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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33
글쓴이 김일동 조회 355

메시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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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

다수라고 진리 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자 노릇하여 군림해 있는 이 세상은 분명히 그렇다. 이는 우리 삶의 체험에서 얻어지는 상식이기도 하다. 주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난 다음의 제자들의 반응은 "그러면, 구원 받는 사람이 적습니까?"였다.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답하셨던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문은 찾는 이가 적다" 하셨다. 두 가지 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므로 우성 당장 그것이 싫어서 그 고난을 기피하기 위해 타협하다보면 그것이 자멸(自滅)로 통하기도 하고, 다른 하나는 이 세상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대대적으로 속이는 일을 벌이므로 거기에 휩쓸려 별 생각 않고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멸망의 지름길임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을 곡해하는 이단(異端)들을 만드는 일에서, 앞에서 사이비 기독교에 대하여 언급한 대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게도 하고 절대 소수를 점하게도 하는 양면 작전으로 이 세상 신(神)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임하고 있다.

어찌 하든 사람들을 속이자는 것이 그의 최대 목표이기 때문이다. 속이는 것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고후 11:14,15]으로 표현하지 않았던가. 진짜 같이 보이게 하는 것이 가짜의 특징이요 장기(長技)이다. 가장 안전한 길은 직접 성경을 읽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베뢰아 사람들은 대사도(大使徒) 바울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참말 그런가 하여 그들 자신 스스로 성경을 상고(祥考)함으로써 믿는 자가 더 많았다고 성경은 칭찬하고 있다.

사람의 말[독자가 읽는 이 글을 포함해서, 성경에 어긋난 것이라 판단되거든]을 따르지 말고 성경을 따르라. 그것이 최상, 최선, 최고의 지혜이다. 한 성령이시므로 같은 말씀, 한 내용으로 가르치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깨닫게 되고 기도하는 중에 우리에게 지시하시기도 한다. 즉 우리 스스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니까 열어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생활에서 일일이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나 자신을 위하지는 않으나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나의 생활을 꾸려가고 엮어가는 것은 반드시 내가 하는 몫이요 역할이다. 서로가 상대의 대리자 역할이기 때문이다. 갑의 역할은 을을 위하는 것이요 을의 몫은 갑을 위함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으면 그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그 달란트를 주인으로부터 받은 그 하인들에게 달린 것이지 주인이 상관할 수가 없음을,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 가 부재중인 것으로서 비하셨다[마 25:14].

간섭, 강제는 않으시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즉 기도로 말씀드리는 대로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대로 그 방법과 수단과 기타 일체를 제공해 주시는 것이니 이것이 주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특징이다. 우리가 원하고 구해도 우리 자신을 위함이 아니다. 반드시 주님을 위해서다. 그러면 주님은 주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신다. 이것이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다. 나와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 위해 이루어 주신 것을 나는 또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 위해서만 그 제공된 것을 직접 활용하는 것이니 이는 전적으로 내게 달린 나의 소관사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요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열매의 성과도 혹은 30배, 혹은 60배, 혹은 100배와 같이 차등이 생기게 된다. 주님께서 간섭하신다면 모조리 100이지 100 이하로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구원 받은 삶은, 각자가 순전히 그 스스로의 솜씨로 집을 지어가는 것을 말함이다.

단 "함께 지어져 간다"[엡 2:22]는 뜻이니, 하나님께서 그 거하실 처소를 위해 집을 지어 가시되 이미 만들어진 획일된 재료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구원 받아] 스스로를 직접 만들어가는 품질과 규격을 따라 이루어진 각종 재료들을 사용하심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각자 그 재료들이 되어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당한 자재라 하더라도 일을 하다보면 그것이 맞지를 않거나 혹은 못쓰게 되는 수도 있다. 그 때는 그 박았던 [벽]돌을 가차없이 빼내고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이 필수이다.

이 경우, 우리로서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 세상은 바로 그런 과정을 거치는 데이다. 이렇게 해서 일단 제 자리에 박혀 아무 이상이 없으면 그 집을 구성하는 요긴한 일부분이 되어 그 자리에서 영원토록 변함 없는 위치로 정착하게 된다. 그렇게 [벽]돌을 빼내거나 박는 일에서 일단 빼내어진 것을 각종 연장으로 수선해서 사용하는 수도 있다. 이는 회개함으로써 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아무리 해도 그 전체의 집 조화에 어울리지 않거나 이웃 돌에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으니 이는 아낌없이 내어 버려야 한다. 이 경우 고의적인 범죄로서[히 6:6/10:26,29] "죽음에 이르는 죄"[요일 5:17]에 해당된다 하겠다.

배도[背道, falling away]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바울의 예언에서 "배도"[살후 2:3]라는 말이 나온다.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다"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 위치에서 떠나간다는 것인데, 만가지로 생각해도 오늘 이 시대가 바로 그 마지막이 분명하나, 오늘날 그런 표현에 해당할 만한 그 아무 것도 없다. 있다면 오직 진리에서 떠나가는 현상 그것이다. 왜냐면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날 정도의 시기가 되면 주님의 예언 말씀대로 이제 거의 땅 끝까지 복음은 전파되었다고 판단되는데, 복음은 전파되었다 하나 너무 어이없게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사람들이 따르지 않고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너무나 현저하게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 판을 치고 거의 모든 이른바 "그리스도의 교회"를 풍미하고 있는 것이 오늘이다. 이 "멸망의 아들"의 출현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인데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그들 가운데 작용하게 하시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살후 2:9-12]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만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복음은 이제는 웬만큼 충분히 전파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진리는 이제는 웬만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그 대신 불의를 좋아한다는 이 두 가지이다. 아직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지 않았다면 그 전파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위해 그런 때가 아직은 오지 않아야 하겠지만, 이미 그런 것이 활동하게 하신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시간적 여유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런 전후 사정을 살펴볼 때 바울이 말한 이 "배도"라는 것이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킴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렇게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형태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가고 자기 부인을 외면한다는 것 즉 바울이 경고한바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사는"[롬 8:13] 것을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라 단언한다. 그 외에는 달리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한다"는 지적에 들어맞는 것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가 이 자기 부인을 "자기 부인"으로 알아듣지 않고 전혀 다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철저히 무시된 채 성경에만 덩그렇게 그 문구가 나타나 있다고 할 그 정도다. 그 표현으로 보아 그렇게 심각하고 중대한 경고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같이 외면 당하는 것 자체가 괴이하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그런 주제로 설교한다고 해보라. 당장 반(反) 복음이고 율법주의라고 매도당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성토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주의를 배척하고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상세히 풀이한 바울 자신의 경고다. 그런데도 오늘날 거의 모두가 이 경고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배도(背道)"는 바로 이런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날 어느 주석서((註釋書)든지 들춰보라. 한결같이 이런 성경의 경고는 "상급을 얻도록 힘쓰라"는 의미로 곡해하여 설명해놓고 있을 것이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인가? 상(賞)이 어떤 상이기에 그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얻는 상도 있다던가? 얼마나 중대한 상이기에 "두렵고 떨림으로써" 차지해야 하는 것이 있다던가. 천하 없는 상이라 하더라도 두렵고 떨림으로 얻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할 말이다. 인간 역사가 생기고 그런 표현을 사용한 예가 있던가.

상이야 받으면 일신상의 영예이고 못받으면 못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뿐이지, "두렵고 떨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그 어떤 상이든 "상(賞)"이 갖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가장 비이성적이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해괴한 책이라고 세상에다 대놓고 선전하고 있는 꼴이다. 이런 선전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구원 받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런 짓을 감행하고 있는 현실이 되어 있다.

유독 성경에서만 그런 매우 놀랄 만큼 괴이한 말을 쓴다면 성경이야말로 괴상망측한 책이라고 세상에다 대고 악평하는 것이니, 세상이이를 곧이 듣고 성경을 백안시하고 사갈시하고 괴기한 것으로서 순 신화적이고 미신투성인 내용으로 매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주님 말씀대로 천국으로 들어갈 열쇠[성경]를 쥐고 있으면서 자신도 들어가려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까지 막는[마 23:13] 당시의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의 위치에 있는 것이 당신네 모두가 지금 서 있는 자리다.

구조선을 몰아 물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는 임무를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변에 앉아 이들 구조 요원들은 놀음놀이에 한창 정신을 팔고 있는 것과 같다. 항상 망대에 올라 귀를 기울여야 들을까 말까 한 "사람 살려!"라는 소리가 귓전에 들어올 리 없다. "구원 받을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무슨 수로든 구원 받게 하실 것이고 그리고 나는 이미 구원 받아놓았으니 걱정 없다"는 태평 심리이므로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가 도무지 현실성 있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이런 사람은, "있는 자는 더 받으나 없는 자는 그 있다고 여기는 것마저 빼앗기게" 되어 있는 그런 상태다. 구원을 추구하면 할수록 구원은 멀리, 멀리 떠나간다. 세상에서 말하는 바 돈을 악으로 악바리로 벌려고 할수록 돈은 멀어지고 거기 신경을 쓰지 않는 자에게 돈은 어느 새 몰려든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자나 남자나 가까이하려 하면 할수록 튕겨져 달아나고 모른 척 하면 제발로 다가서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자기 구원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충실히 매일 살아가는 자에게는 설혹 영생을 멀리 쫓으려 한다 해도 쫓아지지를 않는다. 왜 우리가 구원을 의식 않고 구원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정상인가 하면, 구원을 받은 때문이다. 아주 평범한 대답이다. 그러면 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가. 역시 답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지"[피동] 않았으면 구원을 "이루기"[능동] 위해 애쓸 수가 없다. 애쓴다고 구원을 이룰 수 있다면야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구원을 이루려 한다고 이루어지던가? 사시나무처럼 "떨며 두려워한다고" 구원을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가? 그렇다면 바울의 모든 변론도 어리석은 자의 잠꼬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바울이 구원을 이루라고 했을 때는 이미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즉 산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이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므로 나로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는 죽은 자가 되지 말라[이는 우리 피조물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어디까지나 능동성을 띠는 것이니 아담이나 악령이나 이런 능동적인 측면에서 스스로를 망친 것이다]는 경고인데 그것이 그리도 이상스러운가.

아담이 죽은 자로 있었다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있을 리가 없다. 살았기 때문에 죽지 말라는 경고이셨다. 우리도 현재 산 자이기 때문에 구원을 스스로 이루라는 경고이다. 단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구원을 잘못 해석하게 만든 것이고 그래서 거기 곧장 넘어가 버린 탓이다. 즉 "구원"을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입장권쯤으로 오해하도록 마귀는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입장권'을 선물하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남녀 사이라도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별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이지, 끝까지 둘이 하나되기로 버텨가는 장사가 있던가. 그것은 속박이 되는 까닭이다. 주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이니 마찬가지다. 입장권과 같은 '물건'이라면 내 스스로 버리지 않는 다음에야 그것을 내가 소지하는 이상은 입장이 허용된다. 그러나 '사람'은 무슨 물질처럼 움켜쥘 도리가 없다. 영혼이 있어 마음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랑함으로써 서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아들이 있는 자는 이미 생명이 있고[요일 5:12] 없는 자는 없다. 그래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요 너희 안에 있다"[눅 17:21]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어긋나게 천국이라는 것을 어디로 쑥 들어가면 되는 것으로 착각하니[마 7:21] 어찌 진리에 이를 수 있겠는가.

물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전개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나 거기 들어가는 자는 먼저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새 창조를 입는 것은 다름아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셔서 그리스도와 내가 "합하여 한 영이 되어"[고전 6:17]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고로 아들을 모신 자는 이미 그 안에 천국이 있음이다. 우주 만물이 다 그 안에 있는 분이 내 안에 계시는데 내 안에 있는 것이 비단 천국뿐이랴. 이것이 구원이다. 즉 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정상적인 관계에 있으니, 따라서 정상적이지 못하면 결국 언제든지 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구원도 생명도 천국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논리가 아닌가.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모두 "원(元) 돌감람나무" 가지였는데 거기서 "찍혀" 나와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음"[롬 11:24]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돌감람나무인 내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음[:17]이다. 이것이 우리 구원임을 다시 강조한다. 다른 의미로 생각하지 말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이제는 모든 일이 해결되어 끝났으니 태평하고 안심하라" 했던가? 아니다.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믿지 않음으로써 뻒여진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18] 했고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였고 너는 믿으므로 섰으나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 했고,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21]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될 것이다"[:22] 한 것이다.

이와 동일한 말씀을 주님 친히 하셨다. 우리의 구원을,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우리가 가지로서 붙어 있는 것으로서 분명히 하신 것이다[요 15:1,4]. 그러므로 과실을 맺는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이므로 경고하시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신다"[:2] 하셨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라"[:4]고 명령하셨다. 즉 지켜야 마땅한 율법[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혹은 계명을 주신 것이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하신 그대로다. "내 안에 거하라" 명령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4] 하심으로써 우리의 행동, 우리의 자세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조건부임을 명백히 하셨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2] 하셨으니, "내게 있다" 하심은 이미 구원 받아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과실을 맺지 않는다" 하셨으니 이는 "구원을 이루지"[빌 2:12] 못함이다.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가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래서 "아버지께서 제해 버리신다" 하신 것이다. 모두 조건부로 되어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의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하셨지만, 이미 "내 안에 거하라" 명령하시고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희를 부인하고 나를 시인하면 나도 너희를 시인할 것이라"[마 10:32,33] 하심과 같은 뜻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게 되는 것은 가지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 15:1] 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우리 위한 죽으심을 통해 은혜로 거저 주시고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을 선물로 우리에게 안겨 주신 결과다. 그러면 이것으로 끝났는가 하면 절대로 아니다. 돌감람나무가 아니라 지금은 참감람나무요, 전에는 포도나무 가지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있고, 전에는 죽은 자였으나 이제는 산 자로서 당당하게 구원을 받은 자가 되어 있으나, 가지로서 열매 맺는지 여부는 순전히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일단 가지가 되었으니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열매를 맺는다는 망상은 이 말씀으로써 말끔히 불식시킬 일이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이 완결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우리의 힘이 개입해야 하는 것이라면 은혜, 선물,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 무색하지 않은가" 하려는가. 말의 요점을 알아듣지 못한 결과로 그런 말이 나온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아니하신다. 우리가 이전에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 행위로는 구원 얻지 못한다 했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천신만고 끝에 하는 일이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 얻는다고 하셨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다 수월하게 또는 간편하게 하도록 해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숫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하나님 친히 이루신 것이다. 이제 우리더러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명령하시고 스스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제해 버리신다고 경고하심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4] 것은 그렇게 붙어 있겠다는 의지로 스스로 붙어 있으면 될 일이다. 이전에는 그렇게 가지가 붙어 있을 만한 그런 포도나무[그리스도의 우리 위한 죽으심]가 없었으나 이제는 존재하게 되었고 그래서 농부[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포도나무가 아닌 나무로부터 우리를 찍어내어 포도나무에 접붙여지게 하신 다음이다. 하나님 하실 일은 모두 완결되고 완성된 것이다. 자연계의 식물은 그렇게 접쿹이면 저절로 포도를 주렁주렁 열게 할 수 있으나 우리는 완전한 자유가 엄연히 보장된 인격적 존재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붙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아니할 수도 있다. 주님 말씀대로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5]이다.

우리도 스스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다[:5]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는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게 된다"[:6]고 분명히 경고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스스로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될 것이라"[:8] 말씀하셨다. 내 스스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고 그 안에 거(居)함으로써 과실을 많이 맺어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7]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을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10]이라 하신 대로 그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13:34,35] 하심과 같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15:13] 하신 대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12] 하셨으니,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니 곧 자기를 버림, 자기 부인 다시 말해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3:16] 한 것이다.

고로 이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삶"[고후 5:15]으로써 사람 사랑을 함으로써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는"[요 15:2] 은혜를 베푸시나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게" 되니,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스스로 구원을 이룰"[빌 2:12]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 주님 친히 명령하시고 경고하신 것인데 도대체 무슨 권위로 이를 억지로 해석하여 상급 타는 것이니 어쩌니 하여 자신도 망하게 하고 듣는 자들도 망하게 하려는 것인가. 

이 정도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말씀을 오늘날까지 전반적으로 곡해하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아직 하나님의 복음은 제대로 온 세상에 전파되지 않았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삼지 않으면서도 근거한다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전파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성경은 곳곳에 퍼져 있으니, 그리고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일진대 또한 그 말씀은 인류 구원의 말씀일진대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실상 온 세계에 전파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이라고 자처하며 그래서 그 내용을 전파한다면서 진실이 전파되지 않고 거짓 것이 전파되었으니 성경을 읽어도 그런 식으로 사람이 만들어놓은 내용으로 읽으므로, 그 색안경의 색깔을 따라 성경 내용도 그 안경의 색깔일 수밖에 없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아직은 아니라고 해도 그래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다시금 온 세상에 나아가 전할 책무가 있다. 이 일이 종료된 후에 악한 자가 임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이것을 두고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내가 입장권을 버리지 않는 한 입장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 했는데, 이 "버린다"는 개념에서는 물질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서로 좋아하는 남녀 사이라도 싫어서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면 내가 주님과 합하는 비결이 무엇이며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어떤 것을 말하는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이니 믿으면 합해지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떨어지는 것이다.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답이다. 그러나 진리는 정작 평범한 데 있는 것이다. 왜 평범한 것이 진리인가 하면 진리라는 것은 그 본질과 특성상 만유 만상 만물에 없는 데가 없고 스며 있지 않은 데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왜냐면 진리란 것은 만물을 창조하셔서 존립하게 하신 원동력이고 그 유지 보존력 자체이기 때문이다. 고로 진리라고 하면서 평범하여 누구나 알기 쉬운 것이 아니고 고매하다고 표방하여 어려워 보통 사람으로는 가히 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무엇이든 그것은 필연적으로 진리가 아니고 가식이요 위선이라고 단정하면 틀림이 없다.

믿음이라고 간단히 대답했는데, 그럼 그 믿음은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인가 할 것이 아니라, '누구'를 즉 어떤 사람을 믿는 것인가 해야 정확하니 왜냐면 "그를"[요 3:16]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니 그 말씀을 믿는 것이고, 그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받으셨다는 '그 사실'이 아니고 그렇게 죽음의 고난을 받으신 '사람 그리스도'시다[갈 2:20].

그러면 그 죽으심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이니, 우리가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고후 5:14,15]이라는 바로 그것이다. 이같이 성경은 아주 더 없이 친절하게 우리의 믿음의 겉과 속을 낱낱이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내가 죽은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고 무엇인가.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롬 14:7-9] 것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 위해 죽어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특정 사실'을 믿게 되면 사랑은 작용하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에만 매달리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을 믿게 되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골자요 핵심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만을 위해 살게 되고 나를 위하지 않는다. 또 그의 말을 따르게[복종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고 그리고 또한 자기 부인이다.

"자기를 위해 죽거나 사는 자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 했으므로, 바울과 같은 유명인에게 한정한 것도 아니고 사도들에게 한정한 것도 아니고 모든 믿는 자 무릇 믿는다고 하는 모든 자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하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성격이 무엇이며 목표가 무엇인지를 당장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즉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은 믿음을 버림이요 아니라면 처음부터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알아 왔으니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죽은 것을 인정하지 않음이요 나는 여전히 내 것이라고 하는 데에서 역력히 그 증거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함,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직결된다. 더군다나 모든 것 즉 자기의 생명까지 바쳐 나를 사랑하신 마당에 나는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여 움켜쥐고 있다는 것은 100%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증거일 뿐이다. 성경의 모든 경고 즉 자기 부인, 모든 것을 버림, 자기 목숨까지 주님 위해 미워함, 그 누구도 주님보다는 더 사랑하지 않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등이 이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곧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이다.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 왜냐면 그것은 믿음대로 하지 않음 즉 믿음을 버림,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롬 14:7-9]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 말씀에서도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고 있으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다[Can a maid forget her ornaments, {or} a bride her attire? yet my people have forgotten me days without number]"[렘 2:32] 하신 바와 같다[신 32:18/사 17:10/호 8:14]. 잊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잊을 턱이 없다.

그러면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기 구원[영생 얻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바로 그 뜻이다. 당시 유대인들이나 오늘의 우리나 마찬가지다. 정작 영생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모든 문제는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반드시 자기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데에 있다.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그런 이기적인 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나, 세상 자체가 죽음이고 워낙 비정상이니 무슨 말인들 못하랴.

영생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으니, 영생보다 우선 시급한 것이 있다고 판단될 때는 그런 현세적인 욕구를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위하고 있는 우상에게 대한 관심도 불사할 만한 것이다. 역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하다가 멸망 당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당시의 그 사정은 오늘의 우리 이 시대의 사정과 비할 때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앞에서 지적한 그런 억지 소리[육신대로 살아도 구원은 받는다,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상급 타라는 소리다 등]를 내는 까닭은 그 이유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자기 구원 즉 영생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이 은혜의 시대에 있다고 하면서 여전히 구약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위의 말씀,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고 있으니 나를 잊고 지내는 그 날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는 말씀은 심히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니 우리가 마땅히 자성(自省)할 일이다. 반드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자(仁慈-롬 11:22)를 처녀의 패물이나 고운 옷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를 깨닫는 대로 즉각 회개하지 않으면 성경의 경고대로 "엄위"(嚴威-:22)밖에 없다.

그럴 경우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라"[롬 11:21] 한 대로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요, 나도 "찍히는 바"[:22/수 23:15/고전 15:2/히 3:6/마22:13]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을 것이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혀 버려질 것이라" 함과 같다. 그러므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룰"[빌 2:12] 일이다.

이런 차이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다"[:20] 한 대로 믿음 있음과 없음의 차이다. 다시 말해 우리 믿음이 과연 무엇인가 그 정확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특정 사실만 한 때 시인하는 것이 믿음인가? 아니다. "사랑함"에 있다. 처녀가 그 패물을 사랑하고 자기의 고운 옷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실 것이라"[약 4:8] 명시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의지로 의식적으로 가까이해야 우리를 가까이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시인해야 우리를 시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당연히[이 말에 적극적으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부인하시게 되어 있다[딤후 2:12/눅 12:8,9]. 그렇게 부인하심을 당하는 사례를 주님은 명백히 하여 말씀하신 것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이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25:41,45]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 이것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할 것이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엡 6:1-3] 한 대로, 그래서 그 부모에게 하는 것을 보고 대략 그 사람의 인품을 재어볼 수 있다고 하는 말함과 같이, 그리고 그 부모에게 패역하면 다른 것은 다 보지 않아도 그 품행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말과 같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것은, 우리가 부모를 위하는 것을 "작은 효(孝)"라 할 때 이에 비하여 "큰 효도(孝道)를 행함"이라 할 것이다.

효(孝)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을 똑바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어떤 효자가 있었는데 한 유명한 효자가 따로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서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그 지방으로 달려가 그 집을 찾았더니 낡은 가난한 오두막집이었다. 늙으신 어머니만 있고 아들은 나무하러 산에 가고 없었다. 이윽고 아들이 돌아오는데 한 짐 잔뜩 나무를 지고 내려온 아들을 앉혀 놓고 그 어머니가 등을 두드려 주며 안마를 시켜 주니 아들은 마냥 싱글벙글 하기만 했다.

그래서 효에 대하여 한 수 배우겠다고 온 이 효자는 "너무나 기가 막혀" 자기가 오히려 한 수 단단히 가르치겠다고 아주 못마땅한 어투로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힘 없으신 노모께서 힘들게 등을 두드려 주시는 것을 그냥 두고 즐기듯이 하고 있으니!" 하고 나무라듯이 한마디 하자, 그 유명하다는 효자는 나지막한 소리로 "모든 일에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 그리고 그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해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올시다" 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히 12:28/고전 7:32,33/고후 5:10,11/롬 12:2] 것이 여기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십자가 고난으로 확증되어 있는 어버이 사랑이시다. 지금 우리가 고난 받는 것도 하나님 친히 우리의 고난 받음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아기[자식]의 고통은 그 엄마에게 그대로 전도(傳導), 전달된다. 똑같은 수준의 고통이다. 어버이 쪽은 그 강도가 오히려 더하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의 구원을 원하는 바라"[롬 9:3] 한 바울의 염원도, 그와 같은 의미의 모세의 심령도[출 32:32] 모두 그리스도의 어버이 마음을 닮은 것이다.

아버지의 왕위를 겁탈하려 한 막된 아들이지만 정작 그가 죽자 다윗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울며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한 것이 숨길 수 없는 바로 그런 어버이 마음인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고 기도하는 것도 기타 선을 행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이 어버이 마음을 닮아 있는 그 발현(發現)인 것이다. 모든 사람을 "불쌍히"[엡 4:32/벧전 3:8] 여기는 마음이다. 율법 행위로 얻는 구원을 배격하고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찬양하고 위하면서도 속은 여전히 그 율법주의에 머물러 있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 없이 즉 자기의 구원 하나만을 관심 두고 행하는 일체의 것이 바로 그런 율법 행위 곧 종교 행위가 되는 사실에 왜 눈 뜨지 못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임을 왜 모르는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 우리가 먼저 구원 받아 산 자부터 되어야 하는 일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 하신 그대로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은 먼저 구원을 받음으로써 계시를 통해 되는 일이다[마 16:17].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베푸시는"[고전 2:9/약 1:12] 구원 혹은 영생이라 한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롬 8:28]. 여기서 사람들은 또 곡해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가리켜, "교회 나가서 충실히 예배보고 교회 일에 충성하는" 것을 말함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바로 종교행위다. 그런 일을 특정한 날에만 하고 그 나머지 날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둘이 하나됨이므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일상생활에서 나타난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요 20:21]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4:34] 노력함이니 이것이 "먹을 양식"[:34]이라 하셨으므로 먹고 마시는 것이야말로 매일매일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본을 보인 대로 기도와 말씀 전달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것이다[행 6:4]. 여기 이 기도와 말씀 전함에는 불신자들을 위하는 것과 믿는 형제들을 위함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고 "내 양[어린 양]들을 먹이라"[요 21:17]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외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 일에 힘쓰며[행 6:4] 또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엡 6:18] 그들을 영적인 힘으로 돕기 위해 모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히 10:24,25]. 초대 교회는 모여서 일곱 집사들의 재정 관리로써[행 6:4]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평균되게[고전 8:13] 그리고 공동으로 씀씀이를 함으로써[행 4:32] 아무도 그 중에 궁핍한 사람이 없도록 했다[고전 4:34]. 과거 도둑질한 사람도 이제는 선한 직업을 가져 구제를 목적하는 것이다[엡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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