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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 중국 교회 등록일 2016.02.24 13:40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406

 

19.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똑같은 은혜[빌 1:29]일진대, 교회 역시 그 같은 모습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왜 그 은혜를 거절할 것인가. '믿는 것"[:29]과 동격의 은혜다. 항상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대비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신'이요 '임금'인 이상 그리고 이 사실은 주님 계시던 당시나 오늘이나 주님 장차 오실 그 때까지는 불변의 사실인 이상, 핍박 받던 당시 초대교회의 모습 그리고 오늘날 교회 탄압 국가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런 교회의 모습과 형태를 우리 역시 비록 당장에는 핍박을 받지 않더라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 판단이요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 된다.

20.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세상 신은 핍박의 거센 회오리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아직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아니하는 것뿐이니, 왜냐면 '세상사(世上事)에 몰두하고', '이생의 쾌락' 속에 묻혀 있고, '황금만능주의'에 멍들고 물들어 있게 함으로써, '핍박'이란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오히려 몇 배나 더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효과 있게 제압할 수 있다고 이 세상 신[고후 4:4]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핍박은 받지 않아도 핍박 중에 있는 것처럼 형태를 갖추고 그런 형태에 걸맞게 준비된 삶의 자세가 되어 있으면, 핍박 외의 그런 '세상 쾌락', '세상사에 대한 몰두', '돈 벌어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이라는 이 세상 신[神-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 세상 신’으로 항상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는 이 사실에 지나치리만큼 무감각하기에 이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니 그리스도의 교회는 원천적으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대결 국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창 3:15]의 공략마저도 어느 정도 희석시키고 차단시켜 이 세상 신의 그런 예봉을 꺾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것 또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이런 회유책이 먹혀 들지 않으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다시 교회 탄압이라는 핍박의 소용돌이로 몰아칠 것이다.

21. 이런 경우 이 세상 신은 틀림없이 '핍박'이라는 수단을 다시 강구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와 같은 'CITHM' 운동을 하기 시작하고 어느 정도 효과 있게 진척되면 반드시 핍박이 임할 것이며 이전과 같이 종교계로부터 그런 탄압이 시작될 것을 알므로 항상 이에 대비할 각오가 필요하다. 어쨌든 교회는 초창기부터 종말 즉 주님의 재림 때까지는 이 세상 신을 상대하는 끊임없는 전시(戰時) 상태요 전투 태세에 놓여 있음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그런 상태에 있는데도 마치 이 세상이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로 정착된 것처럼, 아니면 이 세상 신과 그리스도가 마치 화해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이 세상 신이란 적대자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거대한 건물을 정착시키고 또 이를 과시하고 있으니 정신이 나가도 보통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아예 세상에 속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거나, 이 세상 신의 활동을 밝히는 성경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믿어도 엉뚱한 해석을 하여 바로 믿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미국의 한 거대 기독교 교단 선교사로 나온 이들 중 더러는 이 세상 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을 믿지도 않고 '귀신'의 존재까지 부인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런 예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미국이란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인 양 착각하니 그런 식의 종교 형태로 교회 운영을 하려는 것이야 이상한 일이 아니다.

피선교국은 또 그런 선교국 교회 형태를 본받아 따르는 것이 정상인 양 착각해서 오늘날 같은 세상 종교 형태로 계승되어 오는 것이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일 수 없다. 여기서 과감히 탈피해야 하고 성경대로 믿으면 믿는 대로 그 증거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안개 속을 헤매듯 오리무중으로 성경을 읽으며 알고 있으니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역사될 리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교회 운영이 될 리가 없다.

이런 병폐에 대해 왓치만 니는 성경의 이름으로 감연히 등을 돌리고 성경에 입각한 교회 설립과 운영을 선언했던 것이다. 과연 그것이 지혜로웠음이 역사가 웅변해 주고 있음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이런 성경의 원리원칙에서 벗어나 갈팡질팡 하는 가운데 오직 득세하는 것은 주님께서 미리 가라지 비유로써 경고하신 바, '경건'을 '사사로운 유익의 재료'로 생각하는[디전 6:5] 가라지(벼처럼 생긴 피와 같은 잡초)들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양 떼는 돌보지 않고 자기 욕구만 채우려 드는 양의 탈을 쓴 이리 떼들만 득실거리는 온상만 제공할 뿐이다. 현재 우리는 그 실상을 목도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무엇이든 첫 시작이 갖는 의미가 중요하고 그 시작이 앞으로 전개될 과정의 전체 기틀을 잡아놓는 법인데, 교회는 처음부터 핍박 일색으로 300년을 지내온 사실에 유의할 일이다.

성도들이 교회로서 모이는 건물을 지어도 내일이면 무참히 헐릴 각오를 하고 지어야 하고, 신학도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려 하나 내일이면 가차없이 폐쇄당할 개연성을 충분히 숙지한 다음에 결정하는 그런 세월이 300년이나 흘렀으니, 오늘날 교회 건물을 중시하고 제도권 아래에서의 직업적 교역자만을 선호하는 사람들 눈으로 본다면 그런 300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방기(放棄)하시고 몰라보신 결과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 없다. 그 300년이 지나자 자유세상이 되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도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하고 세속화하여, 그 생긴 부산물이 현재의 로마카톨릭인데 이를 진정한 교회라고 믿는 이는 그 종교를 신봉하거나 성경에 대한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 바로 그런 종교단체가 1200년 가량을 홀로 군림하면서 복음적인 신앙인들을 핍박하였으니, 그렇다면 그 1200년간 역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버려두시고 팽개치셨던가 하면 물론 그럴 리도 없다.

22. 그렇다면 처음부터 핍박 받는 교회의 모습이 정상적인 상태요 따라서 세상 종교처럼 세상과 벗하여 또는 "세계의 정신적 지주"임을 자처함으로써 세상 권력의 비호 아래 그 존재를 과시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자 엄연한 현실일진대, 지금 와서 그런 것에 연연하거나 얽매일 그 어떤 이유도 없지 않은가. 교회의 참 모습을 알아내는 그 원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져 온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를 통해서도 정확히 찾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즉 핍박 받는 나라 안에서의 모든 교회 모습이다.

초대교회 당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역사가 잠시도 쉴 새 없이 이루어져 왔음을 감안한다면, 300년의 핍박사가 종결되고 이후 로마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종교가 생기면서 천년 넘게 그런 이단 사상 아래 있는 동안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이렇다 할 외형적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여전히 핍박 받는 교회로 그 그늘 아래 남아 있었던 것임을 여러 역사적 문헌들이 그 증거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교회에서 본을 보이신 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종일관 핍박 속에 ‘건재’해 온 것이다. 핍박 받는 교회가 세상이 주목할 정도로 세상에 드러나질 리도 없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유대교라는 종교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더니, 그 이후로는 로마 카톨릭이라는 종교가 생겨나 역시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다는 그런 차이만 있을 뿐이다. 주님의 말씀에, 핍박하는 자들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법[하나님 위하고 섬기는 방법]이라 하리라' 하신 그대로다. 그럴진대 핍박 받지 않는 오늘날 자유세계의 '교회'가 어느 모로 보면 핍박 받는 교회보다 내용상으로는 더욱 더 그 존립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23. 핍박을 받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국교로 정해지는 것이다(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로마제국에서처럼). 그러나 역사상 기독교가(“복음”이라는 명칭은 이런 경우 유보하자) 국교로 정해지고 부패하고 변질하지 않은 예가 없다. 습한 여름 한낮 땡 볕에 내어놓은 음식처럼 금방 못쓰게 되어 버린 것이 역사의 실례다. 상식적으로도, 이 세상은 이 세상 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왕 노릇하는 곳인데 국교로 정한 그 나라는 그렇다면 이 세상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별세계라는 말이던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철퇴를 맞아 망하고 말 것이 아닌가. 세상 권력의 비호라는 이름으로 질식사시킨 것이다.

동로마가 망할 때 동로마의 국교인 그리스 정교회가 러시아로 옮겨 가 거기서 국교가 되었지만 역사는 역시 그것이 그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국교로서 지정되면 곧장 부패한다는 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핍박을 받도록 되어 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성경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그대로다.

24. 그렇다면 '핍박 받는 형태의 교회 모습', 즉 이 세상 신을 그 우두머리로 한 적대적 세력으로서의 이 세상에서 항상 부대끼게 되어 있는 교회로서의 체제와 운영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시종일관 계속되어 나가야 그것이 정상적인 모습이다. 초대 교회 당시의 교회 형태나 주님 다시 오실 그 순간의 교회 모습이나 그 중간에 나타나 있을 교회 체제나 동일한 모습의 형태이어야 정상이다.

수십, 수백 년 갈 것 같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을 짓고 신학교를 운영하고 거기서 직업적인 교역자를 배출하는 따위의 종교행위를 [구미 각국에서 하는 양식 그대로] 본받아야 할 아무 필요도 의미도 이유도 없다는 것을 재삼 강조한다. 그들 구미 교회들의 실상을 챙겨보면, 앞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 세상 신의 실재까지도 믿지 않는 교직자들도 상당수에 달하는 판이니 그런 그들이 어떻게 성경에서 나타낸 청사진대로 교회를 운영하기를 바라리요.

25. 국교[또는 준국교] 체제 아래에서 그런 교회의 교역자 노릇하는 것을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오히려 선망하게 되어 있는 마당에, 그런 성경대로의 교회 형태와 체제[사도들 당시 초대교회]를 달가워할 리 없고 오직 이단 취급을 할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지금까지의 그런 교회 형태를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형태야 어찌 되었든 오직 중요한 것은 성경대로의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형태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현재 처한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을 가감없이 설파하여 사람들을 구원시키면 되는 일이다. 만일 그런 교회 형태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장애가 되거든 과감히 버릴 일이다. 그렇지 않을 때는 일부러 버릴 필요는 없다. 말씀 선포에 생명이 있지 형태를 가지고 옳거니 그르거니 다툴 필요도 없고 그럴 여유도 실상 없다. 시급한 것은 말씀으로 인생들을 구원하는 일이다. 단 말씀을 전할 때 바울 사도가 본을 보인 것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할 일이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가르치심으로 하고 인간의 지혜로써 하지 않으려고 바울은 그렇게 두려워하고 떤 것이다. 말씀만 전한다고 전부가 아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붉은 짐승"

칼뱅이 스위스에서 비록 소규모의 도시국가이기는 하나 정권을 잡고 성경으로써 통치한다(神權政治)는 발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긴 것은 보통 착각이 아니었다. 착각 정도가 아니라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성령께서 그런 식으로 그를 인도하실 리 없으니 순수하게 인위적인 것이었다. 로마카톨릭이 판치던 세상에서 겨우 성경으로 되돌아오는 과도기적 혼란이었기에 그렇다 할 수도 있으나, 그 일개인의 오류에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지금까지도 오도해오고 있다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종교 "개혁"이란 말도 어폐가 있다. 그것은 성경에 관한 한 문외한인 이 세상이 쓰는 용어다. 다시 말해 "개혁"이라는 것은 로마카톨릭을 기독교로 인식하기 때문에 쓰는 용어다. 이미 서기 600년 경부터 마리아를 숭상해 오는 것이 과연 기독교 즉 "그리스도의 복음"인지 스스로 생각해볼 일이다. 루터, 칼뱅 등을 "개혁" 신학자라 하고 "개신교[Protestant]"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같은 범주에 속한다.

핍박 받는 교회로서의 그리스도 교회는 콘스탄틴 그 이후에도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온 것이다. 세상이 로마카톨릭만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그늘에 묻혀져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이런 것 모두가 이 세상 신의 책략에 의한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짐승 위에 올라 탄 여자 곧 음녀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세상 모두가 이 종교 집단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오인하고 있는 사실을 가리켜 "비밀["MYSTERY"]"[계 17:5]이라 한 것이다.

계시록에서 용을 피해 있는 또 하나의 "여자"가 있으니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곧 그리스도의 교회다. 이렇게 비슷하게 "여자'로서 표현되고 있는 음녀이니 곧 '사이비 교회' 즉 교회가 아니면서도 교회로 자처하여 역사 무대에 분장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음녀라는 말 자체가 역시 그 뜻이다. 즉 하나님도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한다면서도 실질 내용인즉 진리를 떠나 있으므로 “음란하다”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지니면서도 하나님을 떠나 범죄 중에 있는 것을 가리켜 성경이 “음녀”라고 지칭하신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계시록에 보면 그렇게 여자를 자기 등에 태웠던 "짐승"이 그 음녀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광경이 펼쳐진다. 왜 그럴까. 이전에는 자기의 특정 목적을 위해 그렇게 위해 주며 자기 등에 태우고 다녔으나[이는 짐승이 그 "음녀"의 기본 바탕이 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있어선 안될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짐승"은 말할 것도 없이 적[敵]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와 대칭되는 반[反] 그리스도이므로 그 음녀가 그런 반 그리스도적인 일을 수행해 왔음을 뜻함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없애는가. 바울이 말한 대로 장차 이 "짐승"은 하나님으로 자처할 것이기 때문에[살후 2:4]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말살되어야 하겠기에 그러하다. 지금까지는 그 이름으로 세상을 잘 속여 왔으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 버려야 될 판이므로 그 이름으로 실컷 활용했던 이 음녀의 존재를 더 이상 존치시킬 필요가 없는데다 오히려 그냥 두면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음녀"가 가르쳤던 내용은 반(反) 그리스도였으나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행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 유일의 구세주시라는 사실을 선전해 왔으므로 이 이름 때문에 그 음녀를 없애는 것이다. 이미 그 때는 코앞에 다가선 것 같다. 이른바 "파티마 예언"이라고 하는 것에 따르면, 로마카톨릭은 그 마지막 교황이 피살됨으로써 종언을 고하게 된다고 한다. 또 다른 예언에 따르면[이 역시 로마카톨릭 내부에서의 예언이지만] 역대 교황을 하나도 틀림없이 예견한 바가 있는 예언가가 그 마지막 교황이 현 교황의 차기 교황이라 했다고 한다. 현교황의 이름이 "베네딕투스"가 될 것이라고 그 이름마저 정확히 알아 맞추어 예언하고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좌우지간에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로마카톨릭은 종교로서의 막을 내리고, 그렇게 되면 세상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그리스도의 복음은 다시는 복음 전파가 불가능한 밤을 맞았으므로-요 9:4]은 종결을 고하게 되는 것만은 명백하다. 앞에서 지적한 그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자"의 출현으로 세상은 그 "멸망의 자식"의 단일종교로 하나로서의 모습만 취하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현재 로마카톨릭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은 교황이든, 주교든, 신부든, 수녀든, 일반 교인이든 할 것 없이 더 이상 자기 종교라고 해서 연연해하고 미련을 둘 이유가 없다.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왕상 18:21] 외친 것과 같다.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따르면 그것이 진리다.

로마카톨릭이 당신 자신은 아닌 것이다. 어쩌다 혹은 잘못 판단하여 로마카톨릭에 몸담아 왔을 뿐이다. 당신이 로마카톨릭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카톨릭이란 종교가 당신을 위해 있어 온 것이다. 왜냐면 그 종교가 당신을 구원해 주는 유일한 처방이라 자처하고 당신에게 접근했기 때문이니 당신은 단지 그 말을 듣고 그것을 수용했을 따름이다. 그것을 버리거나 버리지 않는 자유는 당신 자신에게 있지 그 어느 누구 그 무엇에 있지 않다.

이제 아주 가까운 장래에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당분간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중심으로 해서 거대한 종교를 구축해온 것이 로마카톨릭이니 같은 운명이 될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므로 로마카톨릭을 통한 "다른 예수"로서의 그리스도를 버리고 신구약 성경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도피성(逃避城)으로 더 지체말고 도피하시라.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성

참고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세상 끝 날까지 교회가 핍박 받는 것으로 시종일관하리라는 경고를 못하는 법이다. 그것이 이 세상 신 마귀로부터 났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없고, 순수하게 인간이 꾸민 거짓말로 지어낸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 왜냐면 그런 핍박 받는 것을 좋아할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또한 그런 종교를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런 내용이라면 '거짓말하고 속인다고 해서' 믿을 리는 없기에 그렇다.

그런 거짓말을 할 바에야 그런 "핍박 받는다"는 대목부터 삭제해놓고 볼 일이다. 거짓말이나 속임수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억지로라도 믿게 함이 유일한 목적인데 아무도 믿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말을 왜 하겠는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머리가 좋아야 한다. 그렇게 두뇌 회전이 빠른 자가 그런 자충수(自充手)를 둘 리는 만무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런 내용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도 이것이 성경의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한 때만 아니라 세상 마지막까지 그러하리라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세상 종교의 특성상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렇게 시종일관하여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쓰는 법은 없다. 더구나 그렇게 고난 받는 것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강조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고난이 필연이고 그 사랑 때문에 고난이 필수라는 것을 강조할 때는 더더욱 거짓을 말할 확률은 아주 제로 상태에 이른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이다. 이런 간단한 사실 하나로 잣대를 들이대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은 그대로 드러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이 밝히는 대로 이 세상 신이 그 마음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후 4:4]. 판단력의 마비 상태인 것이니, 이유는 오직 그것밖에 없다. 진리요 생명인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강조의 말씀[핍박의 표적이 되리라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복음은 창성하는 것이다.

참 것으로도 창성하고 거짓 속임수 즉 가짜를 통해서도 어쨌든 창성하는 것이다. 가짜를 통해서도 창성하는 것은 명백히 이 세상 신의 개입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세상 신이 아니고는 이런 가짜가 이 정도로까지 창성하게 될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이 세상 신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인간 구원 방해라는 유일무이한 목적으로 직접 챙기기 때문에 이런 사이비 기독교의 규모가 이다지도 어마어마하게 크다.

세계 종교 가운데 최대 규모다. 세상에 가짜가 진짜보다 이런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행세를 하는 예를 보았던가. 오직 유일한 것이다. 이 모두 ‘이 세상 신’의 실존과 그 활동을 입증함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이다. 즉 가짜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지 못하게 함이다. 이는 이 세상 신의 실존을 입증함과 더불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악착스럽게 방해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므로 오히려 이런 사실이 또한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성을 역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과 그 활동을 소상하게 밝혀 주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신의 속임수는 항상 인간 상식을 비틀어 무리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 장기(長技)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셨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음으로 아무 능력도 행하실 수 없을 때 이 사실을 "이상히(기이하게-to marvel at) 여기셨다"[막 6:6]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또한 성경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지 않을 수 없는 자체 증명이 된다. 사람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면, 일껏 기적을 행하였다 해놓고는 다시 그 기적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 하고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을 그런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 스스로가 '기이하게' 생각했다 즉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해서 놀랐다고 하는 말은 천하 그 어떤 거짓말쟁이도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줄거리가 된다. 진실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다.

이와 같이 성경을 읽을 때 유의만 하면 곳곳에서 성경이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을 풍성하게 찾아 보게 된다. 이것은 진실된 기록만이 남길 수 있는 부인 못하는 진실의 확증들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릇 모든 진실의 특성이다. 진실도 감추어질 수 없고, 거짓도 시간만 지나면 다 드러나게 되어 있다. 진실은 항구불변이지만 거짓은 그 수명이 짧다는 그 차이뿐이다.

“이상히 여기셨다”는 위의 성경 대목도, 사람들이 상식대로 행하지 않고 상식에 어긋나게 생각하도록 이 세상 신이 인간 상식을 그 정도로까지 마비시켜 놓을 수 있는가 하고 놀라워하신 것을 뜻함이다. 상식에 어긋나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그 상황을 '미쳤다'는 말로 표현한다. 때문에 성경은 이 세상 신에게 종 노릇하는 이 세상 모든 인생들을 가리켜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죽은 자에게 돌아간다"[전 9:3]고 했다. 솔로몬의 지혜의 안목으로 바라본 세상의 실상이다.

교회가 핍박 받는 사실을 말하다보니 연이어 연상되는 것은 인류역사가 시작되자마자 나타난 살인극이다. 성경이 만일 지어낸 이야기라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의인이 창성하도록 설정해놓지, 도리어 그 믿음 때문에 악인에게 억울하게 맞아 죽는 것으로 즉 비명횡사하는 비참한 죽음으로 절대로 그려놓지는 않는 법이다. 이 역시 성경이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대목의 하나다.

뿐만 아니라 교회 초창기에 일어나는 살인극이 더 있다. 성경 내용이 거짓된 인위적인 것이라면 12 사도 중의 핵심 인물의 하나인 야고보 사도가 그렇게 세상 왕권의 불의한 칼날 앞에 아무 연고 없이 억울하게 약하게 헛되게 살육 당하는 것으로 그려놓을 리는 절대로 없다. 세상의 안목으로 보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실망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다른 똑같은 사도인 베드로는 기적적으로 그 죽음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꾸며내지도 못한다.

하나는 죽게 하고 다른 하나는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아무 이유도 밝힘 없이 당신이라면[당신이 거짓말쟁이라면] 감히 나열해놓겠는가. 그 둘이 다 꾸며댄 이야기일 뿐이라면 반드시 그 둘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해 놓게 마련이다. 이것이 모든 거짓과 속임수의 숨길 수 없는 특징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설명이라고는 일언반구도 성경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왜냐면 그것이 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면 모순되는 일 같아 보이지만 그냥 그대로 기록해둘 수밖에 없어 기록해둔 것이기에 그렇다.

이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성경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진실을 두고 "꾸며낸 이야기"라 세상이 말하는 것은 비단 성경이 그 대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 인간은 성경과 무관한 일이라도 그것도 명백히 역사에 기록된 일이건만 그것을 믿지 않는 바보스러움이 있다. 더구나 남의 일도 아니고 추앙 받는 자기 나라 영웅에 대한 것도 그렇게 대접한다. 그 실례가 이공(李公) 순신(舜臣)에 대한 폄훼다.

이공이 비열한 인간이고 상대적으로 원균이 영웅이라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억단을 거침없이 쏟아놓는다. 세상사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영적인 일에 있어서랴.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지배자요 신인데, 우리의 구원으로서의 그리스도께 관한 일에서랴. 보이지도 않는 일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도 없다. 권위 있는 왕조실록이라 하더라도 기록하고 편수하는 자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개입될 수도 있고 또는 기타 사유로 해서 정필[正筆]이 아닌 곡필[曲筆]이 휘갈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일기만은 진실 그대로다. 오늘날에는 개인의 일기가 역사적 중요 문헌이 되고 증빙 자료도 되는 탓으로 의도적인 기획 아래 자기 일기를 쓸 수도 있을지는 모르나, 과거에는 그야말로 진실이 뚝뚝 묻어 나는 정확한 기록이 바로 일기다. 객관적인 사실이야 그 얻어 들은 정보가 그릇되면 그릇된 것으로 그대로 남겨지지만 자기 자신에 관한 한, 이것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그 일기에서 이공(李公)은 당시 팽배해 있는 사회 풍조로서 망국적인 뇌물 공여의 폐단을 적시하고 한탄하고 있다. “뇌물 하나면 죽을 사람도 살린다”고 개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 철부지 젊은 사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없는 사실 있는 사실 만들어 원균과 전공을 다툴 정도의 이기적인 인물이 이공일 것 같으면 왜 그 흔한 뇌물은 쓰지 않았겠는가 반문하게 된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인간 유형이라면 당연히 그 손쉬운 뇌물에 손을 대고도 남았으리라.

또 뇌물의 위력을 모른다면 왜 그 일기에서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한탄했겠는가. 뇌물의 힘을 그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뇌물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은 평소 그의 인품이 공명정대하고 그 언동이 불의한 것을 용납치 않으며 오히려 그런 것을 증오했던 충직한 신념의 일단을 훌륭하게 입증함이 아닌가. 그러면 그렇게 정정당당하게 나가면서 정작 전공에 관해서만은 야차[夜叉] 같이 덤볐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어린애라도 납득할 수 없는 헛소리라고 웃을 일이 아닌가.

이러한 그의 성품으로 기록한 그 일기에서 원균에 대해 "해괴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한 것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원균이라는 위인이 이공과 정반대의 유형임을 한 눈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正)과 사(似)가 확연히 분간되는 갈림길에서 이공과 원균이 일견 서로 상반되게 다툰다고 할 때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어도 무방하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일기'라는 가장 객관성 있는 증거를 앞에 놓고 어느 쪽 손을 들어 줄 것인지는 물으나 마나이다.

이와 같이 아주 상식적인 따라서 간단한 판별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대상을 놓고 그 옳음과 그름을 논할 때, 이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것’이 그 정체를 단번에 식별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줌이 비일비재하다. 이런데도, 이런 단순한 판별 수단을 외면하고 복잡하기만 한 다른 것에다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 범인들의 실수다. 성경도 똑같다. 다른 무슨 과학적 변증법이니 무엇이니 거기에만 매달려 씨름해보아야 만족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증거는 이와 같은 그 내용의 자체 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경의 자체 증명이라는 진실을 이공 순신의 난중일기의 예를 들어서도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세상 모든 일이 상식을 벗어나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26. 이 세상은 원천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 세상 신이 지배자 노릇하는 세계다. 그러한데 이 지구상 어느 한 귀퉁이에서 이 세상 신의 낯을 피해 칼뱅이 꿈꾼 그런 '국가'를 형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국 그가 생각하고 실천한 그 공동체를 하나의 국가라고 인식한 이상, 이 세상 신에게 예속된 집단 체제를 하나 더 따로 구성한 것밖에 없다. 반 복음적 "국교"로서의 형태밖에 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고로 그가 힘써 전파하려 한 이른바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런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니 그런 것이 소위 "신학"이라면 신뢰할 그 어떤 근거도 있을 수 없다. 칼뱅의 발상이 진정 성령으로 난 것이라면, 이미 초대교회 자체부터가 그런 국가 형태를 지향했을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신의 사주를 받는 다른 주변 국가로부터 생존해 남기 위해서는 무력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교회인가? 그런데도 많은 장로교 사람들이 아직도 그를 무슨 교조(敎祖)처럼 받들고 있는 실상이다. 그런 교회 형태 즉 국가적으로 인정하는 종교로서 그에 상당한(즉 종교의 전당답게 외양이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 올리고, 그런 외양의 체제에 어울리는 이른바 성직자들을 종교 지도자답게 품위 있게 양성하여 영입하고, 또 그런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금력(金力)의 중요성이 필요악으로 등장하고 그리고 그것이 압도적인 위세로 부각된다.

중국 대륙의 왓치만 니는 이 폐단을 보고 가정교회 형태를 과감히 채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세상과 모든 지상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이 세상 신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인식하지 않는데 거기서 무슨 전략 즉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인도와 지혜가 깃들 수 있겠는가. 핍박 받는 것 즉 고난 받음이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데 이 명백한 뜻을 어기고 회피하는 데에서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실 것인가.

칼뱅은 그런 망상과 착각의 극치(라기보다 필연적인 결과)로, 소위 "침례" 방식을 성경적이라 주장하던 한 시민[그가 "믿음의 형제"가 아니라 일개 시민이라 하더라도]을 사형에 처해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돌아가신”[고전 8:11] 한 형제를 자기 손으로 죽여 없앴다는 결론이 된다. 사형 집행을 재가했으니 자기가 죽인 것이다. 비뚤어진 성경 해석, 성경상의 무지가 마침내 이를 수밖에 없는 종착점이다. 그 체제의 본질을 놓고 볼 때 로마카톨릭과 무엇이 다른가.

27. 핍박의 대상이 된다 해서 무조건 그것이 성령으로 난 증거가 되고 참 교회의 표상이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황당무계의 이단교리를 사회에 퍼뜨릴 때 사회공해 방지 차원에서 국가가 제재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네가 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는 핍박으로 아전인수 격으로 풀이하고 자위하고 또 선전하는 것은 세상 모든 이단 집단들의 생리적 특성이다. 그러나 무릇 성령으로 출생하여 "다시 나"[요 3:3]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이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딤후 3:12) 천명한 것은 성경이니, 성경의 말씀은 변할 수 없다.

당시 영국 성공회의 화석화(化石化)된 교회생활을 박차고 성령으로 난 복음운동을 일으킬 때 요한 웨슬레와 그 믿음의 형제들은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던가. 성경의 정확한 해석과 분명한 지식으로 성령으로 다시 나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가르친 것뿐이라며, 웨슬레 본인은 성공회에서 분리하여 나와 새 교단 같은 것을 따로 조직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런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는 죽을 때까지 충실한 성공회 교역자로 남기를 소망했었다.

그러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당시 생명력이 떠나간 성공회는 웨슬레의 복음 운동을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사후 그가 양성한 믿음의 형제들 곧 제자들에 의해 감리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되고 조직된 것이다. 웨슬레가 끝까지 "나는 충실한 성공회 교역자"라 버틴 것도 탓할 수만 없는 일이고, 그 후대에 가서 성공회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독립 체제가 된 것도 막을 수 없는 순리의 흐름이다.

28. 그러나 이와 같이 '체제'나 '형태'의 외관(外觀)으로써, 그리스도 복음의 진실과 그에 반하는 비정상적인 사이비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는지의 여부가 관건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성령의 인도는 성경의 정확한 해석에서 오는 것이니 다시 말해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데에서 나온다[고후 5:15].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죽는 자도 없다"고 바울이 단호히 확언한 그대로다[롬 14:7-9].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겉모양이 세상 종교의 형태라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고 그런 주장을 하지도 않는다. 개중에는 참으로 살아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여 순종하고 있는 이들도 있음을 인정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그런 교회 형태 내에서 믿음 생활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온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세상 종교로서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성경에 제시하고 예시한 대로의 방법을 따라 교회 형태를 취하고 운영 방침을 따른다 해서 거기 소속된 모든 이가 다 구원 얻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미 앞에서 예를 든 바도 있거니와 자기 구미(口味)대로 믿고 행동하다가 그대로 멸망 가운데 들어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왓치만 니'가 그런 교회 형태를 선도하고 강조한 것은 좋았으나 그가 가르친 일부 인위적인 교리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목자(牧者)의 자질

29. 단지 우리의 주장은 교회 운영을 하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돋구어 주는 일에 가장 효율성 높은 다시 말해 성경에서 제시한 바로 그런 교회 형태와 체제로 전환하자는 것뿐이다. 만일 현재와 같은 종교 형태가 그같은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면 두 말없이 그런 종교 형태를 취할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그 형태를 바꾸는 데에 주저할 아무 이유가 없다.

이같이 과감히 바꿔놓은 형태와 운영 체제의 중국 교회가 오늘날 이 지구상에서 가장 건실한 교회로서 그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은, 그들 핍박 받는 교회는 이단들이 발붙일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서도 단언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사이비 집단들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하는 마당에 목숨을 걸고 그런 황당한 이단 사상을 전파할 그런 광신자 그룹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중국교회가 계속 그렇게 국가적 박해 속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중국교회도 현재 러시아처럼 정치 변혁을 거쳐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되면 그동안 주춤했던 이단과 사이비와 사교(邪敎)들이 곰팡이 끼듯 우후죽순처럼 득세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중국교회는 과거 로마제국 시대의 고난 받던 교회처럼 그 모든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세력을 꾸준히 때로는 폭발적으로 확장하고 있으면서도 이쪽 자유세계에서처럼 각종 이단 사상으로 물들지 않은 비교적 순수한 모습을 지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과연 오늘 중국 지하교회는 놀랄 만한 속도로 번져가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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