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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 메시아 교회 등록일 2016.02.27 22:22
글쓴이 김일동 조회 555

메시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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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아름다운 것

(1)그러나 뜬구름 같은 그런 세상의 포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신념대로 이공처럼 일관하는 자세야말로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며 칭송 받아 마땅하리라. 공익 정신은 주인의식이다.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동이 되어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을 누가 막으리요. 그리고 정작 본인은 태평이다. 왜냐면 신념대로 산다는 자긍심이 뿌듯하기에 그렇다. 이공이 물론 천부적인 전략가로서 장수의 재목이었지만 그보다 그로 하여금 왜적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게 만든 것은 평소 그와 같은 주인의식에서 스스로 치밀하게 대비하고 준비한 결실이었던 것이다.

(2)거북선 건조도 조정에서 시켜서 된 일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군의 실력자 신립까지 반대를 했지만 자기 신념을 따라 끝까지 그 필요성을 역설해가면서 추진한 귀중한 비장의 무기였던 것이다. 그것으로 적을 쳐부수는(기록상으로는 3척) 맹활약을 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자주적인 주인의식은 유능한 장수는 상부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한다는 말도 있듯이 적의 간계에 빠진 조정의 명령에 섣불리 응할 리 없다.

(3)그 결과 '나'원균의 부채질도 있고 해서 마침내 서울로 붙들려 가 하마터면 무능한 임금과 조정의 손에 죽을 뻔했으나, "위급한 전란 중에 한 명의 장수라도 아껴야 한다"는 정탁의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에 죽음은 겨우 면했다. 백의 종군하면서도 그의 이 자주성을 잃지 않고 '나'원균이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자패(自敗)하여 전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에 접하기가 무섭게 자청하여 그 모진 형장에서 거의 망가졌던 몸을 이끌고 남쪽으로 말을 달려 그 비극적 상황을 점검했던 것이다. 다시 3도수군 통제사라는 빈 껍데기뿐만의 허울 좋은 직함을 받기 전 백의종군 당시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이 자율이요 주인 의식이다.

(4)우리 수군 전멸에 당황한 조정은 군사없는 껍데기 같은 통제사로 다시 이공을 복귀시켰으나 패잔 병력 겨우 12척과 몇 안되는 병사들뿐인지라, "해전은 이제 가망 없으니 차라리 육지로 올라와 육전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다시 내렸다. 이에 이공은 해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조정을 힘껏 설득하면서 쓴 말,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즉 "내가 죽지 않았고 아직도 12척(어떤 기록에는 13척이라고도 하니 그 후에 1척 더 찾아내었던가)은 있다"라는 천고의 명언을 당당히 역사에 남겼다.

(5)그래서 그 의기 하나로 역시 치밀한 대비 끝에 [이순신에게 희망을 걸고 다시 몰려든 백성들의 피난선을 전선(戰船)으로 가장하기 위해 거짓 진세(陣勢)를 벌려 전투시 배후 바다 가운데 집결시킨 것도 그 한 예다], 조선 수군을 섬멸한 끝이라 사기충천한데다 군사력으로도 열 배가 더 넘는 (기록에는 900여척으로 덮쳐왔는데 그 선봉은 300척 정도였다 한다) 적을 명량해전[1597.10.25(음 9.16)]에서 대패시킴으로써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풍신수길의 2차 침공[한반도는 물론 중원 대륙까지 넘보려는] 전략의 동맥을 개전 초와 같이 완전히 절단시켜 버린 것이다.

(6)이 명량대해전은 한산도해전[1592.8.13(음 7.7)]에서와 같이 한반도를 완전 석권한 뒤 해로를 통한 보급로 확보로 중국 대륙까지 침탈하려던 풍신수길의 야망을 두번째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송두리째 둘러엎은 결정적이고도 핵심적인 승리다. 한반도 역사에 이런 크나큰 본보기가 탄생하여 우리 인생 역정에 큰 자극제가 되어 있는 것은 바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당당히 보여 주는 만대의 사표, 전세계 인류에게 과시할 수 있는 사람 삶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7)만일 이공 순신이 사리사욕에 눈먼 인물이었다면 절대로 명량해전을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나'원균의 우리 수군 전멸 후에도 그 몸을 날려 정확한 상황 판단을 위해 자진해서 남해안 지방으로 말을 달려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요 조정에서 육지로 올라와 싸우라 하면 그대로 따라 했을 것이니 어느 모로 보나 이제는 승산없는 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해전의 중요성을 간파했고 그 신념 따라 행동했기 때문에 그 바다 길 몫을 벗어나지 않고 대기했다가 마침내 대망의 최종 승리를 이룩한 것이다.

(8)승패를 떠나 자기의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정신이 만고에 기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사리는 데에 마음이 없고 자기가 맡은 업무, 본분, 사명에 끝까지 충실하고 충성하기에만 여념이 없었으니 그래서 한 시대의 구국(救國)의 영웅이 된 것이다. 한반도만 구출한 것이 아니라 중원 천지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미리 방비해 낸 대공을 이룬 것이다. 비록 한 사람 몫이라도 그 철저한 공익정신이 이같이 위대하다.

(9)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충성과 충정(忠情)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주인 의식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자기 맡은바 일을 '즐기는' 데에서 두드러진다. 마치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처럼 한다기보다 실제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軍)을 돕는 일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박차고 나갈 뿐 주저하지 않기를 마치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기욕(嗜慾, 좋아하고 즐기려는 욕심) 같이 하여 조금도 빠뜨림이 없었다"고 기록(李肯益, 1736-1806, 역사서로서의 '연려실기술'의 저자, 실학자)한 것도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10)주인 의식, 하나님 아들 의식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다. 기도하는 일, 전도하는 일, 선행 등의 주님의 일 모든 것이 다 즐거움이요 기쁨 그 자체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18] 함과 같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거니와, 기뻐하라"[빌 4:4] 했고, 먹고 마시는 즐거움보다 더한 것이 성령 안에서의 평안과 희락[기쁨]이라 그리고 의[를 행함]라 했고[롬 14:17],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 한 그대로다.

(11)이는 십자가로 나아가시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낙심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 "내 기쁨과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하심과 같다[요 14:27/15:11/16:33]. 악을 선으로 이기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살전 5:15]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는["singing and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엡 5:19] 등 이런 것은 성령 충만의 비결이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는 수군 대장으로서 이공이 그 사명에 충실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연히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가 명백해진다.

(12)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서 우리 구원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이를 강조하는 뜻에서다. 누구든 이렇게 살기만 하면 구원이 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은 새 생명의 의미가 바로 이런 공동체 정신으로 사는 데에 있음을 밝히는 데에 있고, 지금까지 이런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역점을 두고 설명하는 것뿐이다.

(13)이공의 공익 정신은 상사가 인사 청탁해올 때도 감연히 거절했고, 상사가 관사의 오동나무 한 그루를 사사로이 베어 올리라는 청을 해도 의연히 거부했던 것이고, 이전부터 평소 병영(兵營) 생활을 할 때도 출장 시에 받는 양곡(糧穀)은 반드시 그 쓴 나머지를 반환했던 것이니, 요즘 세상의 타락한 안목으로는 시시콜콜 따지고 벽창호같고 융통성 없는 꽉 막힌 인간 유형으로 매도당하고 조롱거리나 되겠지만 실상은 이것이 그런 '구국'의 주인공으로서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14)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라야 큰 일에도 충성한다는 것과 같이, 일상 생활에 그런 의식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어야 그런 힘이 무한 동력으로 적시적소에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공의 이런 정신은 어릴 때에도 두드러졌다. 이공보다 몇 살 더 많은 친구 유성룡이가 자기네 집 울안에 있는 과실 나무[감나무인 듯]의 가지가 울 밖으로 뻗어져 나와 조롱조롱 달려 손만 내밀면 딸 수 있도록 되어 있어 그것을 따먹자고 제의했을 때 이공은 그것을 거절하고 먼저 그 친구로 하여금 자기 집 어른에게 알려 허락을 받은 연후에 따도록 시킨 후 그제서야 따서 입에 넣었다고 한다.

(15)아무리 자기 집 과일이라 하더라도 아이는 어른의 허락을 받고 따야 당연 도리라는 생각에서 조금도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질서 의식이 곧 주인 의식이다. 공동체 의식에서의 핵심을 이룬다. 이공의 구국(救國)의 공적을 두고 후대 사람들이 미사여구로 꾸며서 치장해 준 것이 아니라 그 성품의 일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 사는 도리의 원리원칙을 따르고 이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마땅한 사람 삶인 줄로 어릴 때부터 교육 받아 왔고 또한 조부로부터 타고난 성품이었기 때문이다.

(16)이런 정신으로 한평생 일관하여, 자기 실력으로 요직에 앉아 거기 상응한 대접을 받는 것이 옳다고 여긴 그는 젊을 때 병판(兵判), 이판(吏判)의 배경에 의존하여 출세하기를 거부한 것이며, 직속 상관의 부탁이라도 부당한 것이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의연히 거부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미증유의 국난 때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의 우국충절을 따라서만 행동하게 했고, 때로는 명령 불복죄와 모함 등으로 거의 죽을 뻔한 위기에도 직면했지만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하여 뇌물을 쓰지 않았다.

(17)명량 해전에서는 전멸해 버린 우리 수군의 패잔 병력을 가까스로 수습하여 죽든 살든 이기든 지든 나라의 길목이 되는 이  위치만은 사수하겠다는 결의에서 그 정신을 입증했고, 한산도 해전에서는 주변의 반대와 국가적인 지원도 일절 없이 순수하게 개인적 결단으로 승전의 주역 중 하나가 된 거북선의 결정적 활약에서 그 정신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명량해전에서는 이 거북선마저도 없는 상태였으니 이공의 비창한 충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8)나라의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승전의 확률 즉 개인적인 영달의 기회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였던 자기중심의 '나'원균의 태도와 사뭇 대조가 된다. 공동체 의식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하느냐 아니면 자기중심의 안목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냥 개인적인 영달만을 꾀하고 자기중심으로 인한 결과가 장차 전체 인간 사회에 어떤 악영향이나 비극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냐 하는 것과 같은 것에는 전연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이,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세를 네게 주겠다"[눅 4:7]고 하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시험이요 부추김이다.

(19)이 세상 신이요 지배자인 악령의 이러한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감히 자주 독립성을 선언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그는 곧 이 악령의 무자비한 철퇴의 대상이 될 것이므로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그 증명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이러한 시험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지속된 것이니 곧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는 것이었다[막 15:32]. 다시 말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무리 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이 무한하시더라도 당신께서 그런 고통을 친히 당하시게 되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 하여 안심하고 그런 고통을 당하시도록 만든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20)그래서 가룟 유다를 부추기는 등 모든 시도를 감행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실 줄로 딴에는 확신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달랐고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완전히 패배, 좌절된 것이다. 마지막 아담, 곧 우리의 대표로서의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하심은 이 십자가 승리를 미리 말씀하셨다고 보아 무방하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우리를 죽이는 것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니[왜냐면 우리의 자진해서 죽는 죽음은 그의 패퇴를 의미하므로] 일종의 위협 수단인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의연하게 죽음을 향해 나아갈 일이다.

(21)따라서 우리는 적을 알면 적을 이기게 된다는 말과 같이 이는 그의 전술전법을 익힌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죽음으로써 위협하여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의지를 꺾고자 함이 그 목적이므로 우리로서는 우리의 죽음과 자진해서 받는 고난으로써 그 목적을 분쇄시키는 것이 우리의 승리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이공 순신과 풍신수길의 대결에서 이공이 승리한 것과 같은 것이다. 풍신수길의 목적은 한반도를 발판 삼아 중국대륙까지 넘보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이공이 들어서 보기 좋게 분질러 버린 것이다.

(22)광야 시험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시험에 대한 대응으로 "주(主)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눅 4:8]는 등 "기록된 말씀"을 일관되게 인용하셨다.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무기요 "성령의 칼"[엡 6:17]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 우리의 무기임을 또한 이 대목에서 확인하게 된다. 바로 올바른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사는 우리의 자세다. 올바르다는[義] 것은 하나님께서 애초 우리를 창조하실 때 설정하신 바 사람 삶의 기본 법질서에 따르는 공동체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함이다. 곧 머리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복종이다.

(23)그러나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는 인생들이므로 이런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구조로 된 인생 삶의 원리를 제대로 지켜 나간다고 해서 구원이 될 수는 없다. 죽은 자이므로 일단 죽어 끝[첫 창조에서 불행히도 인간 삶이 죽음으로 마무리된 것]을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는 방편[첫 창조는 완전히 끝내고 새 창조로 진입하는]을 구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연 필수라는 것이다.

(24)따라서 이렇게 먼저 일단 구원되어 산 자가 됨으로써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 이 공동체 의식 즉 한 몸 체제 안에서의 지체(肢體) 역할인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즉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롬 15:3]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함"[고전 10:24]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아도 위의 설명처럼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지배하는] 수월하지 않고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기피하는 터에 하물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집중 공격과 증오의 대상이 되고도 남는다.

(25)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를 이긴다. 그래서 구원 얻는 자들을 가리켜 이기는 자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계 2:7,11,17,26/3:5,12,21/21:7]. 이렇게 이기는 것이 남다른 강단과 이공 순신에서 보는 바와 같은 특징적인 성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니 오직 사랑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랑, 실로 평범하고 너무나 일반적이면서도 한편 최고도로 고결하고 거룩한 품성의 기본이요 근본인 것이다.

(26)이 사랑은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다. 아니, 어린 아이 같은 심성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다고 해야 옳다. 그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 하신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머리로서 사랑하고 한 몸된 이웃 지체들로서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곧 공동체 의식에서 발휘되는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이 없으면 순종 자체가 불가능하다.

(27)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살아도 올바르게 살고 죽어도 올바르게 죽으라 하심이다[롬 14:7-9]. 머리와 몸 관계에서 마땅한 도리를 따름이다.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 관계이므로 그러하다. 이것이 "의[義, 올바른 것]를 사랑하고 불법(不法)을 미워함"[히 1:9]의 의미다. "의"라고 하면 위구충절(爲國忠節)의 큰 뜻을 품은 큰 인물이나 하는 것처럼 많이 곡해되어 있으나, 사랑이라는 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간명한 사람 사는 이치를 따름이다. 고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랑만 있으면 그렇다는 얘기다.

(28)올바르게 사는 것이란 이와 같이 실로 간단 명료한 것이다. 간단히 표현해 사랑이기 때문이다. 올바름에 대한 사랑, 나라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등 사랑이 그 핵심 골자요 뼈대이다. 사람들이 이공과 같은 그런 생활을 어려워하여 기피하는 것은 그런 사랑에 대한 동기 부여를 받지 못한 또는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단정해도 좋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충분한 '사랑의 동기'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크게 분발하여 사랑에 눈뜨고 사랑으로 불 붙는 발화선(發火線), 점화선(點火線)을 찾게 되는 것이다.

(29)큰 일에만 공익정신[공동체 의식]을 나타내고 작은 일에는 "시시콜콜 따진다, 사람이 좀스럽고 잗달게 논다"는 등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려 하여 공익정신을 무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는 큰 일에도 마찬가지로 충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동체의식으로 사는 삶의 또다른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의 무용론, 무가치론을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평생을 두고 공익정신을 발휘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30)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하시고 그런 사람들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경고하신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원리원칙에 사는 삶은 조상적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다소간에 없으면 예로부터 평소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兪應孚)는 무과 급제한 후 비록 신분이 높기로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판서 급인 정2품)까지 올라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사는 것은 백날 가야 고기 한 점 못먹고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31)집이라고는 거적대기로 문을 만들어 걸어놓는 그런 정도였다. 그렇게 살다가 단종 복위를 꾀하던 중 세조 앞에서 악형을 받아 죽을 때 그 부인이 울며 하는 말이 "살 때에도 편하게 한번 살아보지 못하더니 죽을 때는 역적으로 죄를 쓰고 죽는다" 하므로 눈시울을 붉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권세를 빙자하여 백성들로부터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재산을 긁어모아 호의호식할 사람 같으면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목숨을 내어놓고 충신 노릇을 하지도 않는 법이다.

(32)세상살이가 이렇다. 이런 험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아예 처음부터 두루뭉실하게 편하게 사는 것이 똑똑한 것이고 애 터지게 의롭게 사느라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 해서 많은 사람은 세상 기준에서 보아도 넓은 길, 넓은 문을 통해 들어가려 하지 남들이 찾지 않는 좁은 문, 좁을 길을 택하여 이 세상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순신 정신'이 옳은 줄은 다 안다. 알지마는 그 길이 우선 보기에는 험하고 위의 유응부와 같은 가시밭길이기에 처음부터 감히 의로운 길을 걸을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33)그런 충신들은, 불의한 일은 할 수 없다 하여 백성들의 재산은 눈곱만큼도 건드리려 하지 않으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 고생시키기에 딱 알맞는 늘품 수 없는 졸장부라는 소리나 듣게 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 구조다. 당시의 이공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이미 지적한바 있다. 그러니 백이면 아마 백사람 다 그런 세상이 가는 대로 휩쓸려 따라 가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원균처럼 되고 이공처럼 되려고 하지 않는다.

(34)되고자 해도 될 수가 없는 현실이라고 타령만 하는 것이다. 과감하게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고 그래서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처럼 사람답게 사는 것으로 삶의 낙을 삼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감히 그런 공익정신으로 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공자가 그런 인애의 정신으로 천하가 이상적인 세상이 되는 것을 꿈꾸며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려고 이상을 품고 노력했으나 그 노력에 사람들은 동감은 하면서도 누구 하나 과감하게 동조하여 나서는 자가 없었고 비현실적이라고 비웃기만 한 것이다.

(35)그러나 어찌하랴. 그렇게 수월하게 살면 임시로 한 때는 좋으나 결국엔 필연적으로 공동파멸에 이르는 것 역시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양심이 가르치므로 누가 이렇다 저렇다 일러 주지 않아도 그 좋은 것을 다 알게 되어 있다. 한편 그렇게 의를 좋아하여 비록 없이 사는 고달픔을 일관해서 맛보더라도 그렇게 의를 지키며 사는 것을 삶의 더 큰 보람으로 느낄 때에는 세상의 그 어떤 압력에도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미 그는 그런 의의 고난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어 색다른 삶의 낙을 그 무엇과도 바꾸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36)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 삶이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삶이나 본질은 같기 때문이요 한 원리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세상만은 악이 대체적으로 주장하는 곳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특징들이 숨김 없이 드러나진다는 그 차이뿐이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히 1:9]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아무 희망을 갖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37)그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더러 이 세상 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아무 불만도 없다. 그리고 사람 살리는 일을 이 세상 권력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이 한사코 저지하려 들기 때문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일당[악령들]과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38)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도 협소하다 하셨고 그래서 "그리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하셨으며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24]이라 경고하신 것이다. 믿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비교적 적은 것은 "하나님이 미리 택하심 때문이라"고 어설픈 생각을 하는 이들이 '특정 신학'에 물들어 있는 탓으로 의외로 많다. 의외라는 것은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력을 발동시키고 그리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음을 말한다.

(39)그렇게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심으로써[미리 아시기 때문에 그 미리 아심을 근거로 해서 미리 정하심이 아니고] 사람들이 믿게 된다면 왜 그렇게 처음부터 정하신 하나님께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시고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 하시겠는가. 왜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려 함과 같이 내가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치 않았다"는 비탄의 말씀을 하셨겠는가. 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겠는가 생각을 좀 할 일이다.

(40)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곧 아버지 친히 하신 말씀이심을 명백히 하셨다[요 14:24]. 미리 택하심으로 사람이 믿게 된다면 왜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할 것이다"[벧후 1:10] 했겠는가. 성경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이들이 성경의 권위자로 척척 자리에 앉아 소위 그 "권위"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의 지배하에 있는 이 세상의 실상이다.

(41)또 오늘날 거의 전부의 사람들이 그릇되게 인도되어 가르침을 받는 대로, 단순히 특정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우리 구원이라면, 무엇 때문에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 들어가기를 힘쓰라" 하셨겠는가.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이라면 힘쓸 이유가 무엇인가. 믿음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기 위한 종교 행위[교회 예배에 충실히 참석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잘 따르는 등의]에 힘쓰라는 뜻인가?

(42)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말은 해도 자기의 행함[종교 행위]으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 됨을 바로 알아차릴 일이다. 무슨 행위든 그것을 하는 동기가 그리고 목적이 자기 구원일 때, 그것이야말로 '행함으로 얻으려는 구원'임을 왜 진작 알아채지 못하는가. 행위는 선행을 말하는 것만 아니다. 그런 종교 행위 역시 "행함"에 속하여 "행함으로 구원 얻는" 부류로 분류됨을 왜 진작 깨닫지 못하는가.

(43)구원 받은 증거는 이미 설명한 대로 일절 자기 구원은 의식하지 않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오로지 사랑하여 그를 위해서만 살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한다[고후 5:15/롬 14:7-9]. 오직 의식하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사실뿐이니 그래서 그리스도를 항상 내 앞에 모셔 섬기는 자세를 일관되게 충성으로 유지함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고 하면서[고후 5:15] 어떻게 자기 구원을 의식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무엇이든 움직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말인가.

()44"구원을 이루라"[빌 2:12], "네 자신을 구원하라"[딤전 4:16] 하는 경고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것은 다 구원하셨으니 이제는 네 자신이 너를 구원하라는 뜻으로서 다시 말해 범죄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를 새로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게 올바르게 살라는 것이다. 아담이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게 살아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이고 영물[천사]들 역시 그러하여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이 생겨나 영원 멸망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45)거룩한 천사들처럼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음에도 그렇게 살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 보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거룩한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산 자로 만드셨으니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산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몫은 다 하셨으니 이제는 너희 자신이 스스로를 산 자로 만들고 죽은 자로 만들지 말라는 뜻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헛된 욕심을 따라 자행자지(自行自止, 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한 것이다.

(46)제 마음대로 하되 질서와 원칙을 따라 해야 하는 것이다. 즉 사는 도리 또는 방법을 사랑하여 즐거이 그 사는 법대로 따라 사는 것이다. 나쁜 방향으로 제 마음대로 하는 것과 옳은 방향을 따라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은 다르다. 마음대로 한다고 하니 처음부터 사람 마음은 나쁜 듯한 인상을 주는 어감(語感)이지만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자유인은 선하고 의로운 목적으로 그 자유를 행사함이다. 악인 역시 그 악을 행할 때 그 자유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이를 가리켜 자유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이다.

(47)하나님께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영원히 멸망당할 목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건만 그 스스로를 멸망하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내가 너를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자로 만들었으니 네 스스로 네 자신을 그렇게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존재로 만들라는 뜻을 모든 영물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은 그 뜻을 그대로 받들어 멸망당하는 운명에 처해지지 않았는데 반해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일당은 그 반대로 나간 것이다.

(48)그러면 당시 그 "거룩한 천사들"은 자기를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는 자로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끙끙 대며 살았던가 하면 그것은 아닌 것이다. 왜냐면 이미 그들은 영원히 사는 자 곧 멸망당하지 않는 자로 창조되어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서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단지 그들은 조심하면 되는 일이었다. 혹 생명이 법과 질서 즉 올바르게 사는 것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일이 있을까 조심해야 했고 그들은 끝까지 그렇게 나가 자신을 지킨 결과 오늘날 거룩한 천사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위시한 악령들은 조심하지 않은 것이다.

(49)그와 같이 아담 역시 조심하지 않은 결과로 죽은 자가 된 것이다[롬 5:12]. 죽는다고 경고를 주셨는데도 조심하지 않은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이와 같이 "조심하라"[고전 10:12]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산 자로 만들었으니 네 자신 조심하여 스스로를 죽은 자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이시니 아담에게 주신 것과 똑같다. "내가 너를 산 자로 만들었으니 네 자신 스스로를 죽은 자로 만들지 말고 산 자로 만들라"는 의미이시다.

(50)천사들을 창조하신 다음에도 그렇게 경고하셨고 아담을 만드신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너를 산 자로 만들었지만 네 자신 너를 산 자로 만들고 죽은 자로 만들지 말라"는 경고이시니, 이 "네 자신을 산 자로 만들라"는 의미가 우리에게는 "스스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되어 있는 것뿐이다. "내가 너를 구원했으니 네 자신을 구원 못받은 자로 스스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이 "구원을 이루라"는 말과 같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1)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바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머리와 몸의 관계로 우리의 생명의 체제가 이루어져 있으니 몸으로서 마땅히 머리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이다. 머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데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하게 되면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아니한다. 우리 신체의 구조를 보아도 각 지체는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고 다른 지체 또는 머리를 위함뿐이다. 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 위한다.

(52)즉 머리는 몸을 위해 살고 몸[의 각 지체]은 머리를 위해 사는 구조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우리로 말하면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고후 5:15].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롬 2:7,10/요 5:29] 한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데 그것이 어찌 선을 행함이 아니고 의를 행함이 아닌가[요일 2:29/요삼 1:11/고전 15:34/롬 2:7,10/요 5:29].

(53)다시 말해 이미 죽은 자로 세상에 태어난 우리로서 무릇 선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 새 피조물이 되어 있지 못하면 절대로 자기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롬 7:24]. 선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영생이든 구원이든 자기와 관련된 것을 결부시킬 때에는 그것은 곧 자기중심 즉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 되어 절대로 선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선과 의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기를 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고, 죄와 악의 특성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54)따라서 성경이 선을 행하라 할 때는 믿어 구원 받아 그리스도 안에 있어 선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받았으니까]을 말하는 것이다[행 1:8]. 다시 말해 구원 얻은 열매를 찾음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열매를 요구하심으로써 선을 행했는지 여부를 따라 판결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으면 열매를 얻는데 즉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아 열매가 없으니, "믿지" 않음을 두고 심판하시는 것보다 믿지 않아 "열매 맺지" 않음을 두고 그것을 기준해야 즉 열매의 있고 없음을 따라 판단해야 공평 공정하기 때문이다.

(55)왜냐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열매가 없어 선을 행함이 없는 이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마 7:21/25:45]. 우리를 구원하심은 열매 맺게 하려 하심이라 분명히 밝히셨다[요 15:1,2,4,5,8,16/마 7:19,20/21:43/막 11:13,14/눅 13:6/벧후 1:8]. 시장하실 때 무화가 나무를 보시고 그 열매를 찾으셨으나 아직 때가 아니므로 열매가 없었다[막 11:13]. 그러나 그 무화과 나무를 단지 열매가 없음을 인하여 저주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성미가 고약하신 분이셨던가.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 아들이시니 그러하실 리 없다.

(56)그러면 무엇인가. 무릇 열매 맺는 나무는 오직 과실을 맺음이 그 생명이고 따라서 그 과실을 찾을 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 과실을 제공하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다는 진리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그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열매 맺을 능력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매가 없으니 나무를 찍어내 버려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 13:6] 하는 사형선고만이 내려질 따름이다.

(57)이공 순신만큼 공익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면 역사상 오직 그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 밖이므로 그가 우리의 본이 되고 사표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공익정신으로 살아왔지만 그런 정신이 낳은 결과를 놓고 볼 때 이공의 경우처럼 명백히 드러나는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를 대표적인 인물로 해서 우리의 귀감으로 삼는다는 뜻일 뿐이다.

(58)그런 공익정신의 인품(人品)은 그의 다음 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大丈夫生出 用則效死 不用則耕於野足矣 若取媚權貴以竊一時之榮 吾甚恥之"(대장부생출 용즉효사 불용즉경어야족의 약취미권귀이절일시지영 오심치지) 즉 "대장부로 세상에 났으니 써 주면 죽도록 충성하고 써 주지 않으면 들에서 밭 갈면 족하다. 부귀와 권력만 탐이 나 일시적 창달을 훔치듯이 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라"라는 뜻이다. "얼마나 부끄러우냐" 하는 것은 사람 사는 도리를 따름이 아니라는 것이니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 부끄러운 것이다. 사랆이 염치(廉恥, 청렴하고 깨끗하여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 때문이다.

(59)사리사욕을 챙기려고 덤비는 것보다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것을 생명처럼 여긴 것이다. 원래 사람 사는 도리는 이와 같이 인간 본성으로서 양심으로 누구나 깨닫게 되어 있는 것이니, '한 몸' 의식,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다. 사사로운 자기 욕심이 눈을 가리워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되는 결과가 각종 부끄러운 일을 하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다. 비록 굶어 죽을지언정 남의 것을 도둑질하여 부끄럽게 살지는 않겠다는 소박한 심정이 그런 위대한 공훈을 이룩할 수 있는 터전이 되는 법이다.

(60)노력한 대가만큼 이룬 공적만큼의 포상을 바라는 것이 옳고, 자기 실력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옳지, 이공의 말대로 개인의 영달을 도둑질하듯이 탐하면 사회 기강이 세워지지 않고 문란해진다는 평소의 생활 신념에서, 무과 급제 후 앞길이 바쁜 "늦깎이" 30대로서의 위치에서도, 직속 장관인 병조판서가 이공의 인물됨을 알고 자기 서출(庶出) 딸을 이공의 소실(小室, 첩)로 들이라고 권해도 거절했다.

(61)먼 친척뻘인 당시 이조판서 이 율곡이 스스로 공을 만나보자고 해도 이 역시 거절했다. ‘이조(吏曹)’는 육조(六曹) 중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천관(天官)이라고 별칭될 정도였으니,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알고 지내면 자리는 거뜬하게 얻어 챙길 수 있는 그런 위세 당당한 자리다. 이공은 그 정도로 사사로운 욕심이 없고 소탈한 인품이었는데도,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주장처럼 "'나'원균과 전공(戰功)을 다투었다"니 가히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62)한마디로, 사사로운 욕심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는 철저한 인생관을 보인 것이다. 인생 삶에서 무리하게 도리에 어긋나게 사사로운 이익을 찾지 않겠다는 것이고 어디까지나 순리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자기 실력 없이 남의 등에 업혀 이득을 보자는 것도 순리에 어긋나고, 자기 힘으로 그런 부정직한 것을 막을 수 있음에도 막지 않는 것 역시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서 자기 출세에 큰 배경이 되어줄 수 있는 이조판서, 또는 병조판서가 그들 자신이 자청하여 줄이 되어 주고자 해도 그것을 의연히 거부했다.

(63)공무(公務)에 임하여서는 상관이 부당한 청탁을 해올 때 이를 감연히 거절하여 그 앞길에 막힘이 많았던 것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이를 보고 친구 유성룡[이조 판서 이율곡을 만나 보게 주선하려 한 것도 유성룡이었다]은 고집불통이라고 아예 따돌리고 있다가, 정작 나라가 풍전등화 같은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기미가 보이자 황급해진 조정이 널리 인재를 구할 때 다시 유성룡이가 이공을 추천한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의 문외한들은 '있어보지도 않았던 '나'원균의 공'이란 것을 가로챘다고 떠드니, 세상의 인물에 대해서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께 관해서랴.

(64)'나'원균은 자기보다 후배인 이공이 통제사된 것을 시샘했지만, 이공이 만일 자기 후배가 자기보다 높은 서열에 위치해 그 지휘를 받았다고 해서 앙앙불락(怏怏不樂, 마음에 차지 않아 즐거워하지 아니함)했을 리 없다. 왜냐면 평소 자기 실력대로 하는 것이 순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실력이 없으니 공이 적은 것이고, 실력을 따라 후배라도 자기 위에 능히 오를 수 있다고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65)이공 혼자서 나라를 건진 것이다. 1592년 5월 23일[음력으로 4월 13일], 아무 대비 없는 땅에 워낙 파죽지세로 전격(電擊) 작전을 편 일본인지라 밀려드는 적의 기세를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나'원균이 배를 자침(自沈)시키고 군대를 해산했던 것처럼 감히 아무도 적을 맞아 싸우려 들지 않았다. 준비도 없었고 힘도 없었기 때문이다. 불야불야 준비라고 했더라 미리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왜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66)'나'원균이 이렇게 강도의 침입을 막는 대신 앞뒤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전선을 마음대로 이탈했으니 나머지는 물으나 마나이다. '나'원균이 당시 최고의 수군력(水軍力)을 자랑하던 경상 우수영 전선(戰船)들을 바다에 가라앉힌 것은 뒤쫓아오는 적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싸우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나온 것은 즉결 처분 감이다. '나'원균은 북방 여진 족을 상대로 싸울 때는 용맹을 발휘했기 때문에 이런 최고 요직에 발탁된 것이다.

(67)대식가(大食家)였다고 하는 것을 보아서 체구도 장대하거나 또는 비대했고 따라서 호탕한 면도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자기를 불러 쓰면 죽을 각오로 충성하겠다"는 이공과는 달리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니 이런 것이 개인주의의 전형이다. 때문에 왜의 대군이 들이닥치는 것을 본 순간 승산 없는 전쟁이라 판단하고 일신(一身)의 보신책(保身策)에 급급한 것이다.

(68)과거 여진족과 싸울 때에는 맞서 싸우면 이길 만하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용맹을 낸 결과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런 여진족과의 싸움과는 전적으로 질이 다르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이기기 위한 전황 판단이 아니라, 개인주의의 자기중심적 판단이었다. 이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명량 해전에서의 이공 순신은 당시 '나'원균에 비해 더더욱 승산이 없었다. 그 누구도 이 경우 포기했을 일이다. 포기해도 누구도 책할 수 없다. 심지어 조정까지 해전을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시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공 홀로 버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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