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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끝)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8 19:29
글쓴이 김일동 조회 392

 

때문에 그 중에서도 믿음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한반도 북쪽의 교회가 세계에서도 가장 악독한 핍박과 압제를 받아 그 햇수를 따져도 어언 90개 성상[일제 강점과 공산 독재의 탄압을 합쳐]을 헤아린다. 그만큼 이 역사적 중대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위한 해산의 수고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때는 바야흐로 온 세계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시기다. 먼저 복음을 받은 서방세계는 성경을 버리고 소돔 고모라의 범죄 속으로 치닫고 있다.

마지막 때 복음은 이 수난 속의 한반도 북한 교회를 주축으로 해서 온 세계에 마지막으로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 전파의 방향을 인간들이 많던 동방으로 틀어 나아갈 채비를 차리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영이 막으시고 그 대신 마케도니아 즉 서방으로 방향을 틀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유럽 대륙에서 아메리까 대륙으로 계속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아메리까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한반도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영국 등지의 선교사들이 동방으로 와 중국에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에까지 미치기에는 힘이 미약했었다.

한국선교는 서쪽으로 향한 미국인들의 공로다. 우리는 이 흐름을 본류라고 분류하는 것이다. 지류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흘러내렸으나 그 본류는 이렇게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돌아 나가는 것이다. 이제 세계 최우수 지능국인 한국이 복음을 받았고 그 중심 자리에 설 자격을 그 받은 바 심한 핍박을 통해 해산의 수고로써 마쳤으니 이제는 복음 전파의 배턴을 받아 서쪽으로 나아가 인구가 넘쳐 나는 아시아 아프리까 쪽으로 전진하게 되어 있다. 이 아시아 아프리까 선교는 서양사람들보다 한국인들이 모든 면에서 적임자라 자타 공인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이 역사가 끝나면서 세상은 종말을 맞을 것이다.

세상은 협박한다. 당시 초대교회 때 사도들을 위협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지으신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일마다 말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세상 일에 가담할 것인가. 젊은이들이여, 그리고 비록 늙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젊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여,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러 대장정(大長征)의 길로 나설 일이다.

초대교회는 유대민족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졌다. 당연하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는 이 한반도에서 많은 일군들이 일어나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복음을 들고 밀고 들어갈 차례다. 세계 최우수의 지능을 가진 한(韓)민족이기 때문에 우리에 버금 가는 지능을 자랑하는 한족(漢族)들도 그 특이함을 일찍부터 알아채고 "장례(葬禮)를 성대히 치르고 흰 옷을 입기 좋아하고 예의범절을 아는" 민족이라 하였다. 동방(東方)으로 달려왔고 백의(白衣)의 사람들이고 국호마저 "아침의 청명(朝鮮)"이라 할 정도이니 진리 탐구열이 어느 민족보다 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인생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고 그 연유를 캐내고자 한 절대적인 의식이 장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는 데에서도 증명되는 것이다. 성경대로 하면(전 7:2,4) 과연 지자(智者)들의 나라다. 종교성이 많다기보다 인생진리를 탐구하는 의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 세계가 이 한민족의 복음전도로 마지막 하나님의 말씀 전도를 받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그런 한반도에서도 평안도 쪽이 복음활동이 성했는데 지금 그 쪽은 세계에서도 가장 혹독한 핍박과 야만적인 박해를 받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받은 고난까지 더하면 근 100년 가까운 세월을 핍박 가운데 지내왔으니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것이요 따라서 이 북한 교회를 주축으로 해서 아시아 아프리까 등지로 복음을 전하는 대열이 줄지어져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주재 선교사들은, 선교사적인 의미에서 온 세계 교회에 좋은 모범을 물려 주었으니 다름아닌 1907년의 한국 부흥, 정확히 말해 기도집회를 통한 교회 부흥, 다시 말해 기도를 중시하는 복음전도의 효율성을 증명해 보였으므로 마지막 선교의 보루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과연 한국교회에 세워져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기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아도 한국인들은 세계 어디에 갖다 놓아도 복음 전도자로서 손색이 없고 자격을 구비하고 있다. 구름 떼처럼 흩어져 나가 세계복음화의 첨병이 되자. 같은 몽골족이지만 징기스칸의 군대는 무력에 의한 세계 정복의 길로 나서 서쪽으로 나아가 다시 동쪽으로 되돌아와 정착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영적인 의미로서의 한민족은 진리를 찾아 동쪽으로 나아갔으나 이제 다시 서쪽으로 되돌아가 그 찾은 진리를 세계 끝 간 데까지 널리 전달해 주게 되어 있다.

영적인 세계 정복의 길로 나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지상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지상 왕국이다. 6천년 묵었다는 지리서(地理書)인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 우리 옛 민족을 가리켜 "동방(東方)에 군자(君子)의 나라가 있다"고 했듯이, 그리고 우리 민족의 뿌리가 요, 순이나 하(夏)나라 우왕(禹王) 즉 백익(伯益), 공자나 맹자, 백이 숙제 등 고대의 현인들을 배출시킨 것이 동이(東夷)였다고 주장하는 연구 결과에서도 보듯이, 예로부터 "예의지국"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정신문화가 발달한 민족의 후예다.

몽골 기마민족으로서 해 돋는 동방 끝 간 데까지 말 달려온 그 열심이 광명과 진리를 추구하는 국민성을 형성하여 흰 빛(白色)을 숭상한 나머지 옷까지 흰 색으로 지어 입었을 정도다. 그래서 국호도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아침의 광명'이다. 우리의 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중심(自重心)을 다시 찾아야 한다. 지능지수가 우수한 민족이라고 양양거리고 남을 깔보며 자기네끼리는 시기심이 많고 단결심 부족한 옛 행티를 각자 자각하여 버려야 한다.

미국 가서 사는 힌인(韓人)들의 생활 양태를 보면 그것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한다. 일찍이 도산선생이 미국 땅에 갔더니 한국사람 둘이 서로 상대의 상투를 움켜쥐고 흔들며 싸우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는데 오늘날도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그곳 교민생활에 정통한 현지 언론이 탄식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우리 동포의 삶도 마찬가지였다고 듣고 있다. 서로 시기하는 통에 조선족 사회에서는 부주석 격의 직위(소수민족 무마 정책에서 나온 것)를 생략하자고 중국 중앙정부에서 방침을 정했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라고 하지 않는가.

세계의 정신적 지주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데에서야 이런 병폐를 이길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갖다 놓아도 굳건하게 생활 터전을 일구고 떨쳐 일어나는 한민족의 우수성을 자각해서라도 명실 공히 세계의 정신적 향도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깊은 명상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내세에 대한 단순한 동경의 차원을 넘는다.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 사유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옳게 떳떳하게 사는 것인가 하는 데에까지 미친다. 그래서 나를 중히 여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이웃인 남까지 그 가치를 동시에 알아 주고 이는 함께 더불어 사는 지혜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소리를 전통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일례로 우리의 대가족 제도를 세계는 부러워했다. 그런데도 주체의식 없이 외세에 아부하는 무리에 떠밀려 서구인 자신들이 통탄해하는 핵가족을 무조건 모방하고 그 쪽으로만 지향하는 바람에 우리의 이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 허물어져 내리려는 위기에 지금 직면해 있다.

혼전 순결을 묻는 질문에 중국, 일본, 한국 등 몇 개국 청소년들이 대답한 것을 보면 혼전 순결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남학생 비율은 단연 한국이 으뜸인데 비해 여학생은 중국에 뒤졌다고 한다. 남학생은 그런데 여학생은 왜 못미치는가. 혼전 순결은 가장 기본적인 건전 상식에 속한다. 우리 선조들이 "예의 바르다"는 평판을 듣게 된 사실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인륜이나 도덕이니 하는 것도 이런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의 보다 나은 질적 삶을 영위하고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규범인 것이다.

우리 민족은 그런 선천적인 우수한 지능으로써 그런 보편 타당성 있는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뜻에서 군자지국(君子之國)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 상식이 지금 몰상식, 몰지각, 몰염치한 부류들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있다. 자기 정체를 바로 찾아내고 자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못살고 핍박 받는 민족으로 울분을 삭여왔다. 움츠리고 기를 펴지 못했다. 우리 스스로 그렇게 열등하다고는 여기지 않았지만 남들이 또 우수하다고 평가해 준 적도 없다가 이제 과학적으로 우리 자질이 최고 수준이라고 인정 받기에 이르렀다.

이제 자기 실력을 알고 정확한 자기 진단을 통하여 우리 할 일을 깨달을 때가 왔다. 예로부터 정신 문화를 개발하여 지켜온 우리는 서구 세계만 아니라 범세계적 의미에서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 매김 할 때가 왔다. 남녀평등이니 동성애니 하는 따위의 그런 퇴폐적인 것에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의연하게 우리의 정신문화 생활을 꽃피우고 지켜 세계의 양심 역할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를 선도(先導)할 일이다.

세계가 그러하니 우리도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전근대적 사대주의적 사고방식을 청산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능력과 자질을 알았으니 세계가 다 그러하더라도 그런 세계를 무작정 따르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솔선 수범으로 홀로일지라도 바른 길을 택하여 몸소 실천해 보이며 앞장 서는 선구자적 포부로써 오히려 세계가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온 세계가 모두 남녀평등을 아우성 치는 세상에서 온 세계의 돌팔매를 당할지라도 그것은 종국에 인간생활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그런 선구자적 자세의 민족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가족제라는 예에서도 보듯이 세계가 따라오려는 것조차도 우리 발로 스스로 걷어차 버리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정신적 선진(先進)과 물질적 선진을 혼동한 때문이요 그래서 우리의 정신적 선진을 물질적 후진으로 착각하고 오해한 결과다. 모두가 애꾸눈인 판에 자기의 정상적인 눈을 손가락질한다 해서 자기 스스로 그들처럼 애꾸눈을 만들어 버린 애꾸눈 원숭이처럼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나 그동안 비하하고 폄훼하였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적 혼란이다.

그러나 이제 오늘이라는 시점을 일대 전환점으로 해서 각자 자기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일찍이 김구 선생이 외치지 않았던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뿐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계시록에 보면 철장(鐵杖)으로 장차 만국을 다스릴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해치려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 입에서 물을 강 같이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를 떠내려 가게 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땅이 여자를 도와 입을 벌려 그 물을 흡수하므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도는 일단 좌절된다. 꼭 그것을 가리킨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이 강물이 무엇일까. 인터넷이 발달하여 초등학교 또래들의 아이들이 거침없이 거기 빠져드는 것을 보고 이 거대한 세력이 바로 그와 같은 강물처럼 거센 불가항력의 노도처럼 홍수처럼 느껴진다면 지나친 망상일까. 한마디로 그 앞에 거칠 것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공룡처럼 모든 것을 쓰러뜨리고 휩쓸어 간다. 자살 조장, 청부 살인, 성적 타락, 심지어 동성애까지 일사천리로 휩쓸어 가니 전혀 무방비다.

북한 교회가 핍박 받고 있는 현실

북한이 세계에서 최악으로 그리스도 복음을 핍박하고 있는 곳으로 세계에서 인정하고 있다. 바로 우리 코 앞이다. 바로 우리 동포 한 겨레이다. 이 현실을 직시하고 눈을 크게 뜨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 극심한 고통에서 면하도록 벗어나도록 기도하자는 뜻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해 기도하고 그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 생활에서 풍성한 은혜를 얻도록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면 현재의 이 핍박에서 해방되고 믿음의 자유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정당하다.

핍박을 받든 아니 받든 오로지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를 "보내신"[요 20:21]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다. 왜냐 하면 이 핍박 받음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 세상에 처한 교회의 정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핍박만 받는다고 그것이 하나님 뜻을 행함은 아닌 것이다. 땅 끝까지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함 또한 하나님의 뜻이다.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난 받게 되어 있고 그래서 고난 받음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고난 받는 북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화가 있다.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 근심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움만 더하게 된다[암 6:6]. 요셉의 환난에 대한 깊은 관심과 기도 없이 아무리 이 자유로운 지대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교회당이 떠나갈 듯이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이 사람들 모두 정신 이상자(광신자)가 아닌가' 하고 놀라서 튀어나올 정도로] 기악을 연주해보아야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한다"[암 6:5]는 죄명[罪名]만 만들어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힐 것이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칠 것이라"[:7]는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만 될 뿐이다.

성경에 "나를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 하고 아주 못을 박아 버리신 그대로의 실상이 현재 북한과 중국, 과거 시절의 소련 및 동구 그리고 지금도 동아시아나 중동 각국에서의 핍박 실태인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15:20] 하셨으니, 주님께서 줄곧 세상에서 증오의 대상 그리고 비난의 표적[종국에 가서는 십자가 처형]이 되셨던 바로 그 과정과 순서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말씀하심이다.

그리고 그 앞서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15:19] 하셨으므로 자기를 "택하심 받은 자"라고 믿는 사람은 모름지기 세상의 증오의 대상, 핍박의 대상 제1호로 세상의 살생부[殺生簿]에 올려져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이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천하가 아닌가.

소위 믿는다고 하는 어떤 이들 중에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실존마저 부정하고 있으니, 적을 모르면 필패(必敗)라고 한 대로 그런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은 초신자들에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경고하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행 14:22]. 그리고 그 서신 중에서도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임을 거듭 강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딤후 3:12].

신학과 신학교가 이천 년 가까이나 성업(盛業)을 했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그 가장 기본적인 것도 규명해내지 못했다. 앞에다 낫[풀을 베는 낫이라는 연장은 꼭 기역 자 형태다]을 놓고도 기역자가 어떤 형태인지 모른다고 하는 것처럼 성경이 명백히 밝히고 있는 대로 에덴낙원이 영계라는 사실도 간파해내지 못했다. 이런 가장 초보적인 사실은 당연히 모든 사도들은 알고 있어 초대 교회를 가르쳤던 것이나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탓으로, 그리고 오늘날[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계시로 진리가 알아진다는 그리스도 친히 하신 말씀을 외면하고[요 6:44,45,65/16:12-15/눅 10:21,22/고전 2:9/고전 2:13,14/마 16:17] 사람이 가르치는 것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누구든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기만"[마 18:3] 하면 다시 말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이들은 구원 얻지 못할 것은 없으므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괘념하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을 사랑함과 절대적인 순종에 우리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사랑의 순종에는 지장이 없는 까닭이다. 이는 그만큼 실제 구원 얻는 진리는 너무나 간명하여 어린 아이 같은 이들도 깨달아 구원 얻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함이다.

어떤 종류의 전문 지식이든 필요불가결하게 필요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반드시 계시에 의한다는 사실은 확고 부동하여 변함이 없다는 차원에서라도 그런 특수 사실에 대한 기록이 유실되어 있어도 그냥 버려두셨다고도 말할 수는 있으나, 실제 그 사실을 밝히는 기록은 성경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바라고 읽는다면 못깨달을 리도 없으므로 성경을 읽되 선입관과 편견으로 읽기 때문에 그리 되는 것이다.

개개인으로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공명심에 들떠 남 모르는 비밀이나 알까 하여 특별히 계시록 같은 것에 집중하므로 남이 보기에는 부지런히 성경을 탐독하는 것으로 비쳐지나 정작 진리에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열심히 읽다가 이단 사상에 빠진 예가 흔하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성경을 너무 읽어 그렇게 이단으로 흐르는 것으로 비쳐져 악령의 좋은 선전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악령 자신도 그런 식으로 열심히 성경 읽기를 실상 부추기는 실정이다. 금식 기도를 잘못된 방향으로 하도록 하여 금식 기도 자체를 멀리하게 만드는 것이 악령의 기만 수법이다. 또 성경을 읽는 이마다 위에 지적한 대로 그런 식으로 읽는다는 것은 아니고, 사람 따라서는 하나님의 계시로 그런 여러 가지 사실을 확실히 또는 어렴풋이 깨달았기는 하지만 개인의 일이고, 또 일반적으로 그런 개인적인 해석을 이단시하여 주의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그런 지식이 우리의 구원과는 실질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냥 그대로 묻혀 버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은[아무리 그것이 정확한 것이라 하더라도] 구원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니, 왜냐면 구원에 이르는 지식은 워낙 간결하고 명료하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깨닫고 구원에 이를 수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는 데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지막으로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강한 유혹"["strong delusion"-살후 2:9,10]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차단하려는 마당에서는 성경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 이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하여 인간 구원에 차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모든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이런 지식이 있건 없건 그와 같이 "항상 복종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길이 열려지게 마련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 상황은 매우 심각한 것이니, 즉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 지식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착각하여 그것을 소위 학문적으로만 깨치려 하니 진리에 평생 가야 이를 수 없다는 그 점에서다.

두드리지 않으니 문이 열리지 않고 구하지 않으니 받을 수 없고 찾지를 않으니 찾아질 턱이 없다. 삼위일체에 의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모습이라든가 아담이 애초 신령한 몸으로 있어 결코 죽지 않는 상태에 있었다든가 하는 것은 몰라도 그만이라 할 수 있다 해도[과거가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사랑의 복종이 제일로 중요하므로],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와 함께 죽으심'이 아니라 '나를 대신하신 죽으심'이라고 얼토당토않게 해석해 치우는 데에서는 구원 문제 자체가 심각하게 대두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오늘이 계속 내일로 이어지면 오늘날의 이런 혼돈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모든 시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 어찌 필자 혼자만의 판단이리요. 친히 말씀하시어 분명히 하신 대로 성령의 친히 가르쳐 주심을 사모하여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이 법칙을 무시하고 무조건 인간들의 해석을 성경 자체보다 더 중시하여 그것만을 여과없이 들이켜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판에 박은 인간의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므로 그런 당연한 결과를 낼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 수백 년을 거듭거듭 되풀이해 온 것이다. 그리고 학문이기 때문에 성경은 신학자가 전문가이고 권위자라는 것이고 따라서 성경의 진리는 그런 이들에게서 배운 신학도로서의 교역자만이 안다는 선입견, 그리고 신학교만이 그런 교역자를 배출해낸다는 그릇된 관념 속에서 오늘날까지 기독교라는 종교만이 그 자리를 착실하게 다져온 것뿐이다. 그리고 신학교에서는 그런 식으로 즉 '학문'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오도해 왔던 것이다.

미국의 정평 있는[그러나 이 역시 이론이 분분한 것은 위의 설명처럼 구원 얻는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절대 다수인 까닭이다-말씀 그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문은 상대적으로 언제나 좁기 때문에 찾는 이가 적다] 부흥 전도자 찰즈 피니[Charles Finney]는 신학생들이 제발 주석서 보지 말고 성경을 읽으라고 가르쳤지만 오히려 그런 주장을 이단 취급하고 그 올바른 경고에 마이동풍으로 대한 것이다.

이 나라 성경 주석의 대가로 떠받드는 장로교의 모 박사도 미국 신학교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은 그대로 피니를 이단자의 대표로 몰아 신학생들에게 주입시킨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는 피니에게서 배운 것도 없고 그의 가르침을 닮으려고 노력한 것도 없다. 단지 필자 역시 성경을 읽으면서[주석서를 전적으로 배제하여] 죄란 것은 그 근원적 의미가 자기중심이라고 믿기 시작했는데 피니의 글을 읽고 그 역시 그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사람 역시 바르게 깨달았구나 정도로 인식했던 것이 그에게서 받은 첫 인상이다.

그리고 그의 주장 중에 필자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더러 있다. 그러나 구원에서의 중요한 가닥은 제대로 잡고 있다고 필자 스스로 평하기에 그런 지엽적인 것은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다. 이런 정도는 루터를 비롯한 당시의 소위 "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천편일률적인 교리에서 벗어나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나머지 너무 믿음 일변도에 치우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간과한 것과 같은 것으로서, 피니 역시 앞에서 지적한 대로의 천편일률적인 교리적 "성경 해석"에서 탈피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다보니 또는 기타 이유로 해서 그답지 않은 성경 해석이 나온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사랑의 순종이 구원 얻는 믿음의 요지임을 감안할 때 그의 모든 복음 활동은 긍정적이고 그의 그런 자세[성경에 전적으로 의존하라는 등]는 누구에게나 천거할 만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는 그런 모든 오류에서 벗어나야 할 정히 바로 그 시점인 줄로 아는 것이다. 초대 교회 형태와 체제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형태와 체제란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대시하고 원수시하여 언제 어느 때든 마음만 먹으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멸절할 태세가 되어 있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집권하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효과 있게 적응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략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령 큰 건물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교회당이라 하는 데에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그 반대의 결과를 내는 것이면 두말없이 그런 일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교회 체제와 운영으로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 그리고 '믿음의 식구들을 잘 보살피는 일'로 구분해서 하면 족하다. 수가 여럿일 때는 성경에서처럼 전자의 일을 하는 자를 "장로"[또는 "감독"]라 하고, 후자의 역할을 하는 이를 "집사"라 하면 되는 것이다.

기도와 겸행하여 말씀을 전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이들을 거두어 교회를 이루고 그 교회를 그렇게 말씀 전하는 일의 기지(基地) 또는 거점(據點)으로 삼고 그렇게 확산, 확장되어 가서 세상 끝까지 이르는 일 외에 더 시급한 일은 없다. 새 사람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만이 물론 능사가 아니고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택하심 받은 자로 베드로의 경고처럼 "굳게 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이 모든 일의 변함없는 기조(基調)가 기도 그리고 말씀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를 도와 구제하기 위해 직접 선한 직업을 갖는["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것 역시 개개인에게 부과된 책임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고 이 세상 인생 삶으로서 더한 가치는 없다. 가난한 사람 구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체를 지니고 있으니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이 미비되어 있는 형제를 돌볼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이 일이 우선이고 그리고 여력이 있으면[갈 6:10] 주변 불신자들 중의 그러한 이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장 멸망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건져내는 것보다 더한 선행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리고 이렇게 진리 가운데로 인도했지만 중도에서 탈락되면 어찌 되는가. 그러므로 형제들을 영적으로 챙기는 일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따라서 모이기를 힘쓰고 필요해서 모이므로 매일이라도 가하다.

성경상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개념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바되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고 그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님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엡 2:20-22), 이것이다. "선지 사도들의 터"라 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 하신 말씀의 대언자들과 이제 그 예언대로 오신 주님을 직접 확인한 증인들의 증언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교회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중심은 그리스도시다. "사도들의 터"라는 것은 사도들 이후에는 그 대리자가 다시 승계하는 등의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들이 증언한 증언 자체인 것이다. 그 증언이 신약성경이요 선지자들의 증언이 구약성경이다. 성령께서 그 해설자이시고 저자이시고 그 진리 자체이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각자 안에서 말씀하신다. 교회의 권위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신 것이다. 사람도 아니요 체제도 직제도 아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형제들로서 모이고 그 중에서 바울 사도가 제시한 대체적인 자격 요건을 따라 믿음의 모본 또는 모범이 되는 사람들을 장로(감독)와 집사들로 세워 전자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 전무하게 하고 후자는 교회 재정에 관여하게 하여 성령의 주장하심과 인도하심으로 교회는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일 때마다 떡을 떼는 것 이상으로 외형상 갖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교회로서 구비할 것으로 그 나머지는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행 14:23]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외래문화가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초대 교회가 시작되었고 바로 그 최초의 동방에서부터[그 움직이는 방향을 서쪽으로 잡았으니 그 향하는 방향에서 보면 분명 동쪽인 것] 생명의 말씀의 빛은 서쪽으로 비쳐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예루살렘은 당시의 그 복음의 영광을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와 같이 그 빛이 처음 서쪽으로 나아간 서구(西歐)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변질된 것도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와 뒤섞인 채 함께 서진(西進)하여 이 한반도에 묻혀 들어온 것이다.

이 변질된 것을 참 것인 양 착각하여 소위 "신학(神學)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도미유학이니 하여 뻔질나게 서방으로 드나들고 한 술 더 떠 보다 색다르다 하여 아프리카까지도 가서 소위 "공부하고" 돌아왔다고 여기는 이들도 생겨나는 판이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한 것이 아니고 '사람' 예컨대 칼벵, 루터 등의 역대 신학자와 신학 사상을 배우려고 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성경대로의 진리를 터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복음을 받았으나 변질된 남의 것을 가지고 거기 물들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런 남의 것을 가지고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해보아야 종교 선교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의연히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자다. 증언을 하는 증인(證人)의 그 증언(證言)은 '자기가 구원 받음으로써 직접 뵙게 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to witness] 것이다. 이 구원은 '자기 것'이니 '남의 것'이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인간의 자식 사랑 자연계 동물들의 새끼 사랑 이런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피조물에 대하여 이와 같은 어버이 사랑이 충만하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런 하나님께서 그 창조하신 인간을 대하실 때 자식에 대한 어버이 심정이심이 확증된다. 고로 모든 인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시고 우리 각 사람은 그 한 몸 구조의 각 지체로서의 위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한 몸 체제에서 자기 부인으로써 상호간에 위하는 데에 있다.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머리를 위함으로써 자기와 함께 지체(肢體)가 된 이웃을 [머리가 위하듯이] 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 율법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내용의 전부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다" 하시면서 가르치시기를, "무엇이든지 남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도 남에게 그렇게 해 주라"[마 7:12/갈 5:14/롬 13:8-10] 하셨다.

사랑은 외부적인 모든 아름다움이 내부적 충실이다. 하나님께서 만일 사랑의 실체 그대로를 우리 각자에게 나타내신다면 우리는 다만 어리 아이처럼 엉엉 울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면 그토록 아름다우신 하나님의 사랑에 티끌만큼이라도 누를 끼친 것 하나만 해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까닭이다. 우리가 아직 그 실상을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이다지도 무감각이고 무덤덤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만은 그런 느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즉 이지적인 판단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사랑하게 하셨다. 왜냐면 이 경우 그런 느낌도 일종의 간섭이고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좋은데 누가 하나님을 떠나려 하고 잊으려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직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기"[히 1:9] 때문에 그런 자유 의지의 선택으로 우리가 스스로 행동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주 독립성으로 행동하게 하신 것이다.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이 이 때문이다. 주변 환경에 부화뇌동(附和雷同, 일정한 견식이 없이 남의 의견에 따라 함께 행동하는 것)하여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자기의 신념 따라 올곧게 나아가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여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의견에 따라 행동했고 남자[아담]는 여자에 따라 행동했다. 광야 시험에서 우리의 본이 되시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기본 위치를 그대로 지키셨다.

이것이 자주 독립성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시지 않으면 즉 머리로서 몸을 위하시는 위치에 계시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의 자주 독립성을 논할 수 없게 된다. 왜냐면 그것은 종속(從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친히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섬기시는[엄마가 아기를 위함으로써 종 노릇하듯이] 한에는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머리이신 하나님만을 위함으로써 완전한 자주 독립성을 구사(驅使)하고 구가(謳歌)하게 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도 이런 우리의 고유의 자주 독립성을 행사하지 못하게 함이다. 우리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를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멸망의 자식인 것과 같이 멸망은 필연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스스로 따랐으니까 인과 응보다. 하나님은 철저히 원리원칙주의이시다.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까지도 일정 기간 활동하게 하시는 것을 보라. 인간[아담] 스스로 그 아래에 복속(服屬)했기 때문에 그 기득권을 일단 인정하심이다. 그 정도로 철저하시다. 이래서 우리는 무한 자비로우시고 인애스러우신 하나님이신 줄 알지만 동시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를 기화로 갖가지로 시험하여 우리의 자주 독립성을 탈취하려 하고 자기 아래에 두려고[복속시키려] 하는 것이다. 무신론을 만들어내고 소위 진화론을 만들어내고 기타 여러 가지 위협과 유화(宥和) 책략을 구사한다. 알고 보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 이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니지마는 어쨌든 현실이니 그리고 그에게 넘어가는 자가 아담을 위시해서 부지기수이니 그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본 줄거리는 이것뿐이다. 너무나 간명하여 허탈해할 정도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만 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유를 창조하실 때 죽음은 만드시지 않았다. 피조물[인격성을 갖추어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스스로 선택하여 만든 결과다. 고난은 죽음의 영역이다. 그래서 고통 고난은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기본 요소가 되어 있다.

하나님 친히 그 고난 받음의 대상이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나타난 다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만물이 지금까지 해산의 진통 속에 있다고 성경은 정확히 밝히고 있다[롬 8:22]. 우리 역시 절대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죽음의 고난을 받으셨지만 겸하여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 5:8,9] 역시 그와 같이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9] 것이다.

이 사실을 반드시 명심할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제는 불가항력적으로 모두가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다. 영원한 것으로 당하든 아니면 이 한 때만으로 당하고 그치든 둘 중 하나다. 영원한 것으로 당하게 되어 있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그러한[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을 위해 준비하신] "위로를 이미 다 받아 버린"[눅 6:24] 상태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의 낙을 누리게 되어 있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야 서로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즉 영원한 고난 대신 일시적 고난, 아니면 영원한 복락(福樂) 대신 일시적 안락이다. 일시적이라 함은 내일도 기약 못하는 이 세상에서 그러함을 말한다. 이 사실을 분명히 명심할 일이다. 고통 고난은 이제는 싫든 좋든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 단지 영원한 것이냐 아니면 일시적인 것으로 그치고 마느냐 하는 선택이 오직 각자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다는 이 엄숙한 진실 앞에서 떨 일이다. 한번 스스로 결정한 것은 결코 되물릴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모든 민족으로부터 미움을 받고[마 24:9] 그리스도께서 당시 유대인 사회의 유력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한 것처럼 우리가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보고도 절대 다수가 믿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니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마귀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 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 얻을 자가 있으면 그 한 사람을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마 18:12].

그리고 "하늘에서는 주님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님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습니다"[시 73:25] 함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 "임마누엘"의 사실을 가리킴이니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아버지께서는 아들로 말미암아 나타나셨고] 더 가까운 그 어떤 존재도 실존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항상 마음 가운데 아로새겨 끊임없는 주님과의 교제를 삶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낙과 의미의 본령(本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되는' 짝의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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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하기 위해 달리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증거[고전 9:24-26/빌 3:8-14].

이 세상은 시험하는 무대로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 때이기에, 또 인생들의 구원이 목적이기에 그렇다.
이렇게 달려 나가면 지칠 듯이 보이는가. 우리가 구원 받은 결실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내심 받은 대로 복종함이니, 엘리야가 하나님 능력으로 갈멜산까지 달린 것처럼[왕상 18:46],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지치지 않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사 40:31].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이 자연계는 짐승들의 서식처일 뿐]
인자(人子, 그리스도만 지칭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대표 또는 마지막 아담이시니 곧 인생 모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7] 하신 대로 이 세상 자연계는 인간의 삶의 고장이 아니니 비정상이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신 대로
그 비정상의 내용인즉 세상은 죽음이요 우리는 산 자이니 생사(生死)의 구분이 분명하여 함께 어울릴 수 없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61] 하신 대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청하라"[10:2] 하신 대로,
오직 이 세상은 일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고 이 목적 달성하기 위해 쉼 없이 달리는 데에 있다. 쉬엄쉬엄 할 일이 아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으니 전대[knapsack]나 주머니[money bag]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3,4] 하신 대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하다"[딤전 6:8].
홀가분한 복장으로 달음박질해야 우승한다. 구질구질한 세상 관심사를 털어 버리고 오직 일하는 자로서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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