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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39
글쓴이 김일동 조회 407

 

바로 이 성령의 열매대로 사는 것이 "선을 행함이고 의를 행함"[요 15:1,2,4,5,8,16/마 7:19,20/21:43/막 11:13,14/눅 13:6/벧후 1:8] 인 것이다. 천국에서도 "보내심을 받는다"는 사실에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갑과 을이 둘이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에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고 또는 몸의 각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따라 행하는 것을 가리켜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한 몸 구조에서 그 각 지체가 되어 있으니 영원히 머리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 이웃 각자를 대하는 것이다. 즉 머리의 지시를 받아 행동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후 5:15]는 뜻이다.

사람 삶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과 함께 삶이 기본이고 그 정상적인 모습이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롬 1:28]으로써 멸망하는 사실과 대조된다. 범죄로 인해 멸망에 처해진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운명,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 모두 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있다. 이제 우리는 구원 받아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두는 즉 모시는 위치에 오게 되었으니[행 2:25] 곧 마음에 주님[절대 복종해야 하는 우리의 주인, 소유주]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 곧 일상생활이 되어 있음이다.

주님과 사는 매일의 생활이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는 것이요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니[살전 5:16,18] 왜냐면 주님 친히 내게 울타리가 되셔서 나를 감싸시는 매일의 생활인데 좋지 않은 것[악]이 내게 넘겨다볼 기회가 없음이다. 주님 친히 자기를 지키시므로[이 "자기"는 나와 둘이 하나되어 있는 자기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함이다[요일 5:18].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악을 선으로 이기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름이다[살전 5:15].

왜냐면 그 사람을 우리의 선행을 통해 모쪼록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벧전 3:1].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고"[살전 5:14],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게 된다[:21,22]. 이런 것이 모두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함이 아니면 무엇인가. 쉬지 않고 기도하고 성령을 소멸치 않는다[:17,19].

우리가 이렇게 할 때에 한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하시니"[:23] "우리를 부르시는 이는 신실하시므로 그가 또한 이루실"[:24]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치명적인 오류에 빠져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행함[절대 복종]과는 일절 관계 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이 아닌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우리의 믿음이 반드시 우리의 복종을 수반하는 것이니 왜냐면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소유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함[자신을 선물로 내게 주셨으므로, 그래서 구원이 선물이다]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소유하심도 내가 그리스도를 소유함도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친히 그 십자가 사랑에서 보듯이 친히 자신을 내게 주셨기 때문이요 나 역시 주님을 사랑하여 나 자신을 주님께 스스로 바침으로써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소유이니 하나님께 절대로 복종하는 것이 그 소유물이 되어 있는 증거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나의 소유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소유가 되셨다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친히 하시는 모든 일이 나를 위해 하심이라는 사실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엄마가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는 바로 그것과 같다. 아이 스스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엄마가 아기를 대신해서 아이를 위해 움직여 주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좋으신 대로 나를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내 스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움직임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룬다는 데에서 즉 복종하는 데에서 그 의미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그리고 모든 하시는 일이 모두 나를 위하고 우리를 위하시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상천외하게 해석하려는 해괴한 일이 벌어져 전혀 엉뚱한 의미로 알아들어, 복종의 행함과는 일절 무관하게 구원 얻는 믿음을 착각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경고한 바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요 헛것'이니, 그러면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함이 없을 때 나는 무슨 행함이 있는가. 무엇이든 행하기는 즉 움직이기는 움직일 것이니 그러면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면 나 자신을 위함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도 나 자신을 위해서 행하시는 것, 내가 행하는 것도 나 자신을 위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의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이라는 말이 된다. 욕심도 그런 욕심이 없고 염치까지도 없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도 그런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자기 분수는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수도 모르는 욕심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하나님의 구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의미를 전연 모르는 채 믿는다고 믿는 것이니 성경에 대한 무지(無知) 가 이 정도이다.

우리가 앞에서 인과 관계를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과론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불교의 교리임을 지적했거니와 이런 일반적인 개신교의 교리 역시 그렇다. 전연 차이가 없이 똑같다. 왜냐면 우리가 구원이 필요하게 된 직접 요인이 아담의 범죄인데도[롬 5:12] 이를 완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여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하였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었으므로 이 죽은 자를 벗어나 산 자가 되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구원될 때는 그 원인인 사랑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아 죄 지은 것을 마땅히 제거해야 우리 구원이 이루어짐이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원인 제거도 없이 결과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개신교의 일반적인 교리이므로 당치도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의 원인이 된 불복종 즉 범죄 행위를 척결함이 없이 그냥 거저 주시는 은혜를 강조한다면 그러면 진작 이런 조처 혹은 비슷한 조처를 취하시지 않음으로써 아담은 불복종으로 죽게 되었으니 이는 명백히 모순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움직이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명성(鮮明性)을 인간이 들어 흐트러뜨려놓고서는 하나님을 오히려 원망하는 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여 항상 그를 마음에 두는 것과 똑같은 그런 사랑의 상대이신 사람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이시므로 이것이 인간 삶의 기본이고 정상적인 모습이기에 아내/남편을 기쁘게 하려 하는 것은 "세상 일을 염려함"[고전 7:34]이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 먼저 와야 하고 이 기본 위치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지 않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1-40].

때문에 "부모 처자 형제 그 무엇이든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할 때는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고 더 사랑할 때는 그리스도께 합당치 않다"고 선언하신 것이다[마 10:36-39/눅 14:26]. 이전처럼 세상에 여전히 안락하게 살면서 구원 얻는 믿음을 생각할 일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항상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있음이니, 세상을 사랑하느냐,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느냐 양자택일의 문제다. 왜냐면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쉴 새 없이 시험하여 이런 선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절대로 아니다. 둘 다 얻으려 하면 둘 다 잃는다. 실제 그 둘 중 하나는 감히 비교 상대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하찮은 것에 대한 미련을 그리도 못 버려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 일을 많은 사람이 실제 택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내일 하나도 확실하게 기약 못하는 인생 삶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일에 관해 충분히 생각할 충분한 시간만은 부여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요 인간 생애다. 쓸데없는 데에다 허송 세월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짧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뿐이다. 만고 천추의 한이 될 일을 저지르지 말 것이다.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 따라 행동하여 순종하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무슨 신비한 것도 아니고 특수한 것도 아니다. 일상용어로 표현하면 신념에 사는 것뿐이다. 옳다고 믿고 그것이 사람 도리라고 인정하면 자기 소신대로 사는 것이지 환경이 여의치 않고 여건이 불리하다고 그 믿음을 꺾거나 타협 양보한다거나 하면 가히 사람이라 하겠는가. 남들을 대해서는 눈 감아준다 하여도 자기 자신일진대 그런 자기를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이상 말씀으로 보나 기타 성경[신약]의 모든 내용으로 보나 믿는 사람이 "적고" 구원 받는 자가 "적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믿고 구원 얻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적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나 속임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가급적이면 많은 신자를 확보함에 있고 가능하면 전 세계를 그 영향권 내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절대로 구원 얻는 자는 적다는 등의 그런 실망을 안겨 주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낙담하기 좋을 만한 그런 언사는 쓰지 않는 법이다. 오직 그것이 진실이고 진리일 때 한해서 그런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다. 이는 상식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한 대목만 보아도 성경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이고 절대로 거짓이나 속임수가 없는 진리임을 자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욕심이 없는데 무슨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믿는 자가 처음부터 소수라고[때로는 극소수] 표방하는데 거짓말이 발을 디딜 틈이라도 있는가.

§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순서다. 임금의 잔치자리에 초대되어 온 사람이 예복 입지 않았다고 쫓겨나게 된 것이 어떤 사연인가. 잔치를 배설한 왕의 체면을 배려해 주는 마음조차 없는 탓이 아닌가. 잔치자리에 평복을 입고 앉아 있는 일이 어디 있는가. 예복은 왕궁에서 다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가져다가 입으면 되는 것이다. 잔치 음식이나 먹고 재미나 보고 자기만을 생각할 뿐 자기를 초청해 준 왕에 대해서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태도이기 때문에 왕의 진노를 산 것이다.

자기 구원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고후 5:15/롬 14:7-9]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의 결말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을 성경은 단죄하는 것이다[롬 2:7].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질서 확립 측면에서도 설명하게 된다. 즉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음이다. 여기서의 "예복"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목적이니 곧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다. 한 몸 체제에서는 반드시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삶이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성경은 설명하는가. 단순히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 했는가? 아무도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도록 하심이라[롬 14:7-9] 하지 않았던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 바로 한 몸 체제에서의 '질서를 따름'이다. 즉 자기 부인이요 그리고 이것은 거룩함으로 통한다. 이 거룩한 그 끝 순서[단계]가 영생인 것이다[롬 6:22]. 죄를 지으면 그 끝이 죽음인 것과 마찬가지의 과정이요 경로다[6;21].

왜 그 마지막이 영생인가. 머리의 지시에 철저히 따르니 한 몸 체제의 일원(一員)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춤에 아무 하자가 없음이다. 여러 모로 시험해보았으나 결격 사유가 발견되지 않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친히 머리로서 내 안에 계시니 "아들이 그 안에 계시는 자면 생명[영생]이 있다"[요일 5:12] 한 그대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심이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 관계로써 계신다. 사랑 없이 둘이 하나로 합하여[고전 6:17] 계속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시다. 인격적 존재이시다. 따라서 사랑이 주제가 되고 핵심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은 궤변의 명수다. 그가 얼마나 궤변에 능한지는 에덴낙원에서 여자에게 접근할 때부터 이미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성경과는 다른 내용을 만들어서 믿도록 가르치는 것이 궤변의 "배도"이다. 성경과는 별개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게[살후 2:12] 된다. 불의가 무엇인가. 옳지 않은 모든 것이다. 옳음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창조하시던 당초의 목적을 따름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가 그 한 몸의 지체처럼 살도록 하심이었으니 여기에는 자기 부인이 필수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함이니, 자기를 위함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이 한 몸의 구조 안에서의 삶은 모든 피조물 개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산출할 수 있는 값의 최대치다. 그 이상은 없다. 그래서 자기 부인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을 의[올바름]라 하고 선[좋은 것]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부인을 버림은 불의 곧 옳지 않음이요, 사람 사는 도리에 전혀 맞지 않고 어긋남이다. 곧 믿음을 지키지 않음이요 생명의 법질서를 따르지 않음이다. 한 몸 체제로 사는 것이 불변의 법이요 영원한 질서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빌 3:18] 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즉 자기 부인을 하지 않음이다. 이 경우 "멸망한다"[:19]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단정한 것이다.

구원은 죽은 자가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살았으니 사는 것이다. 사는 것뿐이지 그 이상 달리 의미가 없다. 그래서 구원은 '현재 내가 사는 것'이다. 과거의 것도 아니고 미래의 것도 아니고 현재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현재가 아닌 과거 또는 미래로 한정시켜 오해하고 착각하는 것이다. 과거에 살았었다 하는 것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 즉 죽었다는 뜻이요, 미래에 살 것이라는 것 역시 뜻은 같으니 즉 현재는 죽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산 자가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믿음과는 전연 무관하다. 그러므로 "과거에 내가 믿었으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바울도 과거의 일은 잊어 버리고 오직 앞을 향하여 달음질한다고 한 것이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뛰는 자세임을 명백히 했다. 과거에 아무리 잘 믿어 혁혁한 공적을 쌓았다 해도 지금 믿지 않으면 과거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임을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에스겔 선지자가 의인이 지금 범죄하면 과거의 모든 의로운 일들이 고려되지 않고 오직 현재의 믿음 없음으로써만 판단된다고 한 것이 그 때문이다[겔 18:26].

이는 또 악인이 아무리 과거에 명백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오늘 현재 회개하면 그 모든 죄가 잊어 버려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27,28]. 그러므로 언제든지 회개할 길은 열려 있으니, 따라서 사람을 판단할 때 복음의 위치에서 보면 오직 현재의 위치로 판별하는 것이지 과거 어떠했다는 식으로 논할 수가 없음이 이 때문이다. 사람의 품성이야 별로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새 피조물됨의 여부다. 새 피조물되어 회개했느냐의 여부로써 말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을 하는 삶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는 비결이다. 이상과 같이 현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인 삶이 아니면, 현재 소위 "믿음을 지키는" 일체의 것은 이른바 종교 행위밖에 나타내는 것이 없다. 종교 행위로 그치지 않고 당연한 삶의 형태로서 자연스러운 삶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 부인이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과 대칭되는 개념은 자기중심이다.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 위주로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만 해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에 상반된다[고후 5:14].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라면,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일상화한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종교 생활이 일상화되어 있는 사례는 있다. 교역자들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생활을 '일상생활화'했다 하여 그 종교화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자기 부인을 뿌리로 하는 것인 만큼 자기 부인이 없는 즉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은 종교 생활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고로 종교 생활 즉 자기 행위로 구원 받고자 하는지 않는지의 여부는 자기 부인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사랑 유무로 넉넉히 판단된다.

오해 말 것은 자기 부인은 고행이나 그와 유사한 은둔 생활이 아닌 것이다. 그런 양식은 세상 종교에서 옛부터 힘써 행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을 성경은 자기 부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가 죽은 사실을 믿는 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시작되는 삶의 아름다운 조화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그 '위함'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복스러운 하나됨은 과거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깨끗이 청산된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나의 죽음[그리스도와 함께]은 내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내 욕심대로 살지 않아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 죄를 짓지 않는 장치가 될 뿐 아니라[고후 5:14], 그리스도와 하나될 수 있는 토대가 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나를 위해 사시므로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이중 장치가 된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자기 부인은 자기를 스스로 죽임으로써 혹은 죽이는 행위와 방불한 고행(苦行)을 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풍성의 또다른 이름이요 모습인 것이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기 것으로 누리는 그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시지 않으면 내가 나를 위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는 존재로서 영원히 계시기 때문에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을 얼마든지 또 영원히 할 수 있음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은 생명의 법칙의 핵심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향유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요 이 죽음의 세계에서는 죽음을 생명을 착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 생명의 법질서는 도리어 죽음처럼 여겨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자연 순리다. 다 함께 만물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 때[롬 8:22] 이런 고통의 때를 세상에서는 생명으로 착각하고 있으므로 그 결말과 장래가 뻔하고, 또한 자기 부인을 죽음으로 착각할 것은 당연하다.

자기중심이므로 자기 부인을 마치 자기 부정(否定)처럼 착각함이다. 내가 엄연히 있음에도 없다 하고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정이다. "내가 없다"고 하는 불교 식의 그런 허튼 주장으로는 아무 해결에도 이르지 못한다. 내가 있으니 없는 것이 아니라 있되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否認)이라 하는 것이다. 내 스스로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니 한 몸 체제에서의 마땅한 도리 곧 한 몸 구조로 살아가는 법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대신 머리가 나를 위하고 나와 함께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내 이웃이 나를 위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 혼자 나를 위하는 것보다 여러 곱절로 내가 위해지는 즉 내 이웃 숫자만큼이나 곱절로 위해지는 것이다. 단지 내가 스스로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이 곧 삶의 최대 지혜인 것이다. 내 이웃의 것을 온통 내 것으로 차지하면서도 훔치는 것도 아니고 빼앗는 것도 아니니 내 이웃들 자신이 스스로 기쁘게 자신의 것을 내게 갖다 바치는 것이다. 그 대신 나 역시 절대로 나를 위하지 않고 내 것을 나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머리의 것 그리고 모든 지체의 것으로서 여겨 나의 상대를 섬김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이 자기 부인이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는 것일진대 특별히 세상 종교처럼 일정한 틀이 있을 수 없다. 평소 사는 것처럼 사는 데에 모든 것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처음 믿을 때 세례 받는 것이 있고 모일 때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으로써 충분하다. 그리고 모이면 자연히 한 단체를 이루는 것이므로 거기에 대표 격으로 그 중에 믿음의 삶에서 가장 본이 되는 이를 정하는 것이다[벧전 5:3].

그리고 형제들의 실생활에 구김이 없도록 주선하는 일이 중요하므로 구제하는 일은 초대교회부터 중시해왔다. 요한도 야고보도 이 일에 대해 그 편지에서 잘 나타내고 있다. 즉 형제가 궁핍할 때 내  식구처럼 돌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처럼 모여 합심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로 서로 덕되는 말로써 피차간 위로하며 힘을 더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초대교회는 매일 모였다 했는데 그 때는 초창기로서 당연히 그렇게 하였다고 하지만 또 오늘날은 때가 절박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 중요성은 강조되고 있다.

반드시 매일이어야 하는 강제성은 없으나 매일이든 아니든 수시로 필요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모이는 데에 뜻이 있다. 모인다는 것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로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세상 남아 있는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살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일하는 것에 우리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목적이 있음이다. 일상생활에서 전업 주부로서 아이들의 엄마로서도 얼마든지 그 일을 감당하고 수행할 수 있다.

§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의 표현은 바울 자신이 한 것이다[고후 11:4]. 복음이 전파된 지 수십, 수백 년이 지났기 때문에 생긴 말이 아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가 속히 이같이 복음을 떠나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고 한 그대로다[갈 1:6]. 이런 것은 세상에 유례없는 일이다. 이렇게 초대 교회가 생기자마자 "다른 것"이 생겨나는 것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있어 즉각 훼방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성경이 진실의 기록이고 단 하나도 거짓이 없다는 자체 증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없다. 이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교회 초창기부터 활동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기 시작하여 전력 아니 사력[죽을 힘]을 다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초대교회 더군다나 그것도 한창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바울 사도 생존시, 그것도 강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수반되어 나타나지고 있는 때부터 이런 "다른 영", "다른 복음", "다른 예수"에 휩쓸리기 시작한 것이니 참으로 놀랄 일이 아닌가! 하물며 오늘날의 일이랴.

성경이 만일 지어낸 이야기이고 그리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래서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라는 악령의 활동을 애당초 인류 역사 시작부터 밝히고 있는 성경인지라 그 성경대로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와 같이 교회가 시작하자마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가 무섭게 그와 같이 활동을 했으니 이는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함과 더불어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의 존재와 활동을 명백하게 드러낸 증거인 것이다.

물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드러내어 덕될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면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유일한 목적은 인생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 얻지 못하게 하는 데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야 마지막 심판이라도 늦추어볼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자기에게도 혹 무슨 기회라도 있게 되지 않을까 바라는 것이다. 성경의 진실성은 이런 데에서 찾아내어야 확실하고 만세 반석이 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부지런히 찾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복음"이니 하고 정확히 진단해낼 수 있는 바울 같은 사도가 사라진 지도 이미 오래다. 고로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방향을 가리키고 그 진위 여부를 진단해 주는 유일한 계책이요 나침반이 되어 있다. 바울이 예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님과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는 것이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실 것"[행 20:32]이라 한 그대로다. 주님은 성령으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이제 그 말씀은 성경의 형태로 우리 가운데 남아 있으니 은혜를 사모하여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면 얼마든지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가르치시고 경계하시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 자체를 읽지 않고 사람이 써놓은 것만을 유달리 편애하고 거기에만 권위를 두고 있으니 어찌 "배도"가 없으리요.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활동은 이미 노아 당시 즉 홍수 후 노아가 아직 생존해 있는 동안에도 여지없이 나타난 엄연한 역사적 실례로도 입증되어 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증인이요 산 증거인 노아가 생존해 있어도 사람들은 홍수의 의미를 부정하고 또는 망각한 채 죄의 길로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속히 떠나가 버린" 것이다.

그 정도의 엄청난 비극적 사실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으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이전과 같은 짓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인데도 노아가 아직 생존해 있어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니, 이런 일련의 사실들은 이 세상 신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을 입증하는 것이요, 이는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실존을 이같이 드러내어 그의 활동을 증언하고 있는 성경의 진실성을 또한 그대로 드러내는 증거이기도 하다. 또 성경이 거짓이고 속임수가 단 하나라도 끼어 있다면 이런 사례들을 열거하지 않는 법이니, 이런 것을 일부러 지어내어 삽입해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노아 홍수라는 일대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경고를 하셨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절대로 노아 생전에도 이렇게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를 꾸미지 않는다는 의미다. 진실 여부를 캐는 데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흑백 논리만 통하는 것이지 그 중간은 없는 법이다. 진실을 가려 내는 데에서는, 진실 아니면 거짓이고 거짓이 아니면 진실이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 했고 더군다나 그 표현이 사뭇 엄하고 심각하여 "두려워하고 떨라"고 하면서까지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고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 의미를 부정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겠는가, 살리는 일이겠는가. 전자에 속하지 후자에 속할 리 없다. 그렇다면 그런 경고를 일절 강대상에서 말하지 않는 오늘의 추세로 보아 완전히 "다른 복음"을 가르치고 "다른 예수"를 전파하고 "다른 영"에게 조종되어 있지 않다고 누가 가히 감히 장담하겠는가!

이런 놀라운 일이 현저히 우리 눈 앞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이 "배도"는, "불의를 좋아하고 진리를 믿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악한 자의 임함의 신호가 되어 있다. 이 악한 자의 임함이 전 세계적인 것일진대, 이렇게 진리를 떠나 자기 부인을 무시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구원은 받는다고 하는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속임수 역시 일부에 한하지 않고 보편적이고 전 세계적인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면 그와 같은 "배도'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띠는 것이 적(敵) 그리스도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거저 막연히 "떠나는 것[departure, falling away]"라고 했을 때는 이런 배도의 현상이 국지적인 개교회 차원에서가 아니라 전반적인 세계 풍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악한 자의 임함은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그들 가운데 작동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살후 2:9-12].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밑그림은 전쟁이요 전투에 있다. 그러나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니 총검을 든 싸움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막강한 세력과의 정신적, 영적, 핵심적인 전투의 현장이 이 세상이다. 여기서 교회의 밑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일대일의 백병전이 있는가 하면 대대, 연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규모의 총력전도 있는데 그것은 기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즉 기도 집회가 처처에 열리고, 그것이 전 국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때다.

군인에게는 영일(寧日)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군인이다. 이 세상에서 세상 삶을 즐기는 그런 한가한 날들, 그런 사생활을 찾는 것은 탈영병의 정신적 방황이다. 군재에 회부될 영창 감이거나 아니면 적에게 밥이 될 운명일 뿐이다. 또 하나 세상 전쟁과 다른 점은 오직 영혼을 두고 벌이는 싸움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실지회복은 영혼들을 다시 찾아오는 데에 있고 적은 이미 노략한 것을 지키고자 함이다.

원래 우리의 것인데 적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불가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전쟁이다. 우리의 앞서신 대장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서신 마지막 아담이시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을 회복하려는 수복전(收復戰), 탈환전이니 싸움이 결코 간단치가 않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로마에게 빼앗긴 이스라엘 주권을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행 1:6] 하는 뜻으로 제자들이 여쭈었을 때 주님이 주신 대답은, 영적 이스라엘의 주권 회복[나라를 다시 찾음] 전쟁임을 사실상 사인하신 것이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7,8] 하셨기 때문이다. 화려한 전쟁이란 없고 영광스러운 전투 장면도 없다. 땀투성이, 눈물투성이, 먼지투성이다. 그리고 당연히 피투성이다. 이 전쟁은 에덴낙원 그 시초에서부터 이미 포고된 바였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자의 그 후손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전쟁 상반기에는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유리하니 발꿈치를 먼저 물려야 하기 때문이고, 종반전에서야 마침내 그의 패배로 끝난다.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후손[적 그리스도]이 성도들과 싸워 성도들을 이기게 된다(계 13:7). 성도의 권세가 깨어진다(단 12:7). 그러나 마침내 성도가 나라를 영원히 회복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전략 전술을 세세히 기록한 병서(兵書)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임하신 모습인 성령께서 사령관이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설 때 칼을 빼어 드신 그 분을 뵌 것이다. 여호수아가 그 분과 일체(一體)가 되어 싸우게 될 것임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이제 우리 각자와 그렇게 함께 하심이다. 하늘에서는 이미 천군 천사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마군(魔軍)들이 일대 격전을 벌여 결국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그 수하 군세(軍勢)들이 한꺼번에 이 지구로 곤두박질쳐 떼밀려 내려 왔다.

계시록은 그러므로 "땅에 화가 있다"고 했다. 패퇴한 마귀로 인한 엄청난 화가 들이닥칠 것을 예고함이다. 그 결과 1,2차 세계대전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외의 대소전쟁과 각국의 정변과 자연재해, 세계적인 질병, 기타 재난으로 수백 수천만 수억의 목숨이 사라지고 또다시 거센 소용돌이가 2,3차로 대기 상태에 있다. 이상 예거(例擧)한 특이한 현상들은 사단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상으로 강제 추방된 때[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대 충돌]와 일치한다. 물론 하나님의 예지 예정에 의한 섭리에 의하여 그런 많은 인명 손실이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욥의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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