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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0)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8 19:23
글쓴이 김일동 조회 444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외부에서 이러니 저러니 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는 앞에서 각자 자신이 취하는 마음의 자세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일이므로, 이런 일에 대한 것도 어떤 외형적인 것을 기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적합한지 아니한지를 우리 스스로 따져 그것만을 기준 삼을 일이다. 이 외의 그 어떤 다른 요소도 개입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만은 우리 모두가 합의하는 것이 옳다.

어쨌든 우리가 분명히 아는 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은 좁다, 그만큼 걸림 돌이 많아 여간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만을 알고, 결코 한 두 구절에만 매달려 자기 자신의 운명을 거는 무모한 모험을 하지 말고 모든 말씀을 전체적으로 종합해서 음미하는 지혜가 필요하며, 만일 단 한 구석에라도 세상을 사랑한다든지 자기를 위한다든지 하여 말씀과 믿음에서 어긋나게 될 때는 그것이 뿌리 즉 "어미"가 되어 여러 가지 위험한 "새끼"들을 낳고 퍼뜨릴 수 있다는 것을 상식 차원에서 유념하면 될 일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마다-그러므로 예외가 없다-자기 스스로 쳐들어가 빼앗아 차지하게 되는 것이지, 복으로 태여 절로 굴러오는 것도 아니고[하나님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착각하는 이가 많다] 누가 고이 갖다 바치는 것을 받아 챙기기만 하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기본 원칙만은 철저히 인식할 일이다. 나머지는 당자 개개인에게 달린 것이요 남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거나 바로 잡아 준답시고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스스로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어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한 그런 것에 비할 수 있다. 한 두 살 이제 걸음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를 스스로 먹고 입도록 버려둔다면 그 아이는 얼마 안있어 곧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것이 아닌가. 엄마든 누구든 절대적인 도움이 그 아기에게 필요하고 그 스스로는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 스스로 안되는 것을 되게 하신 것이 "은혜'요 "선물"이요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천국이 얼마 안되는 거리에 있어 어른이라면 며칠 걸려서라도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만, 어린 아이는 당장 먹고 입는 것부터가 우선이고 스스로로는 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어서 천국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이 꿈도 못꾸던 것을 어른이 되게 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 의미가 우리 구원인 것이다. 말하자면 '어제'까지 그런 '어린 아이'였는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오늘' '어른'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른답게 당당히 걸어 들어가 차지하면 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른이 아니라 여전히 어린 아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증거다. 어른이 될 수 있는 힘을 부여했음에도 여전히 어린 아이라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니, 그 자체에 악(惡)이라는 내부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답게 움직이라는 것이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요, 그렇게 움직이지 아니할 때 즉 여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고후 5:15] 않을 때 그래서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지 않을 때 그것은 "구원을 이루지 못함"이다.

그런 내부적으로 병든 것은 자기 스스로가 아니면 다시 말해 스스로 대오각성하여 그 악을 회개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한 강제로 간섭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 자신께서도 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왜냐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으로서 그렇게 살면 "죽는 것"[:13]인데도 이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지로 회개하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교회 개혁을 말하지 않는다. '개혁'이 아니라 실상은 '원상 복귀' 또는 '환원'이다. [물론 과거에도 이런 "초대 교회 환원"이라는 것을 표방하는 운동이 많았으나 형식만의 소위 '개혁'일 뿐이고 이름만의 '환원'이었다]. 현재 북한 지하교회 및 중국의 지하교회, 그리고 과거 로마시대의 그 유명했던 카타콤 지하교회에서 보는 바 환란과 핍박 속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유형과 본을 따라 또 장차 임할 "짐승"[계 11:7]이 자칭 "하나님"이라 하며 세계를 지배할 환난에 대비하여[살후 2:1-12] 이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취하여 전열(戰列) 태세를 갖출 것을 촉구함이다.

여기서 "짐승[beast]"이라 했는데 '적(敵)그리스도'가 인간일진대 인간은 무저갱(無低坑, bottomless pit)에서 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차별화하여 "짐승"이라 한 것이다. 즉 "네피림"인 것이다. 죽은 자의 귀신은 "네피림"이 죽어 방황하는 영혼들이다. 그리고 무저갱은 이들 "네피림"이 특별한 범죄를 했을 때 그 영혼들이 들어가는 곳이다[눅 8:31/유 1:6]. 그러므로 이 '적 그리스도'는 "네피림"이었다가 다시 환생하는 경우다. 소위 "환생"은 이와 같이 "네피림"에게만 적용되고 일반 아담이 씨 곧 구원의 대상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 책에 녹명(錄名)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하게 여길 것"[계 17:8]이라 함과 같다. 환생, 전생, 윤회 따위가 사실이라면 이는 "네피림"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요 구원의 기회가 부여되어 있는 아담의 씨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니,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말 일이다.

그래서 적 그리스도를 "짐승"이라 한 것이니 "짐승"[창 2:19]의 소생이므로 "짐승"이지 인간[아담의 씨 또는 후손들]은 아닌 것이다. 인간의 형태를 띄었으므로 사람이기는 하나 본질이 인간이 아닌 것이다. 이 "짐승"이 환생하여 적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아들" 운운하며 온 세상을 기만할 때가 바로 온 세계적인 교회 핍박의 때다.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주님, 당신이 아십니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계 7:13,14) 함과 같다.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였다"(계 13:15). 성경을 직접 읽을 것 없이 그 성경을 '대신' 읽고 성경을 풀이해 주는 교역자(敎役者)의 말을 듣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하는 교역자가 있다면 이것은 로마카톨릭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심지어는 교인이 성경에 능통하게 되면 설교 무용론까지 대두될 판이라 그들의 '직업'이 위협 받는다는 해괴한 생각까지 하는 교역자도 있는 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같이 교인들로부터 차단시켜 놓고 어찌 성령의 역사(役事)를 기대할 수 있으리요. 어찌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성령의 역사(役事)로 돌아감이니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성령의 역사 없이 무슨 구원이 있으랴. 구원의 역사가 없는 기독교 교회는 회교, 불교, 힌두교 등과 같은 세상 종교의 하나로 그칠 따름이다.

오늘 이 시간 여기가 초대교회 시대라 간주하고서 우리가 교회도 세우고 운영도 하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극심하게 박해하던 로마 제국 시대에 지금 우리가 처해 있다고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 로마시대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았고 지금도 계속 받고 있는 북한 교회와 더불어 이 나라, 이 땅이 북한이라 치고 그런 환경에 우리가 처해 있다고 간주하고 교회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이 땅이 북한 땅이요 이 사회가 북한 일인독재 체제하에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세계라 해서 이 땅에서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미소를 머금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세계지만 이 국가만은 치외법권 지대가 되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손을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은가. 이 자유세계에서만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휴가를 간 것도 아니고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박해 받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회유책에 휘말려 더 빈사지경에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건실한 교회로 남아 있는 핍박 받는 중국교회, 북한 교회의 모양을 본 따자는 것이다.

이 '중국교회'는 중국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거기서 불법단체로 규정되고 있는 지하교회를 말함이다. 미국도 유럽대륙에서의 박해를 피해 온 청교도 후손이 창건한 이래 수백 년래 신교의 자유를 누린다 하나, 그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회유책이 박해와 핍박으로 급선회하여 그 전술이 바뀌는 것은 언제나 시간 문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바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상 양대 책략을 우리는 간파하고 있지 않는가.

성경이 예언한 그 불법한 자, 멸망의 아들의 출현 역시 지금은 역시 오직 시간 문제다. 지금까지의 모든 질서가 송두리째 무너지려는 순간에 온 듯한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시발점이 오늘이다. 이를 입증한 것이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미국 심장부의 9.11 테러사건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가가 개인을 통제할 수 없는 일종의 무법천지를 내다보고 있는 놀라움이다. 다니엘이 예언한 바 사람의 지식이 더하며 빨리 왕래하게[단 12:4] 된 오늘날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전체 국가를 상대하고 전세계를 상대해서라도 무법 폭력을 자행하고 대량 인명 살상을 할 수 있는 이런 혼돈과 혼란은 이제까지 인류가 알아왔던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누구도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초자연적 능력의 '절대자'의 군림이라고 소리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자존(自尊)하여 하나님이라 하며 하나님 성전에 앉는 자 곧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함이다. 당장은 핍박과 환란 아래 있지 않으나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치고 교회생활을 하자는 취지다. 어차피 당할 핍박이라 예행 연습이라도 해둘 판인데 하물며 교회 원형으로 돌아감에 있어서랴. 핍박의 때를 당해 허둥대지 말고 미리부터 대처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지혜로운 일이다.

교회 초창기나,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오늘 이 시기나 교회는 핍박 받는 모습으로 일관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머리를 발로 짓밟기 전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발뒤꿈치를 물려야 함이다. 영광 이전에 먼저 고난의 형태를 취함이 교회 본연의 모습인데 그 모습으로 다시 돌아감이 잘못인가. 그리고 이 초대교회 형태와 운영 체제야말로 현재 핍박 받는 교회가 위치한 국가 국민에게 시급히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거기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이 자리에서 다시 강조하는 바이다.

예컨대 광활한 중국, 그리고 전세계 무슬림 국가들 및 북한, 베트남, 라오스 등이 그런 절박한 곳인데, 많은 인구를 수용하고 있는 그런 곳에 복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초대교회로의 환원에 의한 교회 운영법인 줄 확신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이미 한국교회조차 어느 순간에든 북한과 똑같은 상태에 들어갈 그런 시점에 와 있음을 보고 있다. 세계에서 교회 박해가 가장 심하다는 독재 체제의 끓는 기름 가마솥이 남쪽으로 기울고 있는 이 때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준비를 다함이 옳다.

일을 당하여 당황할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하는 것이 사리에 맞다. 교회당이 폐쇄되고 교역자가 감금 당하고 신학교 문이 닫히고 공개적으로 예배 볼 수 없는 때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 동시에 적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고 있다. 그 가장 합리적인 대처 방안이 이 초대교회로의 환원, 지하 교회 형태와 체제로의 신속한 변환이다. 1. 교회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전투하는 교회로서 그런 전투하는 형태를 갖춤이 당연하다. 이것이 CITHM(Church "In Their House" Movement-집 교회 운동-고전 16:19/롬 16:5)의 골격이다.

2. 교회는 삶이요 또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한 몸으로서의 교제이다. 이것이 CITHM의 기본 정신이다. 3. 전투하는 교회로서는 기동성, 침투성, 결속력 이 세 가지가 3대 요건이다. 거대한 건물은 기동성에 저해된다. 오늘날의 기업체 개념에서도 언급이 되는 저해 요소다. 거대한 건물 속에 수용된 인원으로만 한정되고 그 숫자만 지탱하려다 보니 그 이상 더 숫자 늘이기에는 다시 말해 전도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교역자들 역시, 이 사람들만 잘 간추려도 큰 성공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자신과 타협해 버리는 유혹을 받는다. 한마디로 기동성이 없다.

그러니 이런 집단을 통한 교회 전진과 발전은 아예 기대 난망이다. 침투력은 이런 기동성으로 가정에 파고들고 직장에 파고드는 등 구석구석이 소규모로 파고드는 전략이다. 소규모로 진행하니까 이합집산을 자유로이 할 수 있으므로 안미치는 데가 없이 확산될 수 있다. 인구 희소 지역인 농어촌도 튼튼하게 교회가 설 수 있다. 구성인원이 이렇게 소수이니 자연 상호간의 유대가 강화되고 친화력이 증진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자명하다. 즉 결속력이다. 건물을 지어 올리고 신학 정규 교육을 받은 정식 교역자를 초빙하는 등의 종교 형태를 갖추면 이상 세 가지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힘을 제대로 구사할 수가 없음을 이제까지 우리는 지겹도록 보아왔다.

4. 성령을 교회 주인으로 새로이 인식하는 바탕에서는, 성령께서 하실 일을 인위적인 것으로 대치한 지금까지의 관행을 과감히 타파하고 탈피하는 일이 시급하다. 5. 여기서 말하는 '초대교회' 형태는 거듭 말하지만 핍박 받던 초대교회 당시 및 현대사에서의 구소련과 동구권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형편이 여전한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사우디, 파키스탄, 이란, 수단 등지에서 겪고 있는 현지교회의 모습을 그 기본으로 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구동구권은 80년을 그런 압제 아래 살았으므로 그동안 우리가 현재 아는 대로의 교회 활동은 전혀 불가능했었다. 그리고 중국은 오늘날 그 반세기를 맞는다. 북한은 웬만한 신앙인은 웬만한 형편이면 거의 다 남하하였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들 나라 가운데는 과거에는 비교적 복음을 자유롭게 받아들였던 그래서 전할 수 있었던 곳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복음활동이 그렇게 장기간 80년, 50년씩 중단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교회 일이 그렇게 장기간 방해를 받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든 악령이든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 친히 사람 구원하시는 일을 중단하실 리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곳에도 하나님의 교회는 존재하고 때문에 그런 지하교회를 아무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교회 형태를 지금부터 우리도 채택하자는 것이다. 그런 교회 형태가 바로 핍박 받던 초대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오늘 하루도 더 더뎌지고 그래서 세상이 오늘 하루도 과거처럼 변함없이 굴러가고 있는 것도,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오래 참으셔서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 때문임을 성경은 명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런 80년, 50년 기간 중에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일을 멈추지도 않았고, 멈출 수도 없고 엄연히 그 핍박 속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교회> 형태가, 오늘 이 시간 이른바 자유세계에 처한 나라들의 마땅한 교회 형태이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자유세계'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가 동참하는데 있고, 그리고 이 세상 지배자가 2000년 전이나 후나 아담의 지상(地上) 생활 이후 여전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되어 있는 이상, 핍박 대신에 '쾌락'이나 '세상 염려', '재리의 유혹' 등 그 공격 방법을 바꾸고 있을 뿐이지 진정한 뜻으로 '자유세계'는 이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과거의 동구권처럼 현재의 중국이나 북한처럼 이들 자유세계에서도 핍박의 회오리바람을 동원할 수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의 교회가 이런 '초대교회' 형태의 모습을 취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중에서도 마땅한 일이다. 그와 같은 형태의 교회 활동을 구동구권이나 지금 중국이나 북한 등을 통해 생생한 실례로써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는 이상 더욱 그러하다.

6. 현재 탄압 받는 이들 교회에는 교회당이라는 어엿한 자기 건물도 없고 신학교도 없으며 따라서 제도적으로 배출되는 교역자라는 특수 신분도 없다. 그러나 그들을 교회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7. 초대교회 형태라는 것은 사도들이 생존하던 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라는 이름의 국가종교를 만들면서부터 그 영적 부패와 타락과 속화에 참여하지 않고 본연의 길을 걸음으로써 핍박 속에 지내던 당시의 모든 복음주의적 교회가 다 포함된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 유럽에서 왈도(Waldo)가 주도한 그런 복음운동도 그 중의 하나다. 대표적인 예로서 거론하는 것뿐이다.

8. 교회라는 개념을 종교적 차원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인생 삶의 기본법칙으로 인식하는 데에 이 <집 교회 운동>의 핵심이 있다. 종교치고 국가권력을 등에 업지 않는 예가 없다. 불교, 천주교, 회교 그리고 이른바 개신교 모두 그렇다. 기본적으로 '종교'의 특징이 그렇다. 이런 '종교적 혼돈'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된 교회관을 확립할 수 있다. 세상 종교는 일종의 세상 권력이 되어 있다.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세상 권부(權府)이다.

권력 지향성이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등에 지거나 또는 그런 것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진리와 사실에 그 근거를 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핵심인 관계로,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여 그 권위에 반역하는 것이 그 본질인 세상과는 항상 등질 수밖에 없는 상극 관계에 있다. 때문에 교회 초창기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때때로 '세상'으로서 상징되는]과의 싸움인 것이니, 그리스도 교회 존립의 의미를 노상 희석시키려 하고 방해하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한가지 전략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항상 종교화하는 데에 주력해 온 것이다.

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 고난이 필수적이냐 하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이 "집 교회 운동"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므로 그 믿음의 특성상 이 세상에서 교회가 받는 핍박, 박해, 환난 등 갖가지 고난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세상에서마저 형통, 창달, 무적(無敵)이라면 더 다시 '믿음'이 되지 않고 '보이는 것'이 되는 즉 강제, 간섭의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난 받는 의미에서 또 하나의 측면이 되는 사실은, 명백히 성경에 지적한 바 '악인을 구원 받지 못하게 걸러내는' 이 불가피한 작업에서 만일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없으면 이 작업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점도 있다. 다시 말해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해야 하는 것이 '의'의 본질인데,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불의한 자도 의를 좋아하게 되는 현상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정의하시는 '의'란 것은 그런 대가성(代價性) 없이 의 자체를 사랑해서 의를 행하는 그것이다.

대가성을 바라고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바 악이요 죄요 불의이다. '구원 얻지 못하도록 하시는 악인'이란 것은 바로 이런 악인을 말하는 것이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이방인 국가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시나 세상의 그 어느 왕들보다 이스라엘 백성을 더 잘 위하시는 왕으로서의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을 요구했으니 이미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견되어진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세상 종교의 형태를 따라가는 그리스도 교회의 행티는 오늘날의 타락과 무기력과 무능이 이미 예견되어진 일이다. 물론 이런 세상의 종교적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고 전혀 부패타락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사도시대부터 이미 그런 조짐은 숱하게 나타난 것이다. 조짐이라기보다 본격적인 부패가 시작된 것임을 바울 사도의 탄식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와 같이 부패타락 또는 이단으로 흐를 수 없지는 않더라도, 교회 형태가 집 교회 형태로 분산되어 있으면 그런 현상도 대개 부분적으로만 그칠 뿐이지 결코 집단적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마치 여러 단층 가옥들로 분산되어 있으면 사고로 무너져도 그런 가옥 몇 채로 끝나지만 수십 층의 한 아파트 내에 집단 거주할 경우 그 아파트가 무너지면 모든 가구 전체가 한꺼번에 결딴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실전에 임하는 병력의 전투 형태는 경직되어 있어서는 다시 말해 기동성이 없으면 일조일석에 붕괴된다. 때로는 얼마든 분산하고 때로는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거대한 공룡처럼 집결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신축성이 있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투 병력이다. 합심 기도, 특정 목적의 헌금, 특정 경우의 전도 등에 있어서는 집단화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평상시에는 분산되어 존재하는 그런 유동성을 지님이 이상적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던 초대교회가 격렬한 핍박을 받게 되자 즉시 뿔뿔이 흩어져 확산되어 간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생명력의 발로인 것이다. 고착성을 고집하고 형태와 체재의 거대함을 자랑함은 이미 화석화(化石化)했음을 입증하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중국의 교회 핍박에 슬기롭게 대처한 왓치만 니의 교회운동이 그 적절한 예이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시던 의미는, 오늘날 복음의 의미로 보면 개개인 각자의 마음 속에 그리하여 그 일상 삶에서 당연히 자리잡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왕권(王權)을 상징함이다.

그러나 이것을 마다하고 가시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것은, 개개인의 일상 생활이 아닌 어떤 특정 법제도와 강권 발동의 체재 아래 자기를 강제로 묶어두려는 종교 차원의 발상인 것이다. 일상 삶에서 하나님을 인지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런 하나님과의 동행 동거(同居) 동역(同役)을 속박이라 보기 때문이고 그것은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명이 된다. 이스라엘이 가시적인 왕을 구한 그 핵심이 여기에 있기에 그것을 "죄"로 보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결코 종교가 아니라 삶 곧 생활 자체임을 강조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의 그같은 처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서운해 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오늘날 종교 체제로 안주하는 이른 바 교회가 꼭 그와 같음을 다시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생의 약함을 절대신의 강함으로 보완하려 하거나, 현세에 대한 불만과 좌절을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해소하려 하거나, 내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거나 또는 현세를 탈출하자거나, 또는 막연하게 생각되는 혹 있을지도 모르는 사후 세계에 대하여 사전 대비책으로 보험에 들어 놓는 따위의 그런 종교행위가 아닌 것이다.

조물주께서 우리를 애초 지으신 그 창조의 원 의도대로, 지금은 벗어나 있는 그 삶의 본래 궤도를 따라 정상 복귀되어 정상적으로 사는 것 바로 그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생 삶의 기본원리로서 인식함이다. 건강을 위해서는 건강할 수 있는 기본 수칙이 있듯이. 교회는 영생을 얻기 위한 구도장(求道場)도 아니고 영생을 종착지로 하는 열차의 그 중간역(中間驛) 구실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영생을 얻고자 함이 목표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 이 영생 곧 참된 (왜냐하면 영원하지 않는 우리의 생명체는 조물주께서 애초 의도하셨고 그래서 창조하신 본래의 생명이 아니니까) 인생 삶의 방법을 세상에 알리려는 일을 하기 위해 모이는 것이 교회요, 또한 스스로의 상태를 부단히 점검함과 동시 피차간 뜨거운(벧전 1:22) 사랑으로 같은 목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상호 격려하고 보살펴 주기 위함이 교회 활동의 의미이다.

9. 이런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는 기능이라면 일정한 형태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 교회의 형태론이다. 자연스럽게 이상과 같은 기본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면 일정 형태를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핍박 받는 것이 시종일관 간판처럼 달고 가게 되어 있는 교회의 특권이요 은혜요 필요 불가결한 존립 요소임을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명백히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 설계와 그 청사진은 이 밑 그림을 근거로 하여 그 토대 위에 작성되어져야 하고 이 표준에서 벗어날 때 하나님의 기본 뜻에서 이탈하는 일대 과오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 은혜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음이다[빌 1:29]. 나를 위해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받는" 것이니 이것이 새 삶, "새 생명"의 "새 사람"의 특징이다. 다시 말해 고난 받음은 주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고 예배의  방법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 존립은 이 고난을 토대로 함이다. 남은 고난에 더 이상 계실 수 없게 되는 영광 중에 나타나시는 그 시간까지는, 그 몸된 교회가 이 세상에서 고난의 표적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들이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택할 때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적으로 담당할 것이라" 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하나님의 일로서 말씀보다 우선되는 기도가 바로 이 고난을 전제로 하는 것이니 제물 없이 제사장의 기도가 효험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의 이 기도가 없이는 죄인들을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는 이유가 바로 이 이치를 따른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는데 피 흘림이란 죽음의 고통을 전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없이는 어떤 회개의 역사도 불가능한 이 원리에서, 주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누구든 믿는 자에게는 구원은 이루어졌으나, 그런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회개의 역사에는 이런 동일한 원리를 따르는 고난이 필수 불가결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하고, 이 남은 고난은 그같이 고난 받으신 주님의 몸을 이루어 있는 그 교회로 말미암아 채워지게 되어 있다.

즉 우리의 고난을 근거로 한 우리의 기도로써, 다시 말해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기도로써, 성령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게" 됨이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똑같은 은혜일진대, 교회 역시 그같은 모습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항상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대비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세상의 '임금'인 이상 그리고 이 사실은 주님 계시던 당시나 오늘이나 주님 장차 오실 그 때까지는 불변의 사실이므로, 핍박 받던 당시 초대교회의 모습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탄압 국가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런 교회의 모습을 띠는 것이 정상 형태의 교회이다. 비록 당장에는 핍박을 받지 않더라도 그 모습 그 대로를 유지하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요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핍박의 거센 회오리바람을 몰아칠 수 있음을 앞에서도 지적했다.

단지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아니하는 것뿐이니, 왜냐면 '세상사(世上事)에 몰두해 있고', '이생의 쾌락' 속에 묻혀 있고, '황금만능주의'에 멍들고 물들어 있게 됨으로써 '핍박'이란 방법을 통하지 않고도 오히려 몇 배나 더 낫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효과 있게 제압할 수 있게 되기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핍박은 받지 않아도 핍박 중에 있는 것처럼 형태를 갖추고 그런 형태에 걸맞게 준비된 삶의 자세가 되어 있으면, 핍박 외의 그런 '세상 쾌락', '세상사에 대한 몰두', '돈 벌어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이라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략마저도 어느 정도 희석시키고 차단시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그런 예봉을 꺾을 수 있는 효과가 있음 또한 물론이다.

그렇게 되면 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틀림없이 '핍박'이라는 수단을 다시 강구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교회는 초창기부터 종말 즉 주님의 재림 때까지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끊임없는 전시(戰時) 상태요 전투 태세에 놓여 있음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마치 이 세상이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로 정착된 것처럼, 아니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리스도가 마치 화해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란 적대자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거대한 건물을 지어 올리고 또 이를 자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활동을 밝히는 성경을 제대로 믿지 않거나 믿어도 엉뚱한 해석을 하여 바로 믿지 못하는 결과다.

지금도 혼자 성경을 깨달았다 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신학교도 나온 일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목사"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을 모아 큰 교회당을 짓고 대대적인 소위 "전도 운동"을 하는 것을 흔히 본다. 그리고는 성경에서 빗나간 이단 사상을 퍼뜨린다. 그런가 하면 "평신도 운동"이라면서 조금씩 사람들을 모아 가정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런 사이비 형태도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격력은 현란할 정도로 다종다양하다.

물론 그들의 성경 해석은 별다른 특이한 면도 없이 자기류의 해석으로 끝나는 오류들로 대개 일관한다. 그런 집회의 특성은 "은혜를 받아 그 지시에 의하여" 한다는 점에서 공통인데, 형태는 그렇게 해도 그 가르치는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개 이단이다. 이런 각종 사례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무던히도 갖가지 형태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모방하고 또 내부 교란을 미리부터 집요하게 획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집 교회를 시작할 무렵이면 그는 벌써 눈치를 채고 이런 경향의 동일한 형태로써 혼란을 야기시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 교회로서의 특성은 무엇으로 규정 지어야 할 것인가. 재차 강조하지만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기동성, 침투력, 결속력이다. 한 마디로 구성원들의 "열심"이고 사랑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오는 전도열과 기도의 힘, 형제들간의 이웃 사랑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오는 거룩한 모범적 행실, 즉 생명력이다. 무엇인지 얼른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느낌이 "좋은" 것 다시 말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주지 않는 그 무엇으로 일반 불신자들에게 비쳐지는 것일 때 우선 불신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믿기에 그런가 하고 스스로 성경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방이 너무나 교묘하므로 참 곡식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데에도 이렇게 어려움을 느끼게 됨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단들이라 해서 그저 일률적으로 냉랭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들나름의 열심과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믿는 바를 조금만 더 유의해서 들여다보면 성경에 반(反)하는 이단사상이다.

세상에는 진리가 있는 반면 그런 사이비가 있고 그런 사이비라고 해서 사람들이 반드시 멀리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달라붙는 일도 있고 더 인기 있는 현상도 벌어지니, 그런 외형적인 현상에 집착할 것 없이 각자 진리라고 믿는 것을 오직 성경에서 구하고 그리고 항상 함께 하시는 진리의 영이신 주님의 지시와 위로의 은혜를 따라 충성하는 것 외에는 달리 확실한 길이 없다. 성경 말씀대로 "구원 얻기로 작정된" 이들은 진리로 올 것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진리 아닌 것을 따를 것이요, "내 말을 들었으니 너희 말도 들을 것이라"는 주님 말씀은 반드시 이룰 것이다.

13.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구원의 소식을 기독교니 종교니 하고 부르는 것부터 그리스도인은 삼가야 할 형편이 되어 있다. 부지부식간에 종교로 오해하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아니라 올바른 사람 삶의 원리를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이요 이 말씀을 믿고 그 삶의 법칙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이요, 이같은 하나님의 가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교회다.

이런 거창한 생명의 작업이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출생하는 창조의 작업이요 그리고 이렇게 창조된 새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이 창조의 역사의 현장에 투입되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이 하나님의 가족 구성원이 되는 것은 성령을 받음으로 되는 일이고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영원토록 산다는 것이 성령 받음의 요체이므로[행 5:32],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 곧 이 '선물'을 받는 일에 가시적인 어떤 절차가 필요함은 자명해진다.

어떤 단체에 가입을 해도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거치는 것인데 하물며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을 받는 일에 있어서랴. 그리고 순종이 이런 새 피조물로서의 새 삶에 필수적인 것이므로 그 순종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 바로 '세례 받음'이다.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심에 따라 그 명령에 순종하는 세례 의식이다. 다음에는 이와 같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과 영원히 더불어 사는 삶이므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내가 함께 있다"고 하신 말씀에 따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반드시 그 자리에는 주님께서 동석하심을 가시적으로 나타내어 그 사실과 의미를 확실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는 그 어느 곳이든 또 어느 때이든 사도 당시의 초대교회처럼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옳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함께 계시는 주님을 확인하고 의식하면서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시는지 항상 그것을 되새기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의미에서 주님의 명령을 따라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 기도로 모인 자리에서도 반드시 성찬식을 거행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형편 따라 정할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필요한 특별의식 또는 절차는 이 두 가지 외에는 없다.

14.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머리)으로 하는 한 몸으로서의 사랑의 삶의 교류'이다. 이 삶의 원리는 이 세상, 이 지구상에서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무궁토록 변하지 않는 삶의 법질서이다. 목자(牧者)는 원칙적으로 바울이 본을 보인 것처럼 자기 생업이 있어 교회로 하여금 그 생활을 부담하지 않도록 함이 좋다. 헌금은 각자 자기 믿음대로 하게 하되 초대교회 때 성도들이 자기 집과 밭들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가져왔던 것처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진력하고 집사들이 따로 선출되어 그 재정 일을 전담했던 것처럼, 7인위원회[초대교회 7집사 선출을 근거로]같은 것을 구성하고 그 위원들은 믿음의 본으로서 정평이 나 있는 목자들로써 구성하되 헌금을 사용하는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대표 기관으로 정착하게 하고, 그 곳에서 헌금을 관리하게 함이 이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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