토나 인구나 모두가 방대한 가장 거대한 나라인 만큼 이같이 두 거대한 교회사적 가치의 운동이[왓치만 니의 국내 전도운동과 헛슨 테일러의 해외 선교운동이 맞물려 결합한] 이룬 결과는 그 규모로 보나 의미로 보나 아마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헛슨 테일러 역시 그 선교 이념이 서구식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국식 교회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복장도 항상 중국인 옷으로 지냈다.

 세상의 핍박과 교회 형태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새삼스럽게 교회 형태를 논하는 이유는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게 되어 있는 근원적인 데에 있다. 그리고 세상 종교처럼 그런 종교형태를 취하게 되면 믿음과 실제생활과의 괴리를 필연적으로 자초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전자의 경우 항상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어 현재의 북한, 중국, 베트남, 이슬람 여러 나라 등 신교의 자유가 없는 상태로 전개될 사태를 항상 예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요 신(神)인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세상에 군림해 있어 그 악한 세력의 적대시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하나님의 뜻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우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 친히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그 남으신 고난을 마저 채우시는 데에 있음이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 받음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 받음이라 했다[빌 1:29].

그렇다면 핍박 받는 북한이나 중국 교회는 우리보다 은혜를 더 많이 받는 불공평불공정이 된다. 하나님의 일에는 이런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단지 우리 스스로 그런 은혜를 우리 선택에 의해 받고 있지 않다는 그런 의미다. 그 증거가 종교화한, 그래서 영원히 이렇게 핍박 없이 지낼 것 같은 태세로 교세를 과시하는 기형적인 '건물 중심의 대형 교회' 지향성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고난을 마저 채우는 것은 우리가 머리되신 주님과 하나 곧 한 몸으로 통해 있다는 증거로도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 받는 교회는 그 훌륭하고도 확실한 증거를 받고 있는 반면 그런 고난 없이 편하게 지내는 우리는 그 증거에서 쑥 빠져 있는 결과가 되므로 이런 불평등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이 평등이 되고 공정공평하기 위해서는 모든 교회가 빠짐 없이 예외 없이 일괄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 중에 들어가 함께 하나가 되는 영광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는 고난, 핍박, 환난과 동일 선상에 있어 동의어처럼 취급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당연한 현실이라 바로 인식해야 함이다. 그런 인식에서 출발할 때 즉 하시라도 핍박과 탄압을 예상하고 있을 때 그 교회 형태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북한에서와 같은 형태여야 함은 불문가지다. 세상 종교에서는 종교 생활과 실생활[일상생활]이 구별되어 있다.

종교 생활은 특정 장소, 특정일, 특정 의례에 맞추어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거기에 따라 시행되는 종교의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일상생활일 수도 없고 또 매일 삶에서 강요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렇게 세상 종교화했다는 것은 실제 삶과는 동떨어진 것이 되도록 만들어버린 이 세상 신(神)의 음모와 흉계에 의한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애당초 하나님의 인간 창조 당시부터 제정된 삶의 법질서, 생명의 원리를 따라 항상 변함없이 평소의 삶을 사는 데에 그 골자가 있고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고 죽은 것"이라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이 목적을 위해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대로 이미 오래 전에 거대한 세상 종교를 그리스도의 이름을 도용하여 설립한 후 요긴하게 활용하고 있고 이에 덩달아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히 따르고 철저히 성경적임을 자처하는 복음적인 교회마저 이에 동조하는 오늘날의 극심한 혼란상이 야기되고 있다.

여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처를 취할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이다. 일례로, 교회당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면 우리의 몸이 성령께서 임하여 계시는 성전이라고 하는 성경적 개념과 상충된다. 의미상으로도 그렇거니와 더 중요한 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신 그 삶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측면보다 가시적인 것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약점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 해결점은 초대교회에서 보인 대로 즉 사도행전에 묘사된 대로의 교회 설립 원칙을 따르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이 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 운동도 그 일환으로 태동된 것이다. 이미 핍박 가운데 놓인 북한이나 중국 등지의 교회는 새삼스럽게 이런 운동이 필요치 않은 것은 거기 형제들은 자연발생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그러므로 아직 그런 정도의 핍박이 가해지지 않는 비교적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지역에서 역점을 두어 전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터이면 '평화 체제'로부터 '전시 체제'로의 인식 전환에서 오는 형태 탈바꿈이라 할 것이다. 교회에 무슨 "전쟁, 평화"가 있으랴 하겠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상 그 태동 때부터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상태에 돌입해 있는 현실이다. 말하자면 영적 전투 태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을 그 특성으로 삼고 있다. 단지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마치 세상과 밀월관계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에 있다.

다시 말해 영적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치면 평화체제처럼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굳이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고 이런 현실이 무척 서글픈 것이다. 이상 설명한 것을 이제 몇 가지로써 세부적으로 다시 간추려보면 아래와 같다. 따라서 현재의 교회 형태와 체제로 교회 운영을 할 경우 고려할 점일 수도 있다. 그리고 'CITHM 교회'가 나아갈 방향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고 하겠다. 'CITHM' 교회라 함은 이 글에 제시된 여러 가지 사항에 찬동하고 그와 같은 정신과 신념으로 교회 사업을 하려는 이들을 총칭한다. 이 경우 문항 앞에 [CITHM 교회]라는 표시를 해두었다.

'CITHM'의 기본 잣대

1. 교회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신(神)과 전투하는 교회로서 그런 전투하는 형태를 갖춤이 당연하다. 이것이 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 - 집 교회 운동-고전 16:19/롬 16:5)의 골격이다. 이 세상 신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경로는 물론 정신적인 측면 즉 우리의 사고(思考) 생활을 통해 침투해 오는 것이지만 우리의 육체는 이 자연계에 예속된 것이기에 자연 이 육체에 끼치는 갖가지 고통을 목표하여 공격을 가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바 이것이 핍박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삶의 원리원칙이요, 이 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교회이다. 이것이 CITHM의 기본 정신이다. 즉 그리스도 복음의 '종교화'를 극력 배척하고 '생활화'를 항상 그 주제로 삼는다.

3. 전투하는 교회로서는 기동성, 침투성, 결속력(結束力) 이 세 가지가 그 형태 또는 기능의 3대 요소다. 거대한 건물은 기동성에 저해된다. 오늘날의 기업체 활성화 측면에서도 언급이 되는 저해 요소다. 거대한 건물 속에 수용된 인원으로만 한정되는 편협한 인식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 있고 그 숫자만 지탱하려다 보니 그 이상 더 숫자 늘이기에 다시 말해 전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어 있다. 교역자(敎役者)들 역시, 이 사람들만 잘 간추려도 큰 성공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타협해 버리는 유혹을 받는다. 한마디로 기동성이 없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집단을 통해서는 교회 전진과 발전은 기대 난망이다.

침투력은 이런 기동성 즉 소수(小數)로써 침투하여 소수로써 안착하고 소수로써 다시 침투해 들어가는 일을 무한대로 되풀이하여 진행하게 하는 것으로서 가정에 파고 들고 직장에 파고 드는 등 구석구석이 소규모로 파고 드는 전략전술이다. 소규모로 진행하니까 이합 집산을 자유로이 할 수 있어 안미치는 데 없이 확산될 수 있다. 인구 희소 지역인 농어촌도 이런 형태로는 얼마든지 튼튼하게 교회가 설 수 있다.

구성 인원이 이렇게 소수이니 자연 상호간의 유대가 강화되고 친화력이 증진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자명하다. 즉 결속력이다. 결속력이 없으면 이미 진행한 모든 것도 일시에 붕괴될 위험을 안고 들어가게 된다. 건물을 지어 올리고 신학 정규 교육을 받은 정식 교직자를 초빙하는 등의 종교 형태를 갖추는 것에 신경을 쓰다보면, 이상 세 가지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힘을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까지 우리는 지겹도록 체험해 왔다.

4. 성령을 교회 주인으로 새로이 인식하는 바탕에서는, 성령께서 하실 일을 인위적인 것으로 대치한 지금까지의 관행을 과감히 타파하고 탈피하는 일이 시급하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항상 의식하여 교회의 머리로 삼고 매사를 진행하기를 힘써야 하는 까닭이다.

5. 여기서 말하는 '초대교회' 형태는 핍박 받던 초대교회 당시 및 현대사에서의 구소련과 동구권 그리고 지금까지 그 형편이 여전한 북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사우디, 파키스탄, 이란, 수단 등지에서 겪고 있는 현지교회의 모습을 그 기본으로 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은 80년을 그런 압제 아래 살았으므로 그동안 우리가 현재 아는 대로의 교회 활동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한 중국은 오늘날에도 별반 다름이 없어 그 반세기를 맞는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이들 나라 가운데는 과거에는 비교적 복음을 자유롭게 받아들였던 아니, 전할 수 있었던 곳들도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복음활동이 그렇게 장기간 80년, 50년씩 중단될 수는 없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 일인데 그 어떤 무엇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악령이든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일을 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사람 구원하시는 일을 중단하실 리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곳에도 하나님의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고, 때문에 그런 지하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그런 교회 형태를 지금부터 우리도 채택하자는 것이다. 그런 교회 형태가 바로 핍박 받던 초대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오늘 하루도 더 더뎌지고 그래서 세상이 오늘 하루도 과거처럼 한번 더 변함없이 굴러가고 있는 것도,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셔서 다 회개하여 구원 얻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 이 하나 때문임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80년, 50년 기간 중에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일을 멈추지도 않았고, 멈출 수도 없고 엄연히 그 핍박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교회> 형태가, 오늘 이 시간 이른바 자유세계에 처한 나라들에 위치해 있는 교회의 그 마땅한 형태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지론이요 신념이요 주장이다. '자유세계'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가 동참하는 데 있음이다.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가 여전히 2000년 전이나 후나 이 세상 신(神)이 되어 있는 이상,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핍박 대신에 '쾌락'이나 '세상 염려', '재리의 유혹' 등 그 공격 방법을 바꾸고 있을 뿐 진정한 뜻으로 '자유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 신(神)은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과거의 동구권처럼 현재의 북한처럼 이들 소위 "자유"세계에서도 핍박의 회오리바람을 동원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아는 것이다.

이런 마당에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과거 핍박 받았던 '초대교회' 형태의 모습을 취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일이다. 그와 같은 형태의 교회 활동을 구동구권이나 지금 북한 등을 통해 생생한 실례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르치시고 있는 이상 더욱 그러하다. 현재 탄압 받는 이들 교회에는 교회당이라는 어엿한 자기 건물도 없고 신학교도 없으며 따라서 제도적으로 배출되는 교역자라는 특수 신분 혹은 계층도 없으나 그들을 교회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다시 강조한다.

6. ‘초대교회 형태’라는 것은 사도들이 생존하던 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라는 이름의 국가종교를 만들면서부터 그 영적 부패와 타락과 속화에 참여하지 않고 본연의 길을 계속 걸음으로써 그 모든 핍박 속을 헤쳐 나온 모든 복음주의적 교회가 다 포함된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 유럽에서 왈도(Waldo)가 주도한 그런 복음운동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의 북한교회도 역시 같은 형태다.

7.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 삶의 기본 법칙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에서 교회라는 개념을 찾아야 되는 것이니, 이것이 <집 교회운동>의 핵심이다. 종교치고 국가권력을 등에 업지 않는 예가 없다.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그리고 개신교 모두가 그렇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종교'의 특징이다. 이런 '종교적 혼돈'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의 교회관을 확립할 수 있다.

세상 종교는 일종의 세상 권력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세상 권부(權府)로 자처한다. 권력지향성이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등에 지거나 또는 그런 것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진리와 진실에 그 근거를 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핵심인 관계로,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여 그 권위에 반역하는 것이 그 본질적 특성이 되어 있는 이 세상과는 운명적으로 항상 등질 수밖에 없는 상극관계에 있다.

때문에 교회 초창기부터 이 세상 신(神)(때때로 '세상'으로 상징되는)과의 싸움으로 일관하는 것이니, 그리스도 교회 존립의 의미를 노상 희석시키려 하고 방해하는 것이 이 세상 신(神)의 일종의 전략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항상 종교화하는 데에 이 세상 신은 주력해 왔던 것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 인생들의 구원을 방해해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차원이 아님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지 않고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한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부리시는 영"[히 1:14]의 차원에서 활동한다. 거룩한 천사들은 인간 구원을 위해 인간들을 섬기는 일이요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및 악령 일당은 그 반대라는 것인데 어느 쪽이든 자유 의지로써 그 스스로 하는 일로서 전자의 경우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인생들의 구원이 자기 일인 것처럼 하는 반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생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그런 악역(惡役)을 맡는 것뿐이다.

전자나 후자나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함에는 동일하나 그들 스스로의 목적[자신들이 목표하는 바]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전자는 우리를 위해서 후자는 우리의 원수로서의 역할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 또는 하나님께서 그런 역할을 맡기셨기 때문에 하는 것이므로, 앞에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마지못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 했으나 사람들을 구원하는 역사는 거룩한 천사들의 몫이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역할을 악령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맡기실 리도 없지만 만일 그런 일을 하게 하시면 억지로 하는 것이지마는, 악인들을 걸러내시는 악역을 담당하도록 하셨기 때문에[살후 2:11,12]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원해서 하는 일이 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사람들로 구원 얻지 못하게 함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억지로 강제로 무엇이든 하게 하시는 일은 없다 한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 그러하고 영원한 형벌의 장소는 예외다]. 악한 동기에서든 선한 동기에서든 그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다. 죄를 짓든,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든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다. 이것이 자유의 의미다. 피조물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신 원래의 뜻이다. 그러므로 멸망에 들어가는 것도 그 스스로의 자유 선택에 의한 당연 귀결로서 그래서 각자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정한다 함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그런 악역을 맡기셨다고 해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악령들이 "필요악"이라는 말은 아니다. 왜냐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렇게 범죄하여 영원한 멸망의 운명에 처해지지 않았다면 거룩한 천사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하든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함으로써 악령이 되어 있는 까닭에 그런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몫을 하게 되었다는 그 차이뿐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하나님의 명령을 마지못해 수행한다는 것은, 선한 마음에서가 아닌 즉 하나님을 사랑함에서 오는 동기로 임무 수행을 하지 않는다는 뜻일 분이다.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evil spirit] 또는 하나님이 악신을 보내셨다[삼상 18:10/삿 9:23]는 언급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시어 저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셨다"[삼하 24:1]는 사실을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計數)하게 하였다"[대상 21:1] 함으로써 이상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욥기에 따르면 먼저 욥에 대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의를 제기한다. 즉 시험을 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버릴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 그래서 욥은 시험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든다. 위에서와 같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징계가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징계"[히 12:7]인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 친히 욥을 징계하신 것이다. 동시에 원수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개입한 것이니 하나님 친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부리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친히 부리시되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자원해서 그 시험하는 역할을 도맡은 것이니,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8. 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고난이 필수적이냐 하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하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그 믿음의 특성상 이 세상에서 교회가 받는 핍박, 박해, 환난 등 갖가지 고난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마저 형통, 창달, 무적(無敵)의 상태라면 더 다시 '믿음'이 되지 않고 '보는 것'이 되는 측면 또한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여하한 경우나 또는 대가에도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지"[히 1:9] 여부를 가름하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9. 우리가 고난 받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측면이 되는 이 사실은, 명백히 성경에 지적한 바 '악인을 구원 받지 못하게 걸러내는' 이 불가피한 작업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없다면 이 작업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뜻의 본질인데,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불의한 자도 의를 좋아하게 되는 현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정의하시는 '의'란 것은 그런 대가성(代價性) 없이 의 자체를 사랑해서 의를 행하는 그것이다.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고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므로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바 악이요 죄요 불의이다. 즉 자기를 위해 사는 자기중심이다[고후 5:15]. '구원 얻지 못하도록 하시는 악인'이란 것은 바로 이런 악인[이 세상 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을 뜻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대가성 없이 의 자체를 사랑하여 복음을 믿고 순종하려면 순종 당시 즉각 나타나는 보상이 아니라 도리어 갖가지 험난한 조건 즉 이 세상 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갖가지 유혹 곧 이 세상 신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아 거기 넘어가지 않고 굳게 믿음을 지키는 그런 증명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이 필요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불 이 세상에서 우리의 구원이 그런 맥락을 따라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고난 후의 영광'이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고난을 받고 영광은 나중에 누리는 순서다. 따라서 이 세상이 악하지 않고 이 세상 신(神)의 관리 아래 있지 않다 하더라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먼저> 고난 받도록 해야 할 필요가 생기는데, 이 필요성을 이 세상이 그 자체적 특성으로써 훌륭히 제공해 주는 셈이다. 이것을 성경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아들"이시기 때문에 이 "순종"의 과정을 거쳐야 하셨는데 우리야 더욱 당연하다는 뜻이다(히 5:8).

10.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 곧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신을 장차 발로 짓밟을 터인데 먼저 그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발뒤꿈치쯤 물리는 것은 약과요 또 당연 순서다. 싸우다보면 상대만 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상대처럼 치명상은 아닐지라도 다소간 손상은 입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싸운다고 하겠는가. 지금은 그와 같이 물리는 때요, 발로 밟는 때는 차후의 일이다. 때문에 초창기부터 그리스도의 교회는 극심한 핍박을 당해 왔다.

11. 무엇이든 초창기 즉 첫 시작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 모습이 바로 이후 계속되어질 모든 과정과 줄거리의 밑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 초대교회 모습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성격과 세상과의 상관 관계를 명백히 보여 주신 것이다. 즉 교회가 태동하자마자 많지도 않은 12 사도 중 하나를 세상의 불의한 칼날 아래 궐(闕)이 나게 하신 것이니 곧 사도 야고보의 죽음이다. 더욱이 그는 교회에서 기둥 같이 여기던 야고보다. 그러나 이것이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명한 '뜻'임은,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의 베드로의 기적적 구출이 이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베드로의 경우처럼 얼마든지 그런 고난의 '비극' 또는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실 수 있음에도, 그와 같이 사도 야고보로 하여금 죽음의 고난을 받게 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이를 만천하에 공개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교회 합심 기도의 위력을 물론 가르치심과 더불어ㅡ. 그러나 기도의 중요성만이라면, 교회가 이제 막 그 여린 뿌리를 내리려는 중대 시점에 교회의 기둥 같은 세 사도 중 하나를 그렇게 결원이 나게 하실 리 만무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설립되어져야 하고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세상 종교를 본 따 '예배의 전당'을 짓고, 인위적으로 양성된 전문 직종으로 인식되는 소위 '성직자'를 두고, 그리고 '예배일'이란 특정일을 따로 만드는 그런 것으로써 하나님 섬긴다고 할 때, 옛 이스라엘이 눈에는 보이시지 않으나 분명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임금되어 계시는 사실을 마다하고 굳이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세우려 했던 무리한 요구, 억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그런 행동을 단죄하신 것이다. 종교화한 오늘날의 교회 형태가 그와 같은 단죄의 대상이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 형통할 수 없다. 이미 이스라엘의 멸망은 그 때부터 예견되어지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세상 종교의 형태를 따라가기 시작한 교회의 행티는 오늘날의 타락과 무기력과 무능이 이미 예견되어진 일이다. 물론 그런 세상 종교의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전혀 부패 타락하지 않는다는 보증은 될 수 없다. 사도시대부터 이미 그런 부패의 조짐은 숱하게 나타났던 바이다. 조짐이라기보다 본격적인 부패가 시작된 것임을 바울 사도의 탄식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12. 그러나, 그와 같이 부패 타락 또는 이단으로 흐를 수는 있어도 교회 형태가 거대한 체제로 집단화되지 않고 집 교회 형태로 분산되어 있으면 그런 현상도 대개 부분적으로만 그칠 뿐이지 결코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넘어갈 수 없다는 논리도 가능해진다. 마치 여러 단층 가옥들로 분산되어 있으면 무너져도 그런 가옥 몇 채로 끝날 수 있지만 수십 층의 한 아파트 단일 건물 내에 집단 거주할 경우에는 그 아파트가 불의의 사고를 만나 한번 무너지면 모든 가구 전체가 한꺼번에 결딴 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전에 임하는 병력의 전투 형태는 경직되어서는 다시 말해 기동성이 없으면 일조일석에 붕괴된다. 때로는 얼마든 분산하고 때로는 거대한 공룡처럼 집단화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신축성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투 병력이다. 합심 기도, 특정 목적의 헌금, 특정 경우의 전도 등에 있어서는 집단화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평상시에는 분산되어 존재하는 그런 유동성을 지님이 이상적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던 초대교회가 격렬한 핍박을 받게 되자 즉각 뿔뿔이 흩어져 확산되어 간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생명력의 발로인 것이다. 우리가 싸워도 '혈과 육에 대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영적 전투라는 것뿐이지 싸움의 내용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전쟁의 달인이라 하는 몽골의 징기스칸이 했다는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인즉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하고 이동하는 자는 흥한다”이다.

13. 고착성을 고집하고 형태와 체재의 거대함을 자랑함은 이미 화석화(化石化)했음을 입증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중국 공산 정권의 교회 핍박에 슬기롭게 대처한 왓치만 니의 교회운동이 그 적절한 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신 의미는, 오늘날 복음의 의미로 보면 개개인 각자의 마음 속에 그리하여 그 일상 삶에 당연히 자리잡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왕권(王權)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가시적인 지도자를 두는 것은, 개개인의 일상 생활이 아닌 어떤 특정 규율과 제도와 강권 발동의 체재 아래 자기를 강제로 묶어두려는 종교 차원의 발상인 것이다. 일상 삶에서 하나님을 인지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과의 동행, 동거, 동역(同役)을 속박이라 보기 때문이요 그것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명이 된다. 이스라엘이 가시적인 왕을 구한 그 핵심이 여기에 있기에, 그것을 죄로 보신 것이다.

10명 내지 12,3명으로 가정에서 모이고 그리고 그것이 세포 분열하듯이 둘로 쪼개져 그 6,7명으로부터 다시 10여명으로 자라고 자란 후에는 다시 나눠지고 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도 기동성, 침투성, 결속력을 강화하는 방편이 된다. 이런 형태로는 직장 내에서도 가능하고 산간 벽촌이라도 가능하고 어디서든 가능한 그야말로 만능(萬能)이 되는 교회 운영 형태다. 그렇다고 반드시 이런 소수에만 한정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면 몇 백 명이라도 좋다. 그 중 가장 합당하고 사리에 맞는 방법을 택할 일이다.

또 이런 소수 숫자에서는 결속력이 남다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피차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아는 그만큼 사랑이 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세상 군대에서도 전투할 때 그 결속력이 전투력을 높인`다는 것은 상식화되어 있다. 장수가 그 휘하 군졸의 상처를 입으로 빨아 독혈(毒血)을 제거해 준다는 말이 왜 예로부터 생기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불과 5천 정병으로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을 상대하여 이긴 것도 오합지졸이 아니라 이같이 알렉산더를 중심하여 한 몸처럼 뭉친 결속력이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치열한 전투 중 목이 몹시 탔던 알렉산더가 "모처의[적진 중에 있는] 그 우물 물 좀 시원하게 들이켰으면 좋겠다" 하고 부지중 소리 친 것을 한 부하가 듣고 곧 달려가 적군과의 좌충우돌 끝에 참말로 그 물을 길어와 바쳤다. 이것을 받아든 알렉산더는 "이 물은 자기 피와 바꿔 길어온 물이다!" 외치며 "우리 모두 함께 나눠 마시자!" 하고 그 물을 둘러 선 부하들 머리 위로 뿌려 버렸다. 그러자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이후의 모든 전쟁은 이미 이긴 것이었다.

14.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결코 종교일 수가 없고 삶 자체 그 생활이 바로 그 핵심임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물론 세상에 "종교"라는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소식만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관계 없다]. 명칭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으로 이미 차원이 다르니, 그래서 차별화가 필요한 것이다. 별도로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의 그 같은 처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오늘날 종교 체제로 안주하는 이른바 교회가 그와 같음을 다시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생의 약함을 신의 강함으로 보완하려 하거나, 현세에 대한 불만과 좌절을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해소하려 하거나, 내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거나 또는 현세를 탈출하자거나, 또는 막연하게 생각되는 혹 있을지도 모르는 사후 세계에 대하여 사전 대비로 보험에 들어놓는 따위의 그런 종교행위가 아닌 것이다. 조물주께서 우리를 애초 지으신 그 창조의 원 의도대로, 지금은 세상이 벗어나 있는 그 삶의 본래 궤도로 정상 복귀함이다.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생 삶의 기본원리로서 인식함이다.

15. 건강을 위해서는 건강할 수 있는 기본 원리가 있듯이. 교회는 영생을 얻기 위한 구도장(求道場)도 아니고 영생을 종착지로 하는 열차의 그 중간 간이역 구실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영생을 얻고자 함이 목표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즉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 이 영생 곧 참된(왜냐하면 영원하지 않은 인간 생명은 조물주께서 애초 의도하신 그래서 창조하신 본래의 생명이 아니니까) 인생 삶의 방법을 세상에 알리고자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모이는 모임이요, 또한 스스로의 상태를 부단히 점검함과 동시 피차간 뜨거운(벧전 1:22) 사랑으로 북돋우어 같은 목적을 달성해가는 과정에서 상호 보완하고 격려하고 보살펴 주기 위함이 교회로 모이는 의미이다.

바울은 "교회에 모인다"[한글 개역 번역]고 하지 않고 "교회로서 모인다"고 했다[고전 11:18]. 이 대목을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교회에 모인다는 것은 특정 장소 즉 건물을 교회로 정하고 거기 모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로서 모인다는 것은 그 모이는 것 자체가 교회됨이요, 장소나 어떤 체제가 교회가 아님을 명시하는 것이다. 흠정영역[KJV]도 당시 유일한 기독교로 통하던 천주교의 영향을 받아 "in the church"로 번역하고 있으나 NKJV, NIV에서는 "as a church"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역대 성경 번역자들은 자기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왕왕 본의 아니게 오류를 범하고 오역을 감행하게 된다. 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성경을 읽노라면 가끔 이같은 불찰을 엿보게 된다. 고로 전체 성경을 조감[鳥瞰: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전체를 한눈으로 관찰]하듯이 읽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부지런히 정독, 다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교회가 이상과 같은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기능이라면 일정한 형태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여기서 강조하는 그리스도 교회의 형태론이다. 자연스럽게 이상과 같은 기본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면 일정 형태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음이다. 형태를 두고 네가 옳거니 내가 옳거니 하고 다툴 이유도 없다. 때문에 반드시 초대교회 형태로서의 가정교회가 아니면 교회가 아니라고 강변하지도 않거니와, 핍박 받는 교회 형태처럼 이 자유 세계에서도 그렇게 모습을 갖출 경우 그것을 이단시하는 것도 적극 반대하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16. 이 세상에서 핍박 받는 것을 시종일관 간판처럼 달고 가게 되어 있는 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특권이요 은혜요 필요 불가결한 존립 요소임을 주님께서도 명백히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설계와 그 청사진은 이 밑바탕을 근거로 하여 그 토대 위에 작성되어져야 하고, 이 표준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의 기본 뜻에서 이탈하는 과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 은혜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음이다[빌 1:29].

즉 나의 구원을 위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위하여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과 함께 받는 것이니 주님과 함께 일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고난 받음은 주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고 예배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원칙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몸이 되어 있으나 이 세상에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고난 받음으로써 사람을 건져내는 그리스도의 남은 일을 마저 완수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육체[세상에 오셨던]처럼 되어 일하기 위함이 구원 받은 다음의 현재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우리 구원의 목적이므로[곪 14:7-9/고후 5:15] 이 목적답게 자연계에 속한 몸을 새로이 받은 격이 되어 이 세상에서 처신함이다. 그러므로 달리 목적이 있을 수 없고 믿기 이전처럼 또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실상을 모르는 현재의 세상 사람들처럼 따라 하여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살고자 이 세상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하기 위해서요 이 단 한 가지 목적분이다.

17. 고로 교회 존립은 이 고난을 토대로 함을 다시 강조한다.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남은 고난에 더 이상 계실 필요가 없는 순간이 되어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그 시간까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고난의 표적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들이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택할 때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專務)하리라” 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하나님의 일로서 "말씀 전하는" 것보다 우선되는 "기도"가, 바로 이 고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희생 제물 없이는 제사장의 기도가 효험이 없고 고통 없는 희생은 없는 법이다. 우리의 이 기도가 없이는 죄인들을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고 제대로의 공효(功效)를 나타낼 수 없다는 이유가 바로 이 여기에 있다. 기도는 반드시 제사장의 기도요 제사장은 제물 없이는 존재 의미가 없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니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다"[사 53:12] 함과 같다.

18.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는데 피 흘림이란 죽음의 고통을 전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없이는 어떤 회개의 역사도 불가능한 이 원리에서,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누구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그런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회개의 역사에는 이런 동일한 원리를 따르는 ‘생명 있는 쪽’에서의 고난이 필수 불가결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 하고, 이 남은 고난은 그같이 고난 받으신 주님의 몸을 이루어 있는 그 교회로 말미암아 채워지게 됨은 당연하다. 즉 우리의 고난을 근거로 한 우리의 기도로써, 다시 말해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기도로써,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게 되어 있음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役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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