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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 중국 석자직 목사 등록일 2016.02.24 13:44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550

집 교회 운동-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CITHM'의 기본 잣대-중국의 석자직(席子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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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건물

30. 다음에는 교회 건물을 '성전' 즉 하나님의 집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모순 또는 맹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중국과 북한처럼 교회를 탄압하는 세력이 홀연 나타나 국가 통제력을 쥐고 교회를 핍박하여 교회당이 모조리 폐쇄되었다 할 때, 그들이 철저히 신봉하던 대로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집"인데 하나님께서 그런 무엄한 인간의 짓을 두고 보시겠는가. 그런즉 그런 소리는 우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감히 하나님의 집을 훼손하다니! 이런 결과를 놓고 보면, 그럴 줄을 알면서도 특정 건물을 하나님 계시는 성전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모독행위가 된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천하의 그 무엇도 누구도 손댈 수 없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무엄한 신성모독[핍박자들의]을 처벌하셨던가. 당장 그런 응징이 나타나야지 왜 10년은 고사하고 단 1년인들 그냥 참고 방관하시겠는가.

예컨대 과거 소련 체제하에서의 교회당, 북한에서의 교회당이 그렇게 짓밟힐 때 그 쪽은 하나님 성전이 아니어서 그러했고 이 남한이나 자유 세계의 건물들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라면 이런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은 더 용납 못할 일이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야 그런 교회 핍박의 세력들이 제물에 망해 버리는 것은, 그런 '무엄한' 짓을 하지 않는 국가도 다 그렇게 빛바랜 낡은 물건처럼 저절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판이니 거론할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의 진노나 징벌이라면 그 즉시 또는 단시일 내로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지를 않으면, 하나님의 징벌로 그 국가 체제가 망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속하게 그런 신성 모독 죄의 행위를 손봐주셨던가. 역사 이래 그런 징벌이 단 한 건도 없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그런 건물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믿은 사람들의 믿음이 '믿음'이 아닌 '미신'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이 실재(實在)하지 않거나.

이런 현실 앞에서 그렇게 '믿는' 즉 그런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믿는 이들은 본의 아니게 그들 스스로 앞의 지적대로 신성 모독 죄를 짓고 있는 것이요 하나님께 크나큰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니 성전이 아닌데도 성전이라 하여 그런 "성전"이 인간의 손에 의해 깡그리 훼파되는 것을 세상 앞에 선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보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내고 있는 까닭이다. 모두 종교화가 되어 있음으로 인한 병폐요 악폐다.

세상 사람들은 반드시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것 보라,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신성시하여 끔찍이 위하던 것이 저렇게 처참하게 파괴되는 추한 꼴을 만나도 그들의 하나님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다. 거 보라,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회개해야 할 죄가 있어 그 "성전"을 하나님께서 떠나셨기 때문에 그렇다 할 것인가? 그러면 역사상 그렇게 핍박 받아 교회당들이 헐려졌을 때 당시 교회 가운데서 번번이 회개 운동이 벌어졌던가? 번번이는커녕 단 한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이미 우리는 초대교회가 그런 교회당 건물을 지어 올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써 이를 충분히 설명하였다.

31. 고로 이 세상에서 시종일관하여 핍박 받는 교회로서는, 교회 <건물>이 교회 구성의 필수 요건이 아님을 누구나 수긍하는 바이다. 건물은 단지 주님의 사업을 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일 뿐이다. 다시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핍박 받는 북한 교회에서 그런 건물이 가능한가? 고로 답은 자명해진다.

32. 신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해서 또 그런 일정 과정을 거쳤다 해서 <교역자>가 교회 구성의 필수 요건도 아니다. 핍박 받는 교회는 교회당도 폐쇄되는데 그런 신학교가 운영될 리 없다. 기껏해야 두세 사람, 많아 보아야 열 사람 내외를 위해 교역자를 양성할 것인가. 핍박을 받을 때엔 거기 맞게 형태를 갖추고, 핍박이 없을 때에는 또 그 형편에 맞게 하라는 그런 무슨 원칙도 없다. 이 세상 신이 좌지우지하는 것으로써 일관되게 움직이는 세상인데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것도 상식에 어긋난다. 일정 기일을 두고 이 세상 신과 무슨 계약이라도 맺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시의 성격을 띤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이 계시해 주시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 하신 말씀에서도 보듯이, 그리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선생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율법'을 연구하던 당시 제도권 내의 교육기관에서 배출된 율법학자들 중 단 하나도 12사도 중에 끼이지 못한 사실을 보아서도, 그리고 그 12사도 중 거의 다수가 무식자들로 구성된 것을 보아서도, 그런 인위적인 교육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 깨우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리 없음은 자명하다.

완전 무시하시거나 일고의 가치도 인정하시지 않는다 해서 지나친 판단일까. 왜냐면 복음의 진리는 계시로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심으로서 알게 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바울 사도는 예외라 할까.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배운 지식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회개한 후 아라비아로 물러나 거기서 3년 동안을 성령의 계시로 다시 배운 것이다.

골고루 기용하신다는 차원에서라도 그 열 둘 중에 율법학자나 서기관 하나쯤은 섞어 끼워 넣으실만도 한데 일절 그런 일을 아니하셨다. 왜냐면 복음의 진리는 계시로 즉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심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3년간 있으면서 계시로써 배운 것이지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다. 일부러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을 택하여 사도들을 삼으심으로써 이 점을 강조하여 세상에 밝혀 보여 주신 데에 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기도에서도 "이것을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계시하여 주시는가 할 때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가까이하신다는 말씀을 기준한다면 겸손히 진리의 말씀을 찾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교만한 자 즉 남보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음을 자랑거리로 여길 사람에게는 <결단코> 가르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성경을 읽어도 그런 마음을 스스로 극력 경계하고 오직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자리라면 안심하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성경을 남달리 열심히 읽음으로써 이단사설에 빠진 사람들은 그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외면하신 것으로 판단하면 틀림이 없다. 사람의 심중을 우리가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공명정대하신 성품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33. 하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지 세상 학문처럼 <가르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오순절 초대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표현도, 바울 사도가 "가르치라"고 명령한 것도 실제적으로는 '말씀 전달'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지식을 전달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니 때문에 우리로서는 전달한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고로 "우리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할 때 그것은 엄밀히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의미가 됨을 알아야 한다. 세상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고 별개의 의미다. '성령께서도 가르치시고' 그리고 '사람도 가르치고'ㅡ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가르침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것이다.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신다는 말씀을 아니하셨다면, '사람의 가르침'에 세상학문과 같은 무게와 의미를 둘 수도 있겠다. 교회도 이른바 제도상의 교육기관이 필요하고 거기서 배출된 교역자라는 계층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같은 '하나님의 계시'에 장애 요인만 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사람이 가르치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 가르친다"[마 15:9]는 말씀으로 책망하고 있는 성경이 아닌가.

천 수백 년이 흘렀지만 초대교회에서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삼위일체에 대한 진실도, 그 기록이 상실되거나 또는 남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그러나 성경상으로는 분명히 설명되고 있고 따라서 관련 기록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삼위일체에 대하여 중구난방으로 제대로 설명해오지 못한 것이 그런 예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학문 차원에서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의미를 절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증거다. 앞에 낫을 놓고도 기역 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말과 같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하셨을 때, 그 '지혜 있는 자들'이 당시 체계적인 종교교육을 받은 계층을 주로 지목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만은 인위적인 교육이란 것에 별다른 중요성을 두지 않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의지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을 여러 수백 번 읽고 성경에 대한 모든 것을 환하게 알아도,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자기 마음에 와 닿지 않고 믿어지지 않는 다음에야 도리가 없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신학교육'을 수료했고 이른바 '목회자 고시'에 합격했다 해서 하나님 교회의 ‘목자(牧者)’로서의 자질이 부여된다는 것은 인위적인 것이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신학생 가운데에 성령으로 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런 사실은 모든 인종과 계층을 불문하고 어디서나 거듭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의미일 뿐이지, 신학생이라 해서 즉 신학교육을 받았다 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신학교 나오고 그리고 일정 시험에 합격했다 해서 그리고 일정 기간 목회 일에 종사했다 해서 그것으로 자격을 주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양 떼를 먹이게 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경고하신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은 이들은 삼위일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필요도 흥미도 없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신다[고전 8:3]. 이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

단지 성경에서 아버지가 계심을 밝히고 그 아들께서 그리스도라 하시니 "아버지 계시고 아들 계시는구나" 그렇게 알 것뿐이다. 그것으로 사실은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고 기도하신 것처럼 나도 "아버지" 하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주님께 기도해도 상관 없다[요 14:14].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로 계시기 때문이다. 모습은 언제나 아들의 모습이시다. 그 이상으로 지식이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다. 대답에 궁하면 "그것은 모르니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라" 하면 되는 것뿐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하심은 지식의 본질 즉 사랑의 순종이 없음을 한탄하신 것이다.  

34. 목자(牧者)로서의 자질은 자기 양 떼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데 있고 그 정신과 열정으로 그들을 위하여 남달리 기도함에 있고, 기도 중에 받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뜻을 그들에게 꺼림 없이 전달함에 있고 그 모든 가르침에서 확고한 본을 보임에 있다. 그 외에 요구하시는 것은 없다. 성령께서 친히 주재, 주장하셔서 모든 영적 힘과 지혜를 믿는 자 각자에게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스승이시고 지도자이심을 그리스도께서는 명백히 하셨다[마 23:8-10].

원천적으로 가난한 자, 천한 자, 약한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더 풍성한 믿음을 주신다는 사실, 그리고 지식이 인간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인간 지식을 헛것으로 돌리신다는 말씀 등은, 세상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중요시하는 소위 "원만한 교육, 원만한 지식 체계"와는 복음 활동이 무관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를 확신해야 성경대로의 제대로 된 교회 운영을 할 수 있음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행 교회 체제를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현재의 방법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니냐, 없기 때문에 이렇게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오늘까지 내려오는 것이 아니냐 할 것인가? 방법은 단순하다. 거듭되는 언급이지만 북한이나 중국에서처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신학교도 없고 신학생도 없다는데 있다. 물론 교회 건물도 없다.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데에서 시퍼렇게 살아 있는 교회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말씀이 또한 "살아 있다"고 한 것이다[히 4:12]. 성령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이 친히 쓰시는 칼날이다[엡 6:17]. 그렇다면 사람이신 주님께서 보이시지는 않으나 함께 계시고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우리에게 있는 한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주님과 그 말씀에로 접근하면 주님 중심으로 교회는 형성되고 운영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주님께 당신네들을 맡기고[부탁하고] 떠난다" 하였다[행 20:32]. 왜냐면 그 말씀으로써 주님 친히 훌륭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믿는 이들을 양육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북한 등지에서의 교회 모습이요 그 형태이다. 이런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혹독한 탄압의 대상이 되게 하신 것이라 보아도 좋다.

물론 근원적으로 고난 받음은 교회로서의 필수 요건이니 믿어 구원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가 이 사람 살리는 일에 있기 때문이다. 말이 쉬워 "믿음"이지 이 믿음이야말로 모든 것의 도화선, 발화 지점이 된다. 이것만 바로 찾아 나가면 곧바로 경천동지의 성령의 크신 역사가 언제 어느 때든 폭발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쉬워 믿음이지, 이 믿음이야말로 따라서 참으로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 세상에서 몇 안되는 것 중의 하나다.

몇 안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 중 하나가 믿음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믿음 따라 주님께서 움직이신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100을 믿으면 100으로 화답하시고 일만이면 일만으로 응답하신다. 절대로 추상적이거나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여기서 가름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로 믿기도 전에 불가능하다거나 가능하다거나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것이다. 믿으면 일이 되고 안믿으면 아무리 훌륭한 이론을 갖다 대어도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내가 너희를 주님과 그 말씀에 부탁한다" 한 것이니, 한마디로, 바울은 "믿은" 것이다.

이미 강조한 대로지만 초대 교회 형태로 돌아간다고 해서 지금까지 몸 담고 있던 체제를 떠나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링컨 대통령 재임 당시 링컨과 교분이 두터웠던 캐나다의 모 천주교 신부는 사목(司牧) 중에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는 교인들의 의사를 물은 다음에 그들의 만장 일치 동의를 얻은 후 그 성당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오직 복음 설교만을 했다. 물론 '마리아'와 관련되어서는 그 후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세례와 성찬식

35. 세례식과 성찬식은 성령께서 주재하시고 집전하시므로 인간은 다만 그 대리(代理)일 뿐이다. 고로 집전자에게 특정 자격 요건을 부여할 필요가 없고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공동으로 모인 자리에서 공동으로 그런 의식을 집전할 수 있다. 단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갓 믿은 초신자는 바울이 경고한 대로 제외된다. 빌립이 전도한 후 내시 간다게에게 세례를 베푼 사실을 상기할 일이다.

바울 역시 자기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본무임을 강조하고 직접 세례를 베푸는 일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자기 전도를 받고 믿게 되었으니 우리 같으면 내가 직접 세례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찬식이나 세례식을 베푸는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대로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친히 그 성례식을 집전하신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누가 하든지 그 사람이 집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친히> 그 성례식을 관장하심이라 믿기 때문이다.

최소한 세례를 베푸는 일이 특정 계층에 국한되어 행해지는 것이 아님을 빌립의 사례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예컨대 바울 사도가 교회에 미친[부정적인 의미로] 또는 장차 미치게 될[긍정적인 측면에서] 영향이나 비중을 두고 볼 때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그의 세례식이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런 역사적 세례를 준 사람은 12사도나 7집사 중 어느 누구도 아니고 단지 현지에 거주하던 아나니아라는 제자였을 뿐이다.

유대인에게는 12사도, 이방인에게는 바울, 이렇게 보내심 받은 그런 교회의 대표적 인물인데 이런 핵심 사도가 될 인물을 주님 친히 평범한 일반 제자 중 하나에게 계시로 지시하셔서 세례를 베풀게 하신 사실이 중요하다. 신성한 의식인데 더구나 명실상부한 이방인 상대의 사도로 세우시는 인물일진대 지금까지의 교회 권위로 일관하는 교권주의적 안목에서 본다면 사도 베드로에게 친히 그런 지시를 내리시든지 극심한 핍박을 받아 그것이 쉽지 않을 경우, 하다못해 빌립과 같은 집사들 중 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로 하여금 세례를 주도록 하셨어야 마땅한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일국의 세력가인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사도 중의 그 누구도 아닌 빌립이 직접 세례를 준 것도 마찬가지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그 나라가 복음화될 수도 있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녔음에도 그러했다. 사마리아인들이나 고넬료 같은 이방인에게 세례 베푸는 일에 베드로가 등장하는 것은 그들에게 대한 유대인의 전통적 관념을 불식시키는 의미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역사적 획을 긋는 최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울 사도의 경우와 같이 일반적인 의미로 그리고 아무 구별 없이 보편적으로 세례 의식은 거행된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게서 직접 전도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세례 베푸는 일을 중요시하지도 고집하지도 않은 사실에서도 이것은 입증된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는 것이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고전 1:13-15] 한 대로 바울은 의식적으로 자기가 직접 세례 주는 것을 삼간 것이다.

36. 이 후로도 언급이 되겠지만 핍박 받는 와중에 특정인에게만 세례 베푸는 일을 한정시킨다면 그러면 그 특정인이 가령 북한 같은 경우 순교하거나 옥중에 있다면 세례식은 무한정 미루어질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성찬식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핍박 받는 교회라는 것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전혀 필요 없는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37. 이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 되는 것은 성령을 받음으로 되는 일이요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영원토록 지속한다는 것이 모든 것의 요체이므로, 보이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곧 성령의 '선물'을 받아 모시는 일에 가시적인 어떤 절차가 필요함은 자명해진다. 어떤 단체에 가입을 해도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거치는데 하물며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을 받는 일에 있어서리요. 그리고 순종이 이런 새 피조물로서의 새 삶에 필수적인 것이므로 그 순종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 바로 '세례 받음'이다.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심에 따라 그 명령에 순종하는 세례(성경의 원 뜻에는 아주 어긋나지만 洗罪禮式이라 풀이해도 좋겠다)이다.

다음에는 이와 같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과 영원히 더불어 사는 삶이므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내가 함께 있다"고 하신 말씀에 따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반드시 그 자리에는 주님께서 동석하심을 가시적으로 나타내어 그 사실과 의미를 확실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는 그 어느 곳이든 또 어느 때이든 사도 당시의 초대교회처럼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함께 계시는 주님 친히 임하여 계심을 확인하면서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시는지 항상 그것을 되새기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필요한 특별의식이나 절차는 이상 두 가지 외에는 없다. 따라서 성찬식은 교회로서 모일 때마다 하는 것이니 두세 사람이 모여도 거기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심으로 어떤 목표를 두고 기도하기 위해 모일 때에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서로 상의하여 할 일이다.

다시 형태론으로 돌아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초대교회 형태를 취한다고 하면서도 그 전하는 말씀의 내용은 전혀 성경과 상반된 것이 있을 수 있다. 고로 형태만을 보고 사이비다 아니다 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각종 사례에서도 증명되듯이 이 세상 신은 무던히도 갖가지 형태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모방하고 또 내부 교란을 집요하게 획책하고 있기 때문이다.

38. 그렇다면 이 글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 교회로서의 특성은 무엇으로 규정 지어야 할 것인가. 다시 강조하지만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기동성, 침투력, 결속력이다. 한 마디로 구성원들의 "열심"이고 사랑이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전도열과 기도의 열정, 성도들간의 이웃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오는 거룩한 모범적 행실, 한마디로 생명력이다.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 즉 성령의 인도를 받아 행하면 생명은 결실하게 되어 있다. 그 나타내는 생명력의 유무는 성경에 근거하여 판단하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로서의 진실성 여부는 그 생명력에 있지 형태에 있지 않음이다. 형태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이미 지적한 대로 지금까지 고수해온 형태가 주님의 일에 적합하면 그것을 유지 보존할 일이다.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 과감하게 그 형태를 바꿀 일이다. 형태만 가지고 나는 옳다, 너는 그르다 하면 본질은 버려두고 지엽적인 것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니 백해무익이다. 이 점을 항상 강조한다.

따라서 현재 이른바 "대형교회"에서 일하고 있다면 현재 그대로의 시설과 조직과 체제로써 최대한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양심껏 하나님의 사업을 계속할 일이다. 누가 뭐라고 할 이유가 없다. 이 세상 신의 모방 책략이 워낙 교묘하므로 참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지는 않다. 이단들이라 해서 일률적으로 냉랭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 나름의 열심과 "사랑"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유의해서 들여다보면 성경에 반하는 이단 사상으로 움직임을 보게 된다.

무엇이 이단인가. 요한 사도가 그 편지에서 지적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님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고 적 그리스도의 영”[요일 4:2,3]인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할 것이나, 그 핵심 부분을 짚어볼 수 있어야 한다.

다름아니라 자기 부인에 있고 따라서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각오로써 매사 임하는지에 따라 그 요지가 드러나는 법이다. 다시 말해 이런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말로는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믿어도 실은 믿지 않는 것이다. 육체로 오신 것은 영광의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위하여 죄인처럼 죄인의 육체로 오셨으므로 한 마디로 우리 위해 ‘죄인으로서의 고난 받으시기’ 위해 육체로 오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난 믿음은 당연히 그 주님을 나의 머리로 모시고 나는 그 몸의 한 지체로서 그 머리께 미쳐진 모든 죄얼[죄로 인한 재앙과 저주]이 그 몸된 교회에도 당연히 미쳐져 있는 모습이 되어 있어야 함이다. 모든 이단들은 한결같이 이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 스스로도 이를 기피할 뿐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혜도 그런 사람들을 피하신다. 이런 고난은 막중한 은총이므로 그런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바울 당시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할례를 또한 받아야 구원된다고 하므로 이런 그릇된 사상에 교회가 요동하지 못하도록 그 여러 편지에서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되는 것을 여러 문장으로 반복해서 나타낸 것을 가지고 오늘날 사람들은 바울의 이런 강조가 우리에게는 전혀 해당되지도 않는데도[“할례”를 말하는 사람은 지금은 아무도 없듯이] 마치 바울이 오늘날도 변함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선행을 행하지 않아도 구원은 된다는 식의 궤변으로 몰아가고 있는 판국이다.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에 신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은 사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을 것이니 계속 이와 같이 이단사설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일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의에게 복종하지 않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겠는가, 상식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그러면 검은 것을 희다 하시니 하나님을 거짓말하시는 분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닌가[요일 1:10]. 왜냐면 죄를 지었으니 죄인인데도, 이를 죄라 하시지 않고 의롭다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죄인의 범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지금까지의 질서는 엉망이 되는 것이 아닌가. 범죄해서 아담이 죽었는데 그 죽음마저 무효가 되고 범죄해서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영원 멸망에 처해져 있는데 그것도 무효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거니와 그런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자신이 어디인가 종잡을 수 없는 데가 있다는 증거다.

주님께서 크신 능력을 베푸셨음에도 여전히 믿지 않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셨다 한 대로[막 6:6], 우리는 이런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백방으로 쳐놓은 함정과 그물, 올무와 덫이 이 정도인가 함에 이르러서는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바울도 놀라움[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에 대해]을 표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 하였으니 이 세상이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발악상(發惡相)과 그 집요함이 이 정도다.

노아 홍수 후 노아가 아직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급속히’ 하나님을 떠나가 버린 것을 일부 신학자들은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라고 의심하나 오히려 성경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이런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리스도만으로써 구원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는데도 그리스도 외에 다른 무엇을 자꾸 첨가시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보다 더욱 교활한 것은 그리스도로써 부족하다는 표현 대신 감히 그리스도께 어찌 나가느냐 한다. 이전 믿기 전 하나님께 대하던 그 자세다. 이는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구원이라 보지 않고 여전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를 우리 구원으로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아주 간교한 방법이다. 그래서 감히 그리스도 앞으로 올 수 없으니 마리아를 앞세우고 마리아를 마치 그리스도처럼 중보자로 내세우는 등의 법석을 떠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으로는 안되고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 율법까지 지켜야 하고 다른 무엇을 지켜야 구원된다고 하는 것과 촌수가 같다. 이런 것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이단 사상들이다. 바울은 당시의 그러한 마귀의 술책에 동원된 “할례”에 대해, 정확히 그 경고의 요지를 밝히고 있다. 즉 할례를 받으면 구원이 아니고 할례를 반대하고 그런 주장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라고는 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마리아를 반대하면 구원이고 마리아를 그렇게 믿으면 구원이 아니라는 이분법으로 갈라놓지 않은 것이다. 물론 할례를 의지하고 있는 한 구원은 없다. 마리아를 그렇게 의지하고 있는 한 구원이 아닌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 그런 것이 이단인가 하는 그 점이다. "할례 받으라 함"이 왜 이단이고 '마리아 숭배'가 왜 이단인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전 7:19]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음에 이단의 본질이 있음이다. 따라서 아무리 할례 받으라는 부추김에 동요하지 않고 마리아를 통하라는 말에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는 그런 이단을 믿는 것과 똑같은 결과다. 그 둘 사이에 차별이 없으니, 그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바울은 다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한 그 역점(力點)을 풀이하여,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갈 6:14,15]이라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당연 결과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니 그리스도의 뜻, 말씀, 그 계명과 분부를 지키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렇게 주님과 함께 죽은 것[그래서 역시 함께 살아난]이 구원인데 그런 것이 없으니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으므로 자기중심이어서 “할례 받은 저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3] 한 것이다.

육체 자랑, 자기 자랑 곧 여전히 자기를 위해 사는 삶이다. 모든 이단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 부인이 없으니 하나님의 계명 지킴이 있을 수 없다. 구원 받은 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능력으로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선을 행할”[롬 2:7/계 20:12,13/딤전 4:16/고후 5:9-11/행 3:26] 수 있게 됨으로써 의인이 되는데 자기중심 그대로이니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가 없다.

바울은 이 명확한 내용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함께 죽음으로써 된 결과]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 악의, 훼방,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니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가 됨이다”.

그리고 난 다음, “거기는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골 3:1-11] 하였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모든 이단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도 없고 함께 죽은 것도 없고 따라서 위의 것을 찾지 않으며 위의 것을 생각함도 없으며 땅의 것을 생각하고 그들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도 없으며 또한 그렇게 믿을 턱도 없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일도 없으며 그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것도 없으니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는 일이 없고 새 사람을 입는 것도 없는” 것이다. 이단과 이단이 아닌 것의 구별은 바로 이런 것이다.

39.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구원의 소식을 기독교니 종교니 하고 부르는 것부터 그리스도인은 삼갈 일이다. 듣는 사람들이 종교로 오해하고 착각할 수 있으므로 종교와의 차별화가 필요하기 때문임을 다시 강조한다. 종교가 아니라 올바른 사람 삶의 원리를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이요 이 말씀을 믿고 그 삶의 법칙대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가족을 형성하는 거창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존립의 의미이다.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출생하는 창조의 작업이요 그리고 이렇게 창조된 새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이 새 창조의 역사 현장에 투입되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바로 그런 의미를 살리는 것만이 교회 형태의 의의인 것이다.

40. 예배의 3대요소는 제사장, 그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 그리고 제사장 직무를 행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하나님 앞 곧 그 성전이다. 성전의 필요불가결성은 하나님이 계셔서 그 제사장의 제물을 받으신다는 데에 있다. 성령을 받아 모신 사람이 이상의 3대 요소를 그 육체 안에 갖추고 있음을 성경은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대표이신 그리스도께 바로 그와 같이 밝히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종교는 이를 모방하여 그런 의미와 비슷한 인위적인 (3대) 요소를 갖추고 소위 예배한다고 하여 우리 육체로서의 성전 대용으로 건물을,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제사장 임무를 대신하여 특정 사제직을, 산 제물인 우리 몸을 대신하여 각종 헌금이나 물품이나 기타 등을 강조하게 된다. 이런 '종교적' 인식을 타파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런 삶의 연합체인 '함께 모임'을 교회로 규정 짓고 주의 일을 하자는 것이 '집 교회 운동'(CITHM一"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의 골자다.

별도의 명칭으로 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바영사회, "Repent and Live Right and Lastingly(RALRAL)" Movement]이다.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을 믿어 살라[영생하라]는 것이요["Repent and live!"], 회개는 바르게 살지 못함을 뉘우치는 것이니, 바르게만 살면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짓지 않고 불복종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한 몸 체제에서의 불가결인 자기 부인을 하면 영생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주신 선물로서의 영생을, 받은 그대로 이루어져 있는 그대로 누림이다. 살되 어떻게 사느냐 하면 ‘바르게 사는’ 것이니 한 몸 체제 안에서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로서 사는 것이다. 영생은 이렇게 사는 것을 말함이다. 고로 나의 할 일은 회개하여 다시는 죄 짓지 않고 바르게 즉 나를 새로 창조하신 애초의 뜻을 받아 사람답게[사람으로 지으셨으니] 사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시지 다른 아무 것도 바라시지 않는다.

이 요구를 첫 사람 아담이 이루어드리지 못했기에 우리가 현재 이 불행 가운데서 구원을 열망[熱望, 切望]하는 것이 아닌가. 인생을 단지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하게 하시는 것뿐이라면 아담이 처음부터 범죄하지 못하도록 강제로 간섭하셨을 것이요 또한 지금의 구원도 모든 인류가 다 자동적으로 구원되게 조처하셨으리라. 그러나 오직 믿는 자만이 구원되도록 한정하신 것이니 이는 바로 위의 사실을 확증하심이다.

회개하여 "악함을 버리는"[행 3;26 ] 자에게만 한정되는 구원이다. 그래서 죄 용서 전에 ‘회개’가 반드시 전제된다. 그리고 순종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고난을 통해 배우게 되어 있다[히 5:8]. 핵심 골자는 이상에 말한 것으로서 아주 간명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일의 원동력이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다른 사람도 똑같이 사랑하시니 그런 그리스도의 심장[heart]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는 나의 사랑이 모든 힘의 원천이다.

41. 어떤 형태든 그것을 줄곧 고집하면 일반적으로 생명의 일에서는 멀어질 경우가 많다는 교훈을 우리는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현재의 교회 체제를 전적으로 부정한다든지 아니면 가정 교회[집 교회 또는 그룹 교회] 체제만을 고집하고 그 외의 것은 사악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력과는 전혀 무관한 일들이니 생명력은 형태에 구애 받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환경과 그 특수 여건에 가장 적합하고 그리고 성경의 기본 틀을 따르는 합리적인 길만 택하면 될 일이고 네 것, 내 것으로 한정해서 그것만을 내세워 고집스럽게 고착시킨다는 것은 오히려 생명의 역사를 방해하고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 경계할 일이다. 초대 교회 당시 어떤 이는 특정한 날을 중하게 여기고 다른 이는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기는 그런 심각한 견해 차이에서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해도 주님을 위하고 저렇게 해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다'는 기본만을 각자 스스로 확정하고 고수하게 함으로써 형제들끼리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는 성령의 지혜로서 그 근본 원리는 오늘날도 유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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