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환법칙

  • 회원 게시판
  • CCI
  • DPApix

Home > 3환법칙 > 회원 게시판

제목 (35)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8 19:13
글쓴이 김일동 조회 402

메시아 교회
--------------------------------------------------------------------------

세례들

그리스도 친히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 받으신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 세례 받으심은 그 죽으심과 장사 지냄이 우리 각자와 하나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미리 상징하여 가리키는 것이므로 나도 주님 받으신 그 세례의 모습 꼭 그대로 받는 것이다. "물에서 올라 오셨다"[막 1:10]고 했으니 물 속으로 들어가셨다가 올라오신 것이다. 물에 잠긴다는 것은 물을 죽음이라 할 때 죽음 속에 완전히 잠겨 버림이다. 죽음과 하나가 되어 버림이다. 노아 홍수 당시 모든 생명체는 죽음에 완전히 잠겨 버린 것이다.

요한의 세례가 '물을 끼얹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물 많은 곳을 일부러 찾을 이유가 없다[요 3:23]. 우물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 오실 때"[막 1:10]라는 대목 역시 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성령께서 임하실 때 음성이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너를 기뻐한다"[:11] 하심과 같이 우리 역시 그렇게 성령을 받는 즉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됨이다. 왜 기뻐하시겠는가. 순종하겠다는 약속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순종할 의사도 없는 아들을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리 만무하다.

이는 그 죽으신 의미가 과거 내가 순종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나가던 나의 "옛 사람"이 그렇게 죽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불복종할 아무 근거가 없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죽음]을 받으셨으므로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을 것이니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라"[벧전 4:1] 함과 같다. 이 세례 받음의 상징성이 현실화하여 나타나고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나의 성령 받아 모심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받으심은 아버지의 영을 받으심이니 곧 아버지와 아들께서 다시 하나가 되심이다. 그 이전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내어 주심"[롬 8:32]이 되었으므로 아버지와 하나가 아니라 분리된 상태이셨다. 물론 내어 주시기 전에는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로 계신 것이다. 그러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일시 그 하나되심이 정지된 것이니 왜냐면 여전히 둘이 하나로 계셨다면 아버지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들께서 사람이 되시기 위해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기 시작하실 때에는 아버지와 분리되셨는데 이는 우리 인간이 범죄함을 인하여 죽은 자로서 원천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음을 가리키는 의미를 상징함이기도 하다. 이제 그리스도 친히 우리의 대표로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아버지의 영]을 받으심으로써 다시금 아버지와 이전처럼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회개의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문자 그대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성령 받음을 "성령의 세례"라고 표현하는 것 역시 그런 방식의 회개의 세례에 비추어 볼 때 성령이라는 물에 완전히 잠겨 버린다, 또는 그 안에 파묻혀 버린다는 의미다. 즉 성령과 내가 불가분으로 하나됨이니 이는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내가 잠겨 버리는 것이니 "살아 있는" 나의 "육신"이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이 자기부인이다. 내가 노력해서 억지로 안죽으려는 나 자신을 죽여 자기 부인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죽어 장사 지내어져 버린 나 곧 "옛 사람"을 근거로 하여 자연스럽게 그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이것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임"[골 3:5]이다. 바울이 말한 바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킴"[고전 9:27]이다. 이미 지적했지만 항상 이 세상은 죽음의 세상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곳으로 사람 삶의 터전이 아님을 명심할 것이며, 세상에서 절대로 살고자 하지 말고 오직 사람 살리는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황금 같은 기회임을 자각하고 이에 매진하고 정진할 일이다.

신약 성경에 죄를 짓지 말라고 했지 육신이 연약하니 하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한 적이 없다. 로마서에서의 "육신"[롬 7:14-24] 설명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 육신이 살아 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육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례'가 상징하듯이 그리고 성령 받음으로 현실화하듯이 죽어 무덤에 묻혀 우리 앞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믿지 않고 혹은 믿음에서 떠나 이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면 육신은 그대로 작동되게 마련이다.

이 역시 양면성이라 할까.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요술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모셨으나 그리스도를 발로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나와 상관이 없게 된 까닭이며 내가 영원하신 선물로서 성령을 받아 모셨으나 그와 같이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시는 내가 성령의 전(殿)이 아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개가 그 토했던 것에 도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한 대로[벧후 2:22] 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은 오직 내가 성령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됨으로 인한 실질적인 변화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그와 같이 내 안에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의 하나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죽으심과 부활이 절대로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내가 죽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 친히 나와 하나되심으로써 내가 죽은 것이요 반면에 내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갈 3:27/롬 13:14] 것을 싫어하여 그리스도를 벗어 버리면 나는 이전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따라서 이를 두고 신비하게 생각할 아무 이유도 있을 수 없다. 요한 사도가 그 편지에서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요일 1:8]이라 한 것도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요일 1:6]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다 혹은 죄가 아니라 할 때 그러하다는 말이니 전후 문맥을 제대로 살필 일이다. 따라서 이 때는 회개하여,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혹은 그렇게 이전에 어두운 가운데 행함으로써[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면서도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어두움을 사랑한 적이 없고 여전히 빛 가운데 있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면, "우리가[즉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이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요일 1:7] 한 것이다.

때문에 요한은 같은 편지에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음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다[요일 2:1/3:6-10/5:18]. 기타 사도들의 논조도 동일하다[고전 15:34/벧전 4:1].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요 5:29]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즉 올바르게 사는지 즉 의[또는 선]를 행하는지의 여부가 문제다. 첫 사람 아담의 죽음은 올바르게 살지 못한 결과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 역시 올바르게 살지 못한 결말이다.

세상 종교는 각자의 구원이 목적이다. 소위 선행이라는 이름 아래의 도덕률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선[또는 의]은 위선이다. 선을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미 그 구원을 은혜로써 달성한 것이다. 스스로 달성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로서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구원 받은 자답게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다.

새 피조물답게 살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니 이는 당연하다. 삶도 조물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이다. 사람되신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하나되어 사는 삶이다. 즉 "성령으로 살고 행하는"[갈 5:25] 삶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아버지를 모시고 한 가족으로서의 '우리' 의식의 삶이 곧 교회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상적인 현상으로 이 세상이 진행되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 나타나게 되어 있는 그 정상적인 모습의 인간 삶일 뿐이다.

그와 같이 살아 함께 일하면서 또는 모여 돈독한 친목을 도모함으로써 서로 위하고 돕는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단지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하는 일이 시급하고 이것이 이 세상 존립의 유일한 의미이므로 여기에 당연히 치중하느라 삶의 낙은 유보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런 차이다.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시지만 사람의 자유 의지를 간섭하실 수는 없는 까닭에 억지로 구원 얻게 하실 수는 없으니 이미 이것은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고 악령들이 영원 멸망에 처해짐으로써 변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다.

살되 낙을 누리는 것과 일하는 것[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싸우는 것[악령들을 상대로 하여]과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일하는 때요 싸우는 때이다. 삶을 누리는 때가 아닌 것이다. 장소도 황야 곧 사람이 살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이 사람들 건져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건져내고 살려낸 사람들을 다시 일군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군인"[딤후 2:3/빌 2:25/몬 2]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 곧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히 12:4]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상대하여 싸우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사생결단으로 이 사람 구원하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의 피를 흘리는 육체대로 싸운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피 흘려 목숨을 바치기까지[육신으로] 이 일에 헌신하고 이 목적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린다는 각오이다. 그렇다고 비장(悲壯)한 것도 아니니 이미 이기고 들어가는 싸움이기에 그러하다.

앞에서도 지적한바 있지만, 인간은 이런 자기중심의 성향으로는 제대로의 생명의 낙을 구가할 수가 없음을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비록 영생을 한다 해도 오직 죽음만도 못한 불행뿐인 것이다. 왜냐면 사랑 없는 생명은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는 것, 죽은 것이 낫다고 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들이 내게 해를 끼쳐서도 불행하지만 불신자들이 가장 신비스러워 하는 것이 바로 양심인데[양심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신비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사람에 따라서는 보통 혹독한 것이 아니다.

왜 이 경우에 그런 작용의 양심까지 들먹이냐 하겠지만, 양심의 가책은 자기부인을 아니하고 자기 중심으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망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가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자살한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남은 내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내 스스로가 남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 절대로 평안할 수가 없기 때문에라도 다리 뻗고 편하게 못사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저지른 일을 놓고도 완전히 만족을 못느끼고 오히려 더 큰 불행을 실감하여 양심의 소리에 못이겨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바로 이 점이 바로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인데도 이에 눈 뜨지 못하니 실로 답답하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그 돈 은 30을 가지고 흡족하고 행복하게 살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양심의 가책에 부대끼다 못해 스스로 자결한 것이다.

보라! 인간 불행이 단순히 외부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자기 내부로부터도 오는 것이니 이를 어찌할 것이냐.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해답이 다 궁색하기만 하다. 떳떳이 "내가 그 해답을 하겠노라"고 나설 자가 천하에 없다. 왜냐면 그 자신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라 일개의 피조물임을 이 양심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증병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 자신 그 내부에서 오는 이 양심의 가책에서 오는 불행[죄책감에서 오는]을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벌써 양심에서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비수(匕首)가 정통으로 내리 꽂히는 판인데 이것을 누가 감히 막으리요! 이 양심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인간 스스로 자기 내부에다 이런 것을 장치해 놓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온 것이니, 즉 누군가가 나를 자율성을 따라 행동하도록 그 기준을 삼을 수 있게 의도적으로 설치해 놓은 일종의 경종(警鐘)인 것이다.

"그 누군가" 할 때의 그 '누구'가 바로 조물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새로이 창조하심을 받아 다시 출생하는 것밖에 인간 구원에 관한 한 아무 해답이 있을 수가 없다. 이 양심이란 것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가? 사람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그 반대다. 이렇게 사람나름이므로 내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내부를 개조하고 양심이란 것을 손볼 수 있는 전지전능을 갖추지 않는 한 모든 이론은 탁상 공론으로만 그치는 한계의 벽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할 바에야 왜 처음부터 그런 짓을 저지르느냐는 것이다. 이를 인력으로 못한다. 양심도 인력으로 통제할 수 없거니와 양심의 가책의 원인이 될 일을 저지르는 것조차 아무 것도 나의 의지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양심의 문제부터 풀라는 것이다. 이것 하나 풀지 못하면서 아무리 우회적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해 보아야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다. 결국 조물주의 존재를 시인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귀결점에도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 인생사이다. 이 사실을 먼저 납득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종교가 얼마나 황당한 가정(假定) 가설(假說)로 점철(點綴)되어 있는지 알 만하다. 처음부터 거짓말이기 때문에 논리성이나 합리성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다시 촉구하는 것이니 이 '양심'이라는 주제부터 풀 생각을 할 일이다. 남이 나를 해쳐서도 탈이지만 거꾸로 내가 남을 해쳐도 탈이다. 이 불행만 느끼게 하고 결코 평안을 안겨다 주지 못하는 장본이 되어 있는 양심을 내 스스로 내 속에다 집어 넣지 않았다. 이것은 자율이 아니라 순수하게 타율이다.

양심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타율이 아니라고 하는가? 내 마음대로 하면 왜 양심의 가책을 받는가.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양심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이지 그 마비된 것은 어느 때든 반드시 머리를 쳐들게 되어 있다.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물 같으면 죽을 수도 있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에는 반드시 나를 찾게 되어 있는 나의 존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 양심도 한 때는 쥐 죽은 듯하지만 반드시 뇌성벽력을 발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세상이 황야로 비유되는 또 하나의 사실

세상이 황량하고 삭막한 광야요 사막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자연계에 속해 있다는 것만 아니라 이상과 같은 인간의 이기주의[자기중심주의] 즉 동물적 생활 습성[자기중심]에도 있는 것이다. 동물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적 생물체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인생들처럼 죄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짐승처럼 즉 야수같이 산다고 해보라. 그 세상이 얼마나 살벌할까. 가상해보는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이 바로 그렇다.

다만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하나님의 강제적인 통제에 의해 겨우겨우 오늘날까지 지탱해 온 것이다. 양심이라는 내부적인 것과 3운법칙과 같은 외부적인 것으로 안팎으로 시달리는 인생들이여. 고로 이 세상 자체만으로는 전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인류는 이미 오래 전부터 눈치챘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강제 통제는 주로 두 가지로써 나타나는 바 하나는 이미 지적한 대로 양심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와 다른 하나는 인생의 걸음걸이가 걷는 자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한 성경 말씀대로 인간의 행보(行步)를 그 출생과 사망에 이르기까지 문자 그대로 자로 재듯이 통제되고 있다는 그것이다[단 5:23/렘 10:23/잠 20:24/잠 16:9].

이 사실이 오늘날 입증되어 나타난 것이니 곧 3운(運) 법칙(trini homo)이다. 성경의 그와 같은 선언이 문자 그대로 '그림 그려놓듯이' 하나의 법칙으로써 그려져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조물주 하나님의 이런 강제적인 간섭이 개재됨으로 해서 인간 세계가 간신히 오늘날까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는 터이므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세상으로 만족하실 리 없다. 원래 세상을 이런 것으로는 만드시지 않은 것이다.

그럼 이런 줄을 모르고 만드셨다는 말인가. 만족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세상은 곧 접으시고 둘둘 말아 치우시게 되어 있다는 그 뜻으로 말함이다. "하나님께서 영적 존재 즉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셔서 일절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다 하면서 어째서 그렇게 통제하신다고 하는가?" 하겠지만, 3운법칙 설명에서 이미 밝힌 바 있거니와, 간섭하고 강제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이니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래 목적은 이 자연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계에서 영원히 사는 데에 있는 까닭이다.

이런 자연계에서의 삶은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신 것이 아니고 인간[아담] 스스로의 미련한 행동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즉 의외의 돌발 사건인 셈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에서 언급한 "인생의 길"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인생 행보(行步)를 가리킴이지 영원한 생사(生死)에 관한 것이 아니니, 그런 영원한 운명은 철저히 각 개인에게 좌우되는 것으로서 그것만은 일절 하나님이 강제하시거나 개입하시거나 간섭하시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또는 증거가 아담의 죽음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의 영원 멸망에 처해진 그들 스스로 만든 운명이 아닌가. 따라서 이런 측면에서 보아도 이생[이 세상]의 삶이라는 것은 일절 무의미한 것이다. 오직 의미기 있는 것은 이러한 인생 행보로 해서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막중한 의미로서 여기에만 중요성이 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처럼 살았든 그 부자처럼 살았든 헤롯왕처럼 살았든 그런 것은 영원한 장래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을 수용하였느냐 여부, 그래서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에 복종하였느냐 여부만을 찾고 가리게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 하는 것이다. 의미 없다기보다 자기 자신의 영원한 운명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니 곧바로 자기를 망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무의미한 인생 삶[이 세상에서의]을 하나님께서 철저히 통제하시는 것이다. 왜냐면 그냥 방치해 두시면 사람 생기자마자 살인행위부터 먼저 일어나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이유 없이 죽였듯이 대중도 없는 살샹 행위가 자행되어 구원커녕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도 이 세상은 제물에 망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인간의 악행에 의한 자멸 행위를 방지하시는 차원에서도 이러한 철통 같은 간섭과 통제가 필요하게 된다. 바로 이 사실을 3운법칙은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구원 얻을 사람의 충만한 수(數; 롬 11:25/계 6:11)가 차기까지의 그 한정된 기간이 끝나면 아무 미련 없이 지체없이 이 세상은 종막을 고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한결같이 이 세상은 "지나가는"[고전 7:31] 것에 불과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고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떠난다 하였다[약 4:7,8]. 우리가 가까이 하지 않는데 가까이하시지 않고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지 않는 것은 마귀의 주장에 동조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곧 옛 뱀"[계 12:9]을 대적하지 않았다[창 3:13,17]. 그러나 마지막 아담께서는 우리의 본으로서 마귀를 대적하셨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이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호통을 치신 것이다[마 16:23].

광야 시험에서도 모두 말씀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물리치셨음은 우리의 본이 되신다. 시험을 받으실 때 광야로 나가신 것은 앞서도 지적했지만 광야가 이 세상을 상징하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만 한정되는 시험이다. 따라서 이런 시험에는 협박과 회유가 병행된다. 세상에서 한 때나마 의젓하게 살 수 있다는 착각 그리고 한 때 고난 받아 죽으면 그만인 것을 마치 영원히 고난 받는 것처럼 위협을 확대해석하는 착각을 넣어 주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그러므로 그런 종류의 협박이나 회유에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가 이 사실 곧 주님께서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받으셨다는 의미에 함께 포함된다. 어차피 살지 못할 이 세상 삶인데 왜 이런 삶에 연연해할 것이며,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 인생인데 왜 죽음 자체에 전전긍긍할 것인가. 전연 이유가 없다 함이다. 그리고 세상은 시험자의 지배 아래 있어 우리가 시험 받는 것이 이 세상 있는 목적 중 하나라는 것이니 그렇다면 시험을 이기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지 시험을 기피하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과감하게 직면하여 이길 작적을 해야 온당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신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사랑과 생명의 법칙 곧 둘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원리에 의한 동시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귀를 우리가 대적해야 떠나는 것은 이미 우리가 그를 이겼고[요일 2:13,14/4:4/5:4/고후 2:14].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이기는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이기는 자로서의 위치를 지킬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방금 말한 동시성이요 양면성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동시에 반드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빌 2:12] 함이다. 우리가 세상을 이김[마귀를 이김]은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시기"[요일 4:4]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구원을 상태를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안겨 주셨으니 우리는 이 능력을 근거로 우리 스스로 움직여 "이기는 자"[계 2:7,11,17,26/3:5,12,21/21:7]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드셨다고 자동적으로 끝까지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겨야 하는 것이며, 나를 구원하셨다고 이 구원된 상태가 자동적으로 지속되어 나를 천국에 들어가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함이다[마 7:21/25:45]. 이 동시성과 양면성은, 내가 아무리 스스로 구원을 이룬다고 해도 나를 이미 은혜로 구원하신 사실이 없는 한 절대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내 아무리 이기는 자가 되려 해도 이미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 있는 은혜가 아니고는 절대로 그 이김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남은 당연하다.

이는 거듭 강조하는 것이지만 아무리 하나님께서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지만 그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한은 꼼짝없이 죽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롬 5:12] 사실과 일치한다. 영물들을 처음 창조하실 때는 영원히 영광 가운데 살도록 만드신 것이지 악령이 되어 영원 멸망에 들어가라고 만드신 것이 아니지만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범죄하여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가니 어쩔 수 없이 멸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조물 각자의 영원한 운명은 피조물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말이 다름아닌,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우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떠난다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가 성도들을 위하여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이 자유 의지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을 우리가 어찌 할 수 있으리요] 그 자유 의지를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모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세를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력화한다는 그 의미이다.

우리가 믿음에 들어오게 된 것도 먼저 이들의 기도 덕이요 말씀을 전파한 덕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그래서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벧전 1:12] 것이라 하였으며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12]이라 했으니, 왜냐면 이런 일은 천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우리 스스로 그리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성령 안에서 기도함"[엡 6:18]이라 했으니, 왜냐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하시는"[롬 8:26,34/히 7:25] 역사(役事) 가운데에서, 이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 역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우리다. 우리가 구원 얻었으면 금방 신령한 몸이 되고 에덴낙원 곧 하나님의 낙원으로 들어가 살 일이지 무엇 때문에 이 아무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죽음의 세상에 그대로 여전히 머물러 있겠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아버지의 아들들이므로 일하기 위해서다. 바로 이와 같은 마땅한 일을 하지 않을 경우, 이는 아버지의 아들들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되므로 즉 믿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기이ㅔ, 아들의 반열(班列)에서 제외되고 탈락됨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역시 양면성이 있으니 죽음의 세상으로서 무익하기만 한 세상이나 하나님의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현장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저울질되고 가름되어지는 시험의 무대로서 영원 세상과 맞먹는 중대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이 이 세상이다. 다시 말해 그 영원 세상에게는 전생前生)에 해당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양면성에서 전생과 후생만이 있고 전생과 금생(今生)은 있지 않으니 다시 말해 전생은 없었고 내생만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삼위일체의 원리다.

우리 세대에서 전생이 있었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과 농락일 뿐이다. 밑도 끝도 없이 유전(流轉) 변천을 반복하는 그런 무질서가 아니라 엄격한 양면성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이 피조물 세계이다. 그런 당치도 않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낭설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이와 같이 지금 이 때는 모든 피조물이 합력하여 한 몸으로서 함께 아이 낳는 수고의 진통을 하는 때이니[롬 8:22] 이것이 현재의 모든 피조물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이 정상이 아닌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모르도록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눈을 감겼기 때문에 "미친 마음"[전 9:3]이 되어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뿐이다. 이는 무서운 현실이니 정상이 아니고 처절한 비극적 현상일 뿐이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groans]으로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나 [왜냐면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시느냐 하여] 이는 아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계실 때 아버지께 기도하시던 모습 그대로이다. 사람으로서 기도하신 것이요 아들로서 아버지께 소청을 드리심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계심과 같이 원래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총체적인 의미가 되실 뿐 아니라 지극히 개별적인 의미가 되심을 이미 설명했다.

총체적이라 함은 우리 피조물 모두를 전체로 하나 같이 대하신다는 뜻이요 개별적이라 함은 마치 사람이나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 서로 개별적인 관계를 가짐과 같으니 왜냐면 육체가 하나뿐이지 여러 육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갑'이라는 육체를 가진 피조물이 '을'이라는 피조물과 관계할 때는 '병'이라고 하는 육체와는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제한성을 두고 개별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가 인식할 때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 중의 하나인 것처럼 착각하여 이런 제한성으로 막연하게 대하는 오류를 범하는데, 조물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피조물은[사람이든 천사든] 공간을 점유한 육체이므로[신령한 것이든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이든] 이런 제한성을 벗어날 수 없어 전체를 만일 대할 때는 개별적으로 대할 수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잘못 인식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몸종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사래에게서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다 떨어지게 되자 아들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여 300미터 떨어진[화살이 날아가 박힐 만한 거리] 곳쯤에 물러가 하늘을 우러러 대성통곡하니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 물 있는 곳으로 안내하여 살 길을 열어 주는 장면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창 21:16].

그 전에도 하갈은 사래의 구박에 견디지 못해 황야 빈 들로 정처없이 도망쳐 나올 때 천사가 역시 나타나 하갈을 안내하여 다시 그 여주인에게 돌아갈 것을 일러 주는데 이 때 하갈은 천사를 만난 그 곳을 일컬어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監察)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You are the God who sees me; I have not seen the One who sees me]"[16:14] 하는 뜻으로 "브엘 라해로이"라 이름 지었다고 했다.

하갈이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the living One who sees me]"[欄下註]라 한 대로 우리 개개인을 개별적으로 살펴보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갈의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토록 세밀하게 나를 생각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이신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당시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인 이삭으로부터 걷어내시고 버리시는 이스마엘과 그 모친 하갈이다.

비록 그러함에도 그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를 보살피시기를 사람이 그 자식을 돌보심과 같이 하시는 것을 하갈이 그 때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머리카락도 다 세시는 하나님이시다[마 10:30]. 이와 같이 우리 각자에게 일일이 "나의 하나님"["우리 하나님"과 동시에]이 되시는 의미는 이미 설명한 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심과 동시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벗]"[약 2:23]라 하심에서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친구라 하심도 같은 의미다[요 15:15].

친구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있고 보다 덜한 친구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각자 그리스도께 어느 정도로 가까이하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관계다. 순수하게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보살피시는 것이지[엄마가 아이를 보살핌은 아이가 직접 할 수 없는 일에 한함과 같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까지 챙겨 주시는 것이 아니니, 그렇다면 창조하실 때부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신 이상, 이 원리원칙에 따라 우리 스스로 움직여야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 경우 하나님의 보살핌이 아니라 도리어 게으른 자로 취급되어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가까이하실 것"이라는 이 교훈은 천만 금 같이 소중한 것이다. 앞에서도 강조했지만 우리가 주님을 시인하면 우리를 또한 시인하실 것이로되 부인하면 주님 역시 우리를 부인하신다는 그 말씀 그대로다[눅 12:9].

갑이 을을 위하게 되는 것은 을이 갑을 위하게 되는 조건에 좌우된다는 '동시성'과 '양면성'의 원리이다. 어느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없다. 양손이 있어 둘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이치 그대로다.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자주 독립성을 행사하는 존재로 만드신 이상 이와 같이 모두 각자가 주체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움직이기를 원하심이다. 우리를 구원하심 즉 새로이 창조하심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써 하셨으니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이는 만유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된 아들로서의 "함께 된 상속자"다[롬 8:17]. 우리 전체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나 개인의 하나님이 되시는 사실은 시편 139편에서 명확히 나타나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자신을 주셨다"[갈 2:20]는 사실을 강조함과 같이 이 시편은 우리가 아닌 "내가", "내게", "나를" 등 하나님께서 '나'와 상관하시는 것을 세밀히 밝히고 있음이다. 이 시편은 다름아닌 엄마 품 속의 아기로서의 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각 사람에게 임하심이 가시적으로 그렇게 나타나지셔서 오순절 날 성령 강림 때 그렇게 불의 혀 같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 임하는 것으로 나타나셨고 그 이후에 성령 받을 때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는 등으로도[행 10:46/19:6/8:18] 또한 나타내신 것은 그 확실함을 모두에게 입증하시는 차원이었다. 따라서 그 후로는 그렇게 "불의 혀"와 같은 형상으로 나타내신 예가 없었던 것처럼 반드시 성령을 받는 사람마다 또는 받을 때마다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는 등의 외형적인 증거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한번 드러내신 것으로 충분하여 모든 교회가 심히 두려워하게 된 것으로써 납득이 되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지 여러 번 되풀이하여 그런 일이 나타날 필요가 없음과 같은 이치다. 일벌백계 식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다고 그런 사태가 두 번 다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니 다만 가시적(可視的)인 측면은 반복되지 않는다는 그 뜻일 뿐이다.

따라서 그 이후로 많은 사람이 성령을 받았으나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만 다르지 그리스도께서는 오순절 당시 각 사람 위에 임하시던 것처럼 우리 각자에게 임하여 우리와 함께 사시는 사실만큼은 불변인 것이다. 불의 혀가 갈라짐과 같이 갈라져 각자에게 임하여 나타나신 것이 바로 각 사람에게 일일이 선물로서 임하심을 증명해 보이시는 의미였으니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과 함께 영원히 사시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유의할 것은 오늘날 소위 성령 받았노라 하면서 방언하는 것 등으로 해서 그 증거를 과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으나 이에 속지 말 것은 이미 우리는 영국 웨일즈[Wales]의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의 영적 현상[1904-5]을 통해 그 거짓을 간파하고 있는 터이다. 오늘날의 그런 소위 오순절 운동[the pentecostal movement]이 거기서부터 연원(淵源)이 되어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성령으로 가장하고 있는 실례(實例)다.

이런 가짜 소동은 이제 곧 적 그리스도가 출현할 때의 보다 큰 규모의 것으로 나타날 전주곡이 되어 있다. 그 때 적 그리스도는 마치 하나님[의 아들]처럼 스스로를 가장하여 온 세상을 풍미(風靡)하게 될 것이다. 성경이 이를 두고 "대단한 속임수[strong delusion-KJV]"라고 했을 정도인즉 진짜를 뺨치는 듯한 가짜 소동이 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 할 것이라" 하셨으므로 마땅히 경계를 요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일은 우리 스스로 하도록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신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데 이루어 주신다면 그것은 간섭과 강제가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도 아무나 누구나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6:65] 하나님에게서 배워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야[:44,45] 올 수 있음과 같은 이치다. 자동차로 치면 하나님께서는 연료를 다 채워 주신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운전까지 하나님이 대신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운전을 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차까지도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운전까지도 하신다면 나를 게으른 자로 만드시는 역효과에 그칠 뿐이다. 운전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운전은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운전이 다름아니라 우리의 자유 의지와 자유 선택에 의한 행동 곧 삶 그 자체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운전하는 방법을 사람마다 그 본성으로 가르쳐 놓으셨기 때문이다.

즉 살도록 지으셨으니 그렇게 지으심을 따라 제각기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이다. 병을 고쳐 주셨으니 이제는 완전히 건강한 몸으로 삶을 영위하면 되는 일이다. 목 말라 죽을 위기에서 마실 물을 얻어 마셨으니 기운을 차리고 나머지는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목이 말라 죽는 순간이었는데 물을 마셨으니 [이 물을 내 스스로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래서 죽게[(멸망하게) 되었었다] 온전히 모든 것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요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내게 책임이 있다.

'어버이'로서의 "아버지", '자식'으로서의 "아들"

이미 설명했지만, 성경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표현은 성경이 인간을 말할 때는 첫 사람 아담을 중심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여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또 남녀로서의 둘도 아니고 오직 한 사람 아담만 만드신 까닭이다. 즉 우리가 아담의 후손 곧 그 씨이니 모든 인간의 아버지가 되지만 성경은 단 한번도 인생들을 "아담의 자손"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왜냐면 정상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애초 창조하신 때의 순수한 모습을 지녀야 하는데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 모습을 잃어 버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인간은 그런 최초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므로 기껏해야 아브라함을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정도다. 아담을 인간의 조상이라 하지 않는 이유다. 그리고 이제는 첫 사람 아담의 시대가 아니라 마지막 아담의 시대다. 곧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탄생한 교회 시대이니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담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신부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여자의 머리이니[고전 11:3] 여자는 그러므로 아담의 몸이다.

또 아담에게서 여자가 생겼으므로 "남자" 또는 "아버지"라는 의미는 "여자" 또는 "어머니"라는 개념은 포함하는 것이다. "아들"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아담을 중심으로 모든 인간을 통칭함이니, 아담을 중심해서 말함으로써 대표성을 아담에 두고 있으므로, 여자가 생김으로 아담이 남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담을 중심해서 부모 자식 관계를 표현하다보니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의미 상으로는 남녀 구분이 없고 모든 사람을 아울러 나타내고 있음은 당연하다. 고로 "아버지"라 해서 어머니와 같은 이미지가 결여되었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말 것이며, "아들"이라고 해서 딸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생각들은 일절 부질없는 것이다. 우리말 번역 "자녀"[子女]는 남녀 개념으로 구성된 단어이지만 영역으로는 "children"으로서 성적 구별이 없다. 물론 구약에 하나님의 자녀[sons and daughters]란 말이 나오기는 하나 그것은 육신으로 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서 여기서는 논외다.

그런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는 어버이[아버지 또는 어머니라는 의미이기는 하나]로서의 의미로 알아들어야 올바르고, "아들"이란 말도 자식(子息, children)이라는 의미로 인식해서 들으면 자연스러울 뿐이지 어색할 것은 없다. "어버이"라 하면 부모 곧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한 몸으로 되어 있는 위치를 말함이라 해석하면 그렇다. 실제는 둘이지만 "한 몸"이므로 실상은 하나가 되어 있음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심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고 근원이시고 하는 그런 막연한 뜻의 의미가 아님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의 말 그대로의 부모 자식간의 어버이되심을 가리킴이다. 바로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들"들이 된 의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아버지께서는 항상 아들과 하나로 계신다. 한 영이신 것이다. 즉 '하나'이시니 이를 가리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 하신 그대로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
다음글 | (36) 메시아 교회
이전글 | (34) 메시아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