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회원가입 HOME

3위1체 원리

  • 관련 자료 모음
  • 바영사운

Home > 3위1체 원리 > 관련 자료 모음

제목 바영사운이란? (25) 등록일 2016.02.16 22:16
글쓴이 kwontayseek 조회 840

바/영/사/회-"[바]르게 [영]원히 [사]는 [회]개" 운동-"그리스도 구원"의 골자
---------------------------------------------------------------------------------------------------

하나님의 율법의 의미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회개하라 명령하셨다"[행 17:30] 했으니, 이는 비단 우상 숭배만 가리킴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복종이 숫제 불가능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악행을 방관하셨고 그래서 사람들이 악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니 만일 그렇다면 인류는 가인이 아벨을 까닭없이 죽임에서 드러났듯이 이미 오래 전에 공멸(共滅)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지 않는 이들이 절대 다수인데 그래도 사회 질서가 잡혀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국가 권력이 있어서도 그렇고 인간 내부에 장치된 양심의 작용이 역시 그렇다. 여기서 말의 핵심은, 그렇게 악을 행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영생의 결과를 내지는 않았다는 그 뜻이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다 회개하라고 명령을 내리신 의미가, 이제 그리스도께 오신 후로는 복종함으로써 즉 선을 행함으로써 영생에 이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종하지 않고 악을 행할 때는 그 행한 악을 인하여 심판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제는 넉넉히 순종하여 영생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을 함으로써 영생에 이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 받음"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모세 시대에도 그런 순종을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여러 가지 법 제도가 있어 이를 순종하도록 하셨으니, 이 역시 명령이므로 지키지 않으면 멸망을 상징하는 죽음에 이른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이 대수가 아니었으니 그 때 당시[모세 율법 시대]는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됨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앙망하도록 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자, 죄인 됨을 인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음을 통감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지킬 수가 있음을 통절히 느끼게 함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순종을 함으로써 그 생명이 유지되고 또한 구원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항구불변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신이요 지배자인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이 말씀을 곡해하도록 만들어,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다는 사실을,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구원되는 것 즉 순종으로써 사람이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단 이 한 가지만 시인하면 그 시인하는 것 자체만으로써 구원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말씀을 혼잡하게"[고후 2:17] 만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교리가 소위 "우리 대신하여 죽으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피조물을 산 자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즉 산 자로서 그 한번 주신 선물로서의 생명을 스스로 끝까지 유지시키는 방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함이다. 생명을 한번 주셨다고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방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한 몸을 이루어 사는 것이 되어 철저히 자기부인으로 일관하는 데에 있음이다. 그러므로 자유 의지를 주신 까닭은, 이와 같이 자기 부인으로 살든지 그와는 반대 방향인 자기 자신을 위하는 자기중심으로 나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심이다.

원래부터 생명은 이와 같이 자기 부인으로 일관함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생들은 이 자기 부인이 불가능했으니 왜냐면 범죄의 결과 죽은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죽은 자를 산 자로 변환시켜 준 것이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얼마든지 순종이 가능해졌으니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 가능해진 것이다. 자기 부인은 이미 설명해온 대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대가 되어 주심에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자가 되어 있으므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대가 되실 수가 없으니,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고 그 산 자에게만 생명이 되어 주심이므로 죽은 자와는 상관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를 죽은 자가 아닌 이제는 당당한 산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고 그리하여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단절된 상태를 원상 복귀시켜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도록 하심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산 자로서 순종해 나가면 그것이 생명이고 구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순종할 의사가 없든지 아니면 처음에는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순종해 나가다가 아담이나 또는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악령들처럼 스스로 순종하기 않기로 결정했을 때 그 생명 그 구원이 그대로 존속될 리가 없다. 존속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범죄의 결과 죽은 것이고 악령들은 영원 멸망에 현재 처해 있음이 아닌가. 그 증거가 아닌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의 죽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죽은 자로서의 당연한 결말을 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왜냐면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도 없으므로 죽은 자가 산 자가 되는 그런 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은 자는 일단 죽어 완전히 땅에 끌어 묻혀야 즉 장사 지내져 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유효하고 그래서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신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죽으심 자체가 우리의 구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것이다[고전 15:14-18]. 오직 우리가 산 자가 되어야 그것이 구원인데 그렇게 산자로 만들기 위한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전단계 조처 또는 과정이요 순서였던 것이다. 우리를 속이는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은, 우리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우리의 산 자됨에다 놓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다 걸쳐 놓아 구원의 근본 의미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서 회석시켜 물 타기를 해 놓은 것이다. 물 타기를 해놓았으니 당연히 구원의 효능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기 부인이 우리 자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것은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산 자가 되기 위한 선행 조처이었던 것이고, 이제 당당히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됨으로써 하나님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생명의 상대가 되어 주심으로 인하여 자기 부인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범죄하기 전 아담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첫 창조의 상태로 복구시킨 것을 가리켜 "새 창조"라 하는 것이다. 첫 창조에서 망가진 것을 새로 다시 복구시켜 놓으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은, 이와 같이 이미 '죽은 자'로서의 내가 그 죽음에서 탈피하고 첫 창조 당시의 범죄하기 전 아담과 같은 '산 자'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 불가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고 해서 단지 그 희생 제물들[모세 시대의]처럼 일단 죽는 것으로써 모든 것[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는데, 단지 이 희생 제물들로서의 짐승[제물]의 죽음은 그리스도 구원의 핵심 내용을 전달할 수야 당연히 없지 않은가.

즉 사람이 아니고 짐승일 뿐인데 사람과 짐승이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것이 그 첫째다. 사람만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하는 그리스도의 특성을 나타냄에는 그런 제물로써 바쳐진 짐승들이 한정이 있다는 것이 그 둘째다. 그러므로 오직 죽어서는 안되고 죽으실 이유가 없지만 우리 위해 죽으셔야 했던 그 의미만을 상징하는데 그런 모세 시대의 희생 제물이 나타내었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즉 그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그리스도의 희생을 구현해내지 못한 모세 율법 시대에 활용되었던 희생 제물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해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은 자명해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름지기 올바르게 살아야 영생에 들어간다. 첫 창조에서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자기 부인으로 산다는 것이니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음을 믜미하고 이는 하나님 친히 머리가 되어 계시는 한 몸 체제가 생명 체제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아담의 범죄와 우리 자신의 범죄로 이 생명 체제에 들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 지은 죄부터 척결되어야 하고 그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부터 청산되어야 하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따라서 과거 죄는 청산되어야 하고 현재 그리고 미래에 걸쳐서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기본 줄거리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요 부활이신 것이다. 그리고 에덴낙원에서 아담이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과 상종한 그 원래의 상태가 복구된 것이, 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한 항 영됨"[고전 6:17]이니 처음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범죄하기 전] 하나님과 함께 지내던 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현재 살고 있는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바로 그런 상태로 될 것이지만, 현재라고 해서 그 때에 전개될 그 상황에 비하여 하나도 부족함이 없다. 왜냐면 현재 나의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구조가 바로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에덴낙원은 영계였기에 아담은 그런 상황을 향유(享有)하고 있었음에 비추어, 우리는 비록 이 자연계에 매여 있지만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충분히 그런 상태로 회복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 사는 법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신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인데 자기 부인이 그 핵심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어 자기 부인과는 반대 방향인 자기중심으로도 살 수 있어 말하자면 자멸(自滅)의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므로 이렇게 해서 인간은 선과 악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런 분류는 영물[천사]들에게도 적용되어 이미 그들은 완전히 두 갈래로 현재 나누어져 있음이니 곧 '거룩한 천사들'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비롯한 악령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출생하게 하시고 새로 창조하셨다 하면서 이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도록 다시 말해 자기중심으로 여전히 나가도록 방치하셨을 리 없다. 그래서 반드시 자기 부인을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자기 부인이 생명의 법칙의 핵심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무한 낙이 되게 하는 원천인데 왜 사람이 이를 싫어하고 배척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자기중심의 세계인지라 자기중심이 생명처럼 비쳐지는 고로 자기 부인은 상대적으로 죽음처럼 비쳐지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세상이 죽음과 무법, 불의, 불법의 세계로서 죄의 세상인 줄을 가장 먼저 깨쳐야 즉 현재의 세상의 실상을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무엇보다 급선무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고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요 6:44,65]. 그러므로 모름지기 영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올바르게 선하게 살아야 함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그리고 처음에는 믿어 회개하여 올바르게 살고자 한 경우라도 끝까지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일절 자기중심으로 나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를 못하면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죄목이 형성되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다시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히 6:6/12:17] 것이다. 이 경우 멸망뿐이다. 즉 ①한번 주신 구원을 경우에 따라서는 취소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②끝까지 지키지 않을 것이면서도 끝까지 지키겠다고[처음 믿을 때에]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는 결론이 된다. 이 ①과 ② 두 가지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따라서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예사이니 과거 철들기 전부터 자행해 온 죄과를 인하여 벌어들인 죄의 대가에서 결단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지금 현재도 죄를 짓고 있을 뿐 아니라 과거에 지은 죄 즉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 온 죄의 대가가 너무나 엄청나게 나를 짓누르고 있기에 양심의 가책으로도 내가 너무 괴로운 것이니 여기서부터의 완전 해방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대로, 그런 양심의 가책이 있어도 그 죄책감을 무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해방이 아니고 또는 죄를 이제 다시는 죄로서 여기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즉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자기 부인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죄인으로서의 고뇌도 사라지게 된다는 그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해방이요 구원, 구속(救贖)의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은 한 몸의 이치에서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이므로, 한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단 하나라도 고통 중에 있으면 나머지 모두가 그 단 하나의 고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하나가 어쩌다 발을 다쳐 모두가 힘차게 행진하는 판에 그 발을 못쓰는 단 하나가 걸음을 천천히 걷는 경우, 나머지 99사람의 힘찬 발걸음을 위해 그 한 사람을 무시하여 뒤로 밀쳐 놓거나 따돌림으로써 희생시키지 않고 그 한 사람의 보조에 맞추어 나머지 99명이 모두 아주 천천히 느리게 답답하게 어물쩍거리며 걸어가는 모양새가 된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특징이다. 왜냐면 그 99명 모두가 아무리 절대 다수이고 그렇게 발을 못쓰는 것이 단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단 한 사람을 위해 나머지 모두가 그 한 사람처럼 되어 주는 것이니 즉 그 단 1명을 위해 99명 모두가 스스로 희생해 주는 것이 한 몸으로서의 '하나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볼품없는 지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이 머리의 중요성만큼이나 대접을 받고 지극 정성으로 위함을 받으니 이보다 더한 '자유 평등'도 없다.

공동체 의식을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즐겨 사용한 말이라고 해서 폄훼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러면 세상에서 악행하는 자들이 아전인수 격으로 즐겨 사용하는 말을 빼 버리고 걸러낸다면 세상에 무슨 좋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그릇되게 사용하더라도 우리는 올바르게 사용하면 그뿐이다. 독재 체제와 이런 이상적인 한 몸 체제의 차이는 여기서도 드러난다. 즉 전제주의(專制主義) 독재 체제에서는 이상 예를 든 것과 같은 경우, 절대 다수인 나머지 99명을 위해 그 한 사람은 무자비하게 잘라낸다. 아껴보지 않는다.

희생을 강요한다. 그러나 한 몸 체제에서는 오히려 나머지 99명이 그 1인을 위해 자진 자발적으로 희생해 주는 것이다. 한 몸 체제에서는 개성을 최대한으로 살리면서도 절대로 개인주의로 흐름이 없다. 한 뭉치로 똘똘 뭉치면서도 강제하거나 간섭해서 하는 일이 아니고 서로가 한 뜻, 한 마음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머리를 중심으로 하는 자기 부인인 것이다. 머리 스스로 솔선 수범으로 자기를 부인하니 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고난 받으심이 그 '영원한 머리'로서의 증거다.

이렇게 사랑 받고 위함을 받는 데에서는 제일 높은 머리나 제일 낮은 꼬리나 똑같기 때문이고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완벽한 평등이다. 꼬리도 머리만큼 인정을 받으니 꼬리로서는 아무 불평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즉 머리가 못되어 한(恨)될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누가 일부러 머리를 시켜 준다 해도 마다할 것이다. 왜냐면 머리가 되어 앉을 필요가 없고 현재 처지가 100프로 만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상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으면 둘이 또는 아무리 여럿이라도 그 각자 하나하나가 불평 불만이 없으므로 내가 높다, 네가 높다, 내가 낫다, 네가 낫다 하고 서로 다툴 일이 없다. 머리는 머리로서 몸은 몸으로서 그리고 몸의 각 지체는 자기 역할을 다함으로써 머리 못지 않게 역할을 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인정 받기 때문이다. 오직 역할이 다르다는 것뿐이지 상호간 우열(優劣)이 없다. 왜냐면 각자는 무조건 자기를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만 자기가 존재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고후 5:15]이 이와 같다.

주님의 비유 말씀에서도 양 한 마리를 잃으면 나머지 99마리를 놓아 두고 오직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목자가 전심전력을 다한다 함이 바로 이런 이치다[마 18:12]. 남자와 여자가 이상적으로 하나되어 있으면 즉 남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그 자신을 주심과 같이 하고 여자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하면[엡 5:23-25] 서로 간에 양성 평등이니 하고 다툴 이유가 없게 된다. 굳이 여자가 남자 같이 되려 하고 남자가 되려 하고 또는 남자와 평등이 되려 할 까닭이 없다.

남자가 부당하게 여자를 구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변괴(變怪)다. 아니면 여자가 부적절하게 남자처럼 되려는 욕심에서 일어나는 혼돈이 소위 "양성평등"인 것이다. 남자가 부당하게 나온다고 여자가 반발하면 둘 다 나쁘다는 판정을 받는다. 그렇다고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나, 그럴 경우 여자까지도 현명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아니 들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런 경우 사랑으로 일관하는 것이 최고 강자(强者)로서의 면모(面貌)다.

여자가 이런 경우 이 사랑을 포기하면 남자와 똑같은 비난의 표적일 수밖에 없다. 여자에게만 이런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신체의 측면에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약자라면 평형의 원리에서 여자는 사랑에서 강자이다. 이렇게 보완해서 하나가 되도록 창조하신 것이다. 이솝 우화에서도 보듯이 햇볕과 바람이 서로 '강하기' 시합을 했을 때 해가 이겼으니, 이것은 이솝이 사랑의 강성(强性)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그 지혜로 만들어낸 교훈이요 가르침인 것이다.

성경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롬 15:1-3] 것을 경고한 것과 같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이것이 자기 부인인 것이다. 즉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 그 지시를 따름으로써 함께 지체(肢體)가 되어 있는 이웃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침 받아 그대로 수행하면 이보다 더한 이상적인 삶이 없게 된다. 즉 앞에서 설명한 대로의 완전한 평등을 누리게 됨이다.

그리고 완전한 자유의 삶이니 왜냐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자유다. 내가 사랑하여 진정 즐기는 것을 하면 그 이상으로 내게 자유가 필요치 않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와 같이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의 상대인 머리를 위하고 나와 함께 된 지체들 곧 내 이웃을 위함이다. 이것을 내가 진정하기를 원하고 그 외에는 내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충심으로 "나 자신을 위해 사는"[고후 5:15] 것을 원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니 곧 오직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 지시 곧 명령 또는 율법을 따라 이웃을 위해서만 살기를 원한다. 왜냐면 이것이 바로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요 모습이요 실질적인 내용인 줄을 나 자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자유를 알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를 누리도록 하심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요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못해 자기 부인을 한다거나 영생을 목적으로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진다거나"[눅 9:23] 하는 일은 완전히 하나님 눈밖에 벗어나는 것이다. 만일 영생을 목적으로 다시 말해 자기 "구원을 이룬다"[성경에 "자기 구원을 이루라"(빌 2:12) 했다고 해서]는 목표 아래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전연 남남임을 스스로 입증함이다.

"항상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이룸"[:12]이니 다시 말해 이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고[그래서 복종하는 것]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는 뜻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우리 구원을 이루시지 않았는가[고후 5:15/롬 14:7-9]. 그 목적대로 살라는 것이다. 만일 목적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하신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구원하신 의미도 사라짐이다. 그러므로 그런 경우 구원이 적용될 수가 없음이다. 

구원 받았으니 올바르게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아 산 자가 되었으니 그 산 자가 되어 있는 기쁨 즉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빌 4:4] 것을 만끽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을"[롬 15:1-3] 것을 권유 겸 경고함이다. 천국의 인구가 일억이라 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정에 놓였을 때 그 일억이 모두 자기의 일로서 내게 관심을 가져 주어 나의 사정에 보조를 맞추어 주어 내가 정상 회복할 때까지 절대적 관심[왜냐면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으니]을 쏟아 부어 준다면 이 얼마나 이상적인 삶인가.

이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기 부인은 아무리 예찬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 자기 부인이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영생 하나만을 무슨 물건처럼 덥석 안겨 주는 것으로 거의 모두가 착각하고 있으나 성경을 바로 깨달아 알 일이다. 구원이 선물인데 이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시다[요 4:10].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시되 성령으로 오시기 때문에 성령을 또한 선물이시라 하는 것이다[행 2:38].

그러므로 아직도 구원 받아야 할 사람 단 하나라도 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천상 천하 모든 피조물이 [머리되시는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구원을 위한 고통에 함께 참예하는 것이다[롬 8:22]. 그리스도께서 나와 하나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어 나의 죽음[나는 이미 죽은 자이므로]에 동참하심도 바로 이 하나됨을 인함이고 또 위함이니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실 이유가 없다.

왜냐면 아무리 우리 위해 죽으신다 해도 우리가 구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이와 같은 한 몸이 되고 하나되는 이치를 따라 삶의 법질서가 정해져 있고 따라서 우리 각자와 하나됨으로써만 생명의 역사(役事) 곧 구원이 비로소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소위 "우리 대신하여 죽으심"이라는 인위적인 교리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고 근거가 없고 조리에 맞는 말일 수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고 그래서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인들의 손가락질이나 받고 웃음거리만 되어 온 것이다.

말하자면 어른처럼 자주 독립성을 발휘하지는 않고 여전히 엄마 치마꼬리에 매달려 맴도는 코흘리개 아이와 같다고 비아냥거림을 받은 것이다. 이 자주 독립성은 앞에서도 언급한 대로 자유인의 영역이다. 그런데 자기중심 일색의 세상인지라 사람들은 이 자유의 개념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 착각한다. 그것이 자주 독립성이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한 몸 이치에서 머리를 위하고 함께 지체가 되어 있는 이웃을 상대로 하여 전적으로 그들을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함이니 악령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눈이 가려져[요 9:39,41/행 26:17/고후 4:4]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 등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자유는 바로 이런 자기중심의 자유이지 이는 말 그대로 모순이요 자가당착이다.

그런 자유인이 되어 보아야 악행만 일삼게 된다. 서로를 위하기커녕 각자가 자기를 중심하니 알력, 투쟁, 증오, 시기, 살상의 행위가 끊이지 않아 내일까지 기다릴 것 없이 오늘 당장이라도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는 판이다. 이것은 아주 잘못 짚은 것이다. 소위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비판하는 그들 역시 그런 그릇된 자유, 자주성, 독립심으로는 평화, 희락, 안녕, 복지(福祉)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자기중심 곧 죄의 대가는 죽음 바로 그것이다. 이미 아담의 범죄로 우리는 모두가 죽은 자이다. 죽은 자인데다 우리 자신이 범죄함으로써 지은 죄가 태산이다. 우리가 "육신"[롬 7:14-8:13]으로 말미암아 죄 중에 사로잡혀[7:24] 자기중심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부득불 지은 죄라 하나님께서 "이를 허물하지 않으셨다"[행 17:30] 해도 죄는 어디까지나 죄다. 무릇 죄는 모름지기 청산되지 않고는 즉 그 대가로서의 죽음을 맞지 않고서는 절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죄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하고 그리고 회개함으로써 그 죄인된 위치로부터 돌이켜져야 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절대로 될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어 요한 사도가 말한 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은 큰 죄라도, [몰랐기 때문에 혹은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반드시 회개함으로써 다시는 그와 같은 형제 사랑하지 않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며 이렇게 회개할 수 있고 용서 받을 수가 있는 근거는 우리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회개하여 그런 죄를 두 번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충분한 작정이 선 경우에만 그렇다. 그래서 그 죽으심의 증거로 나타내는 "흘리신 피"가 우리 죄를 씻으신다 함이다. 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와 함께 죽으심이므로 우리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하여 그 대가를 지불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정한 조건이 있으니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짐짓 짓는 고의성이 있는 죄는[히 6:6] 그리스도를 무참하게 밟아 버리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므로[10:26,29] 절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의미가 더 다시는 통하지 않게 된다.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밟고 성령을 훼방하였는데[사람으로서의 측면이 강조되는 의미의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것은 용서가 될 수 있어도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 훼방하는 것이 되어 절대로 용서가 될 수 없다-막 3:28,29] 절대로 무사하게 넘어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내 스스로 그리스도를 없이 한 마당에 그리스도와 내가 함께 죽은 의미가 더 다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빌 3:18]이다. 이런 사람은 여전히 자기는 그리스도를 믿고 심지어는 사랑한다는 말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차이 나는 것이냐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더 다시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고후 5:15] 않는 데에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본인으로서는 믿음도 버리지 않았고[실질적으로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돌아섬으로써 버린 것이 되어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일에 충실히 한다고 하나, 자기중심이 되어 있는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이런 경고를 누차 주었지만 끝내 돌이키지[회개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을 좀체로 뉘우치지 않는 교회 내 "많은"[빌 3:18] 사람들을 두고 바울 사도의 심금은 그리스도 친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던 그 눈물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종말은 결국 "멸망"[:19]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은 "저들의 신(神)은 배[腹, stomach]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19] 것이라 했듯이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자기중심인 것이다. 

이렇게 자기중심이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는 사람들은 그 "조금"이 실제는 빙산 일각이라 실제는 자기의 전부를 차지하여 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남을 싫어하게 되고 급기야는 미워함으로 발전하고 이 증오는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니, 이는 아벨을 무고히 죽인 가인의 살인행위로써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인간 세상 첫 시작 때부터 피 비린내 나는 살인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상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하다고 인정되었을 때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끔찍한 참극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시기에서 발단된 증오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의 나의 상태는, 내가 지은 죄과(罪科, 罪過) 즉 자기중심에서 오는 모든 결과에 대한 대가뿐이니 나는 꼼짝없이 죽는 수밖에 없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있음과 더불어 나 자신의 “허물”[엡 2:1]에 대한 마땅한 죽음이다. 죽음이 나의 영원한 운명이다. 죽어야 하는 판에 영생이고 무엇이고 모두 사치요 환상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죄 용서가 없다. “피 흘림이 없이는 결단코 죄 용서가 없다”[히 9:22]는 말씀 그대로다.

이는 죄를 지음에는 반드시 죽음이 따르고 다시 살지 못한다는 뜻이다. 죽었는데 어찌 살겠는가. 세상 종교가 헛되다는 것은 여기서도 입증된다. 그들의 종교 사상은 죽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나 이는 숫제 거짓말로서 죽음에 이르면 죽은 그대로 영원하지 다시 살아나는 법은 없다. ‘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철저한 자연법칙을 무시하니 과학적이 아닌 인간 망상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우주가 지탱해 오면서 이 자연법칙을 무시하고서 무엇이든 진행된 적이 있던가.

없는데 이를 무시할 수 있다 하니 너무나 허무 맹랑한 공상(空想)의 세계에서만 그들은 정신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죄에 대한 철저한 보응을 거친 다음이라야 비로소 영생을 논할 수 있으므로, 한마디로 죽지 않고는 죄가 없어지지 않는데 죽으면 그만이니 어느 인생이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날 것인가. 전적으로 불가능이니 그러므로 영생은 빈 말이다. 하나님의 이 세계가 지금까지 원리원칙대로 되어지지 않은 적이 없다.

그 철두철미한 원칙에 의해 나는 죽어야 하고 죽으면 다시 살아날 길은 없다. 이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 시인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니 하나님 부정인 것이다. 그들이 성경의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진실이면 진실인 대로 거짓이면 거짓으로서, 그 자체적으로 일관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처절히 구원을 갈망하게 되나 또한 철저한 절망 가운데서 헤어날 길이 없음을 알게 되어야 마땅하다. 하나님에게서 배운다는 것이 이런 것을 깨달음이다[요 6:44,45].

왜냐면 무슨 수로든 내가 살아날[영생할] 방도는 없는 까닭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가능하신가. 철저한 원리원칙주의로 나가시는 까닭에,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과 같은 일개 악한 피조물의 행위라도 그 합리성[아담 스스로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을 추종함으로써 자기의 전부를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에게 헌납한 까닭에]을 인정해 주심으로 이제까지 그 악행을 어느 정도 묵과하시는 터에[눅 4:7] 죄 지은 자는 죽음밖에 없다는 원칙을 어기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실 리 만무하다.

"그러면 나는 어떡합니까. 이대로 죽어야 합니까", 내 영혼은 처절한 비명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롬 7:24]. 그러므로 오직 방법은 하나님 친히 사람되심으로 나와 함께 죽어 주시는 것이다. 이 밖에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나를 살리실 수 있는 길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죽으시고 아버지께서 다시 살리시는 방법을 취하신 것이다. 창조주 친히 피조물이 되신다는 것 그리고 더군다나 그 피조물의 모든 고통과 "부끄러움"[히 12:2]을 낱낱이 짊어지신다는 것 그리고 영원히 그런 피조물로 계신다는 것은 보통 사랑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사람으로서도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 하셨지만 더구나 하나님이실진대 무엇이라 형용할 길이 없다. 이와 같이 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고 죽음의 운명에 놓인 자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절망적인 현실에 눈 뜨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하게 된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죽음이라면 왜 이 죽음에 대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겠는가.

나 자신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로서 나 자신을 위해 일체의 것을 할 수 없는데도 하는 것처럼 부질없이 껍적대는 것이 세상 종교의 각종 종교 행위이다.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 일을 시도한다면서 나대는 것이다. 그런즉 죄의 대가로서의 마땅한 죽음뿐이다. 이렇게 죽어 마땅한 나의 죽음을 나를 위해 나와 함께 죽어 주셨다는 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의미가 있다. 고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나의 과거가 완전 종결되고 단절된 것이다.

이 자연계에 살던 인생으로서의 나, 그리고 모든 지은 죄, 육신, 생명, 죽음 모조리 한꺼번에 한 덩치로 묶어 종결시킨 것이다. 완전히 죽어 땅 속에 끌어 묻은 것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만 아니라 함께 장사 지내졌음을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취도 찾아볼 수 없도록 철저한 종결이다. 말 그대로 끝이다. 두 번 다시 죄니 육신이니 하는 소리는 끄집어낼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끝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다시 끄집어 내려면 아예 구원 소리도 내지 말라는 것이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전연 상관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 세상 살 동안만은 육신에서 헤어날 수 없다느니 어쩌니 하는 모든 소리가 그런 종류가 된다. 그래서 오직 새 창조다. 다시 출생함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이다. 그러나 아담이 신령한 세계에서의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던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그런 변환 단계 직전의 아담으로 치면 영혼이 새로이 조성되어 있는 상태다. 이는 아담이 제일 먼저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된 다음 그리고 연이어진 순서로 영혼이 창조되고 그리고 에덴낙원 곧 영계가 아담을 위해 창설되어 거기에 아담이 살도록 조처하신 단계별 창조의 그 둘째 단계[영혼 창조]에 해당됨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내는 의미는,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그 순종 여부가 저울질되었듯이 우리는 그런 영계(靈界) 즉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순종 여부가 저울질됨이다.

영물[천사]들은 이미 그런 저울질이 완료되었다. 우리는 부득불 여기서 그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복종 여부로써 가름되어지는 일이니 그래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딤전 4:16/고전 15:2/빌 3:8,9/딤후 3:15/벧전 2:2] 함이 아닌가. 영물들이 그렇게 선과 악으로 분류되는 일에 하나님께서는 일절 간섭하시지 않았다. 오직 그 스스로 정해진 영원한 운명이다. 같은 영적(靈的) 피조물로서 아담이 이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나의 영혼 격이신 그리스도를 내 스스로 발로 "밟아" 치우고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두렵고 끔찍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6:6/10:26,29]. 영혼 없는 육체는 죽음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내 스스로 없애 버리니 자살행위다. 이는 실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아담은 그와 같은 자살 행위를 한 것이다. 이 세상 지배자 곧 이 세상 신(神) 등 악령들도 이미 그런 자멸 행위를 한 오늘날이 아닌가.

그 결과 산 자로서 영생하는 자로서 창조되었지만 그는 그 스스로를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공평공정 차원에서 우리라고 절대로 예외일 수는 없다. 아담처럼 영생하는 자로 새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영물들처럼 아담처럼 당연히 저울질되어 내 스스로를 멸망으로 빠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어찌 아니 두렵고 떨 일이 아니리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켜 주신다고 말하려는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악령들을 지켜 주시고 아담을 지켜 주시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던가.

우리 영적 피조물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스스로 나의 행동을 좌우하는 터이다. 영물들에게 그리고 아담에게는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명백한 불공정, 불공평이다. 공명정대하지 않은 일은 하나님께서 결코 하시는 일이 없다. 편파적으로 움직이실 때 이는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명백한 손실이 된다. 법과 질서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지킬 때 가능해지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의미이다. 그렇지 않으면 간섭, 강제가 되니 자유를 보장해 주신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모순되는 일은 아니하신다. 자유를 주셨으면 시종일관 자유롭게 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일임하심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 자유대로 나아가되 올바른 방향으로 즉 하나님께서 애초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대로 나아갈 경우 우리의 그 의지력에 보조를 같이하여 능력을 베푸시는 것이니 이는 틀림없는 진실이다.

우리를 산 자로 만드심으로써[첫 창조에서든 우리의 새 창조에서든 동일하게]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 주신 능력의 선물이다. 우리 스스로 살지 않았고 우리를 만드신 이께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일체의 능력을 주시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와 같이 우리의 의지는 우리 자신의 것이지만 그래서 좌우 어느 방향으로 틀 수 있도록 하셨지만 그 방향으로 실제 나아가게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이 차이를 혼동하지 말 것이다.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아담을 만드실 때도 처음부터 신령한 몸이 되도록 하시기 위한 조처였었다. 그 증거로 주목되는 것이 무엇보다 인간의 피부다. 처음부터 자연계에서 서식하도록 창조된 동물들처럼 털북숭이가 아니라 장차 현란한 광채로 방사되는 옷을 입을 매끈한 피부였다.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항구적으로 고착화된 지금에도 그런 처음 창조의 흔적이 그대로 있어 옷을 만들어 입느라 부산을 떠는 것이 인간이다.

혹한에는 일반 동물들은 잘도 견디는데 인간은 몸을 감싸는 옷 없이는 속절없이 동사(凍死)해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면 하나님의 최고 작품인데 이런 식으로 가냘픈 육체를 만드실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 위치한 인간은 자연계에 속한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매끈한 피부 등으로 체질이 색다르게 되어 있는데다 영혼이 갖추어진 상태이니, 분명 이는 원래의 창조된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영계에서 신령한 몸으로 있다가 범죄하여 죽음의 결말로 이 자연계에 속해 있는 육체로 전락한 꼴 그대로다.

이제 우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다. 이 상태는 어떤 단계이냐 하면 첫 사람 아담이 먼저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창조된 다음 영혼의 창조를 받아 에덴낙원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 그 셋째 장면에 해당된다. 첫째의 것은 아담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먼저 창조된 때다. 그리고 둘째는 첫 사람 아담에게 영혼이 조성되었던 때다. 셋째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졸 창조된 아담이 영적 존재가 되었으므로 마땅히 영계에 들어가 신령한 몸이 되어 살 수 있도록 에덴낙원이 창설되는 단계다. 

글쓴이    비밀번호   
보이는 순서대로 문자를 모두 입력해 주세요