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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8 19:18
글쓴이 김일동 조회 368

메시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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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몸으로 사는 체제의 행복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들 모두가 한 몸으로서 하나로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을 향하고 위해도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통하는 희한하게 되어 있는 절묘한 장치가 '한 몸'됨이 아닌가.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듯이 내가 바로 그 서울이요 중심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내가 비록 머리도 아니요 모든 지체 중에 가장 낮은 볼일없는 위치에 있지만 사랑으로서 실제 내가 중심이요 서울인 것이다. 이것이 사랑으로 한 몸됨의 행복한 삶의 구조다.

다만 나 자신 나 스스로를 위하는 쪽으로만은 방향을 잡지 말라는 것이다. 어느 쪽을 향해도 좋으니 자기 쪽으로만은 몸을 틀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는 이들만이 한 몸을 이루어 사는 데가 천국이요 그런 삶의 체제를 이루어 있는 것이 교회다.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친히 자기를 위하시지 않는데 말해 무엇하리요. 이렇게 한 몸을 이루는 마땅한 도리를 다하지 않고 염치 없이 자기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바 현재의 이 세상으로서는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이다.

이 간단한 삶의 이치를 에덴낙원에서 "뱀"은 지키지 않은 것이다. 내가 더 잘 안다는 헛된 교만으로 부풀어 오른 것이다. 인간[아담] 역시 그의 꾐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에덴낙원에서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죽는다"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하나님은 거짓말하신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오늘날 성경대로의 하나님 말씀은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 하시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술책에 꼭 그대로 넘어가는 인생의 어리석음이다.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데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함에서 빚어지는 비극이다. 이렇게 한 몸됨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예술, 이 최고의 지혜는 어린 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인류가 이 이치대로 살지 못하고 있느냐 하면 머리되시는 하나님부터 부정하거나 아니면 하나님 존재를 시인하면서도 신뢰하지를 않으니, 머리 역할이 없는데 어찌 한 몸이 될 수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 위해 내어 주신 즉 우리 위해 죽게 하신 '사실'을 믿는 자가 영생한다고 아니하시고 이 '아들'을 믿는 자가 멸망하지 않는다 하신 것이다[요 3:16]. 다시 말해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관계에서는 갑은 을을 믿어야 하고 을은 갑을 신뢰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고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믿어야[신뢰해야]" 하는 것이 핵심이다. 믿는다는 것이 이 뜻이다. 다시 말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고후 5:15] 않으려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심을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으로만 "나를 믿으라" 하시지 않고 그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내보이신 것이다. 믿을 만한 근거를 충분히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즉 우리 위한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이다.

그래서 바울은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면서 "믿을 만한"[행 17:31] 충분한 증거를 주셨다고 한 것이다. 회개하라는 것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는 뜻이요 그렇게 하자면 과연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가를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바로 그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는 의미이다. 한 몸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이상적인 삶인 줄은 누구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서로를 믿지 못하므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버이 같은 존재가 그 한 몸을 이룬 유기체의 머리가 되어 전적으로 그 한 몸을 이룬 각 지체를 위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신뢰를 유도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니 곧 한량없으신 '부모 사랑'의 발로인 것이다.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으로 우리를 친히 돌보시는 어버이 같으신 조물주 하나님의 존재이시니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이 "육신대로 사는" 것은 홀로 살 때의 행동이고 따라서 하나님만이 그렇게 사셨던 유일하신 분이시다. 아들을 낳으시기 전 아버지 홀로 계실 때 그러하셨다. 아들께서도 그렇게 사신 적이 없으니 왜냐면 아들께서 존재하실 때 이미 아버지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아버지]께서도 그런 삶의 방식을 영원히 버리신 것이니 왜냐면 아들이 이제는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피조물들이 생기게 된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하시는 모든 일이 그 피조물을 위하는 것 일색(一色)이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그런 삶의 방법을 고집하는 것은 무신론자의 짓이니 입으로는 아무리 하나님을 시인해도 그 행위로는 부인하는 행티라면 그 역시 무신론자이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그 피조물을 위하시는 사실을 주님은 "아버지께서 새를 기르시고 들 풀도 입히신다"(마 6:26-30)는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인데, 그와 같이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요[고후 5:15] 주님을 부인함[딤후 2:12/눅 12:8,9/마 10:32]이다.

성찬예식     

"기독교"라는 이름의 한 종교집단에서는 성찬예식을 거행하면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 주님의 살과 피 그대로라고 한다. 주님의 살 그대로 피 그대로 먹고 마시는 것이라면 주님 고난 받으시기 전의 바로 그 최초의 성찬도 그런 의미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첫 성찬 예식을 베푸시면서 이와 같이 행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아직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기 전인데도 그렇게 하셨으니 그런 식의 해석은 불가하다. 우리가 지키는 성찬예식은 바로 그 성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지, 여기에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전형적인 종교 형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무조건 교회당에 가서 그 성찬예식에 참예하면 그것이 곧 구원이라는 그런 '믿음[미신을 믿어도 믿음은 믿음이다]'과 맞물리는 것이다. 이런 종교 행티와 또 비슷하게 일부 "복음적임"을 자처하는 데에서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피와 살이 아니라 영적으로 그렇다는 말을 한다. 전자나 후자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같은 것이니 곧 세상 종교의 종교 형태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주님은 "나를 기념하라" 하시면서 이를 지키라 하셨고 그래서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 위하여 죽으신 것을 세상에 전하는 데에 의미가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반드시 그 성찬예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변에는 자기 부인이 없어도 성찬예식에만 참여하면 구원은 틀림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종교의 행티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성경적인 의미의 철저한 회개가 없어도 세례를 받기만 하면 구원이 된다는 말과도 같다. 이런 것이 종교다. 항상 강조하지만, 이런 것은 일상생활 즉 삶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한 아버지를 모신 한 형제들이 되었으니 한 가족이다. 이름만의 가족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가족이다. 가족적인 사랑의 유대가 없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 인간 세상에서 가족을 중시하고 친척 관계를 형성하는 것처럼, 이같이 한 가족의 구성원끼리 모이는 것은 너무나 옳고 자연스럽다. 친교를 맺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협력해서 주님의 일을 원만히 수행하고 완수하기 위함이다.

받은 바 은사[gift]대로 서로 봉사하고 합심 기도하고 피차 격려 위로하기 위함이다. 전투 중에 전우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함이다. 모일 때에 성례를 행한다. 떡을 떼며 잔을 나누며 "주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요 6:54] 한 공동체임을 재확인하고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 오실 때까지 알리는 일이다. 모일 때마다 이렇게 하는 것이니 그 모임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 구제

가난한 사람 돕는 일 즉 구제 업무를 중시했음을 본다. 열 두 사도들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기도하는 것과 주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전적으로 담당했고 이 구제 업무를 위해서는 별도로 일곱 집사를 따로 세운 데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 전파와 함께 이 구제 업무를 중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당시 초대교회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여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아낌없이 처분해서 사도들 앞에 가지고 온 사실로써 입증된다.

성경에 "여분"이라고 명시한 것은 없으나, 바울이 그 서신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딤전 6:19) 한 데에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자기의 전부를 있는 대로 다 처분하였으나 그것이 얼마 후 곧 사라졌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도 온당하지 못한 결론이다. 부자 청년에게 자기의 전재산을 다 처분하라고 하셨고 누가복음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자기 부인을 강조하신 것 즉 자기의 소유로 과거에 인식하던 것은 오직 주님의 것을 잠시 맡는 청지기로서의 의미임을 일깨우시기 위함이니, 초대교회에서 형제들이 재물을 조금도 자기 것이라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며 위의 구절에서 바울이 말한 "좋은 터 쌓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까지가 교회 앞에 가져오는 분량이 되는지는 그 때의 형편을 따라 "성령과 교회"[행 15:28]가 결정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때때로 필요에 따라 행해져야 하는지도 당시 형편을 따라 되는 것이 역시 바울의 서신에서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한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상 구절에서 구제의 기본 역할만은 교회가 힘써야 하는 것임이 명백하다(갈 2:10).

이는 부자 청년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보십시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하니,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막 10:29,30] 하신 바와 같다. 백배나 받는다고 하심이 바로 이상과 같은 공동 또는 균등 배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이제 주님의 것인데 굳이 십분의 일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림자적인 의미의 모세 율법에 얽매이는가. 이것은 십분의 일은 내 마음대로 쓰자는 욕심에서 발단되는 것이다. 십일조 강조는 종교생활은 될지언정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된 삶과는 상관이 없다. 더군다나 십일조 내면 복 받아 잘 산다고 가르친다는 것은 세상 종교의 헛된 망상을 따라가는 추태다.

성경의 기준대로 하면,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족한"[딤전 6:8/히 13:5/고전 7:31/엡 4:28/고전 8:13] 것이니 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에 뜻이 있지 않고 삶의 낙을 누리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사람 살려 구원시키자는 것이 유일한 목표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기 욕심을 앞세워 성경의 경고를 자기 마음대로 무시하려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이다. 똑같은 성경 말씀으로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 같은 성경 말씀인데 감히 무시하러 드는가.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합심기도와 성례식

모여서는 합심 기도하기를 오로지 힘썼다(행 2:42). 그리고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다. 모이는 것 자체가 언제나 주님을 좌장으로 모시는 것이므로 이는 당연하다. 두세 사람이 모여도 이렇게 함이 합당하고 또 상관이 없다 하겠으나 너무 형식에 치우칠 우려가 있으므로 그 때 상황을 보아 진행할 일이다. 1907년 한국교회 부흥을 위한 20명 가량의 선교사들이 초교파적으로 모인 정오 기도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함

이것은 초대교회가 발진(發進)하자마자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으로 인해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 두려워함을 성령께서는 첫 과목 중 하나로 교회에 가르치신 것이다(행 9:31). 두려워하는 공부를 우리 모두 새로이 해야 할 것이다[행 5:5,11/행 9:31/롬 11:20-22/고후 5:10,11/7:1,15/골 3:22/엡 6:5/히 4:1/12:28/딤전 5:20/벧전 1:17/2:17/3:15]. 오늘날 교회는 이 "두려움"을 위험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결(缺)하고 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목자)

열 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 중에서 양떼들의 모범(벧전 5:3)이 되는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게 하셨다(행 20:28). 이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요 인간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정교육을 수료했다고 해서 부여되는 목자의 일은 아닌 것이니 그 교회 중에서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것은 특정 단체의 특정 직위의 개념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재하시는 교회에서, 목자장(牧者長)으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목자의 개념이다.

교회 - 그리스도의 군대

한마디로 종교 체계와는 전혀 딴판이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대 정신으로 뭉쳐진 일상적인 삶이요 교제가 교회이다. 왜 군대 정신인고 하면 보이지 않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세력과 싸우면서 우리에게 부과된 임무와 목적을 달성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군대의 직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대로 한다는 단지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무기(武器)는 기도요 말씀이요 사랑이요 믿음 등등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형태의 생활 자세에는 "사즉생 생즉사(生則死 死則生)"라는 말만 해당되기 때문에 한판 전투이지 한세상 삶의 낙일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완전무장한 군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엡 6:11).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마 10:39).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다"(마 16:25).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릴 것이다"(눅 17:33).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요 12:25).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군인으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군인된 자는 사사로운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이는 군인으로 뽑아준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다[당시 그리스 사회는 시민권자만이 군대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고 명예이기도 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다(딤후 2:5). 이상의 말씀은 전장에 나가는 전투원들에게 대장이 군령을 내리는 "사즉생 생즉사"의 호령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12척 남은 전선(戰船)을 이끌고 역사상 유례없는 명량해전에 나서기 직전 휘하 장병들에게 훈시하던 이공 순신의 바로 그 '사즉생 생즉사'다. 이런 말은 그 옛날 병법에 기록되어 있었던 대로 무릇 전쟁에 나선 자라면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상식이다. 이 전쟁의 목적은 사람 영혼의 구원이다. '영혼'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이미 왕창 못쓰게 된 것이고[영생하는 육체가 아니므로], 뿐만 아니라 이 하늘과 땅 역시 헌 옷처럼 갈아 버린다 하셨으므로 우리 육체와 마찬가지 운명을 당하게 되어 있고, 오직 중요한 것은 인간 생명의 핵심인 영혼인데 이 영혼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모든 것은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 영혼 구원은 사랑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도 이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군인들로서 유일하게 주력해야 하는 전법(戰法)은 이 사랑에 있다. 바로 이 사랑이 우리의 무기이다. 사랑이 아니면 이 인생들을 건져낼 도리가 없다. 그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의 핵심은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즉 한 몸됨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그 죄인으로서 받는 저주에 함께 동참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우리 죄 때문에 받는 저주는 없다. 그러나 아직 구원되지 못한 심령들을 건져내는 일에 있어서는 그들의 저주의 고통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이 필수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이다[골 1:24]. 악을 선으로 갚는 것도 마찬가지 뜻이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다. 즉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는 것이다. 우리 무기는 사랑이기 때문에 이 무기를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면 싸움에 질 것은 필연이다.

시종일관하여 선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계시록도 교회의 위치를 싸움 즉 전쟁으로 묘사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한 그대로다. 싸움인 것이다. 명령일하에 움직이는 군대 집단, 오늘날 이 세상에서 나타내는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이요 자세다.

이공 순신은 전쟁이 임하기 전 군의 기강이 해이된 것을 보고 그 중의 하나를 일벌백계로 참수하여 장대에 높이 매달아 효시하니 그 후로부터는 모두 두려워하여 빗나간 행동을 하는 자가 없고 군기가 바로 잡혔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공은 기강만 바로잡은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 빈약한 식사(食事)를 병졸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들과 동고동락의 본을 보여 부하들과의 유대관계를 끈끈히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이공의 휘하 장병들은 한편 두려워하면서도 한편 이공에게 심복하여 한 덩치가 되어 그를 따랐던 것이다.

물자가 귀한 전란 중에도 상다리가 휘도록 진수성찬으로 매끼 식사를 한 '나'원균과 대조된다. 이런 '나'원균의 식사는 그를 끝까지 추앙한 한 의병장이 밝힌 것이므로 악평하여 한 말은 아니다. 그가 남긴 기록은 '나'원균이 대식가라는 호기심에서 이를 알린 것뿐이고, 이에 대한 해명으로 '나'원균이 특별히 비대하거나 장대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당시 전란 중에 그렇게 호식(好食)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평은 듣지 못할 일임에도 그런 평(評)을 달지 않았다.

충신은 난세에 나타나고 효자는 집안이 기울기 시작할 때 드러나고 사랑은 역경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이같은 절체절명의 어려운 때에 십자가 고난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도 이런 죽음으로써 사람들을 구해내는 양식으로써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으니 우리 또한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을 버림이 마땅한"(요일 3:16)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의 대장은 이공이 병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것처럼 우리 육체 안에 계셔서 우리가 당하는 똑같은 고난을 받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셔서 같은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것과 같은 이치다. 한 덩어리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집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충성을 다할 일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은 이미 에덴낙원에서 인간이 추방되던 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창 3:15].

가인이 아벨을 죽이면서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포문(砲門)을 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일방적인 전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방적인 전투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지금 육체적인 고난을 받고 있음으로써 전투 양상은 현실화하는 것이다. 현재의 이 육체적 고난[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을 못견디면 지는 것이고 견디면 이기는 것이다. 사랑의 충성을 변함없이 지속해 나가면 이기는 것이고 변절하면 지는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우리의 이 연약한 육체가 바로 이 세상이란 전쟁 마당에서 백병전의 싸움터가 되어 있는 셈이다. 전쟁이란 서로 장단점이 있어야 되는 것이니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 육신이 아직 자연계에 속하여 있어 그 죽음의 고난을 받을 수 있음으로써 이 때문에 적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고[핍박을 통한 육신의 고통을 피하고, 육신의 쾌락,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신경쓰는 것, 육신의 안락을 위한 재물 숭배 등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비록 우리의 이런 연약한 육신에 비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을 상대해야 하는 버거움이 있다.

이공은 임진, 정유 양 싸움에서 전투에 임하든 임하지 않든 항상 임전 태세였다. 그 7년간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음은 물론 전투복을 벗은 일이 없었던 것도 그런 예다. 적의 침범에 항상 대비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마침내 그 희대의 속임수 행각을 드러내기까지 기껏 시간이 남아 보아야 10년도 채 되지 못할 것같다. 그동안 그리스도의 군인이 된 자는 모름지기 총력을 다하여 목적 달성을 기필코 이루어야 할 것이니 곧 세계 어디서든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다. 이런 군대 집단으로서의 교회 성격은 절대로 종교 형태를 용납할 수 없다. 종교란 것은 원래가 세상에 속한 것으로서 정착 안주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군대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스도 오신 후로 오늘날까지 유대교는 종교로 변질되었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까지는 오히려 세상 종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주를 따라 이런 모세의 율법에 따른 유대인의 예배 형식을 따랐었다. 모세 율법은 그리스도 오심을 그림자로 나타낸 것이어서 종교라 할 수 없었고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실체를 그림자로 나타내는 막중한 의미였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오신 후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이지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결과 세상의 한 종교(유대인에게만 국한한 것이지만)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이용 당하고 있는 꼴이 되어 있다.

왜냐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바로 이런 유대인의 모세 율법의 모양새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으로써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 그리스도를 상징하였던 임시적인 예배 양식의 흔적으로서 오늘날 유대교가 잔존해 있을 만하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도 남아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세워지지 않은 것은(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오랜 숙원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체가 이상 설명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대한 확실한 물증(物證)의 하나로서 기적처럼 각인되어 있음이다. 고로 이제는 그 어떤 형태로든 종교[세상 종교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로서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의지 표명의 생생한 증거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그 발뒤꿈치를 물리게 되어 있고 이것이 끝나면 교회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머리를 발로 짓밟게 되는 순서이다[창 3:15]. 지금은 연속적으로 그런 물리는 형국이 되어 있다. 물릴 때는 물려야지 이를 피하는 것은 싸움에서 도망치는 일로서 이는 패퇴이다. 물려야 나중에 그 물린 발로 원수의 머리를 밟을 수 있음이다. 세상의 어느 종교가 이렇듯 그리스도의 교회가 받는 핍박처럼 박해를 받았던가. 또 그런 박해를 받고 감히 살아날 수 있었던가. 아니, 그렇게 끝까지 박해의 대상이 되어 있다고 미리 말하는 종교가 있었던가.

이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대(對)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군대 집단'에서 시행하는 유일한 의식이라고는 "세례"와 "성례" 이 둘뿐이다. "세례"는 성스러운 충성 서약식이라고 할까 그런 것에 견줄 수 있을 것이고, "성례"는 출진(出陣)하기 전의 부대(그것이 단 세 명이건 열명이건) 출병(出兵) 또는 출전식(出戰式)과 같은 것이 있으면 그런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 초대교회처럼 매일 모여 떡을 뗄 경우에는 매일 전쟁터에 나가는 출진의 태세라 할 것이다. 의식이라고는 이 외에는 없다.

찬미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임과 동시에 군가(軍歌)에 비유할 수 있고 성경 읽음은 병서(兵書) 탐독에 비유될 수 있겠다. 기도는 개인적이건 합심기도이건 백병전[말씀 전파]을 위한 적진 초토화의 포격전이요, 성도들이 모이는 것은 작전회의 또는 병참 기지 강화라고도 하겠다. 군인은 싸워 이겨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주임무이므로 간결 단순할수록 좋은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례와 성례 외에는 아무 것도 명령하신 바가 없다.

"baptism"

참고로, 우리말 "세례"와 영어의 "baptism"의 차이인데, 영어 "baptism"은 그리스어 원문을 그대로 따와서 지은 용어로 그것을 각자 해석에 따라 "잠근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고 또는 "물로 뿌려 적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어 두루뭉실한 표현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 말을 두고 우리처럼 "침례"니 "세례"니 하고 다투지 않는다. 우리말 "세례"에서 "세"(洗)는 "세수(洗手)하다", "세차(洗車)하다" 등에서 보듯이 "씻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사도행전 아나니아가 계시를 받고 바울에게 와서 "주님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 한 것과 같이 세례 받아 죄 씻음 받는 것이므로, "세"(洗)라는 의미를 '세례 받는 방식'을 의미하는 말로 받아들이는 대신 '세례 받은 결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하면 영어의 "baptism"과 같이 두루 통하는 용어가 될 수 있다.

즉 우리말 "세례"는 <죄 씻음 받는 의식>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모두가 좋은 것이다. 세례를 주는 방식으로서 머리 위를 물로 적시기도 하고, 물을 붓기도 하고, 몸을 물에 잠그기도 하는데 우리말 세례의 "세"(洗)는 그런 방식을 나타내는 의미와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 오직 그런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타내는 결과 즉 "죄 씻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못박는다 해서 하자는 없겠다. 실상 우리말 "세"(洗)도 "씻는다"는 말로만 받아들이면 세례 받는 그 어떤 방식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 위를 물로 적시기도 하고, 물을 붓기도 하고, 몸을 물에 잠그기도 하지만 그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씻는다"는 의미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세"(洗)자를 영어의 sprinkling으로 해석할 아무 근거도 실제는 없다. 그런 관점에서 영어 baptism과 같은 두루뭉실한 번역이라 생각하는 바 "세죄예식"(洗罪禮式)의 줄임말로 치부하면 된다. 번역자가 생존해있지 않아 알 도리는 없지만 아마 그런 의미로 번역하지 않았을까. 성경 번역에서나 용어 선택에서 일반 불신자들에게 혼란만 야기시킬 불필요한 오해는 없을수록 좋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받을 세례"에 와서는 그런 "씻는다"는 의미는 통할 수 없다. 이 때는 부득불 물로써 회개의 '세례를 받는 방식'에 준하여 각자 자기가 믿는 소신을 따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물로써 세례 받는 방식에 준한다는 것은, "잠기는" 뜻으로 해석하면 "성령에 잠긴다" 또는 "고난 속에 잠긴다" 등이 되겠고, "머리 위에 붓는" 또는 머리를 "적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성령께서 오순절날 각자의 머리 위에 임하신 것을 보았으니 그러하고 또 고난도 통째로 머리 위에서부터 발 끝까지 뒤집어쓰는 것으로서 이해하면 그것도 무난하다.

군인 정신은 희생정신이다. 일사보국(一死報國)이라면 우리는 일사 보은(報恩-하나님 은혜 보답)이다. 주기철 목사는 일사 각오로 임했다. 훌륭한 군인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철저한 자기부인이다. 앞을 다투어 자기를 희생하는 데에서 적을 격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사로운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딤후 2:5) 한 것이다. "우리 중에 자기를 위해 살고 죽는 자 하나도 없다"(롬 14:7)는 말과 똑같은 의미다.

그리스도의 삶을 이와 같이 단순화시키는 것이 좋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구차하게 헛되이 살고자 하는 마음을 척결할 수도 있다. 그런 살고자 하는 생각 자체가 자기가 그리스도의 군인이 아니라는 것, 즉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부인하는 것임을 그 자신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편안히 살기를 바란다면 군인은 왜 되었느냐 할 것이 아닌가. 구원 받는 길은 이와 같이 군인이 되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임을 성경은 명시하고 있다.

자기 부인을 가장 효과있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이 군인 의식이라고도 하겠다. 충신, 열사, 의사, 열녀, 효자도 역경과의 전쟁에서 싸워 이긴 승리자를 그렇게 경우 따라 부르는 이름일 따름이다. 전쟁이나 비상 사태 또는 시국이 아닌 평화시에는 그런 이름이 나타날 여지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 증오가 그 원동력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으나 우리는 반대로 사랑이 힘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사랑이 무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를 "따르려는"[주님의 말씀처럼]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의 군인이 되어야 함을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 군인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아예 그리스도께 나올 엄두를 내지 말아야 한다. 구름 떼 같이 많은 인파가 주님을 따를 때 갑자기 몸을 돌리시고 망대 비유를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이다[눅 14:25-35]. 이런 십자가 지고 자기 부인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하겠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이 있는 사람만 오라는 말씀이시다[요 6:68].

자기 부인하지 않고 매일 십자가 짐이 없이(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종횡무진으로 달려 명령 일하에 움직일 각오가 없이) 그리고 모든 것 버림이 없이(자기 목숨 내어 버리고 전투하는 마당에 집 생각, 재산 생각 등을 하고서 어찌 목숨이 아까워 전투할 수 있는가. 목숨을 내동댕이치고 싸우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제자되기를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엄중한 경고이신 것이다. 기드온이 전장에 나갈 300명 용사를 추려낸 방법과도 같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속임수를 써가며 교세 확장에만 신경쓰고 있다. 이 성경의 경고를 말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이루는 것인데 그 경고가 없으니 이루지 못함에도 이루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이 속이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분명히 앞뒤를 충분히 재고 난 다음에 당신을 따라올 것을 주문하셨는데, 소위 교회라는 곳은 덮어놓고 먼저 믿기만 하라고 그 반대로 가르치고 있으니 어찌 사람 건지고 살려내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것인가.

한낱 종교로 타락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사주에 의하여 움직이는 악령들의 주구 노릇일 뿐이다. 그러므로 먹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고 현재 가진 것으로 족하고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혼자 지내고 아내나 남편에게 매여 있는 것을 원치 않고 (그러나 결혼한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기를 바라서는 안되고 또 혼자 지내는 것을 강제해서도 안되는 것이니,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들 구원하는 일에만 여생의 목표로 삼는 마음 자세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삶을 진정 사람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리스도께 달려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쯤이야 아쉬운 일도 아니다. 비록 영생만을 욕심 내어 주님 앞에 나왔다 하더라도, 이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아야 할 당위성'에 대해 먼저 충분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주 끊어 버리는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통과해야 할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 실제 상황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여러 번 경고하였지만 '종교 교리'의 형태다. 폭력배로 풀려 지내다가 갑자기 거의 실명 위기에 봉착한 후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복음을 믿어 열심히 성경 읽으며 목사가 된 어떤 분이 동료 목사들에게 이 자기 부인을 역설했다니 "당신이나 자기를 부인하고 싶으면 열심히 하고 믿으슈" 하는 냉랭한 반응만 보이더라는 것이다. 자기 부인을 실제 상황이 아닌 가상적인 그 무엇 즉 은혜로 얻는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율법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소위 "교회"의 전반적인 타락 현상이다.

주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을 향하여, "화 있으라, 너희 위선자들이여!" 하시던 책망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유효하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우리 중에는 아무도 없다"(롬 14:7)고 단언한 그 구절이 바로 자기 부인을 의미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치고 자기 부인하지 않는 자는 없다는 의미다. 자기 부인을 부정하는 이런 "위선자"들이, 그리스도를 당시 십자가에 못박던 무리 중에 오늘날도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속임수의 명수요 모방의 일인자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군인된 것을 모방하여, 그 종교를 위해 싸우는 것을 성전(聖戰)이라 하고 그 전쟁에서 싸우다 이기면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속이고 있는 종교도 있다. 그리스도 구원의 복된 소식은 그와는 정반대다.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인이 되어 있음이다. 고로 주님의 말씀은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 얻어 주님을 따를 때의 자세를 말씀하심이다.

이런 사실을 처음부터 미리 알고 있어야 함이니, 구원은 받았으나 나중에는 자기 욕심으로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딤전 5:11). 배반하는데 구원 받음이 무슨 소용에 닿는가. 자기 스스로 구원을 차 버리는데 그 구원이 무슨 물건이라고 그대로 남아 있겠는가. "내가 생명이라" 하신 것처럼 구원은 주님 자신이시요 "진리요 길이라" 하신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는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마치 횡재나 공짜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래서 과거 죄인으로 지내던 그 상태 그대로이면서도 문제없이 천국에 들어가는 무슨 타고난 복이나 요행수처럼 생각하는데, 왕의 잔치 자리에서 예복 입지 않은 그 사람은 왜 쫓겨났던가[마 22:11,12]. 요행이고 공짜고 횡재라면 쫓겨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요새 사람들이나 옛 시절에나 점괘를 좋아하는데 쫓겨날 무슨 사주팔개자라도 타고났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사필귀정에 따른 것이 아닌가.

왕궁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한 것이다. 무례하기가 짝이 없다. 무례란 상대를 배려하지 않음이다. 상대는 생각 않고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이 죄이고 멸망의 원천이다. 에덴낙원에서의 아담부부의 범죄도 인간을 사랑하셔서 미리 경고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 않고 자기만 생각한 결과다. 그런 것이 원인이 되어 멸망에 이른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그런 태도를 간과하고 구원하실 턱이 있는가.

그런 식으로 아무리 구원해보아야 여전히 똑같은 범죄를 저지를 것인데 그런 상태대로 구원을 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구원을 하심과 동시에 다시는 그런 일이 재연되지 않게 하시는 조처가 있을 것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그런 죄를 다시는 짓지 않도록 하신 조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자기 부인이요 때문에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믿기만 하면 따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따르라" 하심이다. 핵심 골자는, '이미 나타내시고 베푸신 사랑'에 대한 나의 사랑의 대응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 나도 사랑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은가.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는 나로부터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칙이다. 그것을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가 없는 사랑이라고 해서 '순종의 조건'을 내거시지 않는다고 하고 이것을 "은혜"라고 그들은 헛되이 가르친다.

이는 일면만 보고 생각하는 것이어서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므로 참다운 "진리를 아는 지식"[히 10:26]일 수가 없다. 엄마와 아기와의 관계에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기가 따라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 시키는 대로 함은 엄마를 위함이 아니라 결국 아기 자신을 위함이다. 그래서 엄마가 하라고 시키는 것인데 아기가 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예복 입지 않음"[마 22:11,12]이다. 예복은 궁중에서 마련한 것으로서 누구나 스스로 가서 그 예복을 받아 입든지 스스로 한 벌 집어다가 입든지 해서 입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왕이 그런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런 소행이야 불손하든 어쨌든] 강제로 예복을 입도록 조처하면 될 일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나중에 가서야 그렇게 스스로 입지 않은 사람을 즉결 처분으로 아주 쫓아내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즉 스스로 입도록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의 그러한 태도 자체가 이 잔치 자리라는 좋은 자리에 '옥의 티'가 된다고 왕은 판단한 것이다.

바로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니 곧 우리 스스로 자진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절대로 하나님은 강제하시거나 간섭하시어 우리에게 사랑의 순종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기 때문이다. 구원 역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한 절대로 강제로 구원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우리의 구원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이므로, 사랑은 강제나 간섭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자진해서 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스스로의 주인 의식에서 나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함이 이 때문이다. 바로 상대를 생각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게 마련이다. 잔치음식을 베풀어 주겠다는 상대방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행하면 될 일이다.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그 뜻을 따름이다. 잔치음식이 단지 먹기만 하면 되는 공짜가 아니라 그 잔치주인의 최소한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했던 것처럼, 구원이 공짜가 아니라 주님의 최소한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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