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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31
글쓴이 김일동 조회 442

 

(61)예배가 무엇인가. 예배라고 해서 특정 장소에 특정 시간에 모여 우렁차게 찬미가를 부르는 등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말씀을 지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무슨 형식이 있다는 말인가. 사는 데에 무슨 형식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있던가.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라 법을 지키면 그 나라 국민으로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이 곧 인간 삶의 법이니 그 법질서대로 살고 생명의 낙을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62)심지어는 종교인으로서의 기독교인들이 교회 즉 그들이 성전이라고 부르는 교회당 내에서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교회 밖을 나가 일요일 예배 드리는 날만 지나면 그냥 세상 속에서 세속적으로 살아도 어쩔 수 없고, 다만 그 간의 죄과를 일요일 교회에 나와 회개하면 된다는 아주 전형적인 종교 행티를 내게 된다. 이것이 대부분 오늘날의 이른바 "그리스도의 교회"다. 물론 그런 중에도 왜곡되게나마 하나님의 말씀(성경)만은 제대로 전파되면, 그런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전파된 말씀을 믿게 되는 수도 있으므로, 구원의 역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나 무척 의혹스러운 눈길만은 거둘 수가 없다.

(63)그러므로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깨달은 것을 서로 알려 공유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도 물론 사실이나, 생활 자체가 성령과 진리로써의 예배가 되는 기본 토대가 되어 있지 않는 한 형식에 구애될 수밖에 없다.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힘쓰고 구원의 말씀을 전달하여 알려서 믿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따라 착한 일 즉 믿음의 형제들 간에는 서로를 자신처럼 돌보고 외부 사람 즉 아직도 이 한 몸 체제 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이 한 우리[fold] 속으로 들어오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64)오직 처음 믿을 때 세례[세죄(洗罪) 예식-행 22:16] 받고 함께 모일 때 성례(성찬 예식)를 행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원리원칙으로 삼고 있는 까닭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부인으로 모든 생활을 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해내는 일념에 집중하면 이 이상으로 더 요구할 것이 없다.

(65)[제각기 "침례"니 "세례"니 하여 영어의 "baptism"처럼 통일되게 사용하지 못해 세상 앞에 덕이 되지 못하므로 원 의미는 아니나 "죄를 씻는다"는 의미로 우리만 알고 통일하자는 뜻에서 "세죄 예식"이라 한 것이다. 우리도 영어처럼 한다고 하여 원음 그대로 "밥티조" 또는 다른 무엇으로 부를 수도 있지만 "세죄"라는 것은 "세례 받는" 일의 성경적인 의미이므로[:16] 합당하고, 단지 그 방법만은 성경대로 물 속에 들어간다고 하거나 아니라 하거나 자기 신념대로 할 일이다].

(66)하나님께의 예배를 특정일과 특정 건물 내에서만 국한하지 않고 생활로써 대체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삶 자체가 예배라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당 내에서의 예배 행위를 일상생활로 확장하는 것을 뜻한다. 함께 모이는 것을 폐지하자는 뜻이 아니라[히 10:25], 매일의 삶 자체를 예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니 예배가 생활이요 생활이 예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섬기는 자체가 예배이고 삶의 낙이기 때문이다.

(67)단지 그 생명의 낙이 죽음의 이 세상에서만은 악령들과의 싸움, 나그네로서의 삶, 힘들여 일하는 수고와 해산의 수고로 나타나므로 내적인 희열과 평안을 제하고는 육체적인 고됨을 요한다는 이 차이뿐이다. 이 육체는 죽음의 영역에 속해 자연계에 예속되어 있으므로 현재의 이런 상황은 불가피하다. 우리의 합리적 예배는[롬 12:1] '주님과 함께 사는 충성된 일상생활'인 것이니 이야말로 자연 순리이다.

(68)"다시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은 나 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되어 있으니[고전 6:17]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 계실 때 아버지와 함께 그렇게 계셨던 것과 똑같은 이치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요 내가 하는 말이 모두 아버지 친히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시라" 하신 것이다.

(69)§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즉 우리 위해 아들을 "내어주셨다"[롬 8:32] 하심은, 아들께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니 사람이 되실 때는 그러므로 아들 '홀로'이셨고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 만일 함께 하신다면 아버지까지 사람이 되시는 의미이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언제 다시 아버지께서 아들과 함께 하나가 되셨느냐. 바로 우리에게 본이 되시고 우리의 대표성을 띠시는 의미에서 또한 우리 각자와 하나되심을 나타내시는 것으로서 세례 받으실 그 때 성령이 임하셨으니 그렇게 성령으로 아버지 친히 임하심으로써 그렇게 다시 하나가 되신 것이다.

(70)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모든 일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게 되어 있는 모습을 띠신 것이므로 즉 구원 받은 후 새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이심이었으므로 우리의 대표성을 지니신다 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한 때 아버지와 떨어져 계신 것은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있었음을 나타내심이니 우리 역시 성령[아들께서 아버지와 하나 되어 계시는 모습]을 받아 모심으로써 아담이 범죄하기 전 하나님께 속해 있던 상태로 다시 복구되는 것이다. 즉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다.

(71)그래서 그 때부터 일하시기 시작한 것이니, 이는 아들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되고 그 가르치시는 모든 말씀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우리 역시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임을 나타내고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친히 내 안에 사시는[갈 2:20] 것과 같음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다 떠나갈 것을 말씀하시면서 [요 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는데 벌써 왔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하셨다.

(72)우리 역시 말하기를 [바울의 말을 빌리면], "내가 처음 나의 믿음을 말하기 시작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저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원한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신다. 이는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다'[딤후 4:16,17]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살게 되어 있는"[고후 5:15/롬 14:7-9] 것을 말함이다.

(73)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요 20:21,22]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생명 곧 양식이 됨"[4:34]을 말함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의 생활 양상이 완전히 바뀜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또 우리 각자와 하나되심을 선포하시는 의미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그 때 성령을 받으시고 비로소 그 때부터 아버지께서 보내신 일을 본격적으로 하시기 시작함과 똑같다.

(74)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은 후와 받기 전의 삶의 양상이 절대로 같을 수가 없다. "바람이 임의로 부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이 다 이와 같다"[요 3:8] 하신 것은 보이지 않으시는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된 변화라는 뜻이고 그렇게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 사람이 과거의 행티나 지금의 행적이나 구별할 수 없이 삶이 똑같다는 그런 의미가 절대로 아니니 명심할 일이다.

(75)성령의 계심을 만일 사람이 지어낸 이야기라면 성령의 강림하심도 똑같이 표현했을 것이니, 곧 예수님께 임하신 것을 두고 비둘기 같은 형상이셨다고 했다가 오순절 강림 때 120명 사람들에게 임하실 때는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 같은 형상이셨다고 할 리가 없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약간 어두운 실내[다락]에서는 불과 같은 색깔[색깔이 있는 모양새였다면]에다 여러 사람에게 임하시는 것이므로 불의 혀 같았을 것이요, 예수님의 경우에는 세례 요한의 눈에 비쳐진 것으로서 밝은 대낮 바깥에서 한 사람 예수님게만 임하심이므로 비둘기가 날개 치며 내려오심과 같은 형상이었을 것이나 그렇게 나풀대는 형상이셨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76)그러므로 한 성령이심을 즉각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표현을 달리하고 있으니 위의 설명대로 강림하실 때의 환경과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차이를 두고 표현하고 있기에 진실 그대로의 기록인 줄 아는 것이다. 그렇게 강림하시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 일부러 모양을 내어 주신 것일 뿐이지 그런 고유의 모양이 있으신 것은 아니니 영(靈)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은 물질과 달라 그 형체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77)단지 영물들은 영이기는 하나 그 영에 맞는 일정한 형태를 지니는 것이니 조물주로서의 영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영과도 다르니 사람은 육체라는 그릇이 있어 그 그릇에 담겨진 것과 같은 양상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영물은 '형상화한 영'이라 할까. 그래서 에덴낙원에서의 영물은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 아담과 대화할 수 있었음을 여자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꾀인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78)자연계와 영계는 또한 대칭성을 띠므로 본질면에서는 같은 것이다. 전혀 다르지만 동시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에데낙원에서 영물들을 창조하실 때도 그냥 "짐승들"이라고 하여 마치 자연계에 속한 짐승과 같은 것인 양 표현하고 있다. 본질이 같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저주를 받을 때 흙을 먹게 된 그 결과로 그 신령한 몸이 마치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가시적인 것으로 변환되었다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79)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성령으로 계시는 '사람'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이시면서 성령으로 계신다 함은 완전한 사람이심과 동시에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즉 나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신 사람으로서 나와 함께 사심이다. 그 어느 부모자식, 아내남편보다 가까운 존재로서 각자에게 임하여 계심이다. 단지 그 부활하신 육체로는 아직 나타나시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육체로 나타나시면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몸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육체가 견뎌내지 못한다[행 9:9/계 1:17]. 우리 역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야 그런 부적응이 없어진다.

(80)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람되심은 하나님의 희생제물로 우리 위해 죽으시기 위해 사람되신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살전 5:10] 했기 때문이다. 우리를 영생하도록 만드신 것이 우리 구원이 아닌 것이다.

(81)우리가 구원 받아 영생하게 되는 것 즉 영원히 사는 것은 자든지 깨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함이다. 이전처럼 나 혼자라도 얼마든지 살 수 있되 단지 죽지 않고 사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본질적으로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히 산다는 것' 자체가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다는 것은, 영생하는 것 곧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 또는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삶 자체를 이루는 뼈대가 되어 있음이다.

(82)"두 사람이 의합(意合, 뜻이 서로 맞는 것)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同行)하겠느냐[암 3:3] 했지만 함께 영원히 사는 데에서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로서 불가분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는 비결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갑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은 갑의 것이 되는데 있다. 이는 남녀 육체가 한 몸이 되는 데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즉 부부가 되면 남편의 몸은 더 다시는 남편의 것이 아니라 아내의 것이 되며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 되는 것이다[고전 7:4].

(83)마찬가지로 함께 살 때에는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 사는 것이니[고후 5:15] 갑의 삶은 을의 것이요 을의 삶은 갑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면[:15]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영광만을 구하게 되면 "그 속에 불의가 없는"[요 7:18] 법이다. 다시 말해 의를 행함뿐이다[요일 3:7]. 그러니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to destroy]"이라 한 것이다[:8].

(84)그러므로 누구든지 죄를 짓거나 이 세상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 스스로 구원되지 못했음을 세상에 공표함이 되는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를 따라 자기 구원을 주장한다면 자기 기만이 된다. 심판대에 이르러 비로소 속았다고 뒤늦게 이를 갈고 슬피 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회개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것으로 완전히 삶의 방향을 바꿀 일이다.

(65)고로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와의 온전하고 완숙한 삶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거나[엡 4:30] 할 때 당연히 그런 충만의 은혜에 들어갈 수 없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우리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단순한 그 사실을 아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 수 없으니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요 14:21]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86)"당신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어떤 특정 지식을 밝혀 주신다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게 만드신다는 의미이다. 모든 범죄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능력이 되는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단계적으로 자기를 나타내어 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사랑도 단계적으로 성장하여 나아감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은혜도 내 스스로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바탕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구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87)그러나 여러 번 강조하지만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 항상 모든 것의 핵심이므로, 지식면에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나타내신 그 사랑만 알아 그 사랑에 항상 감격하는 사람은, 그 사랑 하나만으로써도 절대로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할 생각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보고 전도에 힘쓰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며, 비록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말을 해도 그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아 주시는 것이다.

(88)이런 사람들은 가족을 돌보는 가사 일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이들 중에서 나온다. 비교적 시간이 남아돌아 편한 삶을 사는 이들 가운데에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왜냐면 그런 사람들은 그 풍부한 시간에 걸맞게 그에 상응한 노력을 하나님께서 당연히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노력이냐, 그 예를 우리는 피니와 함께 일한 다니엘 네쉬의 기도의 삶에서 본 것이다. 성경에서 나타낸 본으로는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다.

(89)결혼한 지 7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84년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긴 그 정성을[눅 2:36,37] 하나님께서 인정하셔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맞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한다"[딤전 5:5]고 했으니, 이 제사장으로서의 기도에 얼마나 큰 비중이 두어지는지 알 수 있다. 과부라고 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아니라고 해서 그런 기도를 아니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90)시간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그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말씀 전파 아니면 기도라는 뜻이다[행 6:4].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사 일에 종사하지 않는 한 시간이 있는 사람은 모름지기 기도의 일에 정성을 다할 일이다. 그리고 전도하는 일 외에는 세상에서 아무 할 일이 없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 이의 일을 하고자 있기 때문이다.

(91)스스로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이상 설명과 같은 반(反) 성경적인 인간의 교리를 핑계 삼고 방패를 삼는 이들은 절대로 구원될 수 없음을 얼마든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히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함께 사는 삶이니 둘이 함께 하나가 되어 살 때는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을은 갑을 위해서만 사는 구조요 체제인데 어찌 이전과 같은 자기중심의 삶이 가능하겠는가. 이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92)둘이 완전한 짝을 이루어 사는 삶을 우리 각자가 모두 동시에 사는 것이니 나와 함께 사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아버지와 하나 되심으로써] 모든 사람 각자와 그렇게 함께 사시는 것이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 모시고 함께 사는 것[요이 1:9] 곧 일상생활이 합리적 즉 이치에 맞는 예배인 것이다[롬 12:1]. 아이가 엄마 손을 꼭 붙잡고 가는 것처럼 하나님 품속에서의 매일의 삶이 곧 예배인 것이다.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와 함께 매일 사시는' 그리스도로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한 자기가 과연 믿음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하고 확증해야 마땅하다[고후 13:5].

(93)§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의 "양식"[요 4:34] 그 자체이다. "양식"은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먹는 것 자체가 생명[삶]의 낙 자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인지" 모를 정도의 낙이다. 우리가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생명 자체이므로 그렇게 살지 않고 이전처럼 나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즉 "육신대로 살 때는 죽는"[롬 8:13] 것이니 곧 멸망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하다.

(94)"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사는"[:13] 것이니 곧 성령으로 계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삶으로써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없어야[고후 5:15] 비로소 사는 것이다. "몸의 행실[the deeds of the body]"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일체의 것을 말함이다. 즉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과 같은 본능적 자기중심의 삶을 가리킴이다. 이러한 육체로서의 먹고 마시는 최고의 낙보다 더 최고의 낙이 있으니 그것은 성령 안에서의 평안과 기쁨과 의[로운 행실]이다[롬 14:17].

(95)"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17] 함이 바로 그 뜻이다. 육체의 삶의 최고 낙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만 천국의 삶 곧 영원한 영적 존재의 최고의 삶의 낙은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인 것이다. 이는 그렇게 먹고 마시는 정도의 낙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낙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낙심천만이 되어 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내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 하셨다.

(96)그리고 "내가 주는 것[평안,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14:27] 하셨다. 말로만 그렇게 해서 제자들을 위로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의 약속이신 것이다. 약속도 다른 약속이 아니라 친히 우리 각자에게 성령으로 임하실 것 즉 다시 오시는 것을 가리키심이다[:23]. 그래서 "성령 안에서의 희락과 평강과 의로운 열매"이니, 이는 아버지와 하나 되심으로써 영적으로 누리고 계시던 최고봉의 삶의 쾌락으로서 우리 역시 성령을 받아 모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됨을 인한 최고도의 삶의 낙을 누리고 있음이다.

(97)고로 언제나 이 사실을 주지시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하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왜냐면 이런 생명력 가운데에서야 능히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2:12]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가운데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이, 생명 있는 자가 그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곧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기 부인을 말함이다.

(98)구원을 이룸이 다름아닌 생명의 법질서를 지키는 것을 가리킴이니, 이는 앞에서 우리가 먹는 양식의 두 가지 측면을 설명하여 먹지 않으면 죽고 또한 먹는 것 자체가 삶의 최고 낙이라 함과 같이 생명의 법인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을 지키는 것이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율법"을 혹자는 엉뚱하게도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 자체를 두고 말함인 줄로 착각할지 모르나 성경은 명백히 "새 계명"[요 13:34]을 그리스도께서 주셨음을 밝히고 있다.

(99)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명령하고 있다[갈 6:2].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전 7:19] 했다. 요한 사도 역시 "그리스도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일 2:3,4]라고 했다. 안다고 하는 것이 거짓인즉 결국 모른다는 뜻이니 모르고서 믿고 구원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믿고[하나님의 말씀대로는 믿지 않고 사람이 가르치는 교리를 따라] 구원 받은 자로 자처하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100)주님 친히 "새 계명"을 주실 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라"[요 14:15] 하셨고,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라"[15:10] 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사는 것 즉 구원 받음의 필수 요건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킴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하신 말씀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居處)를 그와 함께 할 것이라"[요 14:23] 하심이다.

(101)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데 무슨 수로 구원 받아 영생을 누리려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그 계명을 지키고 그 말씀을 지키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요 14:21]. 여기에는 믿으면 그렇게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일절 없다. 이유는 지금 이 말씀을 믿는 이들 즉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음이 순종을 반드시 수반하는 사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 받는 믿음의 실질적인 내용이 되어 있음을 가르치심이다.

(102)그리스도 친히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신다"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피조물에게 주신 계명과 아버지 친히 아들에게 주신 계명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10:17] 하시고, "이를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다.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18] 하신 것이다. 그 계명이 어떤 것인가.

(103)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부모 자식 간의 도리가 곧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는 계명인 것이다. 아버지는 머리이시고 아들은 그 몸이시므로 둘이 하나됨의 원리이니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하는 것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둘이 하나됨의 사랑과 생명의 법칙이다. 이는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 간에 이루어진 몸과 머리 관계에서도 당연히 적용된다. 그러므로 무릇 인격성을 지니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그러하시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자기중심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이며 이 피조물 세계에서 결코 용납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104)이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하나님 친히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다. "친히 지으셨다"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생물체가 기계적으로 낳고 낳음을 입어 생육하고 증식함으로써 생겨나는 기계적 생명체가 아닌 인격성을 지니고 자유 의지를 행사하는 인간을 비롯한 영물들을 말한다. 다만 인간은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나 육체만은 그런 기계적인 생성 과정을 거쳐 나는 까닭에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105)인간의 육체 역시 이렇게 낳고 낳아짐을 통해 세상에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범죄로 인한 죽은 자가 되어 버린 결과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인간이 모태에서 생겨나는 것 자체를 모세 율법에서 부정(不淨)한 것으로 성경이 취급하고 있음을 본다. 그 이유를 성경은 다름 사실로써 설명한다. 즉 여아가 태어나면 남아가 태어나는 것보다 갑절이나 부정했던 것이다. 이 이유를 다시 성경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 2:14] 하였다.

(106)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정해놓으시고 이를 부정(不淨)하다 하실 리 없다. 이 부정은 반드시 범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부터 죄인으로 또는 죄 짓는 자로 창조하시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담의 범죄와 죽음의 결과인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롬 5:12]. 범죄하지 않았다면 영계인 에덴낙원에서 생겨나는 인간은 모두 아담이 여자와 합동으로 낳은 아들들만이었을 것이다.

(107)"아들"들이라 하는 것은 아담이 낳은 아들들이 다시 그 자식들을 생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아담이 생존하여 계속 자식들을 낳고 있는데 그 자식들이 또한 자꾸 낳게 되면 생성의 서열로 따져 일대 혼란이 생기게 된다. 아담은 에덴낙원에서 새파랗게 젊은 채 자식들을 계속 낳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아담의 범죄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면 태어난 자식들은 남녀 성별도 없었겠느냐 하겠는데, 에덴낙원에서는 자식을 낳아도 '신령한 몸의 능력'으로 낳기 때문에 산고(産苦), 해산의 진통 같은 것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우선 유념해야 한다. 현재의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자녀 생산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108)범죄로 저주를 받은 결과로, 여자는 잉태하는 고통이 크게 더해지고 수고하여 자식을 낳게 된다[창 3:16]. 우리말 번역은 "잉태하는 고통"이라 되어 있지만 영역은 "pains"[노력-NIV], "sorrow and conception[KJV]'이라 되어 있는데 "슬픔[sorrow]"은 저주 받은 결과로 생긴 것이므로 틀렸고, "자식 낳기 위한 노력" 정도가 정확한 의미다. 노력 없이 어찌 자식을 낳겠는가. "수고한다"는 것이 여기서 해산의 진통[pain]을 말한다. 노력이 크게 더해지니까 그것이 고통이 되는 것이다.

(109)다시 말해 아담의 자식들이 남녀 성별을 갖추어 있어도 자식 생산은 하지 않으니 차라리 남자[아담]와 여자[당시는 이름이 없으니 "하와"라는 이름은 범죄 후 지어진 것이므로 여자 역시 "아담"이란 이름으로 통했다]의 합작품(合作品)으로서 여자가 생기기 전의 아담[여자가 창조됨으로써 남자가 되었으니]의 육체를 닮은 무성(無性)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지어 부른 것은 여자를 다스린다는 의미였다.

(110)아담이 각종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 준 것은 그 영물들이 아담 아래 있어 아담의 다스림을 받는 위치에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 영물들 중에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없는 자가 있어야 그가 아담과 필적할 만한 존재가 되어 아담과 더불어 함께 사는 동반자[helper]가 되는데 모조리 다 이름을 지었으니 모두 아담 아래에 들 수밖에 없음이 입증되면서 비로소 여자가 창조된 것이다  이는 바꾸어 말해 여자가 없어도 아담은 얼마든지 양성 생식이 아닌 무성 생식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당시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본질이면서도 영적인 몸의 막강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의 특성으로 말하면 오늘날의 천사들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111)그러나 이 모두 지나간 일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기에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익한 일이나 단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든 영물이든 무릇 영원한 존재로 창조된 피조물은 하나님과의 부모 자식 관계에 있어 어버이로서의 자정(慈情)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대하신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피조물과 조물주 사이라고 무턱대고 하늘과 땅처럼 여기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우리로 치면 그 어느 인간 관계보다, 인간으로서의 부모 자식 관계보다 더하신 아버지와 아들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 영적 피조물과의 관계인 것이다.

(112)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천사들["각종 짐승들"-창 2:19]이나 그 전에 창조된 "그룹"이나 "스랍" 등을 가리켜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표현한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창조의 근본"[계 3:14]이시고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골 1:15] 아들과의 '부자(父子) 관계'를 이와 같이 인격성을 지닌 모든 피조물에 적용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경원시
(敬遠視)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함이다.

(113)우리의 새 창조에서도 마찬가지다. 뿐 아니라 더욱 확실한 근거를 지니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니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직접 모시고 영원히 사는 것으로서 이는 영락없는 엄마 품속의 아기의 모습인 것이다. 참고로,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그 아들들이 되어 있음과 같이 마지막 아담이실진대 우리가 마지막 아담의 아들들이 되어야 마땅하다.

(114)성경은 우리[여기서 "우리"라 함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므로 구원된 이들을 가리킴]가 아담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다. 아담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산 자인[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서 죽은 자의 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의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그러한 아담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제 세상이 끝나고 마지막 심판 후 영원세계에 들어가면 "심판의 부활"[요 5:29]이든 생명의 부활이든 일단 영적인 몸이 되면 성별이든 육체의 부자 관계든 모두가 사라지게 된다.

(115)단지 서로를 인식하게 된다면 전생(前生,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가리켜 말하는 것임)에서 보모 자식 관계를 이루어 지냈다는 그 정도로 알고 있을 정도만 될 것이다. 왜냐면 처음부터 인간의 부모 자식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아버지 아들 관계를 가르치고 상징하는 의미에서 그러했기 때문이다. 짐승들의 새끼 사랑도 그런 의미가 반영된 것으로서 보아도 크게 하자는 없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서만 부자 관계가 형성되니 곧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시는 이시라"[마 23:9]고 가르치신 것이다.

(116)하나님의 어버이되심과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미 확증되어[롬 5:8] 있는 터다. 친히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그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심과 같다. "친구"에다 "어버이[아버지 또는 어머니]"를 대입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크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자식 위해 내어 주는 것 이상은 없다. 바로 그런 사랑으로 자식들을 대하기 때문에 부모 사랑이라 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항상 하나로 계시므로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117)그러면 앞서 언급한 대로 마지막 아담이시면 우리가 마지막 아담의 아들이 되는가 하겠는데, 그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사람이 비록 영적인 존재이나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많은 인간들이 생겨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영적인 존재라면 하나님과 부자 관계를 이루는데, 왜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 그리고 사람으로서의 부자 관계가 되니 이중으로 맺는 부자 관계가 아닌가 할 것이다.

(118)결국 그렇게 되어도 즉 에덴낙원에서 많은 인간들 즉 아담의 닮은꼴이 생겨났다 해도 반드시 마지막 심판대의 대상이 되게 되어 있다. 왜냐면 영물들처럼 악과 의로 분류될 것이기애 그러하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처럼 범죄하면 영원한 멸망에, 거룩한 천사들처럼 의를 행하면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음이다. 그러면 그 생명의 세계에서 하나님과의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 그 외에는 그 어떤 부자 관계도 형성되지 못한다. 원래 부자 관계는 앞서의 설명대로 생명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생명 있는 산 자로 만드셨지 죽은 자 또는 죄를 짓는 자로 만드시지는 않은 것이다.

(119)이 생명 세계에서의 부자 관계는 바꾸어 표현하면 지금까지 강조해서 설명한 머리와 몸의 관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 이후의 영원한 생명의 세계와 죽음[멸망]의 세계와의 대칭 구조에서 부자 관계는 생명의 세계에서 하나님과만 상대해서 이루어지는 관계이므로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았다 해서 아담의 아들이 되는 등의 의미는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명과 죽음이 가름되는 것과 같다.

(120)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원래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신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으므로 현재 비록 사람이시기는 하나 창조주로서의 의미 그대로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와 부자 관계를 형성함에는 아무 무리가 없다 할 것이다. 이사야 예언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시라 함도 여기에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태초로부터 아버지와 아들 둘이 하나로 계신다.

(121)현재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임하여 나와 함께 사셔도 아버지와 함께 하나되신 모습으로 그렇게 하심이다. 따라서 아버지 친히 나를 위해 그 극도의 고통의 죽음을 맛보시는 등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모든 의미를 아들과 공유(共有)하심이다. 따라서 내가 그리스도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아버지]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원래 첫 사람 아담 역시 앞서의 설명대로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음과 같다.

(122)이제 나와 함께 사시는 즉 나를 품고 계시는 아버지[어버이]로서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나타나 계시는 형상은 어떠하신가. 인간으로서 이팔청춘(二八靑春)이라 할 가장 젊은 가장 완숙한 아름다움의 모습이시다. 물론 찬란한 영광에 싸여 빛나는 몸이시기에[행 22:11] 이 자연계에 속한 우리 육체가 도저히 감당치 못한다는 사실만 제외하고는 그렇다는 얘기다. 내가 현재 아무리 노쇠하여 쭈그렁 바가지가 되어 있어도 나의 아버지[어버이]의 모습은 그러하시다.

(123)늙는다는 것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죽은 자"[마 8:22]로서의 결과물인 것이다. 하나님을 묘사한다고 하여 백발 노인으로 그려 놓는 화가의 그림은 성경에 대해서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그러한 그림을 소위 성화(聖畵)라고 하여 교회 당국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숱한 신학교, 신학자들의 그 수 천년 전통과 관록이 무색할 정도로 성경에 대한 완전한 무지몽매함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124)품속에 품은 아기에게 그 엄마가 그 이상 가까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러하시어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할 것이다"[사 58:9] 하시고, 뿐 아니라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다"[65:24] 하셨지만, 절대로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세상의 부모 자식 관계와의 차이라 할 것이다.

(e)강제하거나 간섭해서는 교육적 효과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철저한 것을 목적하시고 바라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 역시 온전하라 하심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하신 대로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그대로 하기를 원하시고[왜냐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충분히 주신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니할 때 아무리 자상스러우신 하나님이시나 등을 돌리신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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