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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31
글쓴이 김일동 조회 366

메시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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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마심은 생명의 법칙

§  "배(腹部)는 식물(食物)을 위하고 식물은 배를 위하나 하나님께서 이것 저것 다 폐하실 것"[고전 6:13]이라 했고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내릴 것이다"[요 7:38] 하셨고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 했으니, 먹고 마심으로써 육체의 배를 만족시켜 그 배에서 육체의 생기와 활기를 충분히 만들어 그래서 즐겁고[기쁘고] 평안한[행복하고 만족한] 것과 같이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 곧 생명의 법칙대로 사는 삶이 그러하며, 자연계에 속한 먹고 마심은 한시적이어서 이 세상만으로 그치나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시는"[고전 10:3,4] 것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gift]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어도"[히 6:4] 그럼에도 타락하는 경우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으니 이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다'[6:6]. 교회를 상징하는 모세 인도하의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로 말하면 세례도 받고 성령도 받는 등의 모든 기본 과정을 다 거치고도 "그러나 저들의 다수[소수 또는 일부가 아니라 "다수"이다]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고전 10:5]는 경고와 같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영역인 이 '먹고 마시는 것'과 '배[stomach]'를 다 폐하신다고 하셨으니 이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이 종료되고 영원하고 완벽한 즉 애초 인간을 창조하신 그대로의 인간에게 걸맞는 영적[신령한] 몸의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배(腹)에서 생명수 강들[the rivers of living water]이 흘러내린다 하셨고 이 바로 성령을 가리키심이라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되심 곧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기"[히 2:14]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이 원래 영원히 사는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면 아담 때문에 죄 그리고 죽음이 비로소 오게 되었음을 성경이 명백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5:12]. 죽지 않아야 할 인간이 죽음에 이르렀고 그것은 마귀[의 거짓말]를 추종했기에 그리 되었은즉 죽음의 권세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쥐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권세를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창조 당시 죽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피조물[인간을 비롯해]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즉 대립 개념에서 그 자유 의지로 말미암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결과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자가 없지마는 죽음과 연계되는 일을 택했기[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인간 원수는 사망이라"[고전 15:26] 하는 것이다. 죽음과 연계되는 것 즉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물론 죄다.

생명이, 한 몸 구조에서 몸과 머리 관계로 살아 절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된 이웃을 위함에 있는데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자기중심이 되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모두의 머리 역할을 할 터이니 너희는 나의 지시대로 하여 상호간 위하는 삶을 살라" 하시는 하나님의 머리로서의 지시에 처음부터 불응하고 나선 것이 "처음부터 범죄하는"[요일 3:8]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드러낸 바 곧 죄인 것이다.

아담이 이 뒤를 따랐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이 마귀를 없앤다 하심은 친히 그 죽음을 죽으신 다음에 그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고로 죽음의 무효화이다. 다시 말해 이 죽음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됨으로 인하여 생기는 모든 결과를 말하는데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 애초 아담이 지녔던 그 신령한 육체를 회복함이다. 그래서 부활하실 때 나타내신 몸이 신령한 몸이셨던 것이다.

이 부활을 믿는 제자들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에 드러내시지 않은 것은, 믿는 제자들에게 나타내실 때는 이미 하나님이신 줄 믿고 있는 터이므로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이 강제가 되지 않고 그 믿은 대로 이루어진 결과일 뿐이나 아직 믿지 않는 세상에게는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고 간섭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다시 세상에 오실 때는 이미 믿고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되어 그 이후로 구원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 된다.

따라서 이제 비로소 의인이든 악인이든 모두 신령한 몸을 입게 되고 의인은 생명의 부활, 악인은 심판의 부활에 이르게 되니[요 5:29] 악령들이 신령한 몸 그대로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는 것과 같은 양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에 속해 있던 인생들이 모두 신령한 육체로 변환되어 애초 아담 때와 같은 상태로 복귀되니 사망의 권세를 쥐고 인생들을 요리하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존재가 그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바로 그런 불가항력적인 요인으로 인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그래서 인간들[그리스도 안에 있는]을 시험하는 자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그 역할이 종료됨과 더불어 그 존재마저도 이전 상태 즉 그 죄로 인하여 인간들처럼 영원 멸망[불 못]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종결됨이다. 그리스도께서 단지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그렇게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이 마치면서부터 그리 되는 것이니 그 때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모든 활동이 끝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때 하나님 편에서 보면 마땅히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의 숫자는 다 채워지는 것이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 보면 그런 충족된 숫자 중에서 하나라도 이탈하는 자가 생기면 성공률이 높다고 인식해 왔는데 그 꿈이 모두 좌절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이 인간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은 사망[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죽음]의 권세를 소유했기 때문이고 이렇게 된 이유는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따름으로써 죽게 된[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되어 버린] 까닭이다.

이제 모든 인간이 과거 첫 사람 아담 때처럼 신령한 몸이 되니[의인이든 악인이든 모은 인간이]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전 상태 즉 아담의 다스림을 받던 때로 복귀되니 '인간 위에 군림하던 마귀'라는 존재로서의 그간의 모든 범죄로 인한 부작용은 사라지게 됨이다. 이제는 영물들 가운데 스스로의 범죄로 자기 운명을 파멸로 몰아넣은 일개 피조물로 원상 복귀된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불 못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

이렇게 모든 인간이 원래의 신령한 몸[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기 전 지녔던]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은 머리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위해 그와 같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첫 시작을 이루었고 그 후에 그를 따르고 순종하는 이들의 자기 부인으로 인하여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음으로써 스스로 부활한[빌 3:10,11] 이들의 숫자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대로 차질없이 채워져 마지막 아담의 온전한 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스도 통치 기간 말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무저갱에서 놓여 나와 사람들을 미혹할 때에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인간들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요한 계시록의 예언처럼 이미 알려진 것이나 그 중에 단 하나도 하나님께서 구원되기로 즉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아시고 있던 이는 단 하나도 그 반역의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그 뜻이 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중에 단 하나라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이탈하는 자가 생기면 애초의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므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비록 천년 아닌 만년이 가더라도 질질 끌어가고 좀처럼 종료가 되지 않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가고 하나님의 미리 아신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인해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은 그렇게 예정대로 종료됨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원리원칙 가운데 모든 것을 처리하시나 단지 모든 상황을 미리 아시고 차질없이 진행시키신다는 뜻이 된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와 같이 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딴에는 성공할 수 있다고 지금까지 자기 목적 즉 조금이라도 마지막 심판을 늦추어 그 후 사태 진전을 따라 자기의 살 길을 모색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리 원리원칙대로 하시더라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내다 보시는 혜안(慧眼)에는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최종적으로 깨닫고 뒤늦게야 자기의 어리석음을 자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일개 피조물이 감히 조물주 하나님과 겨룬다는 무슨 그런 뜻이 아니라 참새 한 마리도 죽고 사는 것을 낱낱이 챙기시고[눅 12:6]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세시고 있다는[:7] 말씀과 같이 그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일개 피조물 더군다나 스스로 악한 자가 되어 있지만 그와 다룰 때 원리원칙을 따라 공명정대하게 공평공정하게 모든 것을 처리하신다는 증거인 것이다. 이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처리하시는 과정을 통해서도 이 사실은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런 원칙을 무서우리만치 엄정 엄격하게 따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죽으시는 정도까지라는 것으로써 이미 확증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이를 통해서도 확인하게 된다는 그 뜻이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이 만일 인간이 지어낸 가상(假想)의 존재라면 그런 거짓말로써 고도의 지성을 발휘하는 인간을 속일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함은 너무나 철없는 짓이 된다. 왜냐면 그런 전지전능하고 무소불위의 창조신이라면 절대로 그 피조물로서의 우리 인간들이 마음 놓은 조건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경우에 가서 그 하나님의 마음이 달라져 모든 인간을 하루 아침에 없애치울지 장담할 수 없는 터에 감히 그런 잊지도 않은 사실을 지어내겠는가.

왜냐면 그 한 가지만 생각을 해보더라도 하나님을 만들어내어 우리 인간 생활에 하나도 덕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음을 모두가 다 잘 아는 사실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불안하도록 만드는 것을 일부러 지어내어 믿으라고 할 필요가 없음을 누구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요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거짓말로 지어내어 무슨 이익을 보자는 것인가. 거짓말도 필요해서 만드는 법이다.

그러면 이 경우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이런 거창한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라고 하는 성경[왜냐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성경이 줄곧 주장하고 있으니까]의 내용을 보자. 모든 악을 단죄한다. 거짓말로 당연히 거기 포함된다. 이렇게 최고도의 도덕과 진실과 사실만을 주장하는 그 내용과는 성경이 거짓말이라고 할 때의 그것과는 전연 동떨어지고 하늘과 땅 차이로 서로 어울리지를 않는다. 거짓말이 그런 정도의 진실 같은 거짓말은 도저히 지어낼 수 없다는 결론이다.

거짓말은커녕 사사로운 욕심 자체를 엄격히 단죄한다. 거짓말쟁이가 이런 종류의 거짓말을 마음대로 지어낼 수 있을까? 거짓말을 하는 자기 자신을 단죄하면서까지 거짓말을 하는 그런 최고 천재만이 할 수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로서의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거짓말이고 사람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났다고 했을 때 불안하기는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질서를 따라 움직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자가 있어 그 창조가 변덕이 나서 어느 때든 그 지은 만물을 확 뜯어 없애치우고 새로 만든다고 해도 불안하지만, 우연히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한다면 그런 생각 자체가 우리 자신이 생각해도 미련하고 우둔하기가 짝이 없음을 스스로 판단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우연에는 필연이 없고 필연이 없으면 법질서 자체가 용납이 안된다. 법과 질서는 필연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연은 한 마디로 뒤죽박죽임을 말한다. 이리도 될 수 있고 저리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저렇게는 안되고 반드시 이렇게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니고 필연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필연에는 그 필연적인 것이 처음부터 나타나도록 처음부터 사전에 설계되고 고안된 것뿐임을 자체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 경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생활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이고 헤프고 어설프고 미련한 것인지 감기 감도 잡지 못할 정도임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자기 딴에는 최고 지성임을 자랑하지만 실제는 지독하게도 바보스러움의 일면을 보게 된다. 이런 모든 것이 그 배후에 막강한 능력을 발휘하는 악한 영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작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말하는 성경이 진실일 수밖에 없는데다 그 진실성에 못을 박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우리 위한 죽으심이라는 대목이다. 사람이 지어낸 종교라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 위해 죽었다고 설정해놓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가 지어낸 하나님의 위신과 존엄에도 걸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왕 거짓말로 하나님을 만들어내었으면 그 하나님의 품위를 지키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도록 하고 그래서 인간이 구원이 된다고 속이다니, 그런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 판단해도 설득력이 없다. 단지 고도의 선행을 행해야 구원된다 하거나 또는 그런 선행이 현실상 힘들 바에야 다른 그 무엇으로 대체해 놓아도 좋은 것이다. 인간을 속일 바에야 그렇다는 얘기다. 불교 등 현재의 세상 종교가 그러하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도덕율의 최고봉이라고 할 자기 부인을 강조한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스스로 남위해 산다니 이 이상 가는 선은 없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남 위해 바친다니[요일 3:16] 인간 세상에 이보다 더한 윤리 도덕은 없다. 거짓말로서 꾸며낸 성경은 그렇게 가르친다고 명시해놓고 실제는 이를 지킬 수 없다고 가르치는 그런 거짓말쟁이도 세상에 있는가. 현재의 소위 기독교가 그렇다. "그리스도가 인간들 위해 죽었다는 특정 사실을 사실이라고 인정만 해라, 그러면 영생한다" 식이다.

성경대로 자기를 부인해야 구원된다는 것은 천주교 개신교 그 어느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보아도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는다. 희한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모든 것이 오직 한 가지 진실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이다. 그것은, 성경이 진실이고 그리고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엄존(儼存)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고는 그렇게 모든 일들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이 계시되 그래서 만유를 창조하셨으나 철저히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시고 그 지으신 피조물을 마치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십가가 죽으심인 것이다. 그러면 이로써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체(同一體)로 보시는 것이 확증되었으므로 이 피조물을 그냥 없애치우시는 일을 절대로 하시지 않는다는 확고한 증거를 모든 피조물에게 주신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므로 한번 만드신 이 우주는 영원한 것이다. 당신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이제는 그 피조물들과 함께 영원하신 것이다. 전에는 피조물 없이 영원하셨으나 이제는 그 피조물과 함께 영원히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만유를 회복하신다"[행 3:21] 한 것이다. 그 피조물이 일시적으로 망가졌으나 이를 그냥 버리시지 않고 끝까지 오래 참으심으로 이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니, 왜냐면 이제는 그 피조물과 더불어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두 한 짝이 못쓰게 되었다고 이를 버리고 새 것으로 사 신으려 하지 않고 이를 천신만고 끝에 정성껏 수선하여 오히려 이전 것보다 더 좋은 구두로 만들어 신는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랑과 생명의 영원한 법질서요 삼위일체의 원리의 뿐이다. 서로 다르지만 영원히 병존(竝存)하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하나이지 분리될 수 없다. 분리될 수 있다면야 처음부터 하나이지 않았을 것이다. 둘이 하나됨 곧 불가분성, 여기에 사람 사는 영원한 삶의 도리가 기초해 있으니 영원무궁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몸과 머리의 한 몸됨의 구조요 생명의 영광스러운 체제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평안과 기쁨에 연연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그래서 아직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의 먹고 마시는 낙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평안과 의로운 삶"[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올바른 삶]에 있는 것이다. 비록 자연계에 속하지만 이미 벌써 영계에 속한 자유인으로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음이다.

영적인 세계 그 인간 본향(本鄕)에서 전개되는 삶의 맛을 여기 이 세상에서부터 미리 맛을 들여가는 것이다. 즉 내 배[腹]에 흐르는 생명수 강이니 강은 마를 날이 없다. 그나마도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서의 "강들[rivers]"이니 영원히 다함이 없는 그 풍성함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런 육체 가운데 있어 우리가 고난의 표적[이 모두 목적 의식이 뚜렷한 것이니 곧 사람들을 살려내는 일에는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이다]이 되어 있으나 성령 안에서의 기쁨과 평안은 넘치는 것이므로 참으로 세상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진귀한 것으로서 하늘의 것이다[요 14:27].

이것을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이 세상에서도 누리고 있는 것이며 하늘 나라[영계]에서는 본격적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는 말 그대로 우리의 구원이시니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에서 벗어나 혹은 떨어져 나가 죽음 가운데 있다가 이제 생명의 원상태로 돌려놓아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말함이고, 애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목적하시고 뜻 두신 원래의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그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와 있음이다. 원래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담의 죽음으로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제 새롭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 회복된 것이 그리스도와 나와의 하나 관계이다. 그 원래의 상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함께 인간 개개인 각자[동시에 '우리'로서의 전체]가 함께 사는 것이었으나, 아담은 이 법칙을 어기고 벗어남으로써 죽은 자가 되어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였던 것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구된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同行)하였다" 한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라는 터전 위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본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같은 믿음[아브라함의 믿음, 노아의 믿음, 욥의 믿음, 오늘날의 우리의 믿음 등]이므로 그런 믿음이면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므로 그런 은혜를 앞당겨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동행한다"[to walk with]는 것은 말 그대로 함께 걸어간다는 것이니 사람이 움직일 때 두 다리로 걸어야 하는 것으로서 이는 바로 생활 자체를 말함이다. 그래서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하였고 아브라함에게도 "내 앞에서 행하라"[Walk before Me.] 하셨다. 그러면 에녹이나 아브라함이나 노아나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살았으니 그들은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되었는가 하면 위의 지적처럼 그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처음 창조 때 그렇게 하나님과 애초부터 살게 되어 있었던 그 상태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재개될 것을 미리 나타내 보여 우리를 사전(事前)에[그리스도 오시기 전에 그리스도 오신 후의 우리 삶을 미리 보이심으로써] 교육하신 것이다.

애초 창조하실 때의 모든 것은 "심히 좋은"["very good"-창 1:31] 것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 하나님께서 이와 달리 만드실 수는 없는 것이다. 완벽하게 아름답고 청순하게 더 이상 손볼 필요 없이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아담]이나 영물(靈物)이나 그 자유 의지로써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그 모든 "좋은"[good] 것의 상대적인 개념 즉 "나쁜"[evil] 것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긴 것이 또한 "거룩함"이라는 개념이다. 왜냐면 그와 같이 좋지 않은 것을 버려두고 어리석게도 그 반대의 것을 따라 행하니 그것은 하나님 지으신 온전하고 완벽한 것에 비하면 당연히 더럽고 추하고 부정하고 흉물스럽고 나쁜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의 고유의 영역이 아니니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하신 대로 우리가 마땅히 거룩해야 다시 말해 애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이 창조 이후 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이시다. 그래서 변하지 않은 즉 범죄하지 않은 영물들은 "거룩한 천사들"이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처음부터 거룩하시고 우리는 상대적으로 죄인이요 죽은 자로 남게 되어 있었는데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 거룩함 가운데로 복귀됨이다[롬 6:22]. 즉 "거룩함"은 현재 인생들의 죄인 곧 죽은 자로서의 상태를 지적하고 자각시키기 위한 상대적 개념이다.

"선한 선생님"이라 그리스도를 부르며 찾아 온 부자 청년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 하신 말씀도 바로 이러한 의미의 "거룩함"을 가리키신 것이다.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찾아 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도 얼마든지 [자기의 행위로써] 선하게 될 수 있다고 믿어 그렇게 "선한 선생님" 하고 불렀었다. 그러므로 이 사실부터 시정해 주신 것이다.

왜냐면 자기가 죄인이 되어 있고 죽은 자가 되어 있음을 믿지 않는 한 아무나 그리스도께 올 수 없고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제각기 하나님과 함께 아주 자연스럽게 사는 데, 별도로 장소를 정해서 그리고 때를 정해서 그 때 그 장소 그런 특정 의식에 의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넌센스 중의 넌센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활 자체가 예배[service, to serve 곧 하나님 섬김]라 하는 것이다.

둘이 하나되어 함께 사는 데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오로지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 있어 나는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아[고후 5:15]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생활로만 만족하고 "모이기를 폐하는"[히 10:25]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우리를 개별적으로 구원하시되 처음 창조 때부터 한 몸 체제로서 살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개인에게는 그런 각기 지체된 역할을 하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이는 상호간 섬겨 보완, 보좌하도록 하려 하심이다.

그래서 모여 그런 지체 역할을 함으로써 상호간 서로 도와 한 몸으로서 자라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한 지체인데 지체 혼자로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 모든 지체가 합동으로 하나되어 한 몸을 이루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를 경고하여 그 날[그리스도의 재림 혹은 이 세상 종말]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 함은 당연하다[히 10:25]. 이런 경고를 하면서 이렇게 모이기를 힘쓰지 않을 때 심각한 범죄 상태에 이른다는 의미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물이 없다"[:26]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사실을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것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서 법질서라는 말을 붙여 그렇지 법이라 할 것도 계명 또는 율법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것도 사실상 없는 것이다. 토닥거리며 엄마 손을 잡고 가는 어린 아이가 엄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가리켜, 아기는 엄마를 위하고 엄마는 아기를 위한다는 법질서 개념에서 설명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기들이다. 만유(萬有)를 창조하신 아들께서도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다"[요 1:18] 했으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아기가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과 동행함[walking with God]이다.

아기가 엄마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고 아기가 혼자 어떻게 살겠는가. 또 엄마는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기 스스로는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아이가 엄마에게 무엇이든 물어보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도 그와 같이 나와 항상 엄마처럼 함께 붙어 다니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을 두고 어찌하여 별스럽다고 생각할 것인가.

우리가 도대체 아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자연계에 속한 육체를 하고 있으면서도 영계에 속한 영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악령들을 감히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상 수단이라도 써야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이런 최소한의 방법도 마다할 것인가. 경직된 자세와 생각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일이다. 그래서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다.

§  소위 에녹서[the book of Enoch]에 보니 노아가 인간의 범죄로 이 지구가 멸망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자기 증조부인 에녹"에게 호소하는 대목이 있었다[65장]. 이것이 바로 진실을 말하듯이 하면서도 사람을 속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전형적인 수법인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어느 인간[육친을 포함해서]보다 가까우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제한 채 그 누구를 가까이 하든 그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이요 속임수에서 오는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그 무슨 그럴 듯한 말을 해도[성경과 같은 내용으로 보이는]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속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위계(僞計)인 것이다.

'마리아'나 소위 성인들에게 기구(祈求)하는 것과 같은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계략인 것이다. 현재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 이상으로는 그 무엇에도 끌리지 말 것이다. 요즘 발굴되었다는 소위 "사해(死海) 사본[Dead sea Scroll]"이든 그 무엇이든 그런 따위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는 대로의 성경을 읽고 믿은 많은 사람이 이미 구원에 이른 것이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음을 그와 같이 훌륭히 입증되고 있다.

이런 속임수만 아니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별의별 그물과 함정과 덫을 쳐놓고 있다. 예를 또 하나 든다면, 우리가 예수님이라 하는데 반해 영어를 모국으로 하는 이들은 "지저스[Jesus]"라 하는데 이를 해석하여 말하기를 "Hail, Zeus[제우스 신(神), 만세]"라는 뜻이라고 하면서 그런 이름을 불러서는 안되고 히브리 발음대로 불러야 구원된다고 주장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는 구절을 들면서 그런 주장을 하는데, "이름"이라고 하면 반드시 그 이름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을 가리키는 것인 줄 누가 모르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공격은 이다지도 집요하다. 우리 역시 못지 않는 끈질김과 집요함으로 우리 믿음을 가꾸어 나갈 일이다. 하나님의 경고 말씀과 구원의 말씀은 원래부터가 그 "세미한 소리"[왕상 19:12]가 특징이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아니한다"[:11]. 그 말씀으로서의 한 권의 책[성경]을 통해, 그리고 가냘픈 소리로서의 양심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따라서 "미세한 소리"이시기에 사람들은 여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나 사실은 이것이 모든 진실의 특징이라 해도 좋다.

왜냐면 생명의 진실은 사랑이 그 중심이기에 사랑은 절대로 강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임이 또한 그 특징이다. 따라서 성경을 따라 상식적으로 이지적으로 판단하는 것 그리고 양심을 따라 행하는 것 그 이상으로 요구하시지 않는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능력을 따라 모든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게 될 때에는 요란한 꽹과리처럼 실로 현란할 것이다. "세미한 소리"에 익숙한 이들은 이런 것에는 오히려 경각심만 유발해 줄 따름이다.

마치 모세의 인도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동안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통한 은혜를 그토록 많이 받았음에도 이에 유념치 않다가 졸지에 그 앞에 그들 스스로 "메뚜기 같다"고 표현한 대로 산악 같은 거구에다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 후손 곧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고 대경실색, 간담이 녹아 내려 하나님의 능력이고 자비고 은혜고 모두 송두리째 잊어 버리고 울고 불고 하다가 결국 버림을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음과 같은 비극을 연출하게 될 것이다.

그 "네피림"[창 6:4]이 얼마만큼 거인들인지는 오늘날 아시아, 유럽, 아메리까 등 세계 곳곳에서 발굴되는 보통 사람의 열 배 이상은 족히 되고도 남을 유골들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는 갈렙 같고 여호수아 같은[민 14:6] 사람만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에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는 그 얘기다. 차분한 마음으로 항상 "세미한 소리" 듣기에 스스로를 숙달시킬 일이다.

양심의 소리는 원래 강압적이지는 않다. 세미한 소리이건만 확실하고 엄정하므로 이 양심의 준열한 책망에 극성스럽게 의기양양하게 또는 살기등등하게 아우성 치던 무리들이 쥐 죽은 듯 조용히 물러나게 된 것이고[요 8:9],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도 그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압적으로 하여 거기 주눅들어 피동적으로 따라서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사랑과는 너무가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해야 하겠기에 남이 하지 않아도 하고 올바르기 때문에 남이 하지 말라 해도 스스로 행하고 선한 일이기 때문에 자진 자발적으로 주인 의식으로 하는 데에는 "세미한 소리"로서 충분한 것이다. "세미한 소리"는 바로 이런 것을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한 때만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일상생활임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인간을 찾으시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인생을 부르신 것을 보면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전 1:26-29]. 또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는 것이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많지 않다" 했고 하나님의 의지가 또한 그러하시다 하니, 그런 것을 좋아하는 이들은 예수님 믿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세상을 사랑하고서는 구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과는 아예 등지고, 오직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건지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전도 상대도 그런 사람 즉 없는 이들, 천한 이들, 약한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접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게 된다.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경고만 해도 성경에 숱하지만 주님 친히 말씀하신 것도 우선 3가지만 들어도 아래와 같다. "나는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눅 13:23-30] 하셨고,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이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이라야 들어갈 것이다...'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마 7:21-23] 하셨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사람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또 왼편에 있는 이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다...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마 25:31-46] 하심도 마찬가지다.

이상 세 가지 경우 모두 "믿음" 여부, "믿음' 유무에 있지 않고 "행함"에 좌우되고 있음을 밝히심이 그 특징이다. 왜냐면 모두가 다 "믿은"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성경에 말씀하시는 바 "하나님의 집 심판"(벧전 4:17)이다. 그 상대가 불신자이든 "하나님 집"이든 심판 받는 사람들은 불신자와 같은 운명으로서 차이가 없다. 그런데 왜 이같은 내용의 경고를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듣기 어려운가. 모두 "은혜로 얻는 구원"에 대한 잘못된 해석 때문이다.

이런 내용으로 설교하다가는 "율법주의자"로 따돌림을 받을 것이므로 세상에서 따돌림 받는 것이 두려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제대로 경고하지 않는 이들에게 화가 있다. 그런 내용의 설교만 듣고 멸망하게 될 그들의 피 값을 어찌하려는가[행 20:26,27/딤전 4:16]. '믿은' 다음 즉 '구원' 얻은 다음의 '행위'는 <믿음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의한 '홀리기 작전'에 휘말려 들었다는 오직 그것 외에 달리 생각할 것이 없다.

믿으면 당연히 그에 따른 행위가 나오는 법이요 그런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이해하고 남을 일이다. 그런 것이 어찌하여 구원 얻는 믿음에 들어와서는 딴판으로 해석되고 '억지 설명'이 되고 있는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간사한 속임수에 말려든 결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믿는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달려 있다는 자체가 놀라움의 대상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알고도 남을 수 있는 사항을 일부러 그 의미를 비틀고 꼬아 '신비한' 것으로 둔갑시켜 놓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술수다.

성경은 상식대로 읽도록 씌어진 글이다. 가장 평범한 말로써 기록되도록 하여 누구나 읽고 깨닫기 좋도록 성령께서 명령하시고 감동시키심으로써 작성된 글이다. 상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하여 어렵게 읽으려고 성경에 접근하는 그 누구든지 하나님은 내치시고 받아들이시지 않는다. 단 예언의 부분만은 앞으로 될 일을 말씀하심이므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나, 그러나 그런 부분이라면 대개 적 그리스도 이후의 그리스도 통치의 천년 기간에 해당되므로 우리가 이를 가려 내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필자 역시 성경을 상식적으로 읽은 결과다. "신학"이라는 편견과 선입관의 색안경을 끼고 읽지 않았다. 성경에 "간다"는 말씀은 "간다"는 뜻 그대로 이해하고 읽은 것뿐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도 자기를 부인하는 것 이상으로 달리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왜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이유를 알려고 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찾고 구하고 두드려서 성경을 읽은 결과가 지금의 '여러 가지 결론의 각종 보화(寶貨)를 얻는 문'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입은 것이다. 삼위일체의 원리를 입증하는 3운법칙의 구조 역시 그 열매일 뿐이다.

그리고 이상 말씀에서, 영생에 들어가는 "의인"들이 "저희들은 그렇게 주님께 해드리지 못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들의 겸손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함이다. 그러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는 것과 같은 경우 자기의 선행을 의식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단지 말씀대로 생활해 온 것과의 차이다. 앞의 경우에서처럼 "나는 주님을 섬겼다"고 역설하는 이들은 전자에 속한다. "나는 그런 일이 없다" 하는 사람들은 후자에 속한다.

후자에 속한 사람은 항상 더 잘 하지 못한데 대한 아쉬움만 남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피력한 것뿐이다. 과거에 의인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았어도 현재 그 마음이 이전같지 아니하여 악을 행하고 그 믿음을 따라 살지 아니할 때, 과거의 그 빛을 발하던 의인으로서의 모범적인 삶과 행위가 모두 공(空)으로 돌아감을 경고하시는 말씀이시다(겔 3:21/18:24/33:18). 전자의 경우, 바로 그런 업적과 공적 등을 의식하여 바로 그 때문에 구원 받을 줄 착각하고 있으니 그런 것이 "율법행위"다.

내가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봉사하고 주님을 섬기고 했으니 구원에 관한 한 얼마든지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그런 마음 상태다. 그러니 그런 "행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후자와는 반대다. 현재 오늘 자기가 교만해져,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마음이 작동하여, 주님의 끊임없는 경고마저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정작 의식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교만"을 경고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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