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환법칙

  • 회원 게시판
  • CCI
  • DPApix

Home > 3환법칙 > 회원 게시판

제목 (34)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8 19:11
글쓴이 김일동 조회 387

 

광야 교회

성령을 받아 모심은 우리가 구원 받음을 의미하고 또한 광야 같은 이 세상으로 보내심 받는 것이 되어[요 20:21,22]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신분에 합당한 자세가 된다.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는 것임이다. 아버지의 일을 하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면서 하는 과업이다. 세상을 광야로 표현하고 있는 성경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광야에 거처하며 회개를 외쳤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성경은 명명한 것이다.

주님의 오심은 황량한 광야와 사막에 길을 내고 대로를 수축하는 것이라고 구약에 예언되었다. 광야 길로 진행한 이스라엘 역시 "광야 교회"[행 7:38]라고 함은 당연하다. 광야에서 무슨 사람 삶을 산다는 말인가. 사람 삶을 애당초 꿈꾼다는 말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삶답게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물론 이런 상징성 때문에 그렇게 황야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에게 명백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셨듯이 가나안 땅으로 직진하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좋지 못한 결과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의 이스라엘에게 가장 적합하고 이상적인 길을 택하신 것이 곧 광야였던 것이다. 연단을 받아 가면서 믿음도 키우면서 적절하게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가나안 땅의 주민들은 네피림과 관련된 거인들이었다. 오늘날 발굴되는 거인의 유골을 보면 너무나 거대하고 장대하여 차라리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 할 만하다. 이스라엘 족장들이 가나안 땅을 미리 정탐하려고 가서 보고 온 대로의 표현을 따르면 보통 사람들은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고 한 그대로다. 이런 땅을 정복하게 되어 있는 이스라엘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불가능인 것이다. 오늘날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우리 앞에 놓인 태산과 같은 "많은 환난"[행 14:22]이지만 우리로서는 더 할 수 없는 가장 적합하고 이상적인 '천국 들어가는 방법'인 것이다. 부득불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는 수 없이 이렇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 살려 내기 위한 필요악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 이뤄진 사실과 맞물린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우리 몸에 채움이다[골 1:24]. 이런 모든 실정과 실상이야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똑똑히 알게 되겠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어림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래서 우리 이웃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여실히 증명해 보일 수 있는 무대가 이런 성격의 이 세상뿐이라는 데에서도 막중한 의미를 찾게 된다. 고난과 모든 역경 가운데서야 우리의 사랑이 제대로 실증(實證)되는 것이다. 영원토록 안락과 쾌락뿐인 천국에서는 이런 기회가 영원히 찾아들지 않는다. 물론 이는 우리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공통된 사랑의 심정일 따름이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한번 증명해 보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그 자유를 지금 여기서 나는 누리고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까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한다"[마 11:18]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안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거룩한 사람이니 무조건 그런 이인(異人) 행세를 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 거룩하다면 덮어놓고 그런 행세를 해야 하는 것인가?

거룩함의 뜻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거룩함이란 것은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것을 알아야 함이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고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앞서 나타나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이제는 모든 인간이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받들어 전령(傳令) 역할로 왔기 때문에, 인간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신 대로 그 위치와 신분이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인간 구원의 의미와 현실을 제대로 나타내 주어야 할 필요성에서 그렇게 광야 생활을 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것이다.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에 족한 메뚜기와 석청[바위 틈에 나는 꿀]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실상이 사람 사는 곳이 아님을 강조하고 그래서 참으로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곳이 이 자연계가 아닌 천국 즉 영계(靈界)요 이 세상은 인간으로 말하면 황야 같은 곳으로서 먹는 낙도 마시는 낙도 없음을 상징하여 교시(敎示)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 대신 주님은 어떠하셨는가. 친히 말씀하신 대로 "먹고 마시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 곧 황야[광야]에서 지내면서 이 세상의 실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준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로서가 아니라, 우리 위하여 인간 곧 죄인의 모습이 되어 오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어린 양" 곧 희생 양의 모습'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처럼 특별히 어떤 전달하는 메시지가 없고 오직 그 몸이 그래서 사람되심 그리고 결국 그 죽으심이 하나님의 메시지이신 때문이다.

세례 요한과 같은 황량한 삶, 황야[wilderness]의 황량한 분위기가 곧 이 세상이다. 한마디로 빈 들이요 사막이다. 바로 이 세례 요한에 대하여 예언하신 이사야를 통한 말씀 뒤에 "외치라!", "무엇이라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다. 이 백성은 실로 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토록 설 것이다' 하고 외치라" 하는 대화가 나오는 것이 이 때문이다[사 40:7,8].

그러므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광야 교회"[행 7:38]라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로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광야 같은 세상에 위치한 교회인 까닭에 광야 교회이다. 세례 요한이 일부러 광야로 나갔기 때문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된 것이 아니라 황량한 빈 들판 같은 세상에 와서 경고를 발했기 때문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자연계는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세계요 그들의 영역이다. 인간 삶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황야일 뿐이다.

이 동식물의 서식처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구가(謳歌)하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그들은 동물들의 삶밖에는 장차 삶[의 낙]이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세상에서 부유한 자로서 그 부유함을 자기 자신을 위해 끌어다 쓴 사람은 영원히 다시는 위로가 없다 하신 것이다[눅 6:24]. 때문에 지금 우는 자가 복이 있고 웃는 자에게 화가 있다 하셨다. 모두 이상의 사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가난한 자가 왜 복이 있느냐.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먹고 살기 때문에 그런가? 그 반대다. 여기서 말씀하신 "가난함"은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충족시킬 수 없는 욕구임을 자각하는 경우를 지칭하심이다. 이 세상에서의 황야 같은 삶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욕구가 남다르게 강렬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천국을 사모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절망적인[부자 그리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이들에게] 내용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놀라며 "그렇다면 누가 과연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했듯이, 다 부자되기 원하고 세상에서 보란 듯이 잘 살고자 하는 욕구를 버릴 수 없어 이 "가난한 자"[마 5:3]란 대목을 "심령이 가난한 자"[눅 6:20]일 것이라 하여 그렇게 썼는지 혹은 주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두 가지로도 말씀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로도 혹은 천하를 준다고 해도 진정한 만족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잘못 판단하면 사시장철 안락한 삶에다 호강이란 호강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만족 못하고 영원히 그런 사치와 향락을 더 누리려는 것 역시 심령이 가난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다. 왜냐면 그런 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이 그렇게 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그 영원한 것을 위해 현재의 일시적인 것을 버릴 줄 아는 용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인데, 그렇게 세상 부귀가 일시적이고 허무한 줄 알면서도 그것을 버릴 생각만은 없다.

버리고 주님 말씀처럼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그 부유함을 하늘에 쌓아둘 생각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자 청년은 바로 그 말씀 한 마디에 절망감에 사로잡혀 주님을 따르기커녕 낙담 중에 물러간 것이다. 처음부터 가난해서 가난하건, 갖은 부귀를 타고 났지만 이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딤전 6:17] 자기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가난하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의 마음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천국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하셨다. 물론 가난한 사람마다 모조리 천국에 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천국 가는 길 위에 서 있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 길로 가고 않고는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의지에 따른 믿음 유무이다. 믿음이란 것은 반드시 인간 의지를 동시에 의미한다. 반드시 의지를 수반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에는 반드시 행동[순종]이 뒤따르게 되어 있다는 성경 야고보서의 경고와도 같다[약 2:20,26].

그냥 지식으로만 담아두는 것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영원한 생사를 가름하는 '거창한' "믿음"일 때 더욱 그렇다. 어찌 행동을 묻지 않겠는가. 왜냐면 행동만이 그 진위를 가려 주는 유일한 척도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인간의 폐부를 시험하시고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행함이 없는 인생의 믿음을 그대로 묵과하신다고 감히 판단하는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신다. 그렇게 하시지 않고는 그 지으신 피조물의 세계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법질서의 "제정자"[약 4:12]이시고 동시에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이 원리원칙주의가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그렇게 처절한 죽음의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고 사랑이시라는 것은, 이런 엄정한 법 집행 차원에서의 안목으로 보니까 그런 것이다.

어지간한 것은 눈 감아 주시고 인간처럼 어물 슬쩍 넘어가 주시는 것이 하나님다우신 사랑이라 한다면 이는 보통 오해와 착각이 아니다. 인간이 어물 슬쩍 하는 것도 인간이 무슨 관대하고 아량이 넓고 배포가 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런 약점에 사로잡혀 있어 양심상 엄정한 잣대를 댈 수 없기 때문인 줄 왜 생각 못하는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언필칭 인간이 약하다는 것을 내세운다. 이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불경 죄, 모독 죄에 해당된다.

그런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마련해 주신 그리스도의 구원을 평가절하함이니 이는 바로 이 세상 신(神-고후 4:4)만이 의식적으로 꺼낼 수 있는 망발이다. 그리스도의 구원 곧 하나님의 새 창조가 겨우 인간을 약한 존재로 밖에는 더 이상 만드실 수 없다는 얘기라는 말인가. 약하게 만드셨으면 왜 범죄에 대하여 추상 같은 형벌을 내리시겠는가. 죄가 인간을 그렇게 약하게 만든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약한 자로 처음부터 만드심으로써 된 결과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죄를 척결하면 인간은 강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새 창조로써 인간을 강하게 만드셨기에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절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요일 2:1/3:6-10/5:18/고전 15:33,34/벧전 4:1].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라는 말이기도 하다[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죄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복음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죄를 가리켜 "오직 이기주의로 나가[self-seeking, selfish: "당을 지어"란 우리말 번역은 오역, "to be contentious"로 번역한 흠정영역도 마찬가지]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것"이라 했다(롬 2:8). 이런 오역 때문에 진실이 가려져 있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오역이 혹 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다른 여러 곳에서 거듭하여 명백히 밝혀 말씀해 두시고 있는 까닭이다.

야고보 역시 이 점에서 아주 분명하다. 즉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하였다. 아담의 범죄에서도 우리는 죄의 속성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닌가. 그래서 자기부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폐해를 우리는 지금까지의 인간생활에서 신물이 나도록 보아 오고 있음이다.

자기중심의 그 첫 출발이 그 아우 아벨을 죽인 가인의 행위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에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들의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세상이 지탱해온 것은 하나님의 강제적 통제에 의함이다. 무신론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 강제 통제가 아니었다면, 그런 무신론자들이 무신론을 입밖에 꺼낼 여지도 없이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은 멸절되었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강제 통제를 하시는 이유는 구원 얻을 사람은 그 누구든지 남김없이 충분히 구원 얻도록 하려 하심이다. 이 강제 통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3운법칙[trini homo]이다.

임마누엘 칸트가 하늘의 별을 보고 그리고 인간 내부의 양심을 보고 말 못할 경외(敬畏)를 느낀다고 했지만 이 시대에 살아 있어 3운법칙을 알았다면 반드시 그 둘에다 3운법칙을 끼어 세 가지를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마음을 느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창조신의 실존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을 믿는 것이 이제는 아무 대수로운 것이 아닌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동안 짙게 드리웠던 무신론의 장막을 서서히 아주 확실하게 걷어 올리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적(敵) 그리스도를 출현시키기 위한 또다른 대대적인 전세계적인 음모에 우리는 직면해 있음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제시하는 유신론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때 늦기 전에 이 3운법칙을 통한 정직한 메시지를 수용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참 사는 길, 올바르게 사람 사는 길로 때 맞추어 들어설 일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제시하는 각종 소위 "증거"를 통해 믿게 되면 이미 당신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수중에 완전히 사로잡혀 요동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육체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절대로 "이 세상 신(神-고후 4:4)으로 군림해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이기지 못하게 되어 있음이다.

약하다는 것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 율법 아래 있던 인간의 상태를 바울이 설명하면서 말한 대로[로마서 7,8장] 인간 육신의 약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약한 육신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죽음을 맞음으로써 종결된 것이다. 그냥 막연하게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현실로 나타난 실제적인 사실이니 그 현실이 바로 나의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오셔서 내 몸을 그 성전으로 삼고 계시니, 이는 내 영혼이 내 육체를 집으로 삼고 있음과 똑같은 현실이다.

영혼과 육신은 불가분이다. 영혼은 실체요 육신은 그 형체로서의 역할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으로써 명실 상부하게 내 육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낸 채로 영원히 그 종결을 고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나 위해 죽으실 이유가 없다.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만 아니라 동시에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아예 나 자신이 죽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위해 살 그 나 자신이 죽어 무덤에 묻혀 버려 사라지고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 지내짐을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는 구조로서의 새 창조의 다시 출생한 삶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히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된 것이니, 믿음은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함에서 자기 몫을 다함이다.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되니까 그리스도 또한 나를 위해 그 몫을 다하심으로써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어 내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결과가 되므로, 이 역시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의 동시성, 양면성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주님 역시 움직이실 수가 없다는 이치다. 내가 믿지 않으면 처음부터 주님의 나 위해 죽으신 막강한 은혜의 능력이 내게 나타날 수 없는 바로 그 이치다.

참고로, 하나님의 율법과 모세 율법의 혼동하는 이들이 많은데 하나님의 율법은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첫째와 둘째로 요약된다. 즉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 22:40]이라 하신 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8,39]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의 체제를 말함이다. 모든 지체는 바로 말해서 '우리'로서 하나이니 곧 나 자신인 것이다.

나 자신이 아니지마는 '우리'로서 한 몸이 되어 있음으로 인하여 나 자신이 되어 있는 것이다. 소아(小我)와 대아(大我)의 관계이다. 즉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자기 부인이 그 핵심이요 주인 의식이 그 요체이다. 그리스도와 내가 둘이 하나 됨도 이 한 몸 구조에 따른 이치를 따름이다. "사회 정의"도 이 공동체 의식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고로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서 이 세상에서나 영원한 천국에서나 사람 삶의 근본 이념은 이 공동체 의식에 있는 것이다.

이 "새 사람"으로서의 삶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된 삶의 새 구조이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시게 된 이유다. 말 그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것이다. 영혼[그리스도]과 육체[나 자신] 관계로서의 하나됨이다. 고로 영원히 불가분이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불가분성은 육체가 물질이기 때문에 기계적인 하나됨이니, 따라서 죽지 않고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됨은 그런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 대 인격의 사귐[교제, 교류]의 하나됨이다.

이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 그대로다. 이 관계를 요한복음서가 아주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시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니. '삼위일체의 원리'가 여기서 비롯됨을 앞에서 이미 설명한 그대로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의 죄에 대한 형벌 차원에서만 해석하고 그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완전한 무지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구원이 될 수 없으니 그런 지식은 구원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하시는" 죽음이라는 엉뚱한 인위적인 교리가 나오게 된다.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나와 함께 죽으심"을 완전 부정하는 교리다. 함께 죽으신 바탕 위에서 역시 함께 다시 살아남이니 이 "함께"는 내가 완전히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다는 의미다.

그 구체적인 현실이 내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심으로써[흔히 하는 말로서, "영접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영원토록 함께 계심으로 나란 존재를 아예 구성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창조다. 이런 구조의 존재가 과거에 없었기 때문이다. 육신이 죽어 없어졌는데, 또 무슨 약한 육신이 있다고 "약함"을 타령하는가. 육신이 죽어 없어진 것이라면 왜 현재 나는 이 육신 가운데 있는가 하겠지만, 그것은 약간 차원이 다른 질문이다.

모든 실질적인 변화는 모두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된 것임을 기억할 일이다. 내 육신 스스로가 변하여 자체적으로 이룩한 변화나 역사(役事)가 아닌 것이다. 앞에서 영혼과 육체는 불가분으로서 영혼이 어떠하면 그 육체도 그와 같이 되고 반대로 육체가 어떠하면 영혼도 그 상황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고 했거니와, 맨 처음 육체가 창조되고 나중에 영혼이 창조된다[창 2:7]. 그래서 영적 존재[영원히 존재하는]로서의 인간[아담]의 영혼을 위해 이 자연계가 아닌 영원히 존재하는 신령한 세계[靈界]가 창설되니 곧 에덴낙원이다.

이 에덴낙원에서부터 인간[아담]의 영혼은 육체를 완전 지배하게 된다. 영계와 자연계와의 차이다. 자연계에서 육체가 창조되었으므로 자연계에서는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지만 국면이 바뀌어 영계에 거처하게 되면서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영혼을 따라 신령한 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인간 육체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도로 환원되어 버려 다시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니 이제 역전이 되어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게 되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특성인 자기중심적 본능[이 본능은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이 자기 종족 보존을 위해 사용하는 기계적 능력이므로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죽음을 끼치는 것뿐]이 작용하여 영혼을 완전 압박하게 되어 있는 비참한 실상을 설명한 것이 로마서의 "육신"[롬 7:14-8:13]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등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내 안에 새 피조물의 '영혼' 격으로 계시니 다시 역전되어 영혼이 주도권을 쥐게 됨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과거의 옛 사람, 옛 육신은 죽은 다음 다시 출생하고[요 3:3] 새로 창조된[고후 5:17] 육신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즉 내 육체는 이전과 다름없는 그대로이나 상황 변화가 천지 개벽이나 되는 것처럼 급격하고 철저하게 그러나 극히 조용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변화를 바람에 비유하셨다[요 3:8]. 외형으로는 아무 것도 변화한 것이 없고 그대로이나 분명 변화는 있는 것이고 따라서 실체는 있는 것이다. 바람이라는 실체는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눈에 보는 것으로만 한정해서 인식하려 하는 어리석음은 이 바람을 통해서도 폭로된다. 바람은 그 누구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이 존재하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유독 하나님만은 '보이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망발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기 한이 없는 인생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 하시는 말씀으로서,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준비해 두셨다"[히 10:5] 하셨고 동시에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7] 하심과 같이, 우리 역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신 대로, 보내심을 받는 양상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실 때 '한 몸을 예비해 주심"과 동일한 것이다. 바로 그 몸이 나의 현재의 몸인 것이다.

이전의 바로 그 몸이지만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으니, 이전의 나 자신이지만 구원 받은 의미로서는 가히 하늘과 땅 차이로 현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지만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당연히 신령한 몸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아직도 이런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는 이유는 이와 같이 세상을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을 온전히 이루시어야 했던 것처럼[4:34], 나 역시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그리스도의 몸된 각 지체 각 부분의 하나로서]을 온전히 이루어야 함에는 이 자연계의 몸을 입음으로써 고난을 받아야[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골 1:24] 마땅하기 때문이다.

나의 육체는 이전 모습 그대로이고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의미와 실제의 역할이 이와 같이 새 창조 차원에서 확실히 결정적으로 달라져 있음이다. 그러나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임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그리고 하나님의 그런 능력과 더불어 나의 믿음이 여기에서 필수이므로 나의 믿음을 따라 그런 의미와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는지 여부가 판가름되고 저울질되는 것은 당연하다. 곧 나의 순종 여하로 나의 천국 행이 좌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마 7:21]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되어[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가 구원 받은 터이기에] "천국에 들어간다" 하신 것이다. 즉 믿음으로써 "땅의 지체를 능히 죽일" 수 있게[골 3:5] 즉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게"[고전 9:27] 되는 것이니, 이전에 나를 사로잡았던 육신과는 전혀 양상이 다르다[롬 7:24]. 그러면 내가 믿음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위에서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더불어 반드시 나의 믿음이 작용되는 것이므로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은 그리스도 믿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은 당연하다. 왜냐면 이상의 모든 것은 위의 설명처럼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임하여 오심으로써 이루어진 결과이므로 내 스스로 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함으로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면 어찌 되는가. 내 스스로 모든 것을 옛 상태로 되돌림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몫이요 성령의 역사다[창 1:2]. 외형적인 것 즉 육체에 속한 것은 여기에 아무 관여할 몫도 없거니와 오직 종속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이루어진 성령의 창조의 역사(役事)를 따라 차츰 자기 때에 그 외형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요, 당장 그 모습이 변화되지 않는다고 하여 성령의 창조의 역사가 어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당장 그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데에는 상당한 합리성이 있으니, 즉 도중에 그 믿음이 떨어지고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계 2:4] 이를 회개하지 않을 경우 그 변화는 영구적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여백(餘白)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에서 범죄함으로써 아담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다시 환원되어 버린 것이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범죄함으로 인하여[만일 범죄하면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경우-고후 5:15] 그러한 신령한 몸으로 변화함을 받지 못함을 인해 "몸의 구속"[롬 8:23]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나 기본 의미는 동일한 것이다. 아담은 거기 에덴낙원에서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심을 받았고[육체는 자연계에서 생성되었지만], 우리 인간은 처음 영계[에덴낙원]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아담이] 지금은 자연계에 속한 존재가 되어 있으나 이제 영생하는 자로 변모해 있는 새 창조에 속하므로, 오히려 제대로 된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아담과 우리와의 차이다. 그러나 기본 내용은 둘이 똑같고 차이가 있을 수 없으니 같은 하나님의 같은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함으로써 아담이 그 본연의 위치를 스스로 떠난 것이니 모름지기 범죄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몸의 구속을 받지 못한다는 기정 사실을 그 누구도 깰 수 없음을 명심할 일이다. 즉 오늘날만연된 사조(思潮)처럼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어 죄 중에 사는 죄인으로 자처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물론 누차 강조한 바 있지만, 모두들 그런 말을 하는 분위기에 젖어 어린 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마 18:3] 구원된 이들도 간혹 말로써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실상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이 순종 가운데 있어 그리스도 안에 안전하게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으니[흔하지는 않지만], 이를 혼동하지 말 일이다, 이런 사람은 말로만 구원 받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생활에서 그 구원 받은 증거가 드러나고 있는 경우다.

여기서 말하는 몸의 구속 즉 신령한 몸으로 변화함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부활이다. "심판의 부활"[요 5:29]도 있으니 결국 모든 인간은 신령한 몸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음이다. 즉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범죄하지 않았다면] 자식들을 생산하여 그들 중에서 악과 선이 구별되어 [현재의 거룩한 천사들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로 구분되어 있듯이] 영원한 불 못과 생명의 세계로 나누어 갈라졌을 것인데, 아담부터 범죄함으로써 이런 상태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그런즉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 자체가 생명이 아니라, 그런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기는 하되 그 영원히 거처하게 되는 데가 생명의 세계이냐 아니면 고난의 죽음의 세계이냐 하는 것으로 판가름됨이다. "몸의 구속"은 생명의 부활을 말함이니, 그래서 "양자됨"[롬 8:23]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만일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에덴낙원에서 이룩했을 인간 세계[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의 지배 아래 들지 않는]와 똑같은 양상의 인간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바로 마지막 아담의 인간 세계인 [계시록에 명시된 대로의] 천년 통치 기간인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구성되었을 그러한 에덴낙원의 인간 세계에서도 영물이든 인간이든 시험하는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 그동안 무저갱(無底坑, bottomless pit)에 있다가 잠시 풀려 나 활동을 재개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계 20:8]. 반역하는 무리의 허다함이 마치 바다 가의 모래 같을 것이라 했으니[:8], 영물이나 인간이나, 오늘날과 같은 역경의 시대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태평 성대에서나, 불복종의 반역에서는 차이가 없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그리스도 통치 기간이 있을 것을 미리 말씀하시어 현재의 이 세상을 가리켜 "이 세대[this generation]"라 하신 것이다[마 11:16/12:41/23:36/24:34]. 즉 "다음 세대"[그리스도의 친정(親政) 시대 즉 천년 통치 기간]와 더불어 이 세상이 양분되어 있음을 가리키심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 이후의 천국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를 말씀하심이 아닌 것이다. "만유를 회복하시는"[행 3:21] 단계를 밟아가시는 필수 과정이므로 그리 오랜 기간도 필요치 않고 그 순서만 밟으시는 데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왜냐면 첫 사람 아담이 처음부터 범죄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한 때를 이루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신 자격으로 첫 사람이 이룩하지 못했던 모든 필요한 절차를 밟아 가심이다. 물론 생략하셔도 무방할 터이지만 워낙 원리원칙을 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신지라 반드시 치러야 할 모든 경로(經路)요 수순(手順)인 것이다. 이는 현재의 상태가 절대로 정상인 것 즉 하나님께서 애초 작정하신 것이 아니었음을 정확히 밝히시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구원의 동시성과 양면성을 다시 설명하면, 세례 받음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 지내지는 외형적 표현으로서 나의 믿음의 의지 표명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나의 응대(應對)이니, 따라서 그 다음에 오는 것이 하나님의 응대 곧 성령께서 내 안에 오심이다. 나의 믿음에 하나님께서 현실적으로 적응해 주심이다. 즉 말 그대로 그리고 나의 믿음 그대로 나와 그리스도께서는 하나가 실질적으로 되어지는 순간이다.

고로 하나님의 능력에는 반드시 우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믿음이 필수이고 따라서 요체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이 강대하고 넘쳐 나도 내게 믿음이 없으면 그림의 떡일 뿐이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시는 등 각종 능력을 행하셨어도 늘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심과 같다. 그래서 그와 같은 능력을 행하셨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경우에는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시고 그들의 믿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하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막 6:6].

그래서 모세 율법 즉 모세로 말미암아 나타내신 대로 법 제도를 정하고 절기를 지키도록 하신 것은, 이상과 같은 자기 부인을 근거로 하여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맛 보기로 보여 주어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그래서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되기까지 사전(事前) 교육 차원이었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므로, 단지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여러 가지 상징적인 것의 총합(總合)으로 나타내어진 바 각종 절기를 지키고 할례를 받는 등 외형적인 것을 지키는 것으로써 대신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그림자로서의 모든 것은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는 폐해지는 것이다. 즉 할례 받는 것이라든가 날과 해와 절기 등을 지키는 것 등이다[갈 4:10]. 이런 것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임시 방편으로서의 외형적인 것이고 실질적인 것은 아니었으니 실질적인 것이 나타날 때는 의당히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나 실질 내용은 변할 수 없으니 때문에 "내가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 하신 것이다[마 5:17].

그래서 이런 외형적인 것을 지키는 것을 가리켜,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 한 것이고[빌 3:6] 세례 요한의 양친을 가리켜서도 성경은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눅 1:6] 한 것이다. 이런 경우 위 설명과 같은 '모세 율법'과 창조 당시부터 정해져 있던 '하나님의 율법'을 성경이 명확히 구분하여 표현하지 않았으므로 혼동하기 쉽다 할 수 있으나 전후 문맥을 살피면 금방 식별할 수 있는 일이다.   




runner1.gif
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
다음글 | (35) 메시아 교회
이전글 | (33) 메시아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