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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8)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33
글쓴이 김일동 조회 437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거대한 공동체적인 삶의 세계를 이룩함이니, 이를 위하여 간단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알림으로써 국내와 전도에 힘쓰고, 그리고 이미 한 몸의 우리[fold]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양(羊)무리"[벧전 5:2]를 보살피되 역시 기도와 말씀으로 하고 "성도(聖徒 a saint)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롬 12:13] 일에 원활을 기하는 등의 일로 요약된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가운데에 그 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어 있는 이를 그 교회 대표로 세우는 것이다. 이들을 초대교회에서 "목자", "감독", "장로" 등의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교회 재정 일은 "집사"들을 별도로 선정되어 전담하는 것이다. 이 일은 해당 교회 식구들의 차질없는 육신 생활을 도모할 뿐 아니라 온 세계 어느 곳에서든 그 곳 교회와의 횡적 유대를 통해 또한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다[롬 15:25,26]. 오늘날에는 "사도"는 있을 수 없다. 당시 "사도"는 예수님 곁에서 직접 그 말씀을 듣고 그 하시는 일을 보고 배운 이들로서 열 두 사도 및 바울과 바나바 등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굳이 그런 사도 역할을 말한다면 그들이 기록한 성경이 이를 대행한다고 할 것이다. 살아 계시는 목자장(牧者長)으로서[벧전 5:4] 그리스도 친히 그 말씀을 통해 친히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지적한 대로 무소유의 전도인으로서의 생활처럼[막 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히 13:5]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아는"[딤전 6:8] 것 그 이상의 삶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이 평소 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고 아내에게서 놓였으면 아내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 매였으면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물건을 구매하는 자들은 구매하지 않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므로) 하는"[고전 7:26,27,29-31] 자세를 끝까지 고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상으로 좀 더 낫고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바라거나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니 주님의 일에서 자승자박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할 일이다. 항상 이상과 같은 표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배려하여 평소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 긴요하다. 성경의 모든 경고는 성령의 경고 곧 우리의 머리로 계시는 그리스도의 경고이신 것이다. 이미 믿기 전에 여러 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형제는 바울처럼 홑몸이 되어 있는 형제와 사정이 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자녀 많다는 핑계를 댈 것도 없고 홀몸이라는 핑계를 댈 것도 없다. 내 가족 곧 우리 가족이요 나의 일, 우리 자신의 일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식구이다. 이상 기준에 따라 가장 합당한 즉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길, 세상에서 본이 되는 방법을 따라 사랑 가운데에서 행할 일이다.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사람들을 건져내어 산 자가가 되게 하는 오직 이 일에만 자나깨나 유일한 관심일 뿐이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벧후 1:10] 한 그대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행할 때는 그것이 종교행위가 되지 않는다. 같은 일을 해도 하늘과 땅 차이로 의미가 달라진다.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내 말을] 지킨다"[요 14:15,21,23/15:10,12/13:34]고 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니, 사랑이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순종하고 따른다. 여기서 자기 부인은 필수이다.

이 자기 부인의 바탕 위에서 나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기에만 여념이 없다. 왜냐면 이것이 "먹을 양식"[요 4:34]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양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데 그런 양식에 해당되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주님의 일을 하지는" 않고 그래서 자기 부인은 없이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12:25]는 경고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25] 않으니 죽은 자이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일을 하게 된다. 주님을 사랑하면 그 말씀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다[14:21,23]. 그러나 사랑이 없을 경우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없이[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없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오히려 사랑할 경우 그 행하는 소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영락없는 종교 행위다. 모세 아래에서의 율법 행위와 그 형태만 바뀌었다 뿐이지 실질 내용은 아무 차이가 없다. 바로 율법 행위로 구원 얻으려 함이다.

마음에 소중이 간직하여 잊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항상 생각하고 잊어 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당신 곁에 사랑하는 누군가 있다 할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의 청이나 원을 감히 무시할 수 있는가. "감히"라는 말을 쓸 것도 없이 당신 자신이 그 원이나 청을 먼저 알아 주어 그것을 들어 주려고 자청해서 나설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람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사랑"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시는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말씀하실 리가 없다. 가령 간다는 말을 온다는 뜻으로 해석할 소지가 있을 때 어찌 그 말을 쓰시겠는가. 우리의 상식에 기초하는 것이 우리의 언어생활이다. 우리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을 가리켜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 하였다. 즉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의 본질이다. 우리는 사랑을 몰랐지만 이젠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다. 즉 자기 부인의 바탕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슬기롭고 지혜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에게 계시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어 주시는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셨고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더더군다나 만인간 즉 어린 아이 같은 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평범한 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인간에게 알리려 하실 것이 아닌가. "죽는다"는 것은 죽는 것이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닌데 그 단어의 뜻을 마치 "지혜로써"[롬 1:22] 푼다는 양으로 하여 어렵게 해석한 것이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속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수법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잔꾀를 부리는 자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시도, 모든 해석, 모든 풀이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오는 것이라 보면 틀림이 없다. 재삼 재사 강조하지만 사랑은 그 본질이 자기 부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이것을 우리가 비로소 배운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아직도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고 단정하게 된다.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영생이요 구원이라 하였다. 사랑을 알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구약 시대 모세 율법 때에는 사랑을 몰라서 사랑할 수 없었다. 즉 사랑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렇게 알게 된 사랑으로 하나님을 시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 사랑의 핵심이 어디 있던가. 자기 부인에 있다.

억지로 자기를 부인하려 해서 자기 부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요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믿음이 곧 자기 부인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믿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믿음이고, 아는대로 실천하는 것이 제대로의 지식이다. 이렇게 연관되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 있다, 지식 있다 외쳐도 무의미할 뿐이다. 겉과 속의 관계와도 같다. 아무리 겉으로 자랑해보아야 속이 따라 주지 않으면 즉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알아 주겠는가.

사랑은 항상 현재다. "사랑으로써 역사(役事)하는 믿음"[갈 5:6]일진대 그 믿음의 속성은 항상 현재에 있다. 고로 항상 현재 나의 사랑 여부로써 모든 것을 말하게 된다. "나는 너를 모른다"고 주님께서 장차 말씀하신다면 "너와 나는 남남이다, 아무 관계가 없다"는 그런 말씀인 줄을 누가 모르겠는가. 우리처럼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거짓말로서의 부인이 아닌 것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 사랑하지 않으니까 모른다고 "부인하시는"[딤후 2:12/마 10:32] 것이다.

사랑을 해야 주님을 아는 것인데 현재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랑을 알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말함이니 왜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빼고는 그리스도의 의미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죽으심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된 것인데 이를 보고도 주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움트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냥 알아보고 인지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령을 받음으로써 구원이 되니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야 비로소 아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을 아는 것과 다른 차원이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인데,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알려면 그의 사랑을 알아 그를 사랑하는 것으로써만 아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알지 못하면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아는 것밖에는 없게 된다. 이런 선고를 내리시는 대상이 모두 "과거에는 내가 주님을 사랑했다, 믿었다, 큰 일을 행했다"는 것으로 일관한 이들이다[마 7:21,25:45].

그러면 왜 그런 무서운 저주를 받고 영원한 사형선고를 받았는가. "항상 복종하여[항상 현재를 기준하는 사랑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천하의 바울이지만 "내가 내 몸을 항상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내가 버림 받을까 함이라" 한 것이다. 과거에 아무리 잘 믿어도 현재의 나에게 그 믿음이 계승되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의 본질이 사랑에 있기에 그러하다.

사랑은 언제나 현재다. 생명 곧 사랑이요 사랑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현재 살아 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함이다. 과거에 아무리 살았어도 현재 죽어 있으면 그 과거의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따라서 믿음이란 것은 내가 현재 믿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한 전혀 무의미하여 나는 믿음이 없는 자와 같이 되어 버린다. 믿음으로 우리는 일단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그러면 그렇게 믿음이 들쑥날쑥하다 하면 성령을 모시고 있는 나의 상태는 어떻게 되는가.

성경은 이에 대해서 분명히 묘사하고 있다. 즉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히 6:6/10:26,29]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또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밟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된다. 실제 또 그것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초대교회 시작 벽두부터 명명백백하게 밝히신바 "주님을 두려워함"[행 9:31]으로 확인되었다. 그것이 또 어떻게 나타났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즉결 심판 사건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무조건 "어린 아이들처럼" 믿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면서 "슬기롭고 지혜 있게" 대처하여 풀어야 한다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믿는 자로서 멸망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자라는 둥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하는 짓을 이단자들은 일삼는다. 주님 당시 주님께서 친히 행하시던 모든 놀라운 기적의 일들을 "귀신의 임금 바알세불"을 통하여 행하기 때문에 저런 일도 가능해진다"라고 설명을 해치운 것도 그런 예다. 그렇게 알아들으면 또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제법 똑똑해진 것처럼 우쭐대는 마음도 된다. 아담 부부는 처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하는 "지혜와 슬기"로 자처하는 것이 찾아 왔을 때 문제는 달랐다. 솔깃해진 것이다. 그냥 말씀대로만 믿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자신이 보아도 비쳐지겠는가. 그래서 그냥 그렇게 넘어가 영원히 씻지 못할 사태를 촉발시켰다.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나 역시 어느 때든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기를 그리스도 친히 나를 지켜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그런 시험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 아담은 그런 보호하심이 없어서 시험을 당했던가. 만일 그렇다면 아담의 죽음은 그 책임이 아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게 된다. 시험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다.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실 때는 천사들이 일제히 자리를 비켰다. 오직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리스도, 일 대 일이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을 다 마친 후에야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을 스스로 이기신 후에야 천사들이 나아와 평상시와 같이 그리스도를 섬겼다고 했다.

이는 우리의 표본이다. 우리의 대표로서 그렇게 하셨고 천사들 역시 그러했으니, 다시 말해 우리가 시험 받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양상임을 이로써 성경은 나타내 보여 준 것이다. 당시 아담은 시험 받을 때 구원을 받을 필요성이 없었으므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물론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아 있고 동시에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시험도 받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는 표현이 가능하다기보다 너무 현실적이고 더욱 실제적이다. 아담이 그 때 자기 생명을 그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처럼 우리는 우리 구원을 그렇게 걷어차 버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 아닌가.

아담에게는 굳이 표현하면 "생명을 지키라"는 경고이셨다고 하면 적절할 것이다. 왜냐면 아담은 자기 생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지 않았던가. 그 지키지 못한 이유가 범죄다. 우리도 "짐짓[고의적으로 즉 알면서도] 죄를 지으면 다시는 속죄 제물이 없다"[히 10:26].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속죄 제물이신데 내가 직접 그를 발로 밟아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므로 그리스도는 더 이상 내게 없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했으므로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죄 용서가 없다[막 3:29].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되어 있다는 것은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있음이니 이는 내 자신이 마지막 아담의 위치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있음과 같다. 그렇게 자기 생명을 걷어차 버리는 의미에서는 꼭 그 위치에 있는 것이다. 고로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것은 내 스스로 생명[새 피조물로서 받은 새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  이 세상은 사는 곳이 아니다. 살려고 한다고 그 생명을 하루라도 더 늦출 수 있는가.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 부르시면 속절없이 가야 하는 인생이다[눅 12:20]. 만물이 다 함께 고통 중에 있는[롬 8:22] 지금 이 세상이다.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은 그 어느 곳에도 삶의 낙을 누리게 되어 있지 않다는 그 뜻이다. 다 함께 고통 당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만이 그것도 죄인 인간이 되어[만물이 인간의 이 죄로 인한 죽음의 결과로 고통 중인데] 면하려는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의인이 되어 있지만 순종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으면 죄인이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 죄인이다.

면하려는 자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눈 가리개에 앞을 못보는 그래서 천지를 분간 못하는 이 세상의 인생들뿐이다. 그들도 때가 지나고 이 세상 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압제 아래에서 풀려 나면 한결같이 속은 죽을 알게 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제자들이 "구원 얻는 사람이 적습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 주님은 "생명의 문은 좁아서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 문도 크고 길도 넓어 그리로 많은 사람이 들어간다" 하셨다. 그리고 그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서려고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셨다[눅 13:24].

"많다" 하신 사실에 심각성이 있다. 역시 "많은" 사람이 "나더러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습니까' 할 것이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마 7:22,23] 하셨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뒤이어 하신 것이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13-21].

성경대로 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부류에 해당하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이들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무시한 이들이다. 이상의 두 경우 다 불신자를 대상으로 한 경고가 아니다. "믿는다" 하고 "구원을 얻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이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말한 바 "배도"를 두고 말한다면, 주님의 이상 말씀은 그 "배도"를 미리 아시고 예언하신 말씀이신 것이다.

왜냐면 믿는다고는 하고 구원은 받았다고는 하나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는 구원 받은 몸이라고 확신하고 구원에 관한 한 아무 염려가 없다고 자신하고 숨을 거둔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혹 있는 것도 아니고 소수도 아니고 대다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구원은 죽어봐야 안다"는 식으로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경고하시는 것은 에덴낙원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니 먹지 말라"는 수준의 경고이신 것이다.

안먹으면 되는 일이다. 왜 굳이 억지로 먹으려고 할 것인가. 여자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해서, 아주 탐스럽게 생겨서, 먹으면 반드시 지혜롭게 될 것만 같이 보여 그래서 천추에 한이 될 결과를 빚어낸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할 생각을 당초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경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고후 5:15] 이웃[나와 함께 된 형제 및 나와 같은 피조물 인간]을 위한다는 삶의 원리원칙대로 하면 그것이 바로 안전이요 평안이다. 그것이 순리(順流)다.

세상은 역으로 흐른다. 모두가 역으로만 흐르니까 그것이 순리처럼 보여서 그런 것이다. 순류(順流)를 따라 흐르면 아무 탈이 없다. 임시로 있는 세상과 영원한 본격적인 세상과의 구별을 해야 한다. 없어질 이 세상은 역으로 흐르기 때문에 없어진다. 영원한 세상은 순리를 따르니까 영원하다. 그러므로 서로 거꾸로 반대 방향으로 간다. 따라서 탈이 없다는 것은 영원 세상에서 그렇다는 것이요, 이 세상에서는 흥하고 창성할 수 있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역으로 흐르는 세상에서 살고자 하니까 문제가 생긴다. 영원한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이 세상에서의 안목으로는 잘 나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세상은 곧 없어진다. 그 어디에서도 두 번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영원히 있을 세계를 기준하여 생각하고 판단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 하셨다요 12:25]. 즉 이 세상에서 산다고 꿈꾸지 말라는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려 함'을 말할 때 "꿈꾼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시 경고하시기를 하나님과 돈[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 하셨다[막 6:24].

이 세상 살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과거 도둑질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은 선한 직업을 가져 부지런히 일을 하여 자기 양식을 먹되 그러나 그 돈 모아 아무쪼록 잘 살고자 함이 아니라 가난한 자 구제에 있다 한 것이다[엡 4:28]. 가난한 자 구제는 나라도 못 당한다 하는데 그렇게 구제하니 자신에게는 돈이 모아질 리가 없다. 아니 처음부터 자기를 위해 모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살 생각을 하지 않을 때는 일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요 이 일이라는 것은 사람 살리는 것이니 곧 이웃을 위함뿐이다.

이웃을 위함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된 형제들을 위함과 같은 피조물로서의 사람들을 위함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한 몸을 구성하고 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한 그런 차이가 크니, 전자의 경우 그 이웃은 바로 나 자신이 되어 있고 후자의 경우 그렇지는 않고 그렇게 하나되어 있지 못한 피조물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름이다. 하나로서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룬다는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즉 경중(輕重)의 차이는 없으니, 둘 다 우리가 이행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유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7:21].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그 구원 받은 목적이 뚜렷하니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이 창조된 까닭에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아들로서의 본분이다.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할 때 아들된 이유가 없어진다. 따라서 구원된 의미도 사라진다. 의미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듯이 우리의 구원 역시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오직 살기 위해 우리가 구원되었는데 이 구원의 목적에서 벗어나니 궤도 이탈이다. 궤도를 이탈한 것은 천체가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던 데에서 벗어나면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되는 것과 같이 생명의 세계에서는 분리되는 것은 필연이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영원히 살고 그리고 각자[예외없이] 자신의 극대화를 꾀하며 최대의 행복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가장이상적인 방법이지만, 이 세상은 죽음의 세계라 그것이 통할 리도 없고 그러할 가치도 없는 것이기에 따라서 오직 일관성 있게 이 세상에서는 살려고 하지 않고 오직 신명을 바쳐 일하는 것으로 제한된 시간[내일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므로]을 가장 효율성 있게 활용하는 것 이산으로 현명한 계책은 없는 것이다.

보다 편안한 삶을 목적으로 하는 돈이라면 일하는 자에게는 필요가 없다. 오직 이 경우 돈이라는 것은 일을 효과 있게 수행하기 위한 필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 털어 버리고 거뜬하게 달리는 자세를 취함이 옳다. 전도 여행에 나설 때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막 6:8/눅 22:35] 하심이 그 뜻이다. 우리의 이 세상 남은 생애[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의]는 바로 그런 전도 여행의 성격인 것이다.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일하기 위함이니 그래서 "나와 같이 그냥 홀로 지내는 것이[결혼하지 않고] 좋고 더 복이 있다"고 바울 사도는 교회에 충심으로 권유한 것이다. 남녀 짝을 이루어 살아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다. 이 세상 끝나면 그런 것은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벧전 3:9] 것도 마찬가지 의미다. 악으로 갚으면 누구를 위해 갚는 것인가?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갚지 말라고 하셨다.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다. 자기중심인 것이다. 나에게 악을 행한 상대를 위해서라면 선으로 갚는 것이 정상이다. 왜냐면 사람마다 양심이 있어 그것이 악인 줄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알지만 그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약함 때문이다. 악이 좋아서 "불의를 좋아하여"[살후 2:12]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한 응징은 하나님께서 하셔도 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하든지 그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그 외에 하는 일은 사실상 의미도 가치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의 죄악대로 갚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일만 달란트 빚을 왕으로부터 탕감 받은 신하가 자기 동료가 불과 얼마의 소액을 빌린 것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둔 처사에 노한 왕이 그 탕감해 준 것을 즉시 취소하고 옥에 처넣은 것과 같은 된다. 악을 악으로 갚는 사람은 자기의 구원을 그와 깉이 취소하는 것이요 처음부터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한"[롬 2:7] 사람이 영생을 얻는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천국에서와는 달라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려면 반드시 "참아야" 가능한 것으로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히 10:36]이라 함과 같다. 참아도 기쁨으로 참아야 하는 것이다[골 1:11]. 왜냐면 모든 일은 생명의 일로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은 단순히 이 세상에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라 함은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일 뿐이요, 실상 그 근본을 따지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 그 근원을 둔다. 즉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롬 6:11]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즉 의에 대하여 살았다[벧전 2:24]는 것은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는[고후 5:15] 의미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었으니, 자기중심으로 살던 일체의 것에 대하여 사망 선고가 내려졌고 이미 집행되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의 특징은 사는 것 또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므로 때와 장소와 경우를 불문하고 무턱대고 그런 식으로 나가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찰나적인 이 세상에서도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하고 영원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기중심으로 살므로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을 염두에 둘 리도 없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서 죽은 자들로 하여금 산 자들이 되게 하는 오직 거기에 있거만 이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의 존립 목적이 영원한 세계에서 모두 살도록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산 자부터 되는 데에 있고 이 일만 끝나면 세상은 신속하게 종막을 내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뜻을 무시하고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리 만무하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면 이 사람 살리는 일은 필연적으로 등한시하게 되고 뜻이 없게 된다. 당치도 않게 살고자 하는 그 욕심에 소위 "육신"의 핑계를 대고 "육신이 약해서 어쩌니" 하는 등의 "육신" 타령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육신 곧 "죄의 몸은 멸해진"[롬 6:6] 것이다. 그럼에도 "육신 운운" 하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든 교리를 믿고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죽는데도 "죽지 않는다"고 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을 더 믿는 것이다. 설혹 세상이 아무리 사람 살 만한 곳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시급한 사람 건져내는 일을 인하여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을 깨끗이 단념해야 하는 그런 화급한 상황이다. 하물며 이 세상이 마귀가 다스리고 있는 세상임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이 이 세상 살아도 천년 만년 사는 것도 아니다. 내일 일도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인생사다. 그러니 산 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인간 대신한 죽음"으로 가르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교리를 단연코 배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순종 여부와 관계 없이 구원은 받는다는 논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멸망이 필지임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을 가리켜 교회에 가르치기를 "너희는 죽었다"[골 3:3] 한 것이다. 아무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옛 사람"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세상은 내게 대하여 죽은 것이다[갈 2:20]. 죽은 자가 세상에 대한 무슨 연연함이 있어 "땅에 있는 지체"[골 3:5]를 죽이지 못하겠는가.

자기를 부인하면 즉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면[고후 5:15] 비록 당장은 죽는 꼴이 나더라도 영원히 사는 것이요 자기를 위하고 자기 위주, 중심, 본위로 나가면 영원히 죽는 줄을 아는 다음에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은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이고 그보다도 이제는 진상과 진리를 알았으니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참으로 미워하게 되었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미워할 만한 것을 미워하는데 나의 이 자유를 누가 막을 것인가.

그리스도 복음의 진수는 하고 아니 하는 것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인으로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아니하는 데에 있다. 이전에는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을 좋아했으나 지금은 미워하고, 자기 부인하는 말을 마치 죽으라는 말처럼 과거에는 반발했으나 이제는 스스로 즐겁게 자진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만일 자기 부인에 대해 이와 같은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바울의 경고 겸 권유처럼 자기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할 시점에 와 있음을 때 늦기 전에 자각할 일이다[고후 13:5].

오늘날처럼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그 누구도 믿음 없는 자라 하거나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경고하는 이가 없는 실정을 주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렇게 예언하셨음이 분명하다. 심판대에 이르러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듯이 별안간 그런 선고를 받는다고 상상할 때 기막히다 못해 "떨리고 두려운"[빌 2:12]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가서 그 심판대 앞에서 그렇게 두려워하고 떨어 보아야 이미 때 늦은 것일 터이니, 지금 이 시간에 "두려워하고 떨" 일이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야["to work out your own salvation"-흠정영역]" 할 것이다.

양과 염소를 구별하여 심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신다는 의미다. 이는 히브리서[히 10:30] 그리고 베드로 서신[벧전 4:17]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양과 염소는 그 형상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비슷하다는 것은 다 같이 믿고 다 같이 구원 받은 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옥석(玉石) , 진위(眞僞)는 분명히 있으니 이를 가려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자 행세를 하거나 구원 받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그런 사례를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아니니,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그 멸망에 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주님 친히 밝히시고 있다.

즉 믿는 자이기는 하나, 지극히 작은 자들을 평소 괄시한 데 대한 심판인 것이다. 그리고 많은 능력을 행하고 선지자가 되고 또 귀신이 복종하여 물러가는 등의 일은 믿는 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믿음을 지속시키지 못했다는데 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그러나 믿음을 지키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실상은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려[계 2:4] 그 때는 회개해야 하는데도 회개하지 않아[:5] 믿음이 없는데도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믿음을 버려 다시 말해 바울의 표현처럼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빌 3:18] 있으면서도 그래서 현재 자기의 위치가 "멸망"[:19]에 있는 줄은 모르고 오히려 영생과 구원에 여전히 있다고 착각하다가, 영원 세계로 들어가는 초입인 마지막 심판대에 이르러 거기서 이상과 같은 주님의 멸망 선고에 갑자기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없다. 바울 당시의 사례이니 오늘날처럼 믿음 자체를 잘못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믿음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데에 있다[고후 5:15/롬 14:7-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도 내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산 자로서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삶"[고후 5:15]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본질을 가르치지 않았고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가르치고 있는데, 그 자신 성경을 읽지 않았으니 아무도 가르치지 않아 몰랐다는 핑계는 있을 수 없다.

성경을 가끔 가다가 들추어 본다고 읽는 것이 아니다. 누구누구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만 과연 그 가르치는 내용이 성경과 합치되는가 하고[행 17:11] 베뢰아 사람들처럼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읽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는데 그것이 과연 성경과 일치하는가를 살피고 서로 어긋나면 왜 그런가 하고 스스로 그 해답을 찾으려고 최소한의 노력이 있어야, '읽는' 것이다. 생명이냐, 죽음이냐 하는 자기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는데도 이 정도의 관심도 없다는 것은 나중에 영원 멸망에 들어간다 해도 유구무언(有口無言, 입이 있어도 변명이나 항변할 말이 없음)이 될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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