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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환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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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6)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8 19:15
글쓴이 김일동 조회 395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셨다"[약 1:18]고 한 대로 "어머니"로서의 해산의 진통은 십자가 상에서 죽음의 고난 겪으신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여기에 아버지 친히 함께 하셨다. 아들만의 고통이 아니시니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둘이 하나되어 계심이다.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이마에 땀 흘리는 수고는 지금까지도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남은 고난 중에 계시는 그 이상으로 큰 수고도 없다. 인간이 아이 낳는 수고의 고통, 자식들 먹여 살리기 위해 수고하는 모든 것은 저주의 결과이니[창 3:16,17] 이 저주의 고난에 하나님 친히 동참하시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담의 경우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어 그렇게 둘이 된 것이다. 독립적으로 처음부터 따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즉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온 것이다[고전 11:8]. 그렇게 파생[派生]된 경과를 따지면 여자는 남자의 자식인 셈이다. 그러나 자식은 아니니 자기 스스로 여자를 만든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자기에게서 나기는 났지만 자기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자기와 같은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만든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둘 다 창조된 것이므로 동격이면서도 그러나 그 육체는 남자의 것이기에 "한 몸"이라 하는 것이다. 한 몸으로 하나이면서도 그 생성된 순서를 따라서 여자의 머리가 남자이다[고전 11:3]. 생성된 순서만이 아니라 실제 남자[아담]로부터 여자가 났고 또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즉 남자가 정본(正本)이면 여자는 부본(副本) 격이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되는 일이다. 과학이라고 해서 무슨 거창하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법칙의 순리에 따르고 그 이치에 적합하면 그것이 과학적인 것이니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표현도 그래서 가능하다. 원리원칙에 따르는 결론이니까 그 원리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진리로도 통한다. 물론 오늘날 미신, 인간 망상, 억단 같은 것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통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실제는 그러하다. 우리가 자연계에 처해 있으니만큼 자연법칙에 준해서 과학이라는 개념이 통하지만 우리가 영적인 진실과 진리를 안다면 그 역시 과학의 범주이다.

너무나 모르고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이름을 적용하지 않는 것뿐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기존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된다"는 말을 하지만, 그 과학이란 것이 다름아니라 만물 만상은 대칭[상칭, 대립]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기본으로 하여 그 각론(各論)을 말하는 것이다. 대칭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 대칭적인 것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닮은꼴들이 상호 교차해 있어 움직여 가는 닮은꼴의 세계이다. 이 닮은꼴에서는 반드시 먼저 있고 나중에 생긴 것으로서의 차이가 분명하여 질서가 확고하다. 닮은꼴이란 도형을 그릴 때도 그 누구도 그 둘을 한번에 작성하지 않는다. 먼저 기본 선 또는 점을 설정한 다음에 그와 같은 것 즉 닮은꼴이 작도됨이니, 그렇게 해서 두 개의 닮은 형상이 쌍으로 짝을 이루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 기본되는 것을 이루고 있는 것이 '먼저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완성되는 것이 '나중 있는 것'이다. 먼저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나중 있는 것을 평가하니까 "닮았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닮았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먼저 있고 나중 있는 것으로 구분되어 서로 짝을 이루고 이리하여 서로 조화를 구성한 하나로서의 통일된 체계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계시는 모습 즉 아버지와 아들로서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이치를 따라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임을 이미 설명했다.

왜냐면 그렇게 계시는 모습이 가장 이상적이고 그 이상 더 바랄 바가 없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이 모든 삶의 기본이 됨은, 이 둘이 하나되어 '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켜 '사랑'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소위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삶이 개화되었다고 하면서도 인간 사고 방식은 퇴행, 퇴폐 일로로 치닫고 있으니 그 단적인 증거가 바로 이 원리, 이치 혹은 상식에 반하는 소위 양성평등이다.

이것은 상식으로나 이성적으로도 반(反)하는 일이요 순(順)하는 것이 아닌데도 온 세계가 여기 물들어 있다. 이는 이 세상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 있어 인생들이 자율적이면서도 반면에[동시에] 타율로 움직여지고 있음을 말하는 확고한 증거이다. 이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적 조류를 자주 거론하게 되는 것은, 이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지배의 가장 확실한 증거 중의 하나가 되어 있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와 활동을 알려면 이런 예를 두고서도 충분히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인간의 판단이 이런 정도로까지 퇴화, 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지배의 확실한 현장 추적이 되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앞에서 3운법칙이 하나님의 강제와 간섭을 증명한다고 했지만, 자율과 동시에 타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확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통제라고 해서 인생들이 기계적으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인생의 길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지만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 인간의 자율성 곧 자주 독립성이니 영원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양상이 이 세상에서의 행보(行步)로써 그대로 나타나지기 때문이다. 가령 자기중심으로 살아 [그리스도를 믿든지 않든지 불문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혹은 돈을 벌기 위해 데마처럼 세상으로 나가면 얼마든지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딤후 4:10].

이는 분명 자율적인 행동이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죽음의 길과 그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또한 타율이니, 그렇게 한다고 반드시 그가 세상에서 형통하고 또는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은 뒤로는 복음 전하는 사도로서의 임무에 끝까지 충실했다. 이것은 분명히 자율적인 행보이다. 그러나 그 역시 3운 법칙에 따라 그런 복음 전도의 생애를 마쳤다. 이것은 명백히 타율적인 것이다.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일문일답을 한 후 회개한 때가 기원 후 32년이다. 그 후 아라비아에 가서 3년간 칩거하는 중에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진리를 완벽하게 터득하고 35세 때부터 복음 전파에 나섰다. 그러다가 57년에 위험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가 있던 중 동족에게 붙들려 로마 총독 앞에 서게 되고 그후 6년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그 후 방면되어 한 3년간 활동하다가 67세에 생애를 끝마쳤다. 바울 사도는 말 그대로 복음 전파의 활동을 하던 때가 그의 활동기로 정해져 있으므로 3운법칙에서는 SN형에 해당된다.

3운법칙에 대해서는 다시 역설하거니와, 이 3운법칙이 존재함으로써 그리고 '삼위일체의 법칙'을 증명하고 있는 그 기이(奇異)한 구조로 인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자체 증명하고 있음과 같이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고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실존, ㉯성경이 그 말씀이라는 것, ㉰성경에 소개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자(救援者)이시고 심판주(審判主)시라는 것, ㉱이 세상이 마지막 때라는 것, ㉲이 세상의 인간 삶이 무의미하여 지금은 삶의 낙을 누리는 때가 아니라 이 무의미한 오직 죽음의 의미만 있는 이 세상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여 건져내는 것만이 마땅히 할 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과 ㉯성경이 그 말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증거가 있어 더 이상 필요치는 않으나[롬 1:20] 그러나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다시 한번 더 확실하게 그 증거를 보여 주심으로써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 "핑계 댈 수 없도록"[:20] 모든 입을 막으시는 조처를 취하심이니, ⓐ이 3운[三運]법칙이 성경에서 나왔으며 또한 성경이 이를 밝히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의 하나이고, ⓑ인간의 전체 생애를 이와 같이 계량(計量)하여 정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아님이 분명한즉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입증하는 까닭이다.

3운법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자(救援者)이시고 심판주(審判主)로서 성경에 소개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유일무이하게 이 인간 생애의 법칙에 해당되지 않음이 드러났음과 더불어, ⓑ이는 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보통 인간과 달라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되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고, 또한 그 생애가 "하나님의 어린양" 곧 희생 양으로서 중도에 그것도 청춘에 끊어지는 양상을 반드시 드러내 보여야 하는 특이한 것임을 성경이 명시하고 있는 그대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마지막 아담으로서 유일하게 그 생애가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는 유일한 존재이시다. 다시 말해 그 생애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되셨으므로 시작한 해는 있으나 그 생애가 끝날 리는 없으니 죽음이 다시는 그를 지배할 수 없는 까닭이다. 죽음으로 종료되어야 그 한 생애를 짚어볼 수 있는데 죽음이 사라졌으니[그의 부활로-롬 6:9] 유일무이하게 그 생애가 끝날 수가 없는 사람이시므로 3운법칙에 해당되시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결혼 운운" 하면서 요즈음 4세기 경에 작성되었다는 파피루스 문서가 발견되어 나왔다고 웅성거린다. 무조건 "고대 사본"이라 하면 무슨 최종적인 권위나 되는 양으로 죽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부터가 가소로운 일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어느 시대에서든 사람은 사람이다. 장난 끼가 있어 아무렇게나 갈겨놓은 혹은 정신 이상자가 써놓은 글이라도 요행히 수 천 단위의 세월이 지나도록 남아 있기라도 하면 그것은 "고대 사본"이 된다.

이런 "4세기의 고대 사본"도 더구나 그 배경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의도적으로 작용하게 되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배후에는 하나님 친히 계신다. 이 표현이 의심스러우면, 적 그리스도의 출현도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들 가운데 역사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10-12]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다시 말해 교만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알려고 아니하거나 또는 순종하기를 게을리 하는 이들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차원에서 그와 같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음모를 묵인하시는 것이다. 소위 "고대 사본"을 통하여 "거짓 것을 믿게 하심"도 그런 사람들을 구원 얻지 못하도록 걸러내시는 한 가지 방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간들을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와 같이 역 이용하시는 것이다. 악인들을 걸러내시는 일을 하심이다.

㉱이 세상이 마지막 때라는 것과 ㉲이 세상의 인간 삶이 무의미함을 증명한다는 것은, 이 삼위일체의 원리나 3운법칙이 진작부터 계시되지 않고 이제서야 인생 중에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는 명백히 택한 자라도 할 수만 있으면 유혹하여 넘어뜨리겠다는 때이고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배운 지식의 확실함과 진실됨을 거듭 확인하게 하여 모쪼록 이 때를 당하여 그 자기 본분을 충실히 다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나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을 받는 일에서나 인생들은 자율적이면서도 동시에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양면성을 반드시 띠고 있게 된다. 그리고 자율성은 각자의 영원한 운명에 관해서 그러하다. 그리고 타율적인 것은 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각자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에 따라 거기 보조를 맞추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즉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어도 이것까지는 자율에 속하나 그 후 세상에서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고 않고는 타율에 속하는 것이니 자기 마음대로 일이 되는 것은 아니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처럼 복음 전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 여생을 이 하나님의 일에만 바치기로 작정하는 것까지는 자율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활동 역시 3운벱칙에 따라 진행되니 분명 타율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 인생들을 조종한다고 해서 각자의 자유 의지만은 간섭할 수도 없고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으면 된다. 하나님께서 손대시지 않는 일을 어찌 감히 일개 피조물에 불과한 영물이 좌지우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즉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다"[고전 12:2]고 표현하고 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을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 함과 같다. 오늘날에 이르러 즉 적 그리스도의 출현에 앞서 더욱 결정적으로 비정상 상태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인류를 몰아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 중 하나가 앞에서 지적한 소위 양성평등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폄훼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의 권위부터 말살시키려는 시도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한 이래 확고부동한 전통으로 내려오던 것인데 인간 스스로가 이렇게 갑자기 왜곡된 인식으로 나갈 리는 없다. 왜냐면 이는 자연 순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인간이 그 본연의 이성적인 판단을 멀리하고 반이성적인 것에 이다지도 몰두할 까닭이 없으니 순수하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작용 때문인 것이다. 옛부터의 전통을 그렇게도 중시하는 인간인데, 더더군다나 가장으로서의 남편이 아내에게 밀림으로써 아내와의 관계가 더 이상 머리와 몸의 체제가 아니고 동격이라는 여자의 주장에 남자로서 굽히려 드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적이라 할 때는 초자연계에 속한 일을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런 현상은 초자연계의 영역에 속하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인간 조종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달리로는 이런 놀라운 급변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음이다. 따라서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와 그 활동에 대한 [불신자에게가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증명이요 증거인 것이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20세기에 들어 급상승한 것은 마지막 때를 위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니[단 12:4], 다시 말해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한 사전(事前) 포석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세계를 장악하여 통일시키기 위함이다. 인류의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가장 바라는 바로서 인류를 하나로서 손쉽게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니 그 증거가 바벨 성탑[城塔] 쌓기에서 이미 입증되었던 바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못하도록 인간의 언어를 당시에 혼란시키신 것이다[창 11:7]. 이제는 적 그리스도의 때가 왔으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온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키자는 목적에서 이런 과학 문명을 발달시킨 것이다.

물론 그 덕에 인간 생활은 편리해졌다. 그러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인간에게 그렇다는 얘기일 뿐이다. 인간은 원래 영적인 존재로서 영물[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해 악령들도 물론 포함된]과 같은 신령한 몸으로서 영계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다. 따라서 이렇게 구차하게 살 수밖에 없는 자연계는 인간의 본령(本領)이 아니다.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되어 있으면 이런 소위 과학의 발달로 인한 문명의 이기(利器)는 어린애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전혀 필요치가 않다. 따라서 굳이 덕이 된다고 말할 필요도 사실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악령들이 나타내는 능력과 지식을 우리 역시 천국에 가면 소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령들만 인간에게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원래 영물들은 인간을 위해 이런 목적으로 창조되었으니까 거룩한 천사들 역시 인간에게 필요한 지식을 베풀지 않는 것은 아니나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이런 현상이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는 것뿐이다]. 고로 이 자연계와 더불어서만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이기(利器)가 인간에게 소용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구성하고 현재의 자연계는 곧 끝날 것이므로 모두가 함께 형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이 세상에 군림해 있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와 활동이 입증되는 것이다. 방금도 지적했지만, 인간의 삶은 이 자연계에서 사는 것이 원래부터 정한 바가 아니고 고차원의 신령한 세계에서 모든 능력으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므로, 이 세상 삶을 모쪼록 편리하게 살도록 하나님께서 이런 각종 소위 과학 문명의 발달을 촉진시켜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벌써 오래 전에 그렇게 하셨을 것이요 다니엘의 예언처럼 이 마지막 때[단 12:4] 이와 같이 하실 리가 없다. 마지막 때 이와 같이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는" 것은 필경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함이니 이 적 그리스도 다음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친히 임하시게 된다. 고로 그리스도의 오심 역시 가깝다는 확실한 징조다. 이렇게 "온 천하를 속이는 악령"[the devil who deceives the whole world][계 12:9]이라는 표현을 성경만이 쓰고 있고 온 천하를 꾄다고 했으니, 성경을 믿는 사람 외에는 예외가 없이 그 속임수의 대상이 됨을 가리키므로, 이 성경을 표준하여 마땅히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세상에게 경고하고 증언하는 증언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세상 종교도 악령이라는 말을 쓰고 그 의미를 적용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권세[인간이 육체이니까 이 육체에 대하여 상대적인 의미로 절대적이라 하는 것이니 육체로서 영을 당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의 "이 세상 신(神)"으로서 표현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세상과 세상 종교가 마귀에게 매여 있는 까닭에 그렇게 마귀의 정체를 폭로할 리가 없다. 그러면 소위 기독교라는 종교 집단에서 마귀의 존재를 시인한다고 해서 진리냐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이니 마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양면 작전을 쓰는 까닭이다.

즉 한 편으로는 마귀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마귀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그럼에도 구원 얻는 진리가 아닌 엉뚱한 것을 선전하게 하는 것이니 즉 "성모(聖母) 마리아" 종교 또는 "행함이 없는 거짓되고 죽은 믿음"[약 2:20,26]의 종교를 만들어놓은 것으로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행동을 얼마든지 취하여 정세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소위 양동(陽動) 작전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쓰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는 철저히 속이는 자이므로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세상을 다스리는[주님은 이 의미로 "이 세상 임금(prince of this world)"이라 하셨다] 이 세상 신으로서 마지막 때의 최후 발악으로 전체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벌이는 이 전무후무의 사기 소동에서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여 성경을 "구태의연한 골동품"이라 선전하기 위한 수작의 일환으로 진행시키는 작업 중의 하나가 "양성 평등"인 것이다. 그렇게 양성 평등을 합리화해 놓으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함께 빌미로 삼아 "고대 원시적인 가부장제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 고루한 옛 사상과 인식에서 나온 것이 성경이다" 하고 몰아 부치기에는 안성맞춤이 된다.

그렇다고 이 양성평등만 제대로 바로잡아놓고 더 이상 그런 그릇된 사상을 품지 않도록 하면 일이 되는 식으로 잘못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단지 그렇다는 정도로 알아두면 유익하기에 지적해 두는 것뿐이다. 양상평등 반대 운동을 벌일 필요는 없다는 그 뜻이다. 오직 성경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이들만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심 같이 할 것이요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처럼 남편을 머리로서 따를 일이다. 둘이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는데 누가 무슨 참견을 하리요.

이렇게 이 세상 신은 인간 사상과 사고방식을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다. "신(神)"이므로 얼마든지 주물럭거릴 수 있는 것이 인간 곧 "육체"다. [그러나 지나쳐 도에 넘치도록 하는 것은 거룩한 천사들이 묵과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움직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조종을 따라 선전되어 있는 성경일진대 장차 누가 믿으려 할 것인가.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 젖은 한낱 골동품"에 불과한 것에 넋을 빼앗긴 비이성적인 무리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이 인식하게 만드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계략은 없다.

성적(性的) 구별은 피조물에 한한다. 피조물이라도 오직 이 자연계 생물에 한한다. 이 자연계와 대칭되는 천사들과 같은 영적 존재에게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부활의 자녀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결혼하는 일이 없다"[눅 20:36] 하신 것이다. 영계는 자연계와 대칭을 이루는 것으로서 생명과 죽음 또는 하늘과 땅 정도의 수준 차이가 확연하다. 고로 우리가 영적인 몸을 입게 되면 더 이상 생식하고 번식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성별도 없어진다.

악령들이 "네피림"을 생산한 것은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 남자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남성적인 그 무엇이 있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여자로도 얼마든 변환될 수 있다. 여자가 아닌 남자의 육체로 자신을 전환시켜 자녀를 생산시킨 것은 사람의 육체가 여자의 태로 말미암아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악령 스스로 여자가 되어 인간 남자와 관계를 했다면 자기 씨가 아닌 아담의 씨만 수태(受胎)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천국에서는 천사와 같아서 결혼하는 일이 없다면 그러면 에덴낙원이 영계라면 왜 아담이 신령한 몸을 입고 있으면서도 여자가 생겼느냐" 할 것인가. 신령한 몸이기 때문에 생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악령들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켜 "네피림"(창 6:1-4)을 퍼뜨린 예를 우리가 알기 때문에], 이제 생식과 번식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일 경우에 한하는 것으로[에덴낙원에 있던 인간이 자연계로 환원됨을 인하여] 낙착되어 있어, 영적인 몸으로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거룩한 천사들에게 결코 그런 일이 없듯이] 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아담은 범죄하지 않았다면 신령한 몸으로 있으면서 신령한 몸으로 된 자식들을 낳았을 것이라는 그 뜻이다. 이제는 여자가 생겼으므로 여자가 자식들을 낳는 역할을 하는 것이나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써 생산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을 것이니 자연계에 속한 육체에 비하면 능력이 비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을 낳아도 무한정으로 낳는 것 또한 아니니 일정한 숫자에 달하면 단산(斷産)되는 것이다. 이는 현재 이 자연계에 속한 인간의 육체도 일정한 때가 되면 생산 행위는 종식되고 끝나는 것으로써 확인되는 바다.

다만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해 두신 숫자가 있어 그 숫자에 차야 하는 것인데[계 6:11],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룩하게 될 한 몸 구성에서 필요불가결한 숫자를 말함이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숫자가 채워지는 것을 저지하면 즉 그만큼 구원 얻는 사람들의 숫자가 미달되면 얼마든지 이 세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경의 예언대로 마지막 때가 가까워오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 대로 숫자가 어김없이 채워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숫자 채우기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런 숫자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느 모로든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임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딴에는 자신을 가지고 지금까지 인간들 위에 군림하여 믿지 못하게 하는 나름대로의 활동을 해온 것이다. 그리스도 통치 기간 말에 일대 반역을 선동하는 것도 그런 일종의 자신감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계 20:8]를 이룸에 있어 필요한 숫자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마저도 반드시 하나님의 미리 아시는 것을 따라 여부없이 진척되어 나갈 것을 미리 단언해 두고 잇다.

먼저 있던 하나에서 다른 하나 또는 닮은 것이 파생되어 둘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나 자연 생물의 낳고 낳아지는 의미에서나 동일하다. 그러나 창조에서는 친히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것이므로, 창조시 정해진 원리의 작용에 따라 남녀 결합하여 새로운 육체 즉 인간이 탄생하는 것과는 아주 판이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는 그러한 작용의 원리를 정하시는 것이요, 피조물의 일들은 그 원리를 따라 충실히 그 과정을 밟아 생성되는 그 차이다.

요즈음 지식이 발달했다고 해서 "인간 복제 운운" 하지만 물론 육체는 어느 정도 그 원리대로 하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다. 그래서 각자 개성이 있고 그리고 자주적인 독립된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은 영혼의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영적 존재는 복제가 되지 않으므로 영혼 없는 육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할 뿐 그것이 인간은 아닌 것이다. 인간은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비로소 존재 의의가 있음이다.

영은 인간의 영혼 조성에서도 보듯이 하나님 친히 그 숨을 내쉬심으로써 된 것과 같이 하나님과 직결된 것이므로 그 무엇으로도 이 일만은 모방 또는 복제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그런 정도의 육체의 복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놓고 마치 창조주의 영역에나 진입한 것처럼 그래서 스스로 신이나 된 것처럼 으스대는 어리석은 인생들이다. 소위 "외계인" 또는 우주인으로 분장시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오늘날 나타내고 있는 인간의 형상들은 악령들 스스로가 그렇게 가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종의 '인간 복제'인 것이다.

초대교회-만대에 이르는 교회의 초석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모습과 자세와 색깔로서 세상에 임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준 교과서적 교훈을 초대교회를 통해 그 본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므로 사도행전의 가치는 막중하다. 교회 운영은 그렇게 성령께서 작성해 주신 청사진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모이는 특정 장소가 없었다. 초대교회는 자기네를 핍박하는 유대교의 성전을 그대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예루살렘 성전을 그들의 성전으로 삼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디서나 기도할 만한 처소가 있으면 가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할 만한 곳이면 가서 전하였다는 의미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의 성전 즉 건물이나 모이는 장소를 따로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면 초대교회가 시작하자마자 핍박 역시 개시되었기 때문이다. 핍박 받는 처지에 그런 건물을 지어 올려 보아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 후로 핍박은 계속된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미리 알려 주신 그대로였다.

다음에는, 모이는 특정일 또는 시간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 매일 모이면 매일 모였고 핍박으로 인해 매일 모일 수 없으면 또 없는 대로 교회는 진행되었다. 핍박 받아 흩어지면 함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함께 할 수 없으니 모일 수도 없는 일이고 각자 행동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모이기를 폐한 것은 아니니 집에서 얼마든지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일정한 날과 시간이 정해져서 모인 것이 아니고 그들끼리의 삶의 교제였기 때문에 필요해서 매일 모였던 것이다.

일상적인 삶이기 때문에 매일 모인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매일 모여야 한다는 그런 규례 같은 것은 정한 바가 없었다. 그리고 무슨 특정 직제 같은 것도 없었다.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그 하신 일을 곁에서 목도한 사람들이 그 보고 들은 바를 모든 사람에게 널리 전하는 것으로 사도들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특별히 직제 같은 것이 필요 없었음이 명백하다. 모인 회중을 대표하는 목자(牧者)로서의 장로[또는 감독] 그리고 집사의 직분만이 초대교회 때 정해진 것일 뿐이다.

애초 열 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범죄로 인해 탈락되어 비어 있는 그 자리를, 애초 열 둘로 지정되지 않은 즉 주님에게서 택함 받지 않은 형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으로도 이 사실은 강조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바울처럼 이방인에게 나아간 사도 역시 열 두 사도와는 달리 별도로 활약한 것을 보아서도 그러하다. 만일 열두 사도가 무슨 직제로 확립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애초 가룟 유다 같은 불상사도 생기지 않게 하셨을 것이고 바울도 열 두 사도 밑에서 그 지도 아래 움직이거나, 이방인에게 전도하는 임무도 열 둘 가운데 누군가가 맡았을 것이다.

그래서 열 둘이라는 숫자는 주님께서 택정하신 그대로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형식을 취했을 것이나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왜냐면 야고보가 헤롯의 칼에 쓰러져 궐이 났어도 가룟 유다처럼 그 자리를 누가 대신 메우는 일은 하지 않았었다. 범죄하여[가룟 유다처럼] 그렇게 되었을 때만 제비 뽑아 정하였을 뿐이다. 더욱이 바울은 그 열 두 사도들에게서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고 직접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았을 뿐이며 오직 가난한 자 구제하는 일만을 당부 받았을 뿐인데 그 역시 사도들의 권유를 듣기 전에도 이미 스스로 행하고 있던 일이었을 뿐이다.

"성령과 우리"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성경이 초대교회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성령과 우리"[행 15:28]로 표현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 친히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 머리[長]가 없는 단체는 없다. 단 두세 사람이 모여도 이미 교회는 형성되어 있다고 함은 이유가 여기에 있으니 머리께서 계시기 때문이다[마 18:20]. 이 머리께서는 목자이시다. 목자는 양떼를 치는[먹이는] 역할이다. 양 떼 있고 그 목자가 있으면 이는 교회이다.

앞에서 교회에는 직제가 없다고 한 것은 세상 그 어느 집합체와는 다른 바로 이러한 교회의 특이성에 있으니, 곧 그리스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랍비[선생님]"라 칭함을 받지 말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하셨고 "너희 선생은 하나뿐이고 너희 지도자도 하나뿐이니 곧 그리스도이고 너희 아버지 또한 하나뿐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다" 하셨으며 "너희는 다 형제다"[마 23:7-10]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느 사회 단체[그것이 국가이든 그 무엇이든]와도 달라 그들이 말하는 우두머리의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들의 높은 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20:25-28] 하셨고,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마 23:12]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평등하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직제는 없다 함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로 계시므로] 현재는 성령으로 계시는 까닭에 육체로 계시는 것처럼 하시지 못하고 우리 중의 누구 또는 모두가 이를 대행하는 체제인데 따라서 그 중에 대표적인 '머리의 권한 대행'을 두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로 이들이 장로[감독]와 집사 직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런 직분을 맡을 자들의 자격을 규정해 놓았다[딤전 3:1-13/딛 1:6-8].

때문에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딤전 5:19]이라고 못박았다. 그리고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20]고 하였다. 대표성을 갖추는 장로의 위치를 그만큼 인정하는 것이로되 한편 장로라 할지라도 범죄하거나 잘못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럴 경우 그렇게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라 한 것이다[갈 2:11,14]. 요약해서 말하면 감독[장로]이나 집사는 온 교회의 본이 되어야 함이니,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자들[교회 구성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벧전 5:2-4]이라 함과 같다.

그러면 그런 장로에 대한 송사를 받는 이는 누구며 여러 사람의 면전에서 그를 책망하는 자는 누구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바울은 그 제자 디모데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 그러면 결론은 누구든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본으로서의 정평이 나 있는 장로급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책망하는 일은 엄정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해야 교회의 내부로부터의 부패가 방지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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