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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3)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41
글쓴이 김일동 조회 686

메시아 교회-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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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전쟁은 이제부터

계시록은 이 격노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성도들과 싸우기 위하여 나서는 모양을 그리고 있다.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적이다. 성경이 "성도(聖徒)의 권세가 깨어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시작하는 때도 지금부터다. 최후 승리의 교두보는 바로 지금부터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대역전의 승리는 지금 이 시간부터 시작하여 '짐승이 성도를 이기는' 때까지 그 토대가 쌓아져 가는 것이다. 패퇴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므로, 지상의 하나님의 군대 곧 성도들을 호위하는 현재의 천군 천사들의 위세 또한 결코 빈 틈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따라 성도들의 '발꿈치가 상함을 받아야' 하므로 그 한도와 범위 내에서 악한 자는 성도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되어 있다. 그 이상은 천사장 미가엘 휘하의 천사들의 위세 아래 한 치도 용납되지 않는다. 이 혼전(混戰), 곧 천사와 사람과 악령들이 한데 어우러진 싸움은 영원을 통해 이 시대 단 한 번뿐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군사(軍士)들은 이 때를 당하여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영원을 통해] 유일무이의 기회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이끈 자는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고 그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비칠 것이라고 성경은 확약하고 있다. 단 한 번 이 세상에서의 충성과 일편단심이 그토록 영원 무궁한 공훈(功勳)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개인적인 영달은 아니다. 전체 한 몸으로서 모두가 누리는 공동의 영예다. 그 때 천국에 가서 "당신은 전생(前生/이 세상 삶)에서 무엇을 하였기에 이렇듯 영광이 극(極)한가?" 할 때 그대는 눈물을 머금고,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고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 주님의 은혜로 당연히 내가 할 일만을 오직 한 것뿐이라"[눅 17:10]는 답변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라.

그리스도인이여, 영원세세 주님을 위한 충성을 나타내 보일 기회는 이 단 한 번뿐임을 다시 강조한다. 이런 기회에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런 기회는 영원을 통하여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이런 기회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놓치는 아쉬움은 아마 영원을 두고 '이를 갈며 슬피 우는' 바로 그런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랴? 그런 비극적 결말 없이 영원무궁토록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하라.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한 이는 영원토록 비췰 것이다[단 12:3].

적을 무찌르는 우리의 총검(銃劍) 곧 "성령의 칼"[엡 6:17]은 무엇이냐.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나타난 그대로다. 아버지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 그 나라를 알리는 것, 우리를 향하신 그 뜻을 알리는 것이니 곧 우리가 진정 어떻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인가 하는 그 사람 삶의 법과 질서를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첫째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똑바로 알아야 하고 그리고 그 참된 앎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마 11:27].

현재 이 세상은 "어두움이요 혼돈"[창 1:2]이다. 6일 창조 이전과 같은 상황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다[롬 5:12].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이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두움과 혼돈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충분히 주신 바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거 이지(理智) 가 있어 그런 것을 충분히 헤아려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다. ①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안다. 이것은 종교가 있건 없건 무관하게 양심의 판단으로 스스로 안다.

그래서 악은 벌은 받고 선은 포상되어야 하는 줄을 알고 있다[롬 1:32]. 그런데 현재 세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악인은 창궐하고 의인 또는 선인은 구박 받고 음지에서 허덕인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공자와의 동시대 인물인 악인 도척이 그러했다. 그래서 자기를 교화시키려고 온 공자에게 면박을 주었다. 즉 "천도(天道)가 어디 있냐?" 한 것이다.

살기 위해서 났으나 이왕 그렇게 나왔으면 고생스럽게 살 것이 아니라 사는 것 같이 낙을 누리다가 죽을 때는 죽는 것이 천도가 아니냐 했다. 그러나 도척은 살기 위해서 난 인간이 자기처럼 장수하지도 못하고 갓난 채 죽어가는 인생 역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세상에 일단 태어나면 일정 기간을 예외없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살면야 그것이 과연 천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지는 못하다는 것을 머리에 떠올릴 줄 몰랐으니 제 딴에는 아주 똑똑한 척 했지만 그런 머리도 하나 굴릴 줄 몰랐다.

그러니 바보인데다 그래도 똑똑한 척까지 했으니 상(上) 바보다. 도척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는 이들을 모두 성경은 바보라 규정한다[시 14:1/10:4]. ②고로 사람이 살기 위해 세상에 나는 것이 아니라 갓나서 죽고 10, 20 꽃다운 나이에 죽어가는 것을 보면 죽기 위해 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아도 답은 명백히 나온다. 첫 사람이 우연히 생겨났다 가정해도,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곧 죽는 판이니 하물며 저절로 생겨난 인생이 나는 얼마만큼 살겠다는 날짜를 정해놓고 세상에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미 입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절로 생겨난 인생이 장수하였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상 바보 중의 바보 머리다. 저절로 생겨났다면 왜 하나만 생겨나겠는가. 여럿이 여기저기에 또는 한꺼번에 생겨났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고 인간의 역사 기록에도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딱 하나만이 애초에 생겨났다는 말인데 그것 자체가 사전(事前) 고안, 설계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그 소리다. 그러므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이제는 접어 둘 때가 되고도 남았다.

아담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말을 듣고 그 거짓말을 따라 움직일 때 바보 노릇이었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을 바보로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아담 역시 그 스스로 바보 노릇을 한 것이다. 내 스스로 나를 바보로 만들지 않는 한 남이 나를 바보로 만들지 못한다. 내가 먼저 나를 바보되게 하도록 조심을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원수는 기회를 본 것뿐이다. 물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그 응분의 죄벌을 받았지만 남자도 여자도 결코 그 허물에서 무사하지 못한 것이다.

죽고 않고 살고 싶고 살다가 지겨울 때는 죽더라도 살고자 하면 천만년이라도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모순이다. 요렇게 요 모양으로 죽을 바에야 그렇게 오래 살겠다는 마음은, 인간이 만일 우연히 생겨났다면, 절대로 먹지 않는 법이다. 일정 기간 살도록 인간의 신체가 얼마나 치밀하게 짜여져 있는가. 그러면 그렇게 우연히 짜여져도 기묘하고 기막히게 아주 이지적으로 짜여져 있는데도 왜 죽지 않도록 짜여져 있지는 못했는가.

아무리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해도 그렇게 살도록 신체 구조가 되어 있으면 그렇게 조직되어 있는 그대로 일정 기간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니 그렇게 일찍 죽는 인간도 오래 살지 못함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이라고 했지만 법칙이라는 것에는 우연은 없다. 필연만이 있다. 법칙에 우연이 있다고 가정해보라. 더 이상 법칙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법칙 자체가 사전 고안, 설계에 의한 것임을 웅변한다.

그러므로 만물이 창조되지 않았고 우연의 산물이라는 바보 소리는 더 이상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시간만 낭비된다. 또 하나의 모순은 양심의 판단으로 악은 마땅히 징벌이 따르고 선은 당연히 축복을 받아야 함에도 그렇지 않음을 보는 것이다. 그 자신 스스로가 이런 전반적인 추세를 따라 함께 행동하여 양심대로 하지 않는다는 데에 그런 자가당착의 갈등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더 심한 것은 그렇게 양심 따라 행하지 못한데 따라 양심이 가책까지 받아 때로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까지도 하니 더 기가 막힌다.

그러므로 질문은 당연히 이 모든 결과의 제1원인으로서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어떻게 해서 인간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는 것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마다 양심이라는 기계 장치를 해 주신 것을 보면 분명히 양심이 가르치고 지시하고 인도하는 것을 따라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이 양심 따라 살지 못함을 고백하는 정도가 되어 있으니 그리고 살도록 치밀하게 구조가 짜여져 있는 신체 구조를 보아도 살 법한데도 갓나서 죽는 수가 수두룩하니 하나님의 진노 내지는 징벌임이 드러난다.

바로 이런 가장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것을 아는 것부터가 시급하고 이를 아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는 것이다[요 6:45]. 먼저 하나님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지경이 되어 있으니 이는 당연하다. 아버지[어버이]로서의 하나님, 머리로서의 하나님이시니, 하나님 없이는 엄마 품속을 떠나 어린 고아 같은 인생들이기 때문이다. 머리 없는 몸뚱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결과는 첫 인생이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지 않음에서 온 것임을 세상에 알려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되 최대한의 행복으로 살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뜻이다. 즉 머리와 몸 관계에서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사는 것이니 이보다 더한 행복한 삶이 조건 또는 체제는 없다. 그리고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니 그 몸이 지체를 이룬 각자는 영원히 사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행복한 삶과 영원히 사는 것, 두 가지를 다 갖춘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을 지으신 뜻이다. 그런데 이런 삶은 사랑이 당연히 그 요체다. 사랑에는 자유 의지가 그 핵심이다. 말 그대로 자유로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그 반대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는 자유다. 바로 이 자유 선택에 의해 첫 사람 아담이 올바른 사람 삶이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반대 방향인 죽음의 길을 택함으로 인한 오늘의 결과를 빚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죽음과 불행 곧 죄와 악이 세상이 사람 사는 데가 아님은 자명하다. 이 저주 받은 세상은 한번 저주 받은 것이므로[창 3:17] 폐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에 대한 일체의 애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살려고 하지 말고 이 영생하는 길, 행복하게 사는 길을 온 천하에 전하는 것만이 인간으로서의 유일한 사명이고 업무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만 온 천하에 전파되면 그 때 세상은 미련없이 막을 내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부로서의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들을 위하여 참 포도나무를 정하시고 우리 각자를 이 참 포도나무에 접붙이는 일을 하심이다[요 15: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 하신 대로,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10]이라 하신 대로, 갑 안에 을이 있고 을의 안에 갑이 있는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관계 바로 그것이다.

고로 내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 접붙여져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됨을 말하는 것이다. 둘이 하나됨에는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으로써 갑이든 을이든 자기 자신을 절대로 위하지 않음에 있다. 이것이 바로 머리와 몸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즉 사랑 면에서는 '아버지[어버이]와 아들' 곧 엄마와 아기 관계를 말함이요 법과 질서 측면[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으므로-:10]에서는 '머리와 몸'의 관계인 것이다.

이것이 사람 사는 도리요 법인 것이다. 이를 지키지 못해 아담은 범죄하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롬 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라"[요 15:12] 하신 대로, 자기 부인으로써[그리스도 친히 자기를 버리시고 우리 위하여 그 목숨을 내어 주심과 같이-10:17] 즉 한 몸의 관계로써 서로를 사랑함이다.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면 그 어느 누구도 머리를 포함해서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다.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할 때 갑과 을은 반드시 큰 자와 작은 자의 관계로서 대소, 주종, 인과 관계를 형성하므로 큰 자가 작은 자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본을 보인다 즉 솔선 수범하는 위치에 있다 하고 따라서 이는 작은 자에게 계명을 내리어 명령하는 것이니 즉 "내가 하는 것처럼 너도 당연히 함으로써 나를 따르라" 함이다. 그래서 작은 자가 큰 자를 위하는 것을 가리켜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고 "복종하는" 것이라 함이다.

이런 상호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계명, 그리고 우리더러 지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계명, "새 계명"[요 4:34],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이 같은 성격을 지니는 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린 아이라도 능히 깨쳐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니 즉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함"이다. 아주 간단 명료한 사람 사는 이치, 최대한의 행복으로 사는 삶의 도리다.

이를 아담이 지키지 못한 것이다. 왜냐면 자기를 위하지 않아야 하는데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자기중심으로 나간 탓이다. 무릇 "산 자"[:15]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야"[:15]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먼저 이것부터 제 위치로 돌림에 있음이다. "산 자"로 만드신 것이 구원인데 "산 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을 이름이다. 즉 자기 부인으로 사는 것이다. 이 자기 부인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가리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 율법, 말씀, 뜻은 우리가 한 몸을 이루어 서로 사랑함에 있고 이 사랑하는 방법은 그리스도 친히 그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본을 보여 주신 대로 자기 부인으로써 함이니 고로 요한 사도는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요일 3:16] 하지 않았는가. 한 몸의 체제에서 이 자기 부인이 정상적인 사람 사는 방법인 것이다. 특별한 것도 없다. 생명의 핵심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자기 부인을 모든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빼어 버리고 그 가짜를 만든 것이 오늘날의 소위 "기독교"를 표방하는 세상 종교다.

세상 종교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별하고 분별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불교와 같은 것만이 세상 종교가 아니다. 자기 부인을 근거로 하는 사랑이 빠진 모든 것이 종교 행위로 서슴지 않고 단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와 같은 사랑에 있는 까닭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 씀에 이루었다"[갈 5:14] 하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롬 13:8] 것이다.

따로 무슨 계명이 있지 않다. 종교 행위를 하고 그런 것을 지키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 단지 믿을 때 세례 받고 서로 함께 교회로서 모일 때에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일만 명령하셨다. 그 외에는 없다. 오직 한 몸을 이룬 대로 서로 지체로서의 사랑을 하여 돌보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필요해서 모이는 것이니 매일이라도 필요하니까 모이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유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히 3:12,13] 한 그대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어"[:14], "하나님께서 나를 제해 버리시지"[요 15:2] 않음으로써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지고 불에 던져 사르는"[:6] 꼴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으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 13:9,10] 한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다.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지만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룰 것이다"[마 5:17,18] 하신 것이다.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는 사랑의 계명을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넉넉히 지키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심이다. 이런 실질적인 계명을 지킴이 없이 교회 예배에 충실히 나가고 교회 봉사와 업무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 계명 지키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하니 그것이 다름아닌 율법 행위[종교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다. 그런 행위를 믿음 있음의 증거로 의뢰하여 "나는 믿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 구조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한 몸을 이룬 구조에서 살되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와 같이 이웃[믿음으로 된 형제들]을 사랑하고 또 이와 같은 한 몸 안으로 모든 사람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이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일인 것이다. 물론 이 일에는 핍박이 따르고 냉대, 냉소가 따르게 마련이다. 핍박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말을 들은 것 같이 너희 말도 들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다. 물론 주님 당시 즉 부활하실 때처럼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땅히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은 다 이 한 목자 아래 있는 양의 우리[fold]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핍박이 무서워 전도를 못라리요. 우리가 그 때문에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이 아닌가.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다'[요 15:15] 하신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우주 천하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생명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알리고 우리에게 아버지[어버이]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 곧 마땅한 사람 사는 도리를 온 세상에 알려 제자들을 삼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 우리 모두의 일이다. 어떤 이들은 기도에 주력하는 것은 자기 형편과 환경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니, 나이 육십이 넘은 과부들처럼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딤전 5:5] 것이다.

이렇게 사람 살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여 생명 가운데 들어오면 되지만 그렇지 않고 고집을 피우고 여전히 자기중심으로 나갈 때 현재와 같은 인간고와는 비교도 안되는 본격적인 죽음의 고난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임을 동시에 경고하여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公義)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행 17:30,31]고 확실히 세상에 전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 받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다는 확실한 메시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회개하라 함과 동시에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눅 3:7]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생사를 가름하는 문제이므로 그 심각성을 알려 주어야 한다. 현재의 이 인간고는 장차 임할 영원한 죽음의 고난에 대한 맛보기일 뿐이다. 소위 세상 낙이라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삶의 낙에 대한 맛보기다. 본격적인 것이 온다. 그런 본격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영원한 운명을 지금 가름하는 것이다.

이상 포도나무 나무 비유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배울 수 있다. ①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로서의 포도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을 말한다. 접붙여지는 것으로 전부가 아니니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즉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 7:21]. 여기서 주님은 그렇게 부르기만 하고 뜻대로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믿음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라 하시지 않았으니, 위의 포도나무 비유를 따르면 그들은 믿고 구원 받은 이들이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니 믿는 자요 그리고 구원 받은 자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여기서 열매는 무엇이냐. ②포도나무가 아닌 다른 나무 가지였다가 포도나무에 붙게 되었으니 포도를 열어야 한다. 그 포도를 여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열매"다. 포도가 열기를 바라서 포도나무에 접붙였으니 이제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었으므로 반드시 포도를 열어야 한다. 포도를 열지 않는 포도나무 가지는 처음부터 농부의 목적이 아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느냐. "예복 입지 않은"[마 22:11,12] 자가 쫓겨난 이유가 바로 열매 맺지 않은 탓이라는 그 뜻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되었으니 포도가 열려야 하고 감나무나 밤나무 등 다른 나무도 아닌 포도나무에다 접을 붙였으니 포도를 열어야 하는 것과 같이,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질탕하게 먹고 마시고 노는 장소에 초대된 것이 아니라 왕의 잔치 자리에 초대되었으니 그 잔치 자리에 맞게 하객들이 입게 되어 있는[궁중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라는 것은 특별히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상황에 맞게 순응한다는 그 뜻이다. 동네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노는 자리에 초대되었다면 당연히 예복을 입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이 초대된 것은 잔치 집의 잔치 자리다. 이는 마치 포도가 열라고 포도나무에 가지를 붙여놓았더니 포도가 열리지를 않는 것이다. 포도나무의 즙액만 빨아들이니 즙액만 허비할 뿐이다. 이는 주님의 또다른 비유에서 한 농부가 무화과나무를 심었더니 3년을 두고 기다려도 무화과가 열리지를 않으니 땅만 버린다고 하여 찍어 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눅 13:7].

다시 말해 우리에게서 "열매"를 바라시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어 "죽은 자"[마 8:22-다른 나무]로부터 "산 자"[고후 5:15-포도나무]로 만들어 주셨으니 죽은 자가 아닌 산 자로서의 행동 즉 산 자에 걸맞는 것을 보이라는 것이다. 잔치 자리에 걸맞는 것은 예복이고, 포도나무 가지에 걸맞는 것은 포도를 여는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걸맞는 것은 무화과가 열리는 것이다. 그럼 산 자에 걸맞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셔서 생명체를 만드셨을 때는 산 자를 만드셨으니 산 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를 따라 살라는 것이다. 그냥 움직인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생명체라도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 등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있고, 인격성을 지닌 우리 인간이나 영물 같은 존재는 각자의 운명까지도 스스로 좌우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주셔서 자유로 선택해서 그 자유 의지로 행동하게 하신 것이 있어 둘로 분류된다.

후자의 경우 지성이 있고 이성적 판단력이 있어 하나님께서 선한[좋은] 것을 보이시고 그 선하고 의(義)로운[올바른] 것을 따라 행동하게 하신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으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justice]를 행하며 인자[mercy, lovingkindness]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to walk humbly with God]이 아니냐"[미 6:8] 하심과 같다. "공의", "인자", "하나님과 겸손히 행함"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실 때는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게 하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즉 목숨이 다하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에 있지 않고 가장 행복하게 사는 도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행복하지 못하면 죽지 않고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인데 오래 살아 무엇하랴. 그래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순히 우리들로 하여금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시는 데에 있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대로 살게 해 주심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다. 그 방법 즉 사람 사는 도리가 다름아닌 몸과 머리의 관계로 사는 것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한 몸을 이룬 각자는 자기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장, 확대, 확충시켜 살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 곧 자기 부인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이렇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지 않으면, 에덴낙원에서부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아담 부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과 같이 또는 가인이 사람이라고는 자기 부모와 형제 단 넷밖에 없는데도 아우 아벨을 죽인 데에서도 확인되듯이 서로를 해치고 파괴하려 드는 것이다. 죄와 악이 왜 생겨났는가. 바로 이런 못된 짓을 하는 것을 가리켜 죄와 악이라 하는 것이다. 자기만 편하면 이웃은 죽어도 일없다, 괜찮다는 심보[-뽀]다. 그러니 자기중심이다. "자기를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악이요 죄다.

그러므로 살아 움직인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에서 자기 부인으로써 살아야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사는 것으로서 비로소 사는 것이다. 머리도 몸도 일절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한 몸 체제로 사는 삶의 특징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현재 인간이 사는 것도 살아 움직인다고 사는 것아 아니라 죽은 자이며,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이 살아 움직인다고 해서 거룩한 천사들에 비하면 악령이라는 말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영원한 고난의 불 못에 들어갈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 송이가 열리는 것과 같이 산 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 자로서 움직인다는 뜻이니 자기 부인을 통해 머리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함께 한 몸이 되어 있는 각 지체로서의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올바른 자세로 임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는[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 등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인 것이다. 

그러면 열매를 맺되 30배, 60배, 100배의 차이가 나는 것은 왜냐[마 13:23].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열매가 나타나니 자연 나로 말미암아 믿게 된 사람들[나의 기도와 전도를 통해], 또는 나로 말미암아 나의 기도 또는 도움을 입어 믿음을 지킨 여러 형제 등 음으로 양으로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내가 힘을 보태 준 이들의 숫자를 말한다고 해서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단 여기 유의해야 할 것은 그들을 사랑함이 밑 뿌리가 되어야 그것이 비로소 열매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도를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바울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하는 바라"[롬 9:3/출 32:32] 한 것처럼 그들의 영혼을 사랑해서 단 몇이라도 그들을 위해서 노력한 것이라야 보람이 있는 것이지, 그냥 여러 수만 명 앞에서 복음 전도의 말씀을 외쳐 설혹 그들이 구원을 얻었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일을 하고도 얼마든지 그 자신은 "제해 버림"을 받고 "밖에 버려져 말라 사람이 그것들을 거두어다가 불에 사를"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면 사랑으로 하지 않고 전도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아래 결과론적으로 율법 행위로써 한 까닭이다. 또는 과거는 그렇게 잘 했으나 현재 사랑이 식어져 그리고 회개를 않음으로써 얼마든지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고 능력도 행했지만" 현재는 심판대에서 멸망의 선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마 7:22]. 다시 말해 그런 경우 그 열매 맺음이 하나님 앞에서 제 구실을 못한다 다시 말해 나를 포도나무 가지로서 인정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계명 말씀을 하셨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이는 둘이 하나되는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말씀하심이다. ③아들께서도 아버지와 더불어 그렇게 둘이 하나되어 계시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되어 있으므로 똑같은 내용의 법 적용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아버지를 가리켜,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킨다"[요 8:55] 하신 것이라든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으로서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10:17,18] 하심도 같은 뜻이다.

같은 뜻으로 또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 것이다"[6:56,57] 하기도 하셨다. 아들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나 같은 맥락이니,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다"[14:23] 하심과 같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한 몸된 측면에서 설명하면 눈이면 눈, 입이면 입, 손이면 손으로서의 지체 역할을 다한다는 의미다. 즉 자기 고유의 지체 역할을 함으로써 이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을 위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 본무(本務), 또는 본분(本分)을 다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그냥 얌전히 자기 역할을 중지한 채 남아 있지를 못하고 반드시 시샘이나 또는 앙갚음을 하려는 듯이 남까지 즉 주변 이웃을 해치기 시작하는 즉 공멸(共滅)을 시도하는 암세포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자기중심으로 나가는 가지는 한 몸 체제에서 제해 버려지는 것이요 밖에 버려져 말라 불 살라지는 수밖에 없다. 이공(李公)과 '나'원균의 예에서 볼 때, '나'원균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단지 자기 보신책(保身策)만 강구할 따름이었고 고의적으로 국가와 민족에 손해를 끼칠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결과론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하는 일마다 그렇게 암 세포로서의 악영향만 끼치게 되는 결말만 나타내었던 것이다. 모든 자기중심적 성향이 이와 같다. 죄와 악의 내용이란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다. 때문에 우리가 이런 자기중심을 악[惡]으로 규정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을 단 한 마디로 정의(定義)하면 "주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는 받는 것이 되어도 '나'로서의 일관된 자세는 일방적으로 주는 것 곧 흘려 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게로 흘러 들어오는 것에 신경쓰지 않고 의식하지 않음이다. 그것은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결과일 뿐이지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흘러 들어 오도록 만들지는 않는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다[행 20:35]

"주라"고만 말씀하셨지 다른 내용을 덧붙이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주는 것의 [순환]법칙을 말씀하신 것이니 곧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줄 것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눅 6:38] 하신 것이다. 즉 전부를 다 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역시 전부를 다 주는 것으로써 도로 받게 된다. 자기중심은 그 반대다.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받고자 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이를 의식하이다.

그러면 혹자 말하기를, "온전한 100% 은혜가 아니고 반분(半分)의 은혜란 말이냐?" 할 것인가. "그게 무슨 말이냐?" 물으면, "구원 얻는 것이, 믿는다는 조건만 아니고 우리 자신의 열매 맺음이라는 조건이 덧붙여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할 것이다. 은혜가 무엇인가. 내가 전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나를 위해 이루어 주시고 더군다나 나는 전적으로 아무 자격도 없어 그런 것을 받을 만한 처지도 아닌데 이루어 주신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비록 내가 천신만고 끝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내 스스로 하게 하시지 절대로 하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그것을 이루어 주시지 않는다. 전연 할 수 없기 때문에 해 주신 것이다. 그러니 은혜는 은혜일 뿐이지 100프로 은혜가 있고 50프로 은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할 수 없는 부분만을 이룩해 주심에 있고 내친 김에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까지도 해 주시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없는 데까지만 이루어 주시고,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도록 하시는 것이 은혜다. 만일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 하신다면 그것은 차라리 은혜가 아니라 내게 독극물이 된다 할 수 있으니 나를 의타적인 성향의 인간으로 만드시는 것이므로 오히려 나를 망치는 결과가 됨이다. 그러면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것까지 아니하고 내 스스로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마땅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내가 감히 불평할 것인가. 그런 불평을 누가 정당하다고 인정해 주겠는가.

은혜라 하고 거저 주신다 하고 선물로 받는 것이라 하고 믿기만 하면 된다니까, 그런 은혜를 착각하여 무조건 공짜인 줄로만 알아 그런 은덕을 베풀어 준 주인공의 소유물까지도 물고 늘어지며, "이것 내가 공짜로 가져가도 좋지 않소?" 하고 억지로 뺏어가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죽게 되어 있는 사람의 병을 천신만고 끝에 의사가 고쳐놓고 보니까 "병원 값, 약 값을 물어 달라, 내놓아라" 하는 파렴치와 같은 것이다. 죽을 병을 고쳐 살려 주었으니 이제는 감사히 생각하고 퇴원하여 세상에 나아가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열심히 살라는 것이다. 의사가 병을 고쳐 준 사람이 열심히 살아 나가면 그것이 그 병을 고쳐 준 의사에게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게을리 하여 이전과 같은 습관에 급속히 빠져들어가 다시 이전과 같은 병에 걸리면 자기를 고쳐 준 의사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혹시 의사에게 무슨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길을 받기 때문이다. 즉 그런 동일한 죽음의 병에 걸릴 이전의 그 방법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니, 다시 말해 죄 짓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포도나무 가지에 포도가 열리기를 바람이다. 잔치 자리에 초대함을 받은 대로 예복 입고 있을 줄로 당연히 예상함이다. 무화과나무를 심었으니 당연히 무화과가 열기를 기대함이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나무 가지를 포도나무에 접붙여 주는 일 외에는 없으니 사실상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포도를 열게 하는 일까지 할 수는 없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시어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하게 하신 이상 강제하기거나 간섭하시는 일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시니까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함은 큰 착각이다. 원리원칙을 벗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그래서 지금까지 자기 계획이 어느 정도 성사할 확률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워낙 공평공정하게 일을 처리하시니까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일을 꾸밀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정하신 일을 뒤집는 일은 절대로 하실 수 없다. 한번 입밖에 내신 말씀을 취소하실 수 없다.

사람이 스스로 믿지 않는데도 능력을 행하실 수는 없다[막 6:6]. 그렇게 되면 강제가 되고 간섭이 되니까 그럼에도 강행하신다면 이는 하나님 자신을 부인, 부정(否定)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원리원칙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지으신 피조물로서의 우주 만물을 운행시키는 힘은 법과 질서다. 하나님 친히 그런 것을 파괴시키는 일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법과 질서를 따라 살기를 바라심은 당연하고 그렇지 못할 때 전체의 복리와 안녕을 위해 그것을 바로잡아 처리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말을 크게 착각함에서 빚어지는 혼돈이다. 곧장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 회개한 강도의 예로써 성경은 이를 확증해 주고 있다. 그는 살아 생전에든 회개한 후든 방금 말한 대로의 "열매"를 맺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넉넉히 천국에 들어간 자로서의 훌륭한 사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이 지상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 기회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를 불평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불평등 운운"할 때는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그의 일을 이 세상에 남아 착실히 하겠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있다면 그런 기회가 있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일이지 그런 기회가 생략된 채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 것을 부러워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마음이 있어 영적으로 아주 연약한 상태에 있는 까닭에 당신은 연단하기 위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와 같이 영적으로 단련되게 하시려고 당신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심이다. 그 회개한 십자가상의 강도의 경우는 그 사랑[회개한 다음의 하나님과 동료 인생에 대한]의 마음이 온건하고 건전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것을 아시게 된 까닭을 나중 신령한 몸을 입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지게 될 것이다. 지금은 몰라서 약이 되는 경우도 있고 알기에는 너무 벅찬 것도 있을 수 있다.

100% 은혜이면 어떻고 50% 은혜이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자를 살려 주시어 산 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영생하는 자로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 회개한 강도는 즉각 영원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회개한 강도가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구원이 우리로 하여금 곧장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하자가 없으나 이전에 살던 그 방식 그대로 살아도 그렇게 된다고 착각하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런 자기중심의 이기주의 그대로 살던 그 욕심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줄로 생각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회개한 강도도 바로 그런 상태에서 낙원에 들어간 줄로 그런 사람들은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인 차이가 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들은 항상 강조하는 말이지만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위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도 이 사랑인 것이다.

계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실 때에도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사랑하라는 분부이신 것이다. 주님의 새 계명 그리고 그 내용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와 몸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기 자신이라고 바로 인식하고 생각함이 없을 때는 절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몸, 하나됨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는 원래 그 대칭되는 둘이 본질과 근본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삼위일체의 원리다.

갑에서 을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둘이 대칭[상칭]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만물이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난 단일 조직이라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 모두의 머리가 되시니 나와 본질이 같으신 나의 "어버이"시라 하지 않는가. "어버이"라는 말은 양친 곧 부모를 가리키나 둘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곧 아버지시다. 아버지와 아들이시지 아버지와 어머니 관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적당한 말이 없어 하나님을 "아버지"시라 하는데 그래서 아담이 처음에는 남자가 아니었으므로[여자가 생기기 전인지라] 그런 아담이 나중에 남자가 되었으므로 그 대표성을 따라 아담이 남자였기 때문에 아담을 따라 "아버지" 또는 "아들"이라고 표현되니 정당성과 합리성은 있다고 보나 어버이는 어느 경우데도 적합하지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너무나도 남녀 개념으로 첨예화로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 가끔 그렇게도 표현해보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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