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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32
글쓴이 김일동 조회 429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하셨으니 실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일이다. 바울 같이 교회에 본이 되고 믿음 좋은 사람도 그 육체에 가시를 주실 정도로 그런 나태와 교만해짐을 경계하신 것이 아닌가[고후 12:7]. 성경에 경고하는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피차 돌아보아 죄로 강팍하게 됨을 면하라"(히 3:13)고 한 그대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벧전 1:17-"no respecter of persons"), 즉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고 엄정한 잣대로 공명정대로 공정공평하게 원리원칙대로 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사정을 보아 주는 일이 없으시다. 죄를 짓고 교만해지면 가차없이 버리실 것이다. 바울이 그런 은혜를 입은 것은 그 스스로 믿음을 버린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종교 행위에 충실함에 있지 않고 위의 경고 말씀에서 보듯이 행함 곧 그 생활의 실천에서 나타남을 명심할 일이다. 후자의 경우 즉 "나는 그런 저런 선행으로 주님을 특별히 대접해 드린 적이 없다"고 하는 이들은 믿음의 생활화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이니, 선행을 모두 의식하면서 생활해가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이 당연히 할 일이라고 여겨 마땅히 사는 방법인 줄 알고 살아 왔을 뿐이다. 바로 이와 같이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기 선행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행함"이라고 해서 오해하지 말 것이니, 심판대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그토록 철저히 속인 사람들은 "나는 무엇 무엇을 했다"는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믿음으로써만 구원 얻는다는 그들의 주장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암암리에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또는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는] 자가당착이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으로 명실상부하게 나가려면 생활화가 되어야 하는데 거꾸로 종교화하다보니 그렇게 된다.

따라서 그 행함의 기준이 '현재'가 아니라 '과거'요 '사랑으로 역사(役事)하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행위'로 나는 '자랑'이니, '믿음의 결과로서 드러나는 행위'로서의 그 주안점이 현재 주님께 대한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자랑하고 의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에 있는 것이다. 즉 생활이 아니라 종교로 착각하여 종교행위를 성취했다는 자긍심이다.

사랑은 언제나 이 시간 현재이지 과거의 한 때가 아니다. 과거의 한 시절에 머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변명이요 속임수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임이다. 그러나 사랑의 상대방은 그 거짓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게 마련이다. 주님의 심판이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율법주의'로 구원 얻으려는 양상(樣相)이고 망상이다. 율법주의는 그 누구보다 배격하고 은혜로 믿음으로 값없이 거저 얻는 구원을 누구보다 강조하고 옹호하지만, 실제 그 결과는 그런 율법주의로 자기도 모르게 빠져 버린 것이다.

내가 헌금도 많이 하고 교회당 짓는 데에 공로가 많았고 구제도 많이 하였고 전도도 많이 하여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을 믿게 했고 특별한 은혜를 받아 계시 받은 것도 많고 지식도 많다는 등등이 구원의 핵심 요소가 되지 아니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그렇게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직 지금 현재 이 시간 믿느냐, 즉 사랑하느냐 않느냐 그 여부다. 형제라고 인식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주님 모시듯 하느냐의 여부다. 사랑의 종 노릇인가의 여부인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애초에 가졌던 믿음을 배반하고 저버리고 그 믿음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성경은 누누이 이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지만 자기 도취에 빠져 이 경고의 말씀을 신경쓰지 않은 탓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강 건너 불 보듯 자기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태평하게 지내온 것이거나 아니면 양심의 가책으로 성령의 책망은 수없이 받았으나 차일피일 그 회개를 미루어 온 까닭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바울이 경고한 것과 같이 뒤에 한 일 즉 과거는 잊어 버리고 오직 이 시점 내 앞에 있는 푯대만 향하여 달려가는[빌 3:13] 자세이다. 곧 충실하고 꾸준한 생활화[말씀의]이니 비록 선행으로 치면 전자에 속한 이들보다 많을 수가 있어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겉모양에 치중하고 그것을 중시하고 사소한 것은 안중에도 없을 때 그것이 육신이고 그런 것이 바로 자랑을 잉태시키는 '율법행위로 구원 얻으려 함'이다. 그래서 그런 자기의 선행을 의식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선물로서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고 말마다 주장하는 그 구원은 자기중심으로 살기 위한 변명으로 삼고, 실제는 그런 종교 행위 또는 공적에다 자기 구원을 넌지시 걸어보는 또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남다른 자신감을 가져보는 즉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이율배반의 어처구니없는 양상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활화지 않고 종교화한 비극적 결말의 공통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복음을 모르는 유형의 사람들이다.

바울이 말한 바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마치게 되는 어리석음은 또 별개이다. 정직하고 올바르게 복음 전파하는 것을 듣고 제대로 믿었으나 중간에 가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을 더 믿게 되는 경우다. 따라서 백방으로 철저히 검증되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경고대로 각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여 스스로 믿음에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는가를 시험하고 살펴 확증해야 하는 것이요(고후 13:5) 베드로의 경고처럼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전쟁에서와 같이 믿음의 생활에서는 방심은 금물이다. 치명적인 것이다. 우리의 믿음 역시 전쟁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작전상 실패는 용납할 수 있어도 경계 근무를 태만히 하는 것은 용서되지 못한다"고 말해 온 것도 이 사실을 말함이다. 이 세상에서의 믿음 생활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휴전없는 전쟁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고 당시 모든 교회가 크게 두려워한 것처럼 이 말씀 앞에서 모든 교회가 다 크게 두려워할 일이다.

다 한결같이 주님 앞에서 거침없이 "자랑하고 있을"만한 그런 <믿음의 쟁쟁한 관록의 소유자들>이다[마 7:22]. 그러나 천만 뜻밖에 전혀 예상치도 않게 "어찌 할꼬! 영원한 운명을 멸망 가운데 지내게 되었구나" 하게 될 그 순간의 참담한 절망을 상상해보라. 그런 사람들이 '일부'가 아니라 "많다"고 하셨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른바 "믿음 좋다"고 자타 공인하던 사람들이 멸망 길로 접어들 것인가! 많은 사람이 그 날에 가서 천만 뜻밖에 '자기'가 탈락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 다 구원 못받아도 나만은 구원 되리라 생각한 것이 완전히 빗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비극이다. 이런 비극이 또 있겠는가. 성경에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 자 먼저 된다고 말씀하셨듯이 그리고 제일 느지막이 나온 사람도 제일 일찍 나와 수고한 사람과 똑같이 보수를 받는 것처럼(마 20:16), 아무리 지난 날 한 일이 많고 이룬 일이 많아도 언제나 처음처럼 처음 믿을 때의 사랑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주님의 경고 말씀은 그 핵심이 여기에 있다.

이 사실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너무나 잘 아는 사실임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를 무시하고 있음이다.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하신 것도, 이렇게 자기 딴에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 하직하고 심판대에 나가본 결과 웬걸 천만 뜻밖의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을 볼 그런 사람이 많으리라는 사실을 말씀하심이니 명심할 일이다.

이는 "그러므로 그 누구도 자기의 구원됨을 확신하거나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악과를 먹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을 때 첫 사람 아담이 죽은 자였던가? 아니다. 영생하는 자로서 영생을 누리고 있던 당시였다. 우리 역시 새 창조로 인하여 영생하는 자로서 구원 받은 자이다. 그러나 아담을 비롯해 모든 영물들이 그 자신의 자유 선택으로 선과 악으로 구별되어진 것처럼 지금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구별되는 작업이 진행 중인 때다.

다시 말해 의인과 죄인[차라리 이제는 '악인'이라 할 것이니 악령들처럼 자기 자유 의지와 선택에 따라 정해지므로]의 영원한 구별 짓기다. 절대로 자기의 과거의 은혜의 경력을 의지하지 말 것이다. 그런 것에 안주(安住)하는 것이 율법행위다. 현재가 아닌 과거를 자랑하기 때문에 또한 교만까지 겸한다. 바로 이런 것이 바울이 말한 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 버리지"[빌 3:13] 않은 결과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되는 것이요 그리고 사랑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 언제나 그 기준 시점은 현재다. 미래도 아니다. 오늘 이 시간이다.

성경의 표준은 언제나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히 3:13)에 있다. 물론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결과이므로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니 이 경우 과거는 무의미하다. 현재가 과거의 건실한 결과로 되어 있을 때 한해서 과거도 더불어 빛나는 것이다. 그래서 "떨며 즐거워함"(시 2:11)이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하면서도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2:12] 함과 같다. 양극을 달리는 모순으로 가득찬 경고 같지만 너무나 현실이다. 대내적으로는 항상 기쁘지만 대외적으로는 항상 두려움으로 대처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넘치는 기쁨을 원동력으로 해서 떪으로써[긴장 가운데] 밖의 원수들에게 대응, 대처함이다.

구원 받은 자로서의 기쁨이 없으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믿음과 사랑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 우리 구원이기 때문에, 믿음은 떨어질 수도 있고 사랑은 식어질 수도 있어 구원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진행 중이니까 상태는 구원 받은 상태다. 단지 완료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중도에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위의 설명대로 심판대에까지 이어져 나간다.

"그러니 결국 죽어보아야 우리 구원이 드러날 수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 아니냐?"에 대한 분명한 답은, 그러니까 그렇게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경우, "선 줄로 생각하는 순간 넘어질까 조심하는"[고전 10:12] 경우, 그러면서도 성경대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빌 4:4] 경우, 그리고 반드시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는" 경우, '구원의 확신'은 얼마든지 현재 나의 것이라는 이 사실이다.

이렇게 깨어 있어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힘써 굳게 하는"[벧후 1:10] 사람은 마지막 심판 때의 결판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항상 "자기를 시험하고 확증하는"[고후 13:5] 관계로 자기 스스로를 "결판 내고" 있는 까닭에 마지막 심판 때의 결판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매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써 끊임없이 기쁨과 평안과 의로운 행실의 힘을 공급받고 있는 경우 그 사람은 복있는 자이다.

성경의 경고는 고로 항상 명백하다. "옳다, 저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였고 너는 믿으므로 섰다. 고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 goodness)와 엄위(嚴威, severity)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롬 11:20-22].

같은 무서워함[두려워함]도 공포에서 그런 것과 긴장해서 그런 것과는 다르다. 공포의 대상일 때는 '인자' 없이 '엄위'만이 있을 경우다. 그러나 엄위와 함께 인자가 병존할 때는 인자에 맞추고 엄위에 해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긴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원수들(우리를 시험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이 무서운 것이 아니다. 원수들의 계략에 말려듦으로써 임할 하나님의 공평공정성의 위엄이 두렵고 떨리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원수의 시험에 속아 넘어가는 나 자신의 부주의를 상상할 때 아담의 선례에 비추어 두렵고 떨리는 것이다.

발람의 계략에 넘어간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무서운 하나님의 징벌과 같다. 발람의 꾀에 넘어가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의 기상 예보에는 변함없는 청명함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갑자기 태풍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날씨가 변덕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런 경우에는 항상 우리 스스로가 반드시 책임지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상황이다. 하나님은 외모(外貌)로 사람을 대하시지 않는다. 즉 차별하시지 않는다. 인간은 그 겉모양을 따져 볼 수밖에 없지만 즉 외모대로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심중을 살피시기 때문이다.

이 '심중(心中)'은 사람은 모르고 당자 자신도 예리하게 살피지 않으면 모르고 넘어가는 예가 너무나 많다. 고로 무릇 지킬 가치가 있는 것 중에 가장 첫째로 지켜야 하는 것이 각자의 마음이라 했다(잠 4:23). 하나님의 구원은 간단명료하지만 절대로 안일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얻기는 쉽게 얻었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면 될까. 그러나 이것은 어렵다는 말과는 또 다르다. 어렵다는 것은 지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는 말로도 통하는데 반해, 이 경우는 지키는 자가 자기 전력을 다하면(그 가치를 알고 소중히 여기는 만큼의)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는 자신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데 있다.

소중하기는 해도 만일 잃어 버리는 경우 아깝기는 하나 그리 한될 것은 없다 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만큼 아니 목숨 자체라고 판단하면 당연히 죽기를 한하고 지킬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지키는 자는 반드시 지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주님의 확언이고 약속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도 있듯이 자기 스스로 지키지 않는데 남이 도와줄 리 없다.

주님의 말씀에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마 10:39/(눅 14:26)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 하신 것이 그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영생을 거저[공짜로] 먹으려고만 달려드는 시늉을 하고 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된 까닭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이라고 으스댈 것은 하나도 없다. 어디까지나 육체이므로 이 세상 신(神)으로서의 마귀 앞에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연약함이다.

얻는 것도 거저 얻었으니 지키는 것까지도 남의 덕을 보자는 그래서 자기 손가락 하나도 까딱 하지 않으려는 심보다. 그리고 이런 것을 가리켜 "은혜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하고 가르치고 또 그런 식으로 배우고 있다. 기가 찰 일이 아닌가. 그런 나태한 사람 또는 그 받은 바의 가치를 모르고 자기 스스로 간수하여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이라면 그런 것을 안겨다 줄 마음을 먹겠는가. 더구나 천신만고 끝에 이루어놓은 것을 그런 사람에게 선물로 주려 하겠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루어놓으신 우리 구원이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것인가? 듣지도 못하였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교육적 차원의 응당한 조처도 없이, 덮어놓고 좋게만 해 주는, 무조건 퍼 주는 것을 진정 사랑이라 하겠는가. 상대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받은 것을 간수할 줄도 모르도록 '만드는' 것이 사랑인가? 간수할 줄을 모르면 간수할 줄 알도록 해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간수할 능력이 있으면 그 간수할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다. 간수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수하려고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은 나태다. 나태를 조장하는 것이 사랑인가? 나태가 무엇인가. 도둑질하고 강도질 하는 것이 그 대표적 결과다. 자기의 것은 간수할 줄 모르고 뒤늦게 그 소중함을 알게 되면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을 것이니 그렇게 하도록 버려 두는 것이 사랑인가. 잔치 집에 초대되었으나 예복 입는 것도 귀찮다고 입지 않는 것이 그런 나태다. 이런 나태에 대한 하나님의 지당하신 대응은 그를 쫓아 내심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나태를 눈감아 주신다고 말하려는가? 이 설명은 지금까지 설명한 갑과 을의 '생명과 사랑의 법칙'은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고 순수하게 통상적인 상식만으로 말해본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고 즉 '무조건적인 사랑'이시라고 허울 좋은 변명만 나열하려는가. 그런 변명과 함께 멸망밖에 돌아갈 것이 없을 것이다. 이상은 우리 믿는 도리의 깊은 것도 아니고 아주 기초적인 상식에 불과하다. 마땅히 우리는 다음 단계에 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란 것은, 어찌하면 가장 효과있게 말씀을 전할 것인가 그런 연구를 하고 성령 안에서 토론하는 것이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다. 대개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그들은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무엇이 옳고 그른지]을 분별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 일이다"(히 5:12) 함과 같다.

성경은 다시 경고한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선물, gift]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으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게 주는 경고다. 그 마지막이 불사름이 된다는 것은 멸망밖에 더 있는가. 이렇게 말하지마는 이것은 일반론이요 직접 이 편지를 받는 교회 개별적으로 볼 때는,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여러분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셔서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셨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잘못해도 '융통성 없이' 벌주고 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해서는 안될 일임을 명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잊어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하신다는 것인가. "외모로 취하신다" 즉 어지간한 허물은 눈감아 주신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가던 이스라엘의 경우에서처럼 오래 참고 참아 주시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가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너무 참아 주신다고(왜냐면 이스라엘이 우리가 보기에도 너무 한심하게 짜증이 날 정도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었으니까-우리 자신의 행위가 때로는 천사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쳐질 것임이 틀림없다) 여길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 완고한 불순종과 불신의 고집을 버리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그러나 무한정 기다려 주시지는 않는다. 위에 인용한 그 많은 사람들 곧 주님의 심판대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은 구원 받은 것이라고 장담하여 주님 앞에 애써 항변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던 사람들이지만 가차없는 심판만이 내려진 것처럼, 버리실 때는 아주 버리시는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룰 일이다. 내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 "광야 교회" 즉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 은혜를 모르고 끝까지 고집하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 그런 마비되기 쉬운 인간 심성(心性)이란 것 즉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 아담처럼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두렵고 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달리 그 중심을 보시고 외모(겉모양)를 따라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

조금만 잘못해도 엄밀히 원리원칙대로 융통성 없이 처리하는 독재가 아니라(겉모양밖에 아는 것이 없는 인간의 판단으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판단할지 모르나) 우리 각자의 중심(中心)에 따른 즉 자유 의지에 의한 스스로의 선택대로 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정확하게 오차없이 판결하고 판단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가령 99%의 순종과 1%만의 불복종이라 할 때, 우리의 생각은 당연히 그 100%에 가까운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그 단 1%의 불복종은 눈 감아 주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지만 인간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은 100프로 불순종으로 보시는 것이다.

99%의 불순종도 단 1%에 불과한 불순종도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100% 불순종이지 경중의 차이가 없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빙산(氷山)의 일각(一角)만 볼 뿐 그 전체 덩어리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일각만 보고 판단하는 까닭에 "하나님은 눈 감아 주실 만한 것이라도 그렇게 덮어 주시는 아량이 없다"는 막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그 1%와 더불어 그 나머지 덩어리 99%를 다 보시기 때문에 그 사소한 것 같은 1%를 보고 처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보지 못하는 나머지 99%를 보시고 처결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억지로 50, 60 또는 80%라고 하여 순종이라는 것을 무슨 퍼센티지로 자질구레하게 재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뿌리를 보시므로 이미 곪을 대로 곪아 희망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은 가차없이 잘라 버리시게 된다. 그런 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그런 것을 알 수도 없고 가름할 수도 없어 자연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의 일반론적인 경고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 얻고 구원 얻지 못할 것인지 처음부터 다 알고 계시는 터이다[요 6:64]. 아시지만 언제나 철저하게 공명정대 공정공평하게 그리고 원리원칙으로 나가시기 때문에 처음에는 믿고 회개하는 경우 그 마음이 당장에는 진실할 때는 성령을 주시는 것이다. "나는 네가 결국 믿음을 배반할 줄 알므로 줄 필요가 없다" 하시지 않는다. 미래에는 어떻게 될망정 현재는 분명히 믿고 사랑하는 까닭이다. 현재를 기준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구원 얻기로 택함을 받은 자일지라도 반드시 그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경고대로 행하고 따른 결과라는 결론이 내려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런 택하심이 있다고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경고대로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구원 얻었다는 사실만이 나타나는 법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주는 경고는 여전하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가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물려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라"(히 5:12-6:12) 함과 같다. 처음처럼 한결같이 끝까지 부지런을 다하여 게으르지 말고 믿음을 지켜 오래 참음으로써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어야 함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 양식(樣式)

우리가 '육(肉, flesh)'으로 나서[요 3:3] 육으로 있을 때는 하나님의 성전이 불가불 상징적으로 따로 있었다. 그것이 모세 시대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영'으로 난 된 다음에는 그러한 그림자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 이를 주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 바 곧 이 때이니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1-23] 하셨다.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셨으니 이는 종교적인 형식으로 특정일, 특정 장소에서만 종교인 행세를 하여 예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삶 그 자체 즉 일상생활이 예배가 되는 그것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자연스러움이고 떳떳하고 당당함을 말씀하심이다. 특정 장소, 특정일에만 국한해서 하나님을 찾다가 나머지 6일간 그리고 그 장소를 떠나서는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다.

주[週] 중에는 세상에서 살다가 그동안 지은 죄를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하나님 계신다고 나름대로 믿는]에 와서 그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는 것은 종교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런 것은 모세 율법 시대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그림자적인 의미로서 허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도 그런 양식을 따르는 것은 복음의 기본 의미를 떠난 것으로서 그것이 결코 정상일 수 없다.

그리 되면 종교 행위[구원 없는]로 화석화(化石化)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고로 그런 형태를 일부러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육으로 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으로 다시 나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심으로써 내 안에 영원히 성령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말함이다[요 14:16]. 그렇다면 내 몸이 성전인즉 따로 성전이라고 해서 특정 장소를 지정하여 하나님 계신다 하고 ㄱ기에 모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즉 그런 예배를 목적으로 모이던 습관이었다가 이제는 그렇게 모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모이기를 폐하는"[히 10:25]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은, 각자에게 각기 다른 "성령의 은사[선물]"를 주셔서 필요 불가결한 지체로서의 역할을 각자 담당하도록 하신 까닭에 반드시 모여 교제함이 필수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를 성전이라고 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때문에 특정한 날을 그렇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때로 정하는 것도 자연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당시 사정에 따라 매일 모였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매일 모일 필요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므로 오늘날도 그 필요로 말하면 초대교회와 비할 때 그 의미가 결코 경감될 수 없는 시대인 만큼 매일처럼 모이는 것이 오히려 더욱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획기적 변화는, 이미 주님께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모든 장사치들을 몰아내시면서 선포하신 사실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예언되어 정해져 있는 것임을,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알리심으로써 명백히 하셨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바울이 성령으로 명령하는 대로 이 개별적인 성전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뵙고 섬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상 생활이 예배이다.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은 다시는 자기를 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고[고후 5:15]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므로[빌 1:21] 자연스럽게 이것이 합리적인 예배[롬 12:1]가 될 수밖에 없다. "산 제물"이니, 살았으나 자기는 죽은 것이다. 자기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았으니 이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요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이다[갈 2:20]. 즉 살아 있는 제물[죽은 또는 매일 죽는]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장사치들을 몰아내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도적[robbers]의 소굴[막 11:17/마 21:13]로 만들지 말라 하셨다. 장사치들이면 장사치들이지 왜 도둑이라 표현하셨을까. 이는 십일조에 관한 구약 말씀에서 그 정해진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을 가리켜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다"[말 3:9] 하신 데에서 알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존중하고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교육적 차원에서 정하신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어[고전 7:23/롬 14:8/고전 6:19,20] 있음을 미리 교육시키는 차원에서의 십일조요 그리고 일주 중의 안식일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럽게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었다. 왜 굳이 영광스럽다고 표현하느냐 하면 주님 친히 우리에게 선물이 되셔서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나만을 위하시는 나의 것이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나의 것, 나는 주님의 것이다[아 2:16/6:3/]. 그러므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그 주님의 것인 내 몸을 나 자신을 위한 욕심에 사용한다면 이는 정확히 말해서 도둑질이다. 내 것이 아닌 남의 소유를 무단 사용하는 것이니 도둑질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고전 10:31] 말에나 일에나 주님의 이름으로 하지[골 3:17] 않는 모든 것이 바로 이 "도둑질"이 된다. 그런즉 수입 중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 나머지 10분의 9는 나의 것, 일주일 중 하루는 하나님의 날 곧 주님의 날, 나머지는 나의 날 등 이런 것이 더 다시는 통하지 않게 된다.

"주님의 날"[계 1:10]이란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요일을 가리켜 특별히 말하는 것은 온당하나 그렇다고 이를 이전의 안식일 개념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그 날을 안식일 대용(代用)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에서는 앞의 설명처럼 무의미한 것이다. 매일 섬기고 매일 하나님을 뵙고 그래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이고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므로,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구별해야 할 그 구분의 기준점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특정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면 그러면 그 건물 아닌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뜻인데 내 몸이 하나님이 친히 계시는 성전일진대 그것이 오늘날 어찌 통할 수 있는가. 특정한 날을 예배 드리는 날로 정하면 그러면 그 날이 아닌 날과 어떤 구별과 차별이 있다기에 그렇게 말할 것인가. 다른 날은 하나님 섬기지 않는 날이란 말인가. 오늘날까지 그런 잘못된 인식 아래 종교 생활을 해오는 이들은 지금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급선회할 일이다.

주님께서 "내가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즉 완성시키려고] 왔다"고 하신 것처럼, 이상 설명은 안식일 개념, 성전 개념을 폐하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더 엄중하게[이전의 습관대로 하면] 정상적으로[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명의 기본으로서] 지키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일주일 중 하루만 아니라 일주 7일 모두가 안식일이며, 십일조만 아니라 나의 삶과 소유 일체를 포함한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니 나의 수입 100프로가 주님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안식일[흔히 말하는 이른바 "주님의 날, 주일"]개념, 그리고 십일조 등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소유(所有)에 대한 개념이 느슨하게 되어 버려, 급기야는 10분의 1도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안식일이라 하여 모이던 것도 모조리 폐하는 지경에까지 가지 않을까 하고 혹자 걱정하는 이가 있을 것인가. 이미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그런 염려보다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이 급선무다.

지금까지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서 인식하던 모든 비성경적인 것을 완전히 일신하는 것이 화급하다. 종교적인 종교인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앞에 말한 대로 '영'으로 다시 나는 것이 가장 긴요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성경은 이에 대하여 확답을 주고 있다. 즉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고후 5:15]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롬 14:7-9]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이보다 더 분명한 설명이 또 있는가. 이 말씀이 강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당신은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잘못 알고 믿어 온 것이다.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종교인 즉 기독교의 교인만 된 것뿐이다. 성경의 권위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스스로 판단할"[행 4:19]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여 "성모 마리아"를 그리스도보다 더 위하면서도 거창하게 "대표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상에 군림해 있기도 하는 것이 이 세상이니 하물며 다른 일이랴. 말씀을 곡해한다는 점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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