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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8)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8 19:19
글쓴이 김일동 조회 392

 

여기서 최소한이라 함은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 삶의 기본 원리를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지우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기본 원리란 것은 이전 창조된 아담에게나 모든 영물들에게나 똑같이 요구되었던 보편 타당성이 있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또한 이지적 판단으로 능히 수긍하고 헤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앞으로도 과거와 같은 범죄를 함으로써 또다시 멸망에 들어갈 위험을 사전(事前)에 차단하는 조처요 영원한 생명의 낙을 누리는 기본 바탕이 됨이다. 이런 정도의 요구를 하시는데 어찌 최소한의 것이 아닌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옛 에덴낙원에서처럼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것인가. 구원하여 '살려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하던 행동 즉 오늘날 구원이 필요해질 만큼 급박하게 만들었던 장본인 그 죽음의 행동을 다시 되풀이함으로써 그 죽음에 또다시 이르지 않아야 그 구원이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런 원인 제거에 협조하는 것이 과분한 요구가 될 수 있는가.

예복 입으라는 정도의 상식에 속하는 요구다. 그런 원인 제거의 조처가 바로 자기 부인이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함이다. 지금까지 내처 시종일관 자기중심의 고집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에 그 자기 부인이 문자 그대로 자기 부정 즉 자기 멸절, 자살행위와 같이 비쳐짐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자기 부인은 자기 멸절이 아니라 그리스도라 안에서의 자기 부활, 자기 갱생(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살았고 영원히 살 것이므로)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원한 바탕 위에서의 자기 확장, 자기 확대, 확충임을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런 확실한 바탕이 없는 자기 부인은 문자 그대로 자기 파멸이지만 영원 불멸의 생명이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자기 부인을 해도 바다에서 물 한 방울 축내기다. 당장에는 고통일지라도 이 또한 무슨 요술 방망이와 같은 것이니 즉 자기 부인을 하면 할수록 즉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이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기"(고후 4:17)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곡해하여 엉뚱한 그림을 그려놓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라" 선전하고 있으니 어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주구 노릇이 아니라 하리요. 성경 말씀은 상식과 논리에서 벗어남이 없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데(여기에 사악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함정이 있다) 이것은 천부당 만부당의 소리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런 미신도 아무 이의없이 믿고 있지 않는가. 성경 어디에 "무조건 믿으라" 했던가. 무조건 믿는 것이라면 왜 사람을 이지적인 인간으로 만드셨는가.

그리스도의 구원을 공짜니 횡재니 하는 식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황감하다 싶었던지 다음에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른바 "절대 주권"이라 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자를 얼마든지 택하셔서 영생을 주시고 원하시는 자를 얼마든지 멸망에 보내시는 것을 인간이 이렇다 저렇다 하고 감히 항변할 수 없다고 하는 맹랑한 주장이다. 사리에 닿지도 않는 이런 무리한 말을 고스란히 믿게 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의 눈을 가림으로 일어나는 비극적 현실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지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는 일은 없다. 사람은 그 속을 알 길이 없고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나 하나님은 그 심중(心中)을 보시므로 속이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틈타게 되는 것은 그 탐구자 자신이 '원인'이니, 성경 읽기를 십 수년을 해도 그 마음이 진실되지 못하고 교만한 구석이 단 한 군데라도 있고 그것을 회개하려 하지 않는 다음에야 진리의 문이 열리질 리가 없다. 그런 사람이 결국 엉뚱한 해석을 내려 이단도 되고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소경 인도자가 된다.

교회 설립 방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과 같이 극히 간결하고 명료하다. 줄거리는 그러하나 세세하고 구체적인 지혜는 각자 성경을 읽으면 성령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또 일상생활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것을 함께 모일 때 여러 형제들 앞에서 증언함으로써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특별한 지식과 훈련이 필요치 않다. 믿음의 훈련은 성령과 더불어 각자 생활하면서 체득하게 되고 그런 체험을 또한 여러 형제들과 서로 나눔으로써 함께 배워 가게 된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삶의 기본 정신, 기본 자세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교회생활이요 믿음생활이다. 종교로서는 더 이상 착각하지 말 것이다. 삶이고 생활이지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신학이니 신학교니 할 것도 없다. 분량으로 따지면 성경과 몇 십 쪽 분량의 요강(要綱) 책자 단 한 권이면 충분한데 그것 배운다고 신학교 가겠는가. 성경에 대해 참고할 중요한 것은 글로 읽도록 해놓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것이다. 그냥 말로써 설명만 해도 충분하다.

오직 믿음생활에 모본이 되는 사람을 형제들 가운데 지목하여 세우고 이들을 중심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진행시켜 나감이 긴요하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주님께서 "너희끼리는 스승이니, 지도자니, 아비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지 말라"는 말씀에 따라 장(長), 사(師). 부(父)와 같은 말은 빠뜨리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장로(長老), 목사(牧師) 등은 버리고 목자(牧者) 또는 목사(牧事-집사[執事]에 상칭하여)라는 명칭이 무난하다 하겠다. 호칭이 아니라면 간단히 "목(牧)", "집(執)"도 좋다.

그리고 모임의 이름은 구역별로 행정 동, 리 단위 그대로 부르고 "교회"라는 명칭 대신 군대 의식을 높여 구세군처럼 영(營)이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말하자면 부산 금정구의 구서2동의 제1영, 2영, 15영, 45영 등으로 해서, 금정구 구서2의 36영 김찬수 목(牧), 박철수 집(執) 등. 물론 지도자니, 스승이니, 아버지니 하는 구별이 없이 다 형제이고 그리스도께서 지도자시고, 스승이시니 군대 의식을 심어 주기 위해 "영"이라 하는 것뿐이므로 구세군처럼 계급은 필요치 않다. 오직 형제들의 영적인 삶을 보살피는 "목"과 경제적인 측면을 맡는 "집"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목"과 "집"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을 부를 때도 그냥 "아무개 형제"라고 적당히 부르면 될 것이다. 그가 어떤 직분의 책임을 지고 있느냐를 밝힐 때 쓰는 "목"과 "집"인 것이다. 12명, 70명, 120명 등으로 엄밀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농어촌에서는 남녀 12명[또는 그 이하로도 충분하다-북한의 교회를 참고할 일이다] 정도이면 좋다. 도시에서는 70명, 대도시에서는 120명 정도로 하는 것이 좋으나 대도시라도 12,3명을 상한선으로 기동성과 침투력과 응집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일요일만 아니라 매일 모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개인 사정에 맞게 적당한 날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공 순신은 불과 12척의 전선으로 그 열 배 또는 그 이상이나 되는 적의 함대를 명량해전에서 격파했다. 알렉산더는 불과 5,000의 정병으로 페르시아 백만 대군을 격파했다. 성경의 기드온은 300명 용사로 적을 물리쳤다. 숫자가 많다고 능사가 아니다. 똑바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숫자에 관계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11사도들을 위시하여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 기도했을 때 능력을 받았고, 남자만 3,000명을 즉시 회개시키는 대 역사(役事)가 일어났다. 오합지졸의 대군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대패(大敗)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똘똘 뭉쳐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소집단이 일을 만들어내는 법이다.

여자와 남자 관계

바울은 성령으로 교회에 편지하기를 사람이(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음이 좋다는 원칙론적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니 남자는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는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고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유혹을 받음으로써 범죄[음행]하지 않기 위함이라 했다(고전 7:1,2). 이제는 즉 그리스도 오신 후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차원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제는 누구든지 얼마든지 천국을 향해 침입해 들어가는 때이다(마 11:12). 오실 분(그리스도)은 오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죄짓는 것은 아니니 결혼하라" 했다. 마치 결혼이란 것이 무슨 죄나 되는 듯한 어조이다. 그러나 "죄는 아니라"고 했다. 결혼이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한 역점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남녀 관계란 것이 이미 설명했다시피 영구적인 것도 아니고 사람 생활에 꼭 필요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이 언급에서도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속박일 수도 있다.

한번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은 사람이 임의로 변경시킬 수 없다는 제약이다. 그것을 어기면 곧장 죄로 지목되기 때문이다. 남녀 짝을 맞춰 살다보면 평생 오붓하게 살면야 무슨 문제가 생기랴마는 어디 사람 삶이 그런가. 마음이 맞지 않을 때는 그것처럼 고역도 없을 것이지만 마음대로 버리지를 못하는 것이다. 일단 결혼을 한 이상은 그에 관한 엄밀한 법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어기면 범죄로 직결된다. 정식으로 결혼한 관계도 아닌 창녀와의 한 때 접촉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몸으로 인정되는 것이 이 법의 엄정성이니(고전 6:16) 다른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남자는 아내의 법에 얽매여 있고 여자는 남편의 법에 평생 얽매여 있어 어느 한 쪽이 사망해야 비로소 해방되어 다른 남자 또는 여자를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이니 충분히 기도한 연후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온 다음에 결행할 일이다. 또 어느 한 쪽이 외도를 하여 남편이나 아내가 있음에도 다른 여자나 남자와 상관할 때에는 갈릴 수 있다. 이것이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나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말씀의 의미이다[마 19:9].

음행이란 것은 자기 남편 또는 아내와의 하나됨을 파기한 행위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로서의 법적 구속의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저쪽이 먼저 깨어 버렸기 때문에 이쪽도 더 이상 그 하나됨에 매여 있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이 외에는 이혼이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상대의 부정(不貞) 행위로 인해 이혼을 해도 재혼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상에서는 이혼은 무조건 재혼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함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결혼한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은,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10:10,11]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대가 부정한 짓을 한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어찌 들으면 상대가 음행을 저질렀어도 무조건 갈리지 말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대가 음행했을 경우 위의 주님의 말씀처럼 갈릴 수는 있다.

그러나 상대가 사망하지 않은 이상 재혼은 불가하다. 혼자 지내야 한다. 또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이 함께 살지 못하겠다고 해서 갈리면 갈릴 수는 있다.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 받을 것이 없다[:15]. "그렇게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므로[:10]. 이 경우도 재혼은 안된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말하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8] 하였다.

주님의 명령에 갈리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내 편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갈라서지는 않을 것이나 단 상대가 음행을 했을 경우에만 갈라설 수 있다. 또 저 쪽에서 갈라서는 경우다. 그 상대는 그렇게 갈라서서는 새 사람을 구해 함께 살 것이다. 그렇게 해도 나는 혼자 지내야 한다는 것이 위의 주님의 명령이 된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나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의미는[마 19:9], 음행의 경우 버릴 수는 있어도 내가 새 사람을 얻어 재혼을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둘이 함께 한 육체가 되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 19:6]는 취지다. 내가 내 마음대로 선택하여 여자/남자를 얻어 한 몸이 되어도 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의미다. 그래서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창녀라도 내가 그와 함께 하면 그와 한 몸이 구성되어"[고전 6:16] 나에게만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됨"[마 19:6]이다.

이렇듯이 남녀 관계로서의 둘이 하나됨, 한 몸됨은 엄정하다. 둘이 하나되는 즉 삼위일체 원리의 법질서 차원에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질서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모든 범죄 행위는 무질서를 조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3] 하는 질문에 그렇게 답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은 사람은 나누지 못한다"이다.

상대가 나와의 이 "짝지어 주신" 것을 깨뜨렸을 때 즉 음행했을 때 그 경우에만 나는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나로서의 이 "나눈다"는 의미는 다른 상대와 다시 한 몸을 구성한다는 즉 짝짓게 된다는 의미는 아님을 재차 강조한다. 이미 짝지어진 것은 상대가 죽지 않는 다음에는 유효한 것이다. 그러면 내가 강간을 당했을 때도 그와 짝지어진 것인가 할 때 이 경우는 내 스스로 움직여 "창기와 합하여" "짝짓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나의 의사와는 달리 저질러진 일이므로 그런 성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어도 나는 사람을 얻어 살 수 있고 이는 범죄 행위가 되지 않는다. 결혼해서 살다가 상대방이 부정 행위가 있다고 하여 나로서는 헤어지는 것은 가능하나 나로서 다른 여자/남자를 구해 사는 것은 불가하다. 왜냐면 짝지어진 것을 깨뜨린 것은 저쪽이이지 나는 아니니 나는 여전히 저쪽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그대로이어서, 그렇다고 저쪽을 따라 나 역시 이 관계를 깨뜨릴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람이 스스로 짝짓는 의미가 된다면야 저쪽이 깨뜨렸으니 나도 당연히 깨뜨림이 옳으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일진대 나로서는 결코 내 스스로 깨뜨림으로써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깨뜨린 것은 저쪽이니 그 쪽이 죄를 담당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갈리지 말고 그냥 지내라" 한 것이나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같은 의미다. 즉 어떤 연고로든 남녀 한 몸된 관계에서는 이상의 이유 외에는 서로 헤어질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어느 한 쪽이 죽어야만 비로소 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럴진대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좋겠습니다[마 19:10] 했을 때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한다"[:11]고 대답하셨으니, 남녀 관계가 '축복'이라기보다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결과로서의 '저주' 같이 되어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해서 스스로 만드는 고자도 있다"[:12] 하셨으니, 이는 "내 뜻에는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을 것이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고전 7:40] 함과 같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다"[:15] 한 대로, 자식들이 달려 있는데 부부 당사자끼리 문제가 있다고 쉽게 갈라질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여기서 고려의 대상이 된다. 비록 음행을 한 아내나 남편이라 하더라도 믿는 아내/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은, 믿는 아내나 남편이 그들을 버리지 않음으로 인해 그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랴[:16] 함이다.

어쨌든 남녀 문제에 대해 성경은 엄정하게 다루고 있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다"[:1] 하면서도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2]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고요 명령은 아니라"[:6]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 했고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7,8].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 아내에게 매였으면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아내를 구하지 말라. 처녀 총각 장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니 나는 너희를 아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내가 분명히 이 말을 하는 것이니 때가 단축되어져 보다 가까워졌으므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할 것이니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기 때문"[:26-31]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나와 같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고 더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낫다"[:9] 하였고,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1]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2] 하였으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혼자 지낼 수 있느냐? 혹은 더 나으냐?" 할 것이다. 답은, "어느 경우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므로, 판단해서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방향으로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일에는 충분한 기도와 각오가 필요함은 자명하다.

앞에서 말한 바 "절제할 수 없다"는 것은 자기 짝과 사별한 사람들도 포함하기는 하나, 무엇보다 처녀 총각들 즉 앞으로 결혼하게 될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과부, 홀아비라도 자기의 짝이 죽었다고 무작정 재혼을 해도 좋다는 말도 아니고 반드시 "주님 안에서"[:39]라는 조건이 붙는다. 즉 주님께 영광이 되는지 여부를 따져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이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아[고후 5:15]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롬 14:7-9].

남편과 사별하여 생활 터전이 사라진 과부들을 교회가 돕는 일에서도 나이 60이 넘어야 하는 것이고, "젊은 과부는 거절하는 것이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하여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는다"[딤전 5:11] 했고, 혹 "게으름만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며 망령된 이야기를 퍼뜨리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등 일을 만들므로"[:12,13] "젊은이는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미 그렇게 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다"[:14,15] 하였다.

이런 것이 "주님 안에서" 하는 모습인 것이다. 물론 이 경우라도 반드시 젊은이는 재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혼자 지내기를 작정하는 자는 더 잘 하는 것[고전 7:37, 여기서 "처녀 딸"로 번역되었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자기 동정(童貞, 이성과 아직 성적인 접촉이 없이 순결을 지키고 있는 상태)을 지킨다는 것이 원 의미다]이라고 했다. 결혼한 이들은 이성과의 접촉을 한 경험자임에 비해, 결혼 연령에 이르러 이제 결혼할지 말지 여부를 두고 그 결단이 필요한 이들은 그런 경험이 없으므로 유혹이 그만큼 크다고 할까, 작다고 할까 그런 차이를 비교해서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후자는 그와 같이 "천국을 위해 혼자 지내기로"[마 19:12] 작정하지 않는 한 절제할 수 없다고 여기거든 결혼할 것이요 음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또 전자의 경우 성적 경험은 해본 다음이므로 이혼을 했다 하더라도 그냥 혼자 지내기가 미혼자에 비해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 수도 있고 또는 개중에는 남달리 욕구가 드센 성향이 있는 이도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죽든지 살든지 하는[롬 14:7-9/고후 5:15] 위치이고 바울이 적극적으로 권고하기를 혼자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다고 성령의 감동으로[성령의 명령은 아니지만] 강조하고 있는 이상[고전 7:40] 그렇게 못할 것도 또한 없다.

항상 명심할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I can do all things through Christ who strengthens me."]는 믿음이다. 또한 이러한 일을 두고 악하게 서로를 판단하는 일은 하지 말 것이니,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선물, gift]가 있어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한"[고전 7:7]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이 세상 살고자 해서 이런 자연계에 속한 구차한 몸으로 이 세상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니 오직 일하기 위함이므로 일하기에 가장 합당한 쪽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일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언급이 신약성경 처처에 널려 있지만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자유할 수 있거든[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차라리 [같은 처지의 종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주님의 일에] 사용하라.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1-23] 함과 같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한 것은 자기를 위해 살고 있는 자기중심의 인간 성향에 대해 종이 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같이 결혼이란 것이 축복일 수가 없으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죽은 자이므로 산 자로서의 삶의 낙을 누리게 되어 있지 않음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초보 유아 단계여서 걸음마 시대였으므로 "축복"이기는 했지만 이제, 그리스도의 시대에 접어들어 모든 지식이 있어 장성한 어른으로서 쓰고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어려운 것도 능히 감내할 만한 처지에 이르렀은즉 있는 사실대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 삶은 사는 낙을 누리는 의미가 결코 아닌 것이다. 철부지처럼 마냥 동심의 세계에서만 머물 수 없는 것과 같다. 결혼 자체가 이처럼 저주의 고통이기에 제자들이 이런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렇다면 사람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시인하셨다. 이 말씀 중에 "천국을 위하여 된 고자(혼자 지내는 사람)"가 있다 하시고 "누구든지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셨으니 "천국을 위하여" 즉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혼자 지내는 것을 주님께서도 시인하신 것이다. 바울도 이 뜻을 위에서처럼 그 서신에서 밝혔다.

여기서 바울은 나의 남편/아내가 비록 그런 음행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나중에 뉘우치고 나와 같이 살기를 바랄 때는 버리지 말고 함께 살아 모쪼록 그를 구원 얻도록 하라는 권고를 잊지 않았다. 왜냐면 우리가 이 세상 있는 목적이 주님의 일을 하고 사람들을 건지는 데에 있지, 절대로 나 자신의 삶을 도모하여 자신의 편함과 안락을 위주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혼자 지내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임박한 환난"을 들었다.

그래서 육신에 고난이 있을 것이므로 "내가 너희를 아낀다"고 했다. 성경은 성령으로 말씀되어진 것이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현재만 아니라 미래의 일도 기술되어 예언의 특성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임박한 환난"이 그 때 당시에 닥치는 것일 수도 있고 오늘 이 시대에 있을 것 또는 각 시대에 있을 각종 핍박과 환난을 대비한 예언일 수도 있다. 오늘 이 성경을 읽는 우리는 우리 시대를 말씀하신 성령의 경고와 권고로 받아들인다 해서 결코 하자는 없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은 이 남녀 관계가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영속적인 것도 아니고 사람 삶에 필수 요건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어차피 없어질 것 중의 하나다. 이런 없어질 것에 구태여 얽매여 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단지 죄짓지 않기 위하여 즉 음행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남자마다 아내를, 여자마다 남편을 둔다는 그런 정도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있고 없고, 또는 믿음이 강하고 약하고 하는 차원을 떠나 있음을 바울은 역시 분명히 있다. "은혜가 각기 다르다"는 차원에서 각자의 사정을 이해해야 함을 못박아놓은 것이다. 혼자 있다고 믿음이 더 좋고 결혼한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믿음이 덜하다는 논리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받은 바 은혜를 따라 혼자 지내기도 하고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으며 가정을 꾸리기도 하는 것뿐이다. 성령의 인도와 양심상 판단으로 최선의 길을 택할 것이다.

남녀 관계가 이상과 같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볼 때 불가항력적인 그 무엇이어서 우리가 짝지어 살지 않으면 큰 일이나 나는 것과 같은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고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물론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의 여생을 오로지 하여 주님의 일에 몸 바쳐 사람 살리는 일에 헌신하고자 함이니,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과는 목적 의식이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삶을 사랑하는 많은 소위 기독교인들과 사고방식이 같을 수가 없다. "이혼했으면 당연히 재혼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이냐" 하고 화들짝 놀랄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런 경우에 들어맞는 말이 "일체유심조"다. 즉 인식 변화에 달렸다. 중요하다고 여기면 중요한 듯이 여겨지게 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냥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그대로 되어진다. 짧은 한 세상 이런 저런 신경 쓰기에는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간다.

이 남자와 여자 관계가 이토록 엄중한 것은 둘이 하나됨의 철칙이 영원히 변치 않음을 강조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아담의 몸에서 여자가 생김으로써 이루어진 육체가 하나되는 사실은,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와 나와의 영원히 변치 않는 "한 영이 되어 있는"[고전 6:17]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성역(聖域)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토록 엄정하게 다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오늘 이 시대는 마지막 때의 마지막이다. 곧장 악한 자는 출현할 것이다. 그리고 대대적인 핍박이 뒤따를 것이다. 적 그리스도의 범세계적인 대대적인 핍박과 환란이 바로 눈 앞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만한 그런 때이다. 바울이 경고하고 예고한 그 날들이 이미 우리에게도 현실로 닥쳐 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가 각별히 요구되는 때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보다 효과적인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방안이 적극적으로 강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나타나는 두 여인 중 하나는 교회다. 그러나 또 하나는 교회를 가장한 사이비로서 외양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자처하나 속인즉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난 것이다. 그런데 악한 자가 나타나면 이 여자를 멸망시킨다고 계시록은 밝히고 있다. 자기 편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겠는데, 이 기록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으로서 그 사이비가 표방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주 제거해 버림을 의미함이다. 그 사이비가 표방하던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을 제거하면 자연 그 음녀로서의 역할은 끝나기 때문이다.

무릇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이는 주님의 예언대로 모든 사람, 모든 국가, 모든 종족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시대가 곧 닥칠 것이 이미 이 대목에서 예고되고 있다. 그러므로 가정을 지님으로써 이 모든 일에 대처하는 데에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바울의 권고대로 따를 것을 종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나도 성령을 받은 줄 안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이나 권고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권고라는 사실을 그런 완곡한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태어나면 무조건 그 부모를 떠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도 아니고 그것이 반드시 우리 믿음 생활에 유익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만 알고 있으면 족하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그리고 구원의 말씀을 누구에게든지 전하기 위한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써 그 가장 나은 방편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택하여 추진해 나갈 일이다. 무조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결혼을 해야 된다는 천편일률식의 사고방식은 당연히 옳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도 아니다.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자세로-이 세상에 사는 자세가 아닌-나가도록 젊은 사람들을 지도할 일이다. 오늘날 보면 이런 바울의 경고성 권고를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일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기에 여기서 특별히 지적해두는 것이다. 지금은 천국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때이다. "천국이 침입을 당한다"[눅 16:16/마 11:12]는 말씀이 그것이다. 주님의 말씀대로 뒤도 안돌아보고 달려들어가는 때이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다. 끝까지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다 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살아 있는 육신이 어떻게 소금 기둥으로 변할 수 있느냐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쏟아진 것과 같은 그런 불과 유황이 하늘로부터 쏟아진 적이 있는가? 없다. 없으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 있던 인간이 소금 기둥으로 변한 것은 당시의 그런 불과 유황으로 표현된 사태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재연되지 않고는 우리로서는 한계 밖의 설명이 된다.

그런 유황과 불이 하늘로부터 쏟아지지 않는 한 그런 소금 기둥도 구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금 기둥을 설명하기 이전에 그 "유황과 불"부터 먼저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소금 기둥을 설명 못한다고 해서 이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무지몽매한 자로 취급되나, 그러나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 유황과 불의 성질부터 규명하고 나선 다음에야 그런 질문을 할 일이다.

그렇게 하늘에서 내린 불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는 한 그 기록을 단지 그대로 믿고 안믿고에 있는 것이지, 그것을 설명해야 하고 제대로 설명이 되어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을 두고 말하기를 "내가 당시에 살아 보았어야 확인하고 비로소 그에 대한 이 기록을 믿을 수 있지 않느냐" 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과 똑같은 무지몽매함이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자리라고 하는 사해(死海)가 현재 소금 바다가 되어 있다. 그것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우리에게 현실로 나타나있는 그 때 당시의 유일한 흔적이요 또한 증거다.

이 소금바다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또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설만 난무하지 그것을 명확하게 이것이다 하고 설명하지는 못한다. 설명할 수 있다면 세계 도처에 그것도 아니라면 그 외에 단 한 군데라도 그런 유사한 소금바다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 이것은 그 지역 특수 환경에 국한한다는 말이 된다. 국한한다는 것은 그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킨 그 불과 유황이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일반적이고 보편화한 지식으로는 통하지 않는 특수한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우리가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냐" 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이고 보편화한 지식의 잣대만을 들이대고 하는 말이다. 그 소돔 고모라에 국한된 특수한 지식의 잣대를 대고 하는 말이라야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있는 그런 특수 상황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어떻게 일반적인 상식과 관념만으로 그 특수한 상황을 판단하려 하는가. 이것이 비과학적인 접근이 아닌가. 성경은 간단히 "유황과 불"이라고만 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그리고 당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으로 "불과 유황"이라 했을 뿐이다.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누가 능히 설명할 수 있는가?" 하고 우리는 오히려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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