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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02
글쓴이 김일동 조회 508

메시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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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 교회

(1)핍박 받는 북한 땅의 교회를 기준으로 하여 하는 말이기에 10인 교회, 13인 교회라 하는 것이다. 10명 정도 그 이상으로는 모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핍박이 유달리 심한 나라에 가서 전도 활동을 경우도 그렇다. 그래서 이를 또한 집 교회라 하는 것이다. 종교의 전당이라고 하는 것은 그 종교를 불허하고 반대하는 곳에는 세워질 수 없다. 그래서 그 종교는 그 곳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렇지 않다. 종교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생활 원리를 말하는 것이므로 '그리스도'라는 원리를 따라 일상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특정 지역에서 반대를 하든 않든 얼마든지 들어가 이 사람 사는 원리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2)예배 전당이 필요치 않고 이른바 예배를 집전하는 사제(司祭)도 필요치 않다. "신학"이니 "신학교"니 할 것도 없다. 분량으로 따지면 성경과 몇 십 쪽 분량의 요강(要綱) 단 한 권이면 충분한데 그것 배운다고 신학교 가겠는가. 성경에 대해 몇 군데 참고할 중요한 것은 글로 읽도록 해놓으면 누구나 볼 수 있다. 따라서 특별한 직분의 교역자도 필요치 않다. 오직 믿음생활에 모본이 되는 사람을 형제들 가운데 택하여 장로(또는 감독)와 집사로 세우면 족하다. 초대교회의 본을 따르면 된다. 그들은 세상 종교처럼 종교의 전당부터 세우지 않았다. 당장 핍박의 불똥이 튀는데 일부러 불살라 버리려고 또는 강탈당하기 위해 그런 건물을 지어 올릴 엄두를 내겠는가.

(3)그같은 핍박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 있는 한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 다니는 것임을 주님은 분명히 하셨다. 이 세상에서의 교회는 그리스도 다시 오실 때까지는 핍박으로 시작하여 핍박으로 끝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종교가 만일 그런 식으로 핍박 받는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종교 형태를 감히 나타내겠는가. 나타내기도 전에 벌써 멸절해 버렸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도 아니고 따라서 종교의 형태도 띠지 않는다. 지금까지 종교의 형태를 띠려고 했다면 명백한 잘못이다. 그 폐단이 드러나고 있으니 이제는 종교 아닌 초대교회 형태로 돌아가야 할 때가 벌써 되었다.

날마다 모여

(4)"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니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으로 사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1-47).

(5)자연발생적으로 필요에 따라 날마다 모였다. 일상적 삶이기에 날마다 모인 것이다. 특정한 날을 정해서 모이는 종교의식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매일의 삶 자체이기에 매일 모인 것이다. 떡을 떼는 것도 모이는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편의를 따라 했으니 만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떡을 뗄 수 있으면 거기서도 했을 것이다. 모이기는 성전에 모이고 떡은 집에서 떼고 그러므로 장소에 구애당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6)나중에 핍박이 일어나 성전에서 모일 수 없게 되었을 때에는 집에서 모였다. 성전이기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라 평소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라고 하여 습관적으로 그렇게 가던 버릇대로 간 것이었고 그 곳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기에 간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당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미 영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사람이 매일 살아가듯이 그렇게 매일 모였을 따름이다. 그렇다고 매일 모여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고 특정일에만 모인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7)그런 일상 생활로서의 그리스도인 삶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정일을 지키라고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보태어 가르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지 특정일, 특정의식, 특정된 무엇무엇을 지키라는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야 모세 율법을 따라 그런 형식을 지킬 필요가 있어 지켜 왔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 피조물이 된 새 삶이므로 자연스럽게 영위되는 일상생활일 따름이다.

(8)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삶. 때문에 날마다 제사장으로서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 주님처럼 고난 받는 삶, 선을 행하는 삶, 형제들을 사랑하는 삶, 그런 일상 생활의 본격적인 삶으로 정착된 것이다. 초신자들을 모아 가르치고 합심 기도하고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고 하는 매일의 삶으로 연이어졌던 것이 초대교회였다. 이 세상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에 보내심 받은 것처럼 똑같은 의미로 우리가 세상에 파송된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9)날을 정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다. 주님께서도 날을 정하여 일하신 적은 없다. 사도들도 날이면 날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했지 날을 정하여 한 적은 없다. 필요에 따라 합심기도하고 필요에 따라 형제들이 모여 말씀으로 교제하고 필요에 따라 여럿이 함께 전도를 나가기도 하고 혼자 하기도 하고 혼자 하든지 함께 하든지 그것도 특정한 무엇이 정해져서가 아니라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하였다.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일하는 것이니, 여기서 삶의 낙을 누리자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원칙만 제대로 지켜나가면 특정된 것을 가지고 서로 다툴 일이 없다.

(10)일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것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할 일이다. 그러니 획일적이고 균일된 것은 바라지도 않고 가르쳐 강제하지도 않는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람이 가급적이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으나 사람에 따라 은혜가 다르니 부득이한 사정이면 결혼할 것이다. 주님 안에서의 모든 일이 다 그와 같다. 꽃은 아름다우나 다양성이 있어 아름답듯이 사람마다 다양성이 있으니 그 받은바 은혜대로 할 것이다.

(11)다만 자신을 대해서나 이웃을 대해서나 그 누구도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위해서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그 점만은 피차간 명백해야 한다. 그것이 명백하지 않을 때만 문제가 생긴다. 그것만 제하고는 우리는 생명의 다양성을 믿는다. 생명은 규격품화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주장하고 강조하는 것은 특정 종교생활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다.

(12)그리스도의 복음은 위의 성경 기록에서 보듯이 새 창조에 의한 새 피조물로서의 새 생활이다. 물론 각자 개별적으로 사는 삶은 아니다. 인간 개개인의 생활은 사회생활로 자동적으로 연결되듯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생활이기도 하다. 공동체생활이라 해서 단체생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간 생활이 개개인의 생활이면서도 나라와 사회와 및 이해관계에 따른 각종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그런 정도의 자연스러운 공동체 생활이다. 

(13)이런 일상생활을 종교생활로 타락시키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집착해 왔다. 그래야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로서의 내용을 빼고 겉껍질만 덩그렇게 갖다 놓고 진리라 하는 것이 '종교화'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종교가 아니며 될 수도 없으니, 종교는 해결도 답(答)도 아니고 시도(試圖)일 뿐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 유일한 답이요 해결인 것이다.

(14)종교는 그냥 '몸부림'이고 '발버둥침'이라 표현하면 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일상생활과는 별도로 종교생활의 영역을 새로 구축하여 거기에 스스로를 맞추어 나가게 만들었다. 왜냐면 삶 자체가 아니고 몸부림에 불과하므로 그 정도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이미 구원 받아 그 구원 받은 대로 새 삶을 영위하는 것인즉 일상생활로 구현되는 것이지 이 영광스러운 삶의 "복된 좋은 소식"[복음]을 종교로 격하시켜 종교로 가두어놓고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계략이다.

(15)사람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 길을 알면 그 길 따라 충실하게 살면 된다. 이전 삶 그대로 살아서는 절대로 안된다. 죽음, 멸망뿐이다. 새 창조를 거쳐 새 피조물이 되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하는 몸이 아니었다. 몸은 영생하지 못하는데 마음은 영생하기를 바란다면 그런 모순, 뒤죽박죽이 없다.

(16)인체의 구조를 보면 무서우리만치 일사불란한데 이렇게 마음과 육체가 서로 엇갈리게 작동된다면 즉 일사불란함이 없으니 이것은 분명 까닭이 있는 법이다. 우주 만물의 운행 하나만 보아도 일사불란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도 유독 이 인간의 영생하고자 하는 욕구와 육체의 실태만은 전적으로 어긋나게 움직인다. 자연계에 속한 짐승들은 그런  흐트러진 데나 어지러운 데가 없다. 왜냐면 그들은 영생하려는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17)이 비극의 실상부터 먼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서 자기 병든 것을 뒤늦게 안 사람이 그에 따른 치료를 기다리고 병 낫기를 위해 전력을 다하듯이 새 창조를 받아 새 피조물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므로 그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이다. 병들어 죽게 되어 있는 위급한 상황인데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시급하다.

(18)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 지상의 동물들처럼 한 때만 살고 그 다음에는 죽으니 이는 짐승같은 삶이지 사람으로서의 삶은 아니다. 그러나 영생만이 목적이 아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되 모두가 예외없이 똑같이 행복하게 사는 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도 서로 미워하고 싸우며 피차간 불행하게 만들며 사는 것은 아무리 영원히 산다 해도 그 영원히 사는 가치가 없다.

(19)차라리 그런 부끄러운 삶은 끝내버리는 것이 낫다. 영원히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며 한 몸처럼 사는 삶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그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서 영생을 욕심 내는데 이것은 완전히 첫 단추 잘못 끼우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영생을 꿈꾸면 그것은 현재의 자기 욕심 그대로 부리면서 죽지 않고자 하는 다시 말해 영원히 사는 것까지 욕심 내는 욕심의 또다른 양상, 표현에 불과하다. 이것은 단연코 말하거니와, 추한 것이다.

(20)다시 말해 개인적인 욕심을 일절 버리고 오직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전체를 위해 모든 것을 하면서 그 전체 가운데에 속해 있는 자신의 안녕 역시 모두와 함께 자연스럽게 보장되게 하는 것이 올바른 사람 사는 방법이다. 한 몸 체제로서의 생명을 유지함이 그 올바른 길인 것이다. 애당초 인간이 영생하는 생명체로 창조되어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도중에 이 올바르게 사는 방법에서 벗어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비극적인 현실 중에 있는 것이다.

(21)올바르게 살지 못하니 사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므로 결국 영생도 자연스럽게 취소된 그런 상태다. 그러므로 영생하지 못하게 된 그 원인 즉 올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할 생각은 없이 다시 영생하기만을 욕심 내니 이는 애당초부터 잘못 짚은 것, 잘못된 사태 파악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실상부터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선결 요건이다. 그렇지 못하면 매양 다람쥐 쳇바퀴 돌기다.

(22)이렇게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 중의 하나로서 나의 행복을 기대하는 것이 순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그것이 그 방법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내 이웃을 위하게 되면 그 모든 나의 이웃이 대신 나를 위하게 되는 그런 방법이다. 그러면 나는 굳이 남의 것을 욕심 내지 않아도 또는 못되게 그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 남의 것이 내 것이 되게 하는 절로 굴러 오는 호박이 되는 것이다.

(23)이러한 구조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 이것을 간단히, 공동체 의식에서 사는 삶이라고도 한다. 이 공동체 의식은 현재의 인간 생활에서도 그 주축을 이룬다. 인간 삶에서 이 핵심 부분이 빠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정도다. 모든 법제도, 윤리, 도덕 등의 인간 삶의 법규가 모두 이 공동체의식을 뿌리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공동체의식 함양도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간 본성적인 욕망과 함께 사람이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것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다.

(24)영원히 살고자 하는 본성, 인간 각자에게 내재해 있는 양심이라는 것이 모두 이 사실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도록 창조하셨다는 증거다. 비록 지금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 있지만 과거 한 때는 그런 체제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시퍼렇게 살아 있는 표적'인 것이다. 이 공동체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모든 행위를 죄라 하고 악이라 하고 불법, 불의, 부정이라 하는 것에는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죄인을 엄히 다스리고 제약하고 형벌을 가한다. 그래야 세상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25)사람답게 사는 것은 이상 두 가지 필요성 즉 '죽지 않고 사는 것'과 '사랑의 한 몸 구조에서 사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이와 같이 분명히 드러난다. 고통 없이 사는 것이나 죽지 않는 것이나 같은 의미다. 왜냐면 괴로움과 슬픔 등은 죽음의 영역이지 생명에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가 자연계에 속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오는 고통도 크지마는 못지 않게 큰 것이 인화(人禍), 인재(人災)다. 즉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입히는 해악(害惡)이다. 그 증거가 가인이 아벨을 죽인 데에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하도록 하는 영구한 장치 없이 영생만 바라는 것은 한마디로 넌센스다. 이 "장치"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26)"선을 행함"은 곧 이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을 말함이다. 그래서 이 사랑 없는 악한 세상에서 이를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이 영생으로 보답된다고 성경은 명백히 한 것이다[롬 2:7,10]. 여기서 믿음 유무는 일절 묻지 않고 있다. 왜냐면 이 선을 행하는 것 자체가 자기 부인에서 비롯되고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얼마든지 선을 행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마 7:21/25:45].

(27)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문제를 새 창조로서 모두 해결하는 것이기에 복된 좋은 소식 즉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영원히 살아도 서로 사랑하며 사는 즉 공동체의식이 없이 살면 무의미하므로 먼저 이 공동체의식이 확고한 기반 위에서 인생은 영생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영생하고 나서 그렇게 서로 한 몸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먼저 각자 철저한 공동체의식이 분명하고 철저하게 자리잡은 다음이라야 영원히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순서다.

(28)왜냐면 아담은 영생을 하게 되어 있는 영생하는 현장에서 이런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 죽은 자가 된 까닭이다. 즉 머리를 무시했음이니 머리의 지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서야 한 몸 체제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결과로써 현재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우리는 이제 산 자가 되려면 먼저 이 공동체 의식을 갖추고 있는지부터 먼저 묻게 된다. 공동체 의식은 한 몸 체제에서 오는 '우리' 의식인 것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구조가 생명[영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은 머리로서의 하나님 말씀[지시]에 불복하고 자기 마음대로 나간 것이다.  

(29)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인데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선악과를 먹었으니 자기 부인과는 반대인 자기중심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 구원 얻는 조건으로서 이 자기 부인을 먼저 따지게 되어 있다. 자기 부인이 자연스럽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자기 부인을 우리 각자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즉 나와 하나 되시는 원리에서 나와 함께 죽으셨고 그렇게 그리스도 자신을 영원한 선물로 우리 각자에게 주심으로써 나와 하나되어 계심이다.

(30)자기 부인의 완전한 바탕을 이루어 주셨으므로 나는 단지 이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요 그 사실을 따라서 살면[생활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로 선물로써 얻는 구원이다.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그 증거로서 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임하여 오신 것이다. 그래서 향후 '나'라는 존재를 나와 함께 구성하고 계시니, 아담의 육체와 영혼 창조[창 2:7]에서처럼, 내가 '육체'라면 성령께서는 그 육체의 '영혼' 격이시므로 영원히 불가분으로 문자 그대로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이다.

(31)그래서 내가 죽었기 때문에도 자기 부인이요 이제는 그리스도[살아 계시는]께서 나를 위하시므로 그래서 내가 나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도 자기 부인이다. 이중으로 된 자기 부인의 철통 같은 완벽한 장치다. 고로 나는 이 믿음을 따라 행동하여 살면 그것이 곧 영생이다. 바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을 두고 자기 부인 여부를 따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따진 다음에 이에 순응하는 경우에만 영생이 부여되는 것이다.

(32)즉 죄 용서가 되고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는 것이다[행 2:38]. 회개하는 것은 이렇게 이미 이루어진 나의 자기 부인을 믿음으로써 내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니 곧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여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겠다는"[고후 5:15] 결의 표명이요 그래서 이를 약속이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부인을 각자 인정하는 회개 없이는 결코 구원이 되지 않는다. 자기 부인은 믿고 나서 점차적으로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동시에 작용되는 것이니 그래서 처음부터 망대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눅 14:26-35].

(33)왜냐면 그 후의 연속적인 것 즉 죄 용서와 성령 받음이 자기 부인을 그 핵심으로 하는 회개가 없으면 뒤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행 2:38]. 그래서 ①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②그리스도를 믿음이 양면으로 강조됨이 바울의 복음 전파였다[20:21]. 오늘날 영생만 욕심 내는 사람은 이 회개를 건성으로 듣고 중요시하지 않는다. ①은 자기 멋대로 입맛 따라 빼 버리고 ②만 강조하니 그래서 구원도 생명도 없는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34)우리는 죄와 의, 악과 선을 '공동체 의식'과 '그 결여'로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파괴적인 공동체의식의 결여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 가장 명확한 역사적 실례로서 임진왜란[1592. 5. 23(음 4:13)]의 이공(李公) 순신(舜臣)과 '나'원균의 행적을 들게 된다. 원균을 '나'원균이라 함은, 원균 일개인을 지목함이 아니고 원균이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인간 삶의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자기중심의 성향을 강조함이다.

(35)이런 역사적 의미에서 원균은 이공과 함께 똑같이 우리에게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교훈을 주고 깨우침을 주면 그 무엇이든 우리에게 스승이 되는 것이다. 80 노인도 3살박이 어린 아이에게서 배운다 함이니 이 경우 그 아이는 그 노인에게 스승이다. 우리가 평소에는 주의하지 않는 일반적 폐단인 이 자기중심[개인주의, 이기주의]이 유사시에 필연적으로 나타내게 되어 있는 엄청난 결과를 원균의 삶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6)우리 중에 아무도 원균을 비난할 사람은 없다. 이공 유형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다는 얘기다. 왜냐면 원균을 통해 자기의 자화상을 보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원균인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절감하기 위해 짐짓 붙인 이름이 '나'원균이니, 이는 원균을 감싸 주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치 원균만이 악당인 것처럼 악의 화신처럼 착각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가 이런 사실(史實)을 말할 때는 자성(自省)의 교훈을 얻고자 함이 아닌가.

(37)이공과 '나'원균의 대조적인 삶의 결과가 너무나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기에 그러하다. 주로 생각하는 것은 이공의 공동체의식의 투철함이다. 반면에 '나'원균은 악인도 아니고 인간사회에서의 대죄인도 아니고 다만 평범한 인물에 불과했을 뿐이다. 단지 그 평범함이 우리가 평소 대수롭지 않고 여기고 넘어가던 자기중심의 실체가 일조유사시에 그런 엄청난 파괴력을 드러낸다는 이 점만은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38)역사적 무대에서 두 인물이 우연히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서로 대비하는 처지에서 '나'원균이 들먹여지는 것이다. 왜냐면 '나'원균 유형의 인물은 이 세상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돌멩이처럼 흔하게 볼 수 있음이다. 단지 이공 유형은 결코 흔히 대할 수 없다는 것이 다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누구든지 이 흔치 않는 유형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나'원균 유형은 평범한 인물 그대로이고 이공 유형은 흔히 볼 수 없는 그런 유형이지만 이 두 대조적인 맞수가 특정 사실을 두고 등장 인물로 나섬으로써 그 나타낸 역사적 교훈이 너무나 크므로 이 '사람답게 사는 주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어 되풀이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39)말하자면 이공은 공동체의식의 화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 삶에서 우리 모두의 사표가 되고 있다. '나'원균은 그리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은 평범한 인물로서 누구나 그러하듯 특수한 경우에 처하여 자기 욕심대로 고집대로 나간 결과가 이렇게 엄청난 것임을 실증해 준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그 나타난 파급 효과가 마치 일부러 쓰기라도 한 소설처럼 극적이고 진귀하다는데 있다.

(40)이 두 인물의 당시 상황의 위치를 바꾸었다고 가상해보면 명백히 이 사실이 드러난다. 즉 이공이 당시 경상우수사라 하고 '나'원균을 전라 좌수사라 했을 때 전개될 상황과 그 필연적 결과를 가정해보면 된다. 한마디로 그럴 경우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요 전쟁이야 일어나더라도 해전으로 한바탕 끝나고 나라 전체가 전쟁의 참화 속에 곤두박질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즉 이공은 경상우수사로서 왜적을 맞아 사력을 다해 싸우고 여기에 '나'원균의 전라 좌수영 함대가 출동하여 구원 또는 합세하고 전라 우수영 함대까지 합류하여 싸우면 풍신수길은 대패하여 물러나고 두 번 다시 그런 야심을 품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41)그보다도, 일본이 정탐꾼을 보내어 당시 국내 사정을 살필 때 처음부터 이공의 경상 우수영(右水營)의 사전대비 유비무환의 철통같은 위엄을 두 번 세 번 사전 탐지하고는 애당초 출병부터 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이공 진영의 대비 태세를 정탐해보고는 도저히 이공의 군대를 뚫고 나갈 자신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것이기에 그렇다. 이공과 같은 인물이 나라의 관문을 지켜 버티고 있음을 보고는 전쟁 도발을 망설이다가 결국 그 꿈을 일찌감치 접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42)전쟁 전에 풍신수길은 첩자를 동원하여 당시의 모든 조선 국내 사정을 꿰뚫고 있었기에 그 정보에 자신을 얻어 침략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정적 실수는 서울로 가는 길목의 '나'원균의 경상 우수영의 허술함만을 보고 왼쪽에 곁다리로 붙어 있는 듯한 전라 좌수영은 주목해 보지 않은데 있다. 다시 말해 당시 핵심은 경상우수사의 향배였다. 경상좌수영은 너무 적전(敵前) 위치여서 쉽게 노출되어 궤멸되었다 쳐도, 경상우수영 병력만 왜군을 붙들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면 그것이 구심력이 되어 타도 수군 병력이 집결되고 힘을 배가시켜 적을 능히 퇴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핵심이 무너지면 전라 좌우 수영도 덩달아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천만다행으로 이공이 전라좌수영에 위치해 있어 형세를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이다.

(43)또 만약 이공이 그와 같이 경상우수사로 중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적을 막아내었더라면 그냥 이공 일개인의 무훈으로만 끝나고 우리로서는 아무 교훈도 얻는 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원균이 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지대한 교훈을 우리가 얻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투철한 공동체 의식이 인간 삶에 과연 어떤 결정적 영향을 입히느냐 하는 그 결과를 증명해 보였다는 뜻에서 이 역사적 교훈은 가히 세계적이라 할 수 있다.

(44)다시 말해 공동체의식은 나 자신만 아니라 인류 사회 전체를 살리는 것이요 공동체 의식의 결여는 그와는 반대로 인류 전체를 궤멸시키는 것이요 그 원흉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의 결과가 이 정도로 끔찍하다는 것을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행위가 아니더라도 이런 역사적 실례로써 입증된 것이다. 그리고 의[올바름]의 행동이 인류 전체에 지대한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그 증거이기도 하다.

(45)이공의 공동체 의식에 반하여 '나'원균의 그런 자세는 우리 모든 평범한 인간들의 마음자리다. 자기중심의 폐단과 악이 바로 이와 같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나'원균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기중심의 비참함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공과 '나'원균에 대한 우리의 주제는 당연히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다. 무엇이 공동체 의식인가 그 실상을 보는 것이다. 왜 '나'원균과 같은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이런 의식이 결여되어 자기도 망하게 하고 내 이웃도 망치는 것일까. 대답은 금방 나온다. 자기를 앞세워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이다.

(46)'나'원균을 악인이라고도 않고 우리와 같은 일개 평범한 인간 유형의 하나로 보아 '나'원균을 지목해서 규탄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자기를 앞세우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할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는 인간 심성이 이 자기중심이다. 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 정작 문제이다. 불치병이고 치명적이라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만성 불감증과 같기에 그렇다 함이다. 그러면 '나'원균의 경우처럼 모든 사람이 그런 유형이고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를 구원하는 이공 유형이 그렇게 소수라면 이 세상은 벌써 망하지 어째서 이렇게 오늘날까지도 굴러가고 있는가 할 것이다.

(47)그것은 하나님의 강권력 때문이다. 말하자면 억지로 붙들고 계시는 것이 이 세상이다. 붙들고 계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유의지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순종할 만한 사람들은 끝까지 구원해내시고자 함이다. 또 여기에 철저를 기하여 그렇게 믿음에 들어온 사람도 끝까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지"[히 1:9] 여부를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인들을 걸려내시고자"[마 13:49] 함이다.

(48)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억지로 인간 세상을 강제적인 통제를 통하여 유지하시는 것이니 물론 이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 이 자연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강제적인 간섭이 없다면 이미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처음 생기자 말자 형제가 형제를 미워하여 첫 살인극이 벌어졌으니 알 만하지 않은가. 이 철저한 조물주의 간섭은 트리니 호모(trini Homo) 즉 3운(運) 법칙으로 입증되고 있다.

(49)하나님의 통치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 세상 지배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할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과 대칭[대립] 위치에 있는 것은 거룩한 천사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물(靈物)들과 대칭[상칭]되어 있던 것은 첫 사람 아담이었다. 아담을 위해서 이들이 창조된 까닭이다. 물론 영계의 영물[동식물 모두]들은 자연계의 동식물들과 대칭이 된다. 이와 같이 관계와 관계 속에서 종횡으로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50)그리고 아담[남자]과 대칭되는 것은 그를 소재(素材)로 하여 창조된 여자다. 이렇게 모두 대칭을 이루어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있는 조직이 이 우주 만물이다. 따라서 자기중심이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자기 부인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체제가 생명 체제다. 자기중심이 그렇게 해독을 끼치는 반면, 이공과 같은 공동체 의식에 투철한 인간 정신은, 전체라는 관점에서 자기를 보기 때문에, 전체에게 골고루 유익이 되는 것이다. 즉 '우리' 의식에서만 '나'를 인식함이다.

(51)항상 '우리'라는 관점에서 '나'를 조화시키고 일치시키는, 강제에 의함이 아닌 자진 자발적인 행위가 공동체 의식이다. 강제가 되면 그것은 전체주의의 독재가 된다. 자발적으로 해야 그것이 가히 '인간 정신'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중요하고 때문에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인데 이 자발적인 것이 생명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은 강요가 아닌 자유의지에 의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의식을 말함이다.

(52)사람마다 자기 안에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이라는 것이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알지마는 현실상 철저한 공동체 의식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으니, 이유는 그런 식으로 즉 이공 정신으로 나가게 되면 당장은 이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이 세상 삶의 상식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야 그렇든 말든 자기 신념대로 나가야 하는데 그런 용기를 가진 이가 예로부터 드물다는 데에 있다.

(53)이공도 평소 그런 올곧은 성품 때문에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고 볕 못보는 세월을 보낸 점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공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극시켜 위인이 되게 한 것은 미증유 전란이라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런 국면이 아니었다면 이공 역시 이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평범한 인생들은 바로 이런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 세상 버젓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 수 없다는 데에서, 이공과 같은 정신을 높이 치면서도 현실적 인식으로는 거의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는 모순의 이중성이다.

(54)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은 제 살 깎아 먹기다. 그것이 나쁜 줄은 알면서도 그것 때문에 내일 죽을지라도 당장 오늘은 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람이면서도 지극히 사람답지 못한 마치 동물 같은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를 표현하여,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죄에게] 종 노릇한다"[히 2:15] 하였다. 여기서 인간 삶은 악순환만 되풀이되고 얼키설키 실 타래처럼 뒤엉켜 그 끝을 모르게 된다.

(55) 자기중심, 자기 본위의 삶의 태도를 척결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 되는 줄은 알지만 고양이 목에 방울 달자는 쥐들의 토론처럼 인간으로서는 그 한계만 절감할 뿐 어쩔 도리가 없이 지낸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였다. '자기 부인'만이 그런 자기중심, 자기 집착에 대한 해결책이 되는데, 이 자기 부인은 각자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이다. 이것이 해결되어야만 행복한 인간 삶이 보장되고 영원한 삶의 의미가 비로소 살아나게 되는데, 인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적 현실이었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상태였던 것이다.

(56)위의 이공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인간 세상에서의 공동체 의식과 본격적인 진정한 의미에서 영생을 주제로 하는 공동체 의식은 그 내용의 본질면에서는 같으나, 실질적으로는 다르니 전자는 그림자라면 후자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그림자일지라도 그 나타내는 결과는 이상 설명과 같이 엄청난 것이다. 하물여 영원한 삶의 법칙으로서의 자기 부인에 위배되는 자기중심이 과연 어떤 해와 악을 끼치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는 그 얘기로서, 이공과 '나'원균의 예를 드는 것이다.

(57)인간 역사가 생겨난 지 이미 오래인데 세상은 여전히 이 저주스러운 자기중심의 아집에 사로잡혀 있으니, 이 세상에서 해결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는데 언제 어디서 해결한단 말인가. 죽으면 그만인데 무엇을 어떻게 해결하리요.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야 하고 그렇게 살아난 뒤에는 지금처럼 자기중심으로 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철저한 공동체의식으로 살아야 하는 두 가지 요건을 다 채워야 그것이 해결책이다.

(58)죽으면 그만이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이것이 현실이다. 어떤 근거로든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데 극락이고 천국이고 있을 까닭이 없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 근거도 없이 마치 살아날 수 있는 것처럼 내세가 있다느니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있다 하는 속임수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세상 종교의 실상이다. 육체가 죽어 영혼이 떠나는데 영혼만 있어 무엇을 하는가. 육체가 살아나야 영혼이 그 안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사람 삶이 되는 것이 아닌가.

(59)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길이 없는데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오직 상상에 불과할 뿐이니 상상은 상상으로 그칠 뿐이지 현실은 아니므로 공연한 것이요 무익하고 시간 낭비만 될 뿐이다.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말로만 영생이니 극락이니 천국이니 하는 모든 종교는 무익하고 시간 낭비 외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이런 헛것에다 희망을 두는 까닭은 그런 종교에 나타나는 각종 기적 다시 말해 초자연적 현상들에 있다. 우리는 자연법칙에 매여 있는데 초월해서 놀고 있으니 "과연 신(神)이다!" 하게 되어 있고 그래서 권위를 두려는 경향이다.

(60)이런 기적은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 의해 자행되는 줄을 그들이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사람이 영생하고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되는 이 일은 새 창조만이 가능하다는 것이요 새 피조물로서 그런 자기중심이 완전히 무너질 때 영원히 살고 영원히 살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여기에 무슨 하자가 있다기에 믿지 않고 비방하며 배척하는가. 새 창조니까 이것은 조물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61)때문에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나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세상 종교가 조물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도 우리가 아니다. 새 창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속이려니까 조물주를 시인하면 안되는 것이다. 자기 최면을 해서 없는 것을 있다고 자기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을 없다고 자기에게 수긍시키고 납득시켜도 현실은 속이지 못한다. 자기 자신도 한 때 속일 수는 있어도 엄연한 현실은 현실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62)그리스도의 구원은 다시 살아나는 증거를 제시하고[행 17:31] 영원히 공동체의식으로 살 수 있는 근거를 보이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복된 좋은 소식[福音]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죽었으니 '나'라는 자기중심, 자기 본위, 자기 집착에 대해 죽은 것이므로 다시는 죄와 악이 나를 관장(管掌)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내가 다시 살아났으니 다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물론 육체로 죽기는 하나 때가 되면 신령한 몸 즉 "하늘에 속한 형체"로[고전 15;40] 반드시 변환된다.

(63)"그러면 내가 다시 살아났다면 왜 내가 이 세상에서 죽는가. 또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면 그렇게 다시 살아나서 지금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새 창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이 그 설명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의 새 창조를 위해 사람되셔서 나의 죄를 인하여 죽어 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신 그 이치를 따름이다.

(64)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다시 살아남이 되어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이상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복종의 과정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나타내신 삶 그대로 우리 역시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으므로 이런 삶을 똑같이 나타낼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65)왜냐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으로써 구원되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이상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에서 살기 전에 이 세상이 남아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와 같은 모양새를 따라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모든 일에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당연하니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children]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롬 8:17,18] 함과 같다.

(66)고난 다음에 영광이다[눅 24:26].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9]. 어쨌든 먼저 고난이다. 영광부터 생각하지 말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부터 먼저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배척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영광부터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리스도를 잘못 알기는 일반이다.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중심 그대로 있으면서 구원 받으려 하니 영생에만 욕심이 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는 뒷전이니 "예복을 입지 않은"[마 22:12] 결과가 되어 쫓겨날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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