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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04
글쓴이 김일동 조회 1218

 

(67)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에서 먼저 오는 것이 고난이다. 순서를 제대로 따라야 한다. 왜냐면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고난을 받아야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사람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남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이 됨으로써 되는 일이니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할 것뿐이다.

(68)이미 죽음은 실존하는 실체이다. 처음부터 죽음을 만드시지 않았지만 자기 생명을 스스로 지켜야 할 인간 스스로 죽음을 만든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했는데[약 1:15] 바로 그대로다. 죄인으로 만드시지 않았는데도 죄인이 스스로 되고 따라서 죽음을 낳은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대칭으로 만드셨으므로 피조물[인격성을 지닌]들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그런 죄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 이미 예상되고 예정되어진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 스스로 불가항력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닐진대 즉 얼마든지 죄를 짓지 않고 죽음과 멸망을 초래시키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니 피조물 스스로가 그런 결말을 만든 것도 사실이지 그런 결론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양면성이라 할까.

(69)그러므로 죽음과 죽음에 속하는 고난과 고통이 영원한 실재가 되어 있으니 우리는 만유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그 주인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난을 맛보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리 고난을 지천(至賤)으로[abundantly] 받았어도 죄인으로서 당연한 보응을 받는 것이었기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는 이상은 마땅히 고난을 거쳐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크고 차이가 엄청나다고 하는 것이다.

(70)그리고 이렇게 고난 받는 것은 피조물 전체가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 중심으로 모두 한 몸의 체제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현재 모두가 고난 중에 있음이다[롬 8:22]. 만물의 머리로 세우신 인간이 범죄로 죽음의 고통 가운데 둘러 빠져 있으므로 이것이 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고대 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20]이라 하였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이 받는 이 고통[성경은 아이 낳는 해산의 진통이라 하였으므로]에서 우리가 제외되거나 면제된다는 것은 그것을 황당하다고 말하기에 앞서 무모하고 믿음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니 이를 그 스스로 자체 증명하기 때문이다.

(71)그러므로 고난 받는 처지에 있으면서 이 세상 살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로서 한 마디로 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와 같이 하나님 아들로서의 영광만으로 착각하는 것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함이요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당시 유대인들의 자세 바로 그것이다. 구원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에 잘 살아야 하고 축복 받아 영광스럽게 산다는 망상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런 망상에 젖어 있는 이들이 오늘날 거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만든 기독교 곧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72)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일을 하시고 죽으신 것처럼, 나 역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된 동일한 모습으로서 이 세상에 나를 보내신 주님의 일을 하면서 그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고 죽음으로 부활하는[빌 3:10,11]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작업이 필요해지는 것이다.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처럼 세상의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남은 여생의 행로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니 나도 그 모습을 따라 동일하게 다시 살아나야 하는데 그 살아나는 모습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73)첫째는 지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함께 죽었다가] 있으니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장차 내가 "몸의 구속"[롬 8:23]을 받으면 그리스도와 같은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때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언제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나타나시는 그 날이다. 왜 하필이면 그 날이냐. 그것은 그 날이 '이렇게 새 창조를 입어 새 피조물될' 사람은 다 그렇게 새 피조물이 되고 더 이상은 구원 받을 사람이 없는 때이므로 그렇다.

(74)'이 세상에서 일하시던 그리스도의 모습[고난 받으시는]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할' 사람은 더 이상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그 마지막 한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지막으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그 때가 되면 이제는 완료되었으니, 당연히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우리도 일제히 부활하는 모습을 세상 앞에 드러내어야 할 것이 아닌가.

(75)유의할 것은 당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다시 살아나신 몸을 보이신 것이 아니라 오직 믿는 자들 앞에서만 한정해서 나타내 주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나의 '영적 부활'도 신령한 몸으로 당장 변환되는 '육체의 부활'로 세상 앞에 드러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는 당자(當者)의 마음 속에 그렇게 믿어지는 대로의 확실한 사실로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76)설명상의 편의로 '영적 부활'과 '육체의 부활'로 나누어본 것이다. '영적 부활'은 내가 성령[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내게 오셨으니]을 내 안에 받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 장사 지내지심,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이 나의 죽음, 장사 지내짐, 부활, 승천 및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 등으로 현실화, 실제화, 구체화되어 내가 현재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함이다. '육체의 부활'은 물론 "몸의 구속"[롬 8:23]이다.

(77)첫 사람 아담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처음 창조될 때부터도 신령한 몸으로 변환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자연계에 속한 다른 생물체의 육체와 달랐다. 그 증거의 하나로 인간의 피부만은 털북숭이가 아니라 매끈한 피부였으니 이는 영계가 창설되면 거기 들어가 살 때 신령한 몸이 되어 빛으로 감싸질 터이므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처럼 털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렇게 신령한 몸이 된 후 시험을 받아 범죄하여 도로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귀속됨으로써 죽은 자가 된 것이다.

(78)이제 우리는 그 순서를 거꾸로 밟아가는 것이다. 즉 신령한 몸이 되기 전에 시험의 대상부터 먼저 되는 것이니 곧 이 세상이 그 시험장이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여전히[아담을 시험했던 것처럼] 시험하는 자다. 따라서 아담은 시험 받아 범죄하여 신령한 몸으로부터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도로 돌아옴으로써 죽은 자가 되었으나, 우리는 여기서 시험을 받고 범죄하면 영원히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몸의 구속"을 받지 못하는 그런 차이다.

(79)즉 생명의 부활이 아니라 심판의 부활로만 나가게 된다[요 5:29]. 아담처럼 죽은 자가 되기는 일반이나 우리의 경우는 영원 멸망으로서 영물(靈物)인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이 되는 까닭이다. '영적 부활'과 '육체의 부활'이라 한 것처럼 비록 이 세상에서 이런 몸을 하고 있지만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영적 부활'로써 구원을 받았으므로 현재 말 그대로 우리는 영생하는 자이다. 아담 역시 산 자 곧 영생하는 자로서 범죄하여 다시는 영생하지 못하는 죽은 자가 되었음과 같다.

(80)우리 역시 새로 창조함을 입어 아담과 같은 산 자로서의 위치에 있으므로[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죽은 자가 아니므로] 영생하는 자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시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내 속에 임하시는데 그렇게 성령을 "물려받아"[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아 인간이 된 것처럼] 성령으로 출생한 까닭이다[요 3:3-6]. 그러나, 아담의 범죄를 거울로 삼아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빌 2:12] 자기를 추슬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아담과 같이 범죄하면 아담의 말로(末路)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81)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죽은 자로부터 산 자가 됨에 있지, 이런 시험[영물이나 첫 사람 아담이나 다 예외 없이 거쳐야 했던]을 건너뛰고 면제 받고 예외가 되는 무슨 특혜를 받는 뜻은 결코 아니다. 공명정대, 공정공평, 원리원칙과 일사부재리로 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불공평한 일을 그 어떤 피조물 중에서도 행하실 리 없다. 많은 사람이 이 점에서 오해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아주 그릇되게 인식하여 멸망을 자초한다[벧후 3:16]. 에덴낙원에서와 같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걸려 든 것이다.

(82)우리가 영적 부활을 하여 다시는 죽은 자가 아니요 산 자가 되어 있지만 아직은 육체의 부활을 입지 않은 것은 시험 받기 위함이라 했거니와, 이 시험의 무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요 20:22] 그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4:34] 여부로써 나타나게 되어 있는 까닭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시어 경고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켜 행하는지 그 여부로써 그 시험의 주제가 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83)시험의 내용과 본질은 같으니 곧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하나님께 대한 생각과 그 말씀은 무시하고] 자기중심으로 나간 것이었고, 우리 역시 우리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뜻을 행하지 않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면 자기중심 곧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이 그 온상(溫床)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편안히 지내고 고난 받지 않고 핍박을 면하려는 생각이 바로 자기중심인 것이다[갈 6:12/5:11]. 고난 받음은 이 세상에 위치한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필연이고 필수인데 왜 회피하고 기피하려는가. 이는 하나님이 아들됨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이니 그 선택대로 될 것뿐이다.

(84)시험은 절대적으로 각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즉 간섭, 강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님 시험 당하시는 것을 보아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시험하는 동안에는 천사들이 일절 어른거리지 않다가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떠난 뒤에야 즉 시험이 종료된 다음에야 나타난 것이 바로 이를 말한[마 4:11]. 이렇게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우리가 있는 동안은 주님께서도 천사들도 그 모습을 우리 눈앞에 드러내지 않는다. 사울에게 나타나실 때처럼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그러하고 천사들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대로 특수한 경우에만 한한다.

(85)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 역시 마찬가지다. 특별히 이 시대에 임하여 인간들을 속일 목적으로 빛의 천사로 가장하거나 아니면 오늘날처럼 소위 ufo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가능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속이기 위해서 그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천사들은 우리의 이 시험 기간에 간섭이나 강제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천사가 나타나면 천사에게 의존하려 들게 되고, 악령이 나타나면 공포의 대상이 되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따를 리가 만무하다는 것을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자신도 잘 알기 때문이다.

(86)아름다운 것 또는 신기한 모습 등으로 위장하는 것는 빛의 천사로 가장함의 일종으로서 과거에는 소위 "신선, 선녀, 선계(仙界)" 등으로 나타났으나 지금은 소위 "외계인, 우주선", ufo 등으로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악령도 천사도 우리 인간들과 뒤섞여 있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주님이시랴. 우리 속에 성령으로 계시므로 일절 우리가 볼 수 없으나[내 영혼이나 남의 영혼을 볼 수 없음과 같이] 여기서 우리의 믿음 여하가 가름되어지는 것이다.

(87)즉 단순히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 하는 일반 세상 사람들과 같이 우리 역시 보이시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나와 항상 함께 계시고 사시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나을 것이 없다. 그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그 열 형들이 와서 야곱을 거짓말로 속였을 때[창 37:31] 또는 여부스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속일 때[수 9:1], 하나님께서 혹은 천사가 보이는 형상으로서 야곱이나 여호수아와 함께 있었다면 야곱이나 여호수아나 반드시 당시 상황에 대해 문의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분명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까맣게 잊어 버린 것이다.

(88)그러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셔서 야곱이나 여호수아에게 속지 말라고 실상을 알게 해 주셨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여호수아의 경우 오히려 성경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수 9:14]고 책망하고 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서 그 말씀을 믿을진대 그렇게 믿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데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였으므로 이것을 절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 없다.

(89)우리가 바로 그런 위치에 있음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세상은 시험의 장소요 시험의 때이다. 시험하는 자가 항상 포효하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 헤매는[벧전 5:8] 그런 상태이다. 우리가 마치 홀로 있는 것처럼 처신할 수 있는가. 여자가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어디엔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아담과 의논할 생각도 않고 얼른 손이 가서 선악과를 따서 먹은 그와 같은 위험한 사태가 쉴 새 없이 전개되고 있다.

(90)반드시 주님을 의식하고 주님께 일일이 기도하여 여쭙고 주님께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고백하고 주님께 마음으로 항상 노래하는[엡 5:19] 등의 생활을 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하는 강제나 간섭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 행하는 사랑의 자발적인 행위이어야 한다. 이것이 항상 핵심이다. 그리고 또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항상 조심할 일이다[고전 10:12].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호수아나 야곱의 예가 우리에게 경고가 되니 그래서 성경을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해 주는 지혜"[딤후 3:15]라 하는 것이다.

(91)한번 받아 항구불변한 사실로 정착하는 것이 우리 구원이라면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 할 리가 없다. 그러면 우리 구원이 항상 요동 치는 파도와 같이 정함이 없다는 말인가 할 것이다. 요동 치는 것은 우리 마음이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기"[롬 10:10] 때문에 그러하다, 화살을 엉뚱한 데에다 돌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원래 사람 마음은 항상 본인 스스로가 최고도의 노력을 기울여 지키게 되어 있다[잠 4:23]. 얼마든지 변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92)바울 사도가 본을 보인 것처럼[고전 11:1] 우리 역시 아무쪼록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빌 3:10,11] 작심하여 충성한[계 2:10] 경우 그래서 우리가 고난 받고 죽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나 우리나 세상 앞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요 현실이니 그리고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 살다가 죽은 것이므로, 사람이 그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다면 그 살아있는 모습이 자연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세상에 나타나져야 하고 또 그렇게 산 모습으로 세상 중에 이전처럼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죽었으니 다시 살아나면 그렇게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이전 죽지 않았을 때처럼 세상에 그 산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야 한다는 그 의미다.

(93)이는 다른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죽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사람이시기 때문에[하나님이시면서도] 그 살아나신 것이 현실로 나타나야 하고 우리 역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똑같은 하나님의 아들(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되어 있음 역시 변함이 없다)로서의 동일한 모습과 과정을 취하느라 세상에 보내심 받고 주님의 일하다가 주님의 남으신 고난을 내 몸에 채우며 죽었으니, 당연히 세상 앞에서 그 다시 살아난 모습으로 나타나져야 하는 것이다.

(94)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의 몸도 그와 같은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면 사람, 사람이시면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헷갈린다고 생각하는 경우, 전적으로 사람이시라고 생각하고 단지 다음 경우에만 하나님이심이 입증된다고 보면, 뒤섞여 갈피를 못잡거나 분간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즉 부활하신 후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시는 일로써만 하나님이심이 입증된다 함이다. 사람만이시라면 사람은 육체이므로 이런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95)그리고 그 하신 일이 모두 하나님[아버지] 친히 하신 일이요 그 하신 모든 말씀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것이니 왜냐면 아버지와 하나로 계시는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하시는 말으로서 아들 개별적으로 하신 말씀은 하나도 없고 아들 단독으로 판단해서 하신 일 또한 하나도 없음을 분명히 밝히셨으니[이 사실은 요한이 그 복음서에서 명백히 알리고 있다] 우리는 이로써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명을 받고 있는 것이다.

(96)세 번째로는 부활하실 때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다시 말해 아버지와 하나되시는 아들이 아니시고는 절대 부활하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아버지]으로서는 아들[사람]을 절대로 다시 살리실 수 없는 것이다. 왜냐면 일단 우리 위해 죽으셨으므로 그 죽음은 변경이 없고 또한 영원한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구원의 의미가 아주 사라지게 된다. 왜냐면 다시 살아나시게 되면 그 죽으셨다는 의미가 취소가 되어 버리는 까닭이다. 이는 당연한 우리의 상식적 결론이다.

(97)그러나 그렇게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버지와 둘이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 계시는 모습의 구조상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둘이 하나되심을 통해 아버지 친히 아들의 모든 일에 함께 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위에서 지적한 바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그가 이루신 또는 나타내신 모든 것이 아버지 친히 하신 일이요 따라서 아버지의 모습이시라는 그 이유이기도 하다.

(98)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셨으니까[지금도 그러하시고 영원히 그러하시지만] 아버지께서는 아무리 아들 안에 계시고 아들과 하나로 존재하시나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신 것이다. 사람되신 것은 오직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아들은 사람으로서 죽으셨지만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으로서 그대로 살아 계심이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아들처럼 죽으실 것도 살아나실 것도 없고 그냥 여전히 살아 계시는 그대로 살아 계시되, 아들로서는 이와 같으신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다시 살아나심이 된 것이다. 왜냐면 아들께서 사람으로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으로서는 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심으로써 살아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곧 사람으로서 죽으신 아들의 모습이 되어 계시기 때문이다.

(99)그러므로 [사람으로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으로서는] 살아 계심이다. 아버지께서는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히 '변함없이 살아 계시는데' 반해 아들께서 사람이시므로 사람으로서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신' 오직 그 차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계시는 그 영으로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하는 것이다. 또한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아들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세도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내 목숨을 누가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버린다"[요 10:17] 하셨다. 모두 '둘이 하나됨'의 이치에서 그러하신 것이다.

(100)내가 그리스도와 또한 둘이 하나되어 있으므로 바로 이 이치를 따라 이루신 우리의 구원이다. 고로 그 관계와 의미가 똑같다. 이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우리 대신하신 죽음 때문"[죄를 여전히 짓고 죄인으로 있으면서도 구원된다고 오늘날 많은 이들이-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그런 이단 사상이 횡행했지만(고전 15:33/약 2:20)-전혀 다른 의미로 복음을 착각하고 있음과 같이]이라는 주장은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01)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냥 죽으시는 시늉처럼만 하신 것이 아니라[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완전히 죽으신 것이니 오직 아버지와 하나 되심을 인하여 다시 살아나신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의 죽음 역시 실제이고 역사적 사실이고 결코 죽는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죽음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바울은 명백히 했다.

(102)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고전 15:17,18]이라고 분명히 못박았기 때문이다. 이를 거듭 강조하여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14] 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으로 이루어진 구원이기 때문이다.

(103)이렇게 주님도 나타나시고 나도 나타나는 등의 한꺼번에 나타나는 바로 그 날이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이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 곧 세상에 다시 오심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렇게 주님이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실 때 주님을 위해 죽은 우리의 다시 살아난 모습도 역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도 위에서 지적한 대로 주님을 위해 살고 일하고 죽은 경우에 한하는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고 나를 위해 이 세상 사시다가 나를 위해 일하셨고 나 위하여 죽으신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104)나도 주님 위해 살고 일하고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해야 그렇게 세상에 부활한 몸으로 나타날 수 있음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주님 안에 잠든 이들은[계 20:5] 마지막 심판 때 그 몸으로 행한 대로 받기 위해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고후 5:10] 그 결과로 선을 행한 자에 한해서[롬 2:7,10/요 5:29] 영생을 얻어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 나타나실 때 주님과 영광 중에 나타날 사람들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이유가 없다.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될 자들은 "둘째 사망의 해(害)를 받지 않는다"[계 2:11] 한 것이다.

(105)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원칙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게"[빌 1:29] 되어 있다. 바로 이런 고난을 받기 위해 우리가 구원 받은 현재에도 이와 같이 자연계에 속한 연약한[고난 받기에 알맞은] 몸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지 우리의 소관사가 아니라고 접어두는 것이 옳다. 왜냐면 우리의 목적은 영원토록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06)나 자신의 명예나 편안함이나 영광을 위해 함이 일절 없다. 이는 그리스도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대로 될 것이라는 말씀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다만 바울은 그렇게 분류되는 사실만 나타내고 있고 그 경우에 모두 "우리"[고후 5:10/고전 15:51]라고 하여 일반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경계할 것은 "나는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함께 부활하여 천년 동안 다스리겠다" 하는 개인적인 야심이나 포부는 품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이므로 다스리는 일은커녕 구원마저 잃을 개연성이 아주 높다.

(107)이로써 모든 과정은[창조의] 끝나고 사람답게 사는 삶 곧 영원히 그리고 행복하게 [범죄로써 서로를 해치지 않고] 아름답고[眞善美] 올바르게[義] 사는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천국에서의 삶이 전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일은 모두 완료되고 하나님의 애초의 뜻을 따라 조물주와 피조물 간의 행복한 세계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는 창조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창조는 완성되었으나 일부 피조물[영물과 인간(아담) 모두 통틀어] 가운데 범죄하는 자가 생겨 하나님의 창조를 부분적으로 훼손하였으므로 부득불 새 창조로써 그 손상된 부분을 메우시느라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108)그래서 그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쉬신 것이 아니라 계속 일하신 것이다[요 5:17]. 지금도 그런 상황은 진행 중이므로 역시 하나님은 일하신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한 우리와 함께 일하심이다[고후 6:1].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일하신다는 말씀을 왜 하셨는고 하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될 때 그들에게 주신 대답이셨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것이다.

(109)하나님께서는 인간 범죄를 인하여 아직까지도 일하시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창조를 마치시고 쉬셨다는 의미로만 알아 아직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안식일을 빙자하며 철없이 비난하고 비판하는 어이없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안식일의 의미는 두 가지이니 하나는 첫 창조를 하시고 쉬셨다 함이요, 둘째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시 일을 시작하시어 우리 위해 죽으시는 일을 하심을 이집트 탈출 때 어린양의 희생 제물의 피로 이스라엘의 모든 기력(氣力)의 근원인 장자(長子)들을 살리심으로써 나타내신 것을 함께 상징함이었다.

(110)이를 처음부터 성경이 나타내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은 편협된 시각으로 이를 간과, 무시하고 외곬으로 일면만 고집한 것이다. 즉 첫 창조로써 완성된 하나님 사업을 인간이 범죄로 허물었으므로 하나님 친히 오늘날까지 쉬시지 못하고 다시 일에 접어드신 사실을 함께 가르치시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의미였다. 다시 말해 "엿새" 동안 일하시고 "제7일"에 쉬셨으나 다시 일을 하시게 되니, 그 제7일은 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

(111)"안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던 것을 일절 중단하고 그 대신 하나님 섬기는 일로써 보낸다는 뜻인데도, 하나님의 아들 친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을 막으려 하고 이를 비방했으니 그런 본말전도도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특정된 안식일이 없다. 일을 하는데 하루만 일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계속 일주 7일 1년 365일을 연달아 일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계명을 통하여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365일 오로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를 상징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112)오늘날의 안식일 개념도 어폐가 있다. 하루만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치라고 명하였던가? 우리의 남은 생애 전부, 모든 시간과 정력이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다[고후 5:15]. 일주 7일 모두가 말하자면 "안식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정확한 의미가 영원히 사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사는[영원히] 방법을 가르침에 있으니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음으로 죄 짓지 않고 그 말씀을 불신하지 않고,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요 20:21,22/4:34] 데에 있음을 확언하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113)죽은 자가 아닌 이제는 "산 자로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나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머리의 지시를 따라 사니 머리를 위해 사는 것임이다[고후 5:15]. 나 위해 죽으시고 사셨으니 나 역시 죽어도 주님 위해 살아도 주님 위해 살아야 당연하지 않은가[롬 14:7-9]. 영생 받음은 사는 자가 됨에 있고 사는 자가 되어 있음은 머리와 몸의 관계에서 한 몸의 이치대로 살아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에 있는 것이다.

(114)영생은 그런 다음의 부차적인 것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영생 얻는 것 하나만을 생각하니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의 악인으로서 멸망 받을 자로 성경이 취급하는 것인데 이를 알지 못하니 슬픈 일이 아닌가. 앞서의 설명대로 영생과 자기 부인[행복하게 사는 유일무이의 방법]은 평행선으로 달리는 철도 레일처럼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영생 하나에만 눈독을 들인다. 그것은 영생까지 욕심 내는 탐욕일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으므로 천국에 가서도 범죄하여 이웃을 해칠 것이기에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 7:21]는 말씀이 그 뜻이다.

(115)그리고 이 세상은 앞에서 언급했지만 사람이 사는 세계가 아님을 항상 명심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을 고집함이니 그 결과는 죽는 것 즉 멸망밖에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여 사람 살리는 일에 죽자 사자 매달릴 일이다. 이것이 가장 시급하기 때문이니 왜냐면 이 일만 끝나면 세상은 지체없이 끝날 것이기에 그렇다. 그리 되면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것은 내 동족의 구원"[롬 9:3]이라는 열망, 모세가 "이스라엘을 용서하시지 않으시면 제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 책에서 지워지기를 바랍니다"[출 32:32] 하는 기도가 용솟음칠 수 있을 것이다.

(116)왜냐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이기 때문이다. 그런 심정에, "육신대로 살" 욕심이 어느 구석에서 생겨나리요. 자기 목숨을 바쳐 사람 살리기에만 열중하는데 어느 여가가 있어 그런 안락한 생각에 빠져 들 것인가. 이와 같이 자연스러운 흐름 그대로다. 무리한 것도 없고 억지도 없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이 흐를 뿐이지 다른 것이 흐를 이유가 없다. 따라서 핑계도 있을 수 없다. 믿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결과가 나타나질 것뿐이다. 믿음 없음을 다른 무슨 변명으로 핑계를 댄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 통할 리 없다. 물은 곬으로 흐르고 죄는 지은 대로 기어코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117)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서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영생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아예 꿈도 꾸지 말 일이니 그것은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따를 수 없고 제자가 될 수 없어 그리스도와 남남이 된다. 믿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무슨 말로 변명하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믿지 않는다"는 말 외에 달리는 통하지 않는다.  

(118)'이순신 정신'이 무엇인가. 공동체의식이라 했지만 공익(公益) 추구 정신이다. 공공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그 한 부분인 자기 자신의 유익도 함께 달성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공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사익 즉 사사로운 이익부터 먼저 생각하면 나 혼자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다 함께 망한다. 각 지체 각 부분이 한 몸을 이루는 이치와 같으니, 하나가 망하면 나머지도 망하고 하나가 흥함으로써 나머지도 덩달아 흥하니 그래서 공동의 운명을 짊어지는 조직체다. 덩달아 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범죄한 암세포는 도려내게 마련이다.

(119)귀, 코 혹은 눈이 전체를 생각하면서 자기를 생각해야지 자기 혼자 위한다고 코가 코로서의 자기 하나만 가지고 살 수 있는가. 때문에 자기 혼자만 생각하고 몸 전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삶이 아니라 망할 장본이라는 것이다. 전체를 위하는 것이 그 전체를 이룬 한 부분으로서의 나를 동시에 위하는 것이 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나부터 먼저 위하면 그것은 그 나를 위하는 일에 전체를 이용하겠다는 것인즉 그것은 상식과 이치에도 어긋나거니와 그런 욕심을 각자가 다 가진다면 그 사회가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120)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사실을 가리킴이요 또 가르침이다. 하나님께서 만물과 우리 인간들을 지으시니 그 지으신 모든 것이 한 몸을 이룸이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이다. 이런 것이 조물주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만드심으로써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삶의 법질서이다. 즉 사랑의 원리가 바로 이 공동체 의식의 뿌리다. 이 사랑의 원리가 조물주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을 만드심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121)이 공동체 의식에서는 항상 그 중심점이 있어 이 중심을 둘러싸고 모든 것이 회전하는 양상을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머리의 존재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머리시다. 이공 순신 역시 백성들의 높은 칭송으로 해상왕(海上王)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이성계처럼 그런 인기를 이용하여 조정을 둘러엎고 자기가 나라를 차지해보겠다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다. 임금의 제일(祭日)이 닥치면 반드시 북향 재배했다. 그런 심경에 모반의 싹이 틀 리가 없다.

(122)임금과 조정의 생각은 달랐다. 이성계의 본보기를 따를까 그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이성계도 왜구를 물리친 공로로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터라 이공 역시 왜적을 상대로 그렇게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에 더욱 더 불안했다. 그래서 장수 하나도 귀한 당시의 위급한 처지에서도 그를 죄로 얽어매어 죽이려고까지 하는 미친 마음의 사사로운 욕심으로 일관했으나 끝까지 이공은 왕을 중심으로 모든 행동을 통일 조화시킴으로써, 철저히 공익의 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123)매해 빠짐없이 임금의 제삿날에 궁궐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배례를 올린 그가 사심(私心)이 있을 리 없다. 전쟁만 끝나면 자기 소임은 다했으므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짓겠노라는 것이 그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렇게 소회(所懷)를 읊은 시를 써두었기에 우리가 그 마음의 일단(一端)을 아는 것이다. 이런 '머리' 의식, '머리' 중심이 공익정신의 빠뜨릴 수 없는 특징 중 하나임을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시 강조한다. 자기가 머리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대표적인 악(惡)이다.

(124)만유의 중심이 곧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경험으로 알거니와 행복하고 원활한 인간 삶이 되려면 이러한 중심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차원은 좀 다르지만 철학자 칸트의 소위 "요청적 유신론"이란 것이 그런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그 구원을 의지한다는 말은 아니했으나 그런 조물주 신이 없다면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평소 강조한 대로의 "상식적" 귀결인 것이다. 그런 결론에는 이르렀어도 그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확신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125)성경에 그런 사람을 바보라 한다[시 14:1].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그가 내린 결론이 만인에게 더 설득력을 지니는 셈이다. 그의 견해가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사람이기에 내릴 수 있는 편견이라고 말할 모든 입을 그나마도 다행히 막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다. 그런 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믿을 수 있는 반면에 지식만으로는 사람이 구원되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드러내는 것이다.

(126)한가지 더 생각할 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더라도 이같이 공익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이공 순신의 생애에서 입증되는 바라고 이미 지적했다. 이 세상의 생리가 그렇다. 이공은 처음부터 그런 정신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사사로운 청탁이나 압력 같은 것에 감연히 항거하여 자기 평소의 신념대로 나가니, 배경을 업고 행세하려 하고 뇌물이 성행하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에서는 앞길이 막히기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

(127)이공은 자기 실력대로 나가야 옳은 세상이라 믿어 그렇게 스스로 행동하는 것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갖가지 부정과 사리사욕으로 출세하는 세상에서 형통할 수 없었고 항상 그늘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응달에서 천대만 받고 부당하게 당하기만 하니 세상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처량한 신세"로서 이를 아는 이마다 혀를 차는 처지였다. 그런데 그런 치사하고 아니꼬운 세상의 감히 그 어느 누구도 나서지 못하는 상황으로 사태가 돌변하자 비로소 이공 홀로 나설 수밖에 없는 위치에서 그런 진정한 사람 삶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었기에 만인의 사표가 된 것이지 그런 상황이 오지 않았다면 평생 "불우하다", "복이 없다" 소리만 듣고 이름도 없이 역사의 그늘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128)이공만 아니라 이같이 의롭게[옳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 빛을 발하기는 하지만 세상이 알아 주지를 않는다. 그런 돌발사태가 벌어져야 비로소 그 빛의 아름다움과 밝음을 온 세상이 알게 되는데 우리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배경으로 '이순신 정신'을 영롱한 그 본연의 색깔대로 비쳐볼 수 있는 축복을 선사 받은 복된 민족이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렇게 아주 이상적으로 또 극적으로 이 공익정신의 진정한 값어치가 화려한 역사적 무대를 통해 있는 그대로 드러난 사례를 여기 이 경우말고는 이렇게 선명하게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129)있었다 하더라도 널리 알려져 있지 못하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진귀한 교훈을 있는 그대로 음미할 수 있으니 이는 가히 쓰레기 틈에 솟아나 핀 장미 꽃의 진귀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상 일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일이랴. 하물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이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이런 사람답게 사는 법 즉 공동체의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데 세상에서 환영 받기를 가히 바라겠는가.

(130)구원을 받기로 택하심 받은 자 외에는 그 누구도 그 가치를 인정해줄 리 없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이공이 의롭게 강직하게 나가는 탓에 번번이 상관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그 소위 출세 길에 항상 지장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사람 사는 올곧은 길만을 택하므로 세상에서 미움 받고 따돌림 받고 모든 것이 열악한 사정 일변도로 나가고 고난만이 지천으로 깔려 있게 된다.

(e)당시 이공의 자세가 세상에서 인기를 얻지 못함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세상에서 영합되지 못하고 항상 그늘 속에 묻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안되는 경우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이상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공의 공익정신이 그와 같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임을 임진왜란이라는 대환란을 통해서야 비로소 입증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생활과 행실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잘 드러내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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