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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1)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38
글쓴이 김일동 조회 378

메시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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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믿음이 있어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의인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은혜에는 이르지 못한 이들이다-계 20:5]. 심판대 앞에 나아가나 위의 주님의 말씀처럼 저주 대신 축복을 받는다. 일부에게는 그와 같이 사형선고를 받는 자리가 되지마는 그들에게는 축복을 받는 자리가 된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후 5:10]. 그리스도인은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성경에 대한 무지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그 몸이 영광스러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사람은 예외다. 그래서 이런 "첫째 부활"[계 20:5]에 참예하는 이들은 "둘째 사망"[:6]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모두 영광의 몸으로 변환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착각한다. 이 경우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있거나 고난 중에 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해당된다[살전 4:16,17]. 이들은 천년 동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영광을 입게 된다. 이런 사람은 죽어 있었어도 그 때 다시 살아나고 주님 재림 때 지상에 아직 살아 있던 이들은 그 몸이 변환되는 것이다[살전 4:17].

그렇지 않은 나머지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계 20:4-6/2:11]. 이들이 모두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바울 사도는 이런 두 가지 양상의 부활을 모두 염두에 두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고로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 가르치는 것이다. 원천적으로 구원 받은 자마다 세상에 보내심을 받는 것이니[요 20:21],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 몸된 교회로서 우리 육체에 채움으로써 사람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여전히 위치해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열매 맺기다. 다시 말해 30, 60, 100배 차이가 있으니 왜 이런 차이가 있느냐 하면 모든 일의 핵심은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누가 강제해서 될 일도 아니고 순수하게 자기 자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 능력에 좌우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능력이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요컨대 내가 이렇게 은혜로 받아 스스로 가동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100배, 혹은 30배로 나타나지는데 말하자면 100배의 경우 그렇게 고난과 죽음으로 나타나 천년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영광에 들어가고 30배일 경우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차이로 나타난다고 할까. 그러면 "첫째 부활[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듯이-계 20:6]"에 들어가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이 그런 영광에 들어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왜냐면 이미 그런 대가[포상]를 바라고 그것이 그 동기와 목적이 되어 있는 고로 상(賞)은커녕 구원도 받지 못하니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자기를 위함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 때에는 무조건 그것은 믿음도 구원도 영생도 일절 아니고 한낱 종교일 뿐임을 명심할 일이다. 바울이 "부르심의 상"을 바란다고 한 것은 "구원을 이룬다"는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즉 그 '결과'를 말함이니 곧 "구원을 이룸"이다. 그래서 요한의 모친이 자기의 두 아들[야곱과 요한 형제]을 주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앉고 못앉고 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께서 결정하시는 몫이라고 설명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우리의 소관사가 아님이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모두 그런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자기중심의 위선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여 무엇이든지 하게 되어 있고 그 결과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아야 마땅한 것이며 또 그런 사랑에 따라 그런 열매의 차등도 생기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님의 일을 완수하려는 것과[요 4:34], 자기의 상 타는 것 즉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나아가기를 욕심 내어 또는 주님과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리게 되기를 탐내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로 본질이 서로 다른 것이다. 이 점을 혼동하지 말 일이다.

그리스도 재림 때 그렇게 영광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이 심판대에 서는데, 위의 말씀대로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하나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염소"들은 처음부터 믿지 않는 자로서 교회 중에 섞여 있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상 비유에서 그들이 주님 앞에 쏟아놓는 변명들을 들어보라[마 7:22/25:45]. 믿음이 있어 능력도 행하지 않았던가.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귀신이 쫓겨나고 선지자[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런즉 아담이 산 자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린 것과 같이 또는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이 거룩한 천사들처럼 "자기 지위를 지키면"[유 1:6] 즉 영생하는 자로서의 마땅히 할 도리를 따르면 즉 하나님께 복종하면 되는 것인데도 오만하게도 하나님 정하신 삶의 법에 대해 "과연 반드시 그럴까? 내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해도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여 빗나간 결과 영원 멸망에 처해진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이요 우리 구원이 현재 시제(時制)임에도 불구하고 미래 시제로도 표현되는 것이다[빌 2:12/딤전 4:16/고전 9:24-10:12/15:2/빌 3:8,9/딤후 3:15/벧전 2:2/히 3:6-17].

마치 현재 구원 받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으로 여겨 사후(死後)의 막연한 미래의 일로 설정해놓는 불교나 이슬람교 천주교와 같은 세상 종교에서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면서 동시에 같은 편지에서 같은 말로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4:4] 한 것이니, 이 기쁨은 구원 받아 현재 산 자가 되어 있는 기쁨이요,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나아가시면서도 주님 친히 그 넘치는 기쁨과 평안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실 정도의 생명력인 것이다[요 14:27/15:11/16:33].

천주교가 현재의 믿음으로 인한 은혜의 선물로서의 구원을 믿는다면 마리아를 왜 앞세우는가? 왜 연옥과 같은 구닥다리를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현재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고[고후 4:11/5:14]  생명[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남녀를 불문하고-천국에는 천사와 같이 성별이 없다-눅 20:35,36]이 되어 있기 때문에 향유할 수 있는 생명의 기쁨과 평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다시 죽을 수 있다는 말이냐 한다면, 이렇게 되묻게 된다. 아담은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 창조되었는데 왜 죽은 자가 되었느냐? 그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애당초 창조 때의 하나님의 의도도 아닌데도 그 스스로 죽은 자로서 자기를 만든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지킨 것이고 아담이나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지키지 못한 것이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지키지 않는 쪽을 택한 결과다. 이것이 모든 인격성을 갖춘 피조물에 보장해주신 완벽한[절대적인] 자유 의지의 의미이다. 절대적이라 함은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번 정하신 것이어서 하나님도 그 자유를 좌우지하실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간섭이나 강제하지 못하고 오직 그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니 그래서 영원한 운명을 각자 스스로 정한다 함이다. 스스로 정하니까 당연히 두려워하고 떨 일이 아닌가. 아담이나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그렇게 스스로 정한 멸망의 선례(先例)가 뚜렷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다.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terror"-흠정영역]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는 것임"을 명백히 한 바울의 경고가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고후 5:9-11]. 또한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할 것이니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할 것이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다"[고전 15:51-53] 했으니, 즉 부활의 두 가지 양상을 가리킴이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셨다' 한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게 될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않기로 주의할 일이다"[롬 14:10-13].

형제를 대해서 판단한 일에 대하여 바로 심판대에 가서 그 죄를 자인하게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 때에는 죄를 용서하는 때가 아니다. 죄 용서는 이 세상뿐이다.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형벌로 곧장 들어가는 때다. 때의 특성이 서로 완연하게 다르다. 그 때는 용서가 없기 때문에 "심판"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악간에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도 했거니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실"[2:6] 것이라 한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지금까지 산고(産苦)의 극통(極痛) 속에 지낸다고 한 대로[롬 8:22] 지금은 삶의 낙을 누리는 때가 아니다. 사람들 구원하는 때요 악인과 선인[의인]을 영구적으로 구별하는 작업을 하는 때이고 따라서 시험하는 때이다. 그래서 일견 뒤죽박죽처럼 보여 악인이 흥하고 창성(昌盛)하며 의인은 오히려 고난 중에 있는 것이다. 이런 데가 어찌 사람 사는 데인가.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인생들을 "죽은 자"[마 8:22]라 명시하셨다.

때문에 왜 혹자는 살만큼 오래 살지 못하고 중도에 죽고 그것도 이유 없이[즉 악행으로 인한 벌을 받는 등의 "정당한"(이는 인간의 생각일 뿐) 사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어 나가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했을 때[눅 13:1-5] 산다는 것 자체를 사는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다시 말해 마땅히 살아야 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인정하시지 않고 망하게 되어 있는 자가 결국 회개하지 않고 "망하는" 것으로서 명백히 밝히신 것이다.

그러면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지 않는가. 물론 죽는다. 그러나 그 양상(樣相)과 의미가 하늘과 땅 차이다. 전자는 죽은 자로서 당연히 죽는 것이고, 후자는 산 자로서 죽음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 죽음까지도 "유익한 것[gain-빌 1:21]"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죽은 자의 모습을 취하시고 그리하여 우리 위해 죽으셨으나 시종일관 산 자이셨던 것과 같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게 되어 있음을 가리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은 자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고자 하는 것이 무익할뿐더러 자멸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하심을 입어 산 자가 되어 있어도 [산 자가 되었다고 해서 이 세상이 삶의 낙을 누리는 무대가 아니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된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지내시던 꼭 그대로의 죽은 자의 형태를 취한[자연계에 속한 육체 그대로 있으므로] 죽은 자의 행보(行步)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죽었다"[골 3:3] 한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으니[:3] "나타나는" 것은 생명의 낙이 아닌 죽음의 고통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 세상에 처하여 계시는 그 자신의 모습을 가리켜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그 둥지가 있되 인자는 머리 둘 데도 없다"[눅 9:58] 하셨다. 이는 인생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죽음의 고통임을 설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이요 어두움이요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권세 일색(一色)이니 이러한 죽음과 어두움과 악마의 장중(掌中)에 있는[행 26:18] 실상과는 반대로 생명이요 광명이요 자유와 번영으로 이 세상을 색칠해 놓고 천하 인생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악령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다[계 12:9].

속이니까 깜빡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고 속아 넘어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살려고 기를 쓰고 덤비는 것이다. 검은 것을 희다 하고 죽음을 생명이라 하고 속박과 구금의 종 노릇하는 것을 자유라 하여 대립[대칭] 개념으로 이 세상을 가장해놓고 있는 마귀다. 이 세상의 지배자가 악령 마왕(魔王)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인 것이다. 그리고 악령들의 패거리들이 "네피림"이라는 별도의 조직으로 이 세상 인생 중에 충만해 있어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여 구원 받아야 마땅한 모든 인생들을 제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이 말하자면 마굴(魔窟)이 되어 있는 셈이다. 이 사실에 눈 뜨게 하는 것이 전도요 이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요 그래서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을 행함"이다. 또한 하나님께 대하여 똑바른 인식을 할 필요가 있으니 내게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요[빌 1:21]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이요[갈 2:20]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알지 못하는 상대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니 "하나님을 알고"[호 6:3] "그리스도를 알고"[벧후 1:8]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히 3:1]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알기 위해 알아도 정확히 알기 위해 스스로 부지런히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정상이므로 이에 대한 대가는 필연인즉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께 대한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전체 인류를 위하심임과 동시에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이를 바울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그 자신을 주신("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시라고 명백히 했다.

이는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다 세시고 있다는[눅 12:7] 말씀과 그 흔한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마 12:29] 말씀으로 확인하신 바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착각하는 데에 항상 근본적 문제가 있다. 사람은 전체를 상대하면 개인을 상대할 수 없고 개인을 상대하면 전체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한 육체[형체]로서의 피조물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피조물은 그것이 "영(靈)"[히 1:14]이든 아니든 일정한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 특성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천사들이 영"[:14]이라는 것과는 전연 별개의 의미시다. 천사들[영물들]은 영이라도 일정한 형체[우리로 말하면 육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 피조물처럼 생각하지 말 것이니 전체를 상대하시면서도 개별적으로 완벽하게 상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말씀을 바로 그런 측면에서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가리켜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갈 2:20] 분이라고 밝힌 것이요 이것이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20]이라 한 것이다.

우리가 구원된 것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됨으로 인한 것이므로 둘이 하나되는 구성에서는 그 둘을 이룬 어느 쪽도 두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즉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되면 갑이든 을이든 갑과 을의 삶을 동시에 살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갑은 갑 자신이 아닌 을의 삶을, 을은 을 자신이 아닌 갑의 삶을 살게 되어 있으므로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한 것이다. 이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 또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함과 똑같은 표현이다.

그런즉 우리는 당연히 그리스도께 대하여 각자 나름대로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배우도록 하신 것이다. 즉 계시로 말미암는다[마 11:27]. 그래서 성경을 부지런시 읽으며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8]이다. 그래서 그 외의 것으로서 이 지식에 방해되는 것을 "모두 해로 여긴다 했고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했다[:8].

§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보답하시고, 오직 자기중심이 되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라 행하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신다"[롬 2:7-10]. 우리말 번역은 "당을 짓는다"[:8]라고 했고 흥정영역[KJV]도 "contentious" 즉 다투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자기 위주로 나가니까 자연 당파를 짓게 된다고 의역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오역이다.

New KJV에서는 "self-seeking" 즉 "이기주의", "자기중심"으로 번역하고 있고 NIV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고 사람을 차별하지 아니하심이다"[:9-11].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 행적은 일체 불문에 부치고 오직 현재의 상황[선을 행하느냐 아니면 악을 행하느냐]대로만 판단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의미다.

이 세상은 물론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과거 행적도 참작하시고[히 6:10] 은혜를 베푸시어 회개에 이르도록 책망하시는 등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시나 강제하시거나 간섭은 아니하신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모든 것의 기준은 현재이니, 따라서 현재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영원세계에 들어가 심판대에 이른 경우에는 전혀 그런 과거의 행적이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음을 성경은 처음부터 천명하고 있다[겔 33:12,13]. 과거는 오직 현재를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대목에서 믿음 유무를 기준해서 심판하신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로 처음부터 구원을 얻는 것처럼 그런 색채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제 우리가 믿었으니 당연히 그 믿음은 믿음에 수반되는 복종 여부로 저울질되기 때문이니 이로써 말로만 믿는 것이냐 아니면 마음으로 믿어 그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위가 나타나느냐가 가름되어진다. 즉 우리의 믿음이 처음 믿을 때의 회개를 통한 순종의 약속에 좌우되는 고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라 한 그대로다[약 2:17,20].

우리 믿음은 반드시 순종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되는 특성을 처음부터 지니기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이다. 이는 힘써 믿음을 지키라는 의미이니 믿음은 순종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될 것"[요 5:29]이라 하심은 당연하다. 각 교회에 보낸 사도들의 편지가 각종 경고로 가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경고를 무시할 때 그 결과는 불문가지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경고를 오늘날 설교 강단에서 한마디도 들을 수 없다는 현실은 오늘날 이 시대가 얼마나 진리에서 이탈하였는지 그 충분한 증거가 되고 있다. 온 세계적인 "배도"의 현상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다소곳이 믿고 의지하고 나가면 이런 오류와 거짓과 이단 사상에 빠져 들 리가 없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을 사랑하여 "이 세상에서의 자기 생명을 사랑하기"[요 12:25] 때문에 이런 억지와 무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죽음의 세상으로서 한 낱의 가치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구원 얻는 데에만 의의가 있고, 자기가 구원 받았으면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성경의 모든 경고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장 먼저 이 사실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진노 앞에 있는 세상이요 따라서 그 앞의 인생들이라는 현실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바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요 6:45].

이렇게 배우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올 수 없음이다[:65]. 나아왔다고 스스로 여겨도 나아온 것이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니다. 자기 기만일 뿐이다. 자기를 속이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으니 이런 사람은 장래 희망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가장 첫째되는 기본 단계가 이 세상과 나 자신의 죽은 상태임을 깨닫는 것이다. 내 스스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 하나 됨으로 인하여 그를 성령으로 내 안에 모심으로 말미암아서만 이 죽음은 해소된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났다고 하여 이 세상에서 삶의 낙을 누려도 좋으냐 하면, 위의 지적과 같이 세상은 여전히 죽음의 상태이지 하나님 앞에서 삶의 현실이 아닌데 어떻게 이런 죽음의 곳에서 여전히 살기를 바랄 것인가. 과거에는 몰라서 그랬지만 이제는 알고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어 산 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과거처럼 여전히 살고자 한다는 말인가. 사는 것은 삶의 터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죽음의 곳에서는 시종 죽음밖에 없다.

이런 세상에서 산 자가 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사람들을 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스스로 깨닫고 먼저 산 자가 되게 하는 이 일 외에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즉 '사는 데'가 아니라 힘쓰고 애써 '일하는 데'가 이 세상이다. 일하는 자가 어찌 편히 쉬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삶의 낙을 누리는 것은 일한 다음의 쉬는 것을 말함이다. 쉬는 것[안식]은 일을 마친 다음의 순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6일간 일하시고" 마치신 다음에 "쉬셨다"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새 창조에 다시 착수하신 터이므로 지금도 일하시는 것이지 쉬시지를 못한다[고후 6:1/요 5:17]. 그러므로 모름지기,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여 그래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에게는 구원도 생명도 미래도 없다. 오직 죽음과 영원한 환난의 미래만이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가장 확실한 첫 걸음이 바로 이 죽음의 실상을 아는 데에 있다. 그래서 빌립보 간수도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자기 자신이 죽은 자임을 직감한 것이다[행 16:30].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증명이 아닌가[고후 5:14]. 즉 이 세상의 실태, '나'라는 한 인생의 실상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정확히 그려 주신 것이다. 그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현실의 묘사 그대로다. 살고자 하니까 돈을 사랑하고 그래서 부유하기를 바라게 된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부유해지기를 바라는 자는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는 것이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딤전 6:9]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10] 함과 같이 멸망이다. 믿음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그러하다. 살고자 하니까 부유하게 살아야 하고 고귀한 자로 살아야 하고 강한 자로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없는 자, 천한 자, 약한 자로 통해 있는데 어째서 이것이 사는 것인가[고전 1:26-28]. 만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믿는 자마다 모두가 강한 자, 있는 자, 고귀한 자로서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죄인과 악인도 역시 그렇게 되기 위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려 할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선과 의를 사랑해서 의와 선을 행함이 아니라 그렇게 세상에서도 강한 자, 있는 자, 높은 자가 되기 위함이 그 목적이므로 자기중심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렇게 되면 혼란이고 모순이고 뒤죽박죽이 된다. 이런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는 데에서도 이상 설명의 정당성을 찾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또는 살고자 하는 것과는, 물과 기름 사이라는 것이다. 결단코 화합할 수 없음이다. 따라서 세상 사는 재미에 묻혀 지내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하는 한 구원은 없다. 아예 구원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모르는 것을 어찌 목숨을 걸고 믿을 수 있다던가. 하나님의 축복 받아 이 세상에서 내로라하고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경우 불문곡직하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단 사상이라 단정하면 틀림이 없다. 천하없는 기적을 행해도 그 기적은 마신(魔神)이지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은 아니다. 우리가 산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처럼 살아야 사는 것이다. 이 세상 죄인들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의 있는 자, 높은 자, 강한 자로 살 수 없음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일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그런 높은 자, 강한 자, 있는 자와 더불어 서로 경쟁이라도 붙었다는 말인가. 이런 사고방식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나 좋아할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사니 당연히 이 세상의 악인과 죄인들은 상대적으로 못살아야 그런 말이 제대로 먹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 신(神)이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요 이 세상 임금으로서 지배자인데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꼭두각시라는 말이던가. 어느 모로 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이익[잘 살아 돈도 많고 생활이 풍부하고 대우도 받고 어느 정도 권력도 부리는]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분쟁, 갈라 시기 등]이 일어나는[딤전 6:5,6] 것이라고 함이 옳다. 반면에 "족한 줄 아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믿음 생활]에 큰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6]. "족한 줄 안다(知足)"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므로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7] 것은 당연하니 단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충분하다고 여기는"[:8] 것을 말함이다.

일하는 데에는 이로써 충분한 것이다. 살고자 함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시어 부한 자로서 가난한 자가 되셨으니[고후 8:9] 우리도 그 본을 따름이다. 이 세상을 무대로 하여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의 전쟁 중인 자가 어째서 살고자 하는 삶의 낙을 꿈꿀 것이며,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려 하는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없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전쟁 중이지도 않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마수로부터 인생들을 건지려는[행 26:18] 노심초사도 없다면 그렇게 할 일이다. 성경을 전연 믿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일이다. 오늘날 그렇게 성경을 믿지 않는 이들이 "성경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이들 중에 절대 다수다.

그래서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고전 1:26] 하였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시어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시어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신다"[:27,28]고 했다.

이런 세상에서 이런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 끊이지 않는 데에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변함없는 좁은 길, 좁은 문이다. 게다가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셨다.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고도 하셨다. 진리를 알도록 계시(啓示)해 주시는 것도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라 하셨다.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어떤 이에게는 죽어도 못하는 그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임을 어찌 하리요.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신 자는 적다. 택하신 자가 적다는 것은 이러한 세상의 양상을 미리부터 내다보셨다는 의미다. 베드로는 의인이 겨우, 가까스로["scarcely"]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벧전 4: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신학적으로는 그런 "배도"의 물결이 온 세상을 휩쓸고 있으나 개개인으로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으로["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위의 주님의 비유에서와 같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모든 사랑의 행위가 생활화되어 있는 이들은, "복 받은 자들이여, 너희를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라"는 축복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다.

그런 왜곡된 가르침에 관계없이 오직 성령의 친히 가르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그런 "배도"에 물들지 않은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은 것이니, 일면 상당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실상은 이상 지적과 같이 비극적이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하심을 받은 자는 적다. 우리 자신은 모르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를 따라 미리 정해놓으시고 거기 따라 구원하시고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런 편파적인 일을 하실 하나님이 아니시다. 오직 그와 같이 어린 아이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줄을 미리 아시고 그 사랑과 믿음에 아무 지장이 없도록 처음부터 조처하신다는 그 의미가 성경에서 말하는 "택하심"이다.

이것을 모르는 채 그냥 무작정 조물주의 권한으로 이 자는 구원 받고 저 자는 멸망에 처하기로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나 하나님만이 아시는 이유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조물주로서의 심오한 권위로 그렇게 구원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별하신다고 흔히들 착각하여 잘못된 주장을 하지만, 피조물과 사랑으로 하나 되어 계시는데 그렇게 당신께서만이 아는 이유로 모든 일을 처리하실 리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오히려 피조물들이 모르게 무엇을 하신다는 오해를 사시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개방해서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특징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는 비밀이 없으니 비밀이 있다면 사랑으로써 마음이 하나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 같이 철부지하면 모르지만 양식과 상식을 주시어 만사를 스스로 판단하여 진행하고 움직이도록 인간을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 어찌 그 뜻대로 행한다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기계적인 순종의 '인간 로봇'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없다고 100프로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종들에게 장차 하실 일을 미리 일러 주시지 않고서 하시는 일은 없다고 성경은 처음부터 선언해둔 것이다. 우리 인간에 관계되어 이루시는 일은 모두 그러하시다. 미리 아신다는 점에서는, 사람도 자기 창의성을 발휘하여 무엇을 창작해서 새로 만든다면 그 만든 것의 장래를 미리 보듯이 세세히 알고 만들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감히 두려워서 그것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가령 내가 로봇을 만들었다 할 때 그것이 혹여 괴물로 둔갑하여 인간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될 때 감히 그것을 만들겠는가. 바로 그런 것과 똑같은 상식적인 것이 이 "미리 아시고 택하심"이다.

§  소위 "교회"에서 말하는 바가 다르고 성경이 말하는 바가 다를 때 그리고 그 "교회"가 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가르친다고 공언하고 있는 이상, 우리 스스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가. 성경이 베뢰아 사람들을 칭찬한 것은, 능력 있고 고명(高名)한 사도 바울이지만 그 이름과 능력에 쏠려 치우치지 않고,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이 성경이라 하니 그 성경 자체에 최종 권위를 두고 거기 의존하여 "과연 그런가" 하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그 결과 "믿는 자가 많았다"는 데에 있다.

필자도 17,8세부터 시작하여[그 후 한 20년간은 하루 5시간씩 성경을 읽는다고 법석대기도 하는 등] 지금까지 반세기 이상을 성경을 부지런히 읽는다고 하지만 지금 이 글도 마치 과거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 같은 새로운 감각으로 써 나가고 있다. 남들보다 건망증이 심해서인지는 몰라도 한번 깨달았다는 것도 잊어 먹고 기억 못하기가 다반사다. 그래서 과거 써놓은 글을 본인이 읽지만 거기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은혜스럽다고 할 때가 많다.

이와 같이 한번 깨달았다고 전부가 아니라 계속 되풀이하여 읽음으로써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 지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까지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여 부지런히 읽어야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하면서도 지금 이 시간에도, 이전에는 한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이제야 그 동일한 성경 구절 가운데 필요한 말씀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겨우 뱔견하고는 "그러면 이전에는 눈을 감고 읽었던가" 하고 스스로를 한스러워할 때도 있다.

눈을 감고 읽었다기보다 성령께서 구절구절마다 친히 짚어 일러 주시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는 알 수가 없다고 해야 옳은 말이 될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단계적으로 가르쳐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오늘 깨달아야 할 것이 있고 내일 알아야 할 것이 있는 등 구별해서 가르치시므로 따라서 우리는 매일 부지런히 성경을 대하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면 그만큼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결론이 되므로 그런 것이다. 베드로도 "너희가 다 잘 아는 바이지만 항상 너희로 다시 기억하게 하려 한다" 하지 않았던가[벧후 1:15-17]. 이 절대적 필요성은 고금을 통해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다.

§  매양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의 죽음의 현실을 똑똑히 직시하지 않고서는 믿음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므로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하셨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대한 인식을 끝까지 유지해야 우리의 믿음도 끝까지 유지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일이므로 수시로 변할 수 있어 성경은 이 마음에 대해 별도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한 것이다.

때문에 항상 주님을 마음에 모실 것을 경고하고 있고 또 이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엡 3: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이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나의 주인, 소유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벧전 3:15] 함과도 같다. 이는 항상 주님의 모든 말씀[뜻]에 대한 절대 순종을 의미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주님께 복종하고 있지마는 마음의 일이기 때문에 날마다[가능하다면 '시간마다'] 우리 스스로를 닦달할 필요가 있음이다.

왜냐면 어느 새 내 마음은 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 한 대로 날마다 시간마다 마치 처음 믿는 듯이 "믿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삼는" 일을 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의 요지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 '구원 얻는 믿음'의 실상이다.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을 지키는"[잠 4:23]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믿는 마음, 주님을 모시고 사랑하는 마음 곧 그리스도를 주(主, 나의 주인, 나의 소유주)로 삼는 마음이 다른 것으로 변할 수가 있음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다른 마음, 자기를 위해 사는 마음이 어느 새 꽉 차게 될 수 있음이니 이것이 곧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말한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마음에 가득함"[행 5:3]이 된다. 항상 경계하여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는"[고전 10:12] 것이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 믿기로 작정하고 대중 앞에서 세례 받는 것으로써 "믿음"이 종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종교가 아니라 삶[생활]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상적으로 올바른 일상생활을 꾸려 나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면 그 정상적인 삶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요 4:34].

바로 이것이 생명[영생]의 낙인 것이다. 같은 생명의 낙도 이 세상에서의 것과 영원한 천국에서의 것이 다르다. 생명의 낙은 천국에서나 지금 이 세상에서나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고 그리스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있으나, 천국에서는 순수한 생명의 낙인 반면, 이 시한부의 세상에서는 그 "생명이 감추어져"[골 3:4] 있고 "죽은"[:3] 모습이 되어 있다는 그 차이에 있다.

그러나 낙은 낙이니 변함없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반드시 낙이 있게 마련이다. 비록 죽음의 모습으로 있어도 그래서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지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죽음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생명의 평안과 기쁨과 생명의 증거인 의로운 행동으로 일관하니[롬 14:17],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함과 같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나아가는 길목에 서 계셨어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듣고 기가 죽어 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면서 이 성령의 평안과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요 14:27/15:11/16:33] 하신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평안, 희락, 오래 참음[longsuffering]과 자비[gentleness]와 양선[goodness]과 충성[faithfulness]과 온유[meekness]와 절제[self-control]"[갈 5:22,2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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